한국 천주교회가 사회교리에 입각해 대선 후보에 대한 정책평가를 발표했다. 정책평가를 맡은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는 시민의 자유권과 복지, 환경에 대한 공약에서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보다 사회교리에 더 근접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1월 27일 오후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그리스도인의 자세’ 세미나는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소장 강우일 주교)와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이용훈 주교)가 공동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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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7일 오후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주제로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와 정의평화위원회의 공동 세미나가 열렸다. ⓒ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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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주교 “모든 일상의 체험과 사회 상황에 복음 선포하는 일은 교회의 의무”
이용훈 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수원교구장)는 인사말에서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가진 대통령이 어떤 가치관과 윤리의식, 구체적인 정책 비전을 가지고 국정을 펼치느냐에 따라 국민 개인의 삶과 우리나라의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방향과 미래가 판가름 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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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훈 주교 ⓒ강한 기자 |
이 주교는 “사회교리에 따르면 대통령과 같은 정치권위를 포함하여 참되고 완전한 권위는 하느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르고, 인간을 위한 진정한 봉사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라며, “하느님을 떠난 부도덕한 권위에 대해서는 양심에 따라 거부할 수 있으며, 주권의 행사를 위임한 통치자들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민주 사회에서 주권을 지닌 국민이 선거를 통해 교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들의 정책을 사회교리의 이론과 척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모든 일상의 체험과 사회 상황 안에서 ‘복음이 제시하는 해방과 구원의 말씀이 울려 퍼지도록’ 선포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박동호 신부는 △ 세계인권선언에 기초한 ‘인간 존엄성과 인권’ △ 가톨릭 사회교리 원리에 기초한 ‘정의(공동선)’ △ ‘평화’의 세 가지 관점에서 주요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정책공약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문재인 후보, 주교회의 정책 제안서에 답변 보내와 박근혜 후보, 마감 기한 미루다 결국 보내지 않아
본래 이날 세미나에서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지난 10월 15일 주요 후보자들에게 발송한 <제18대 대선 정책 공약을 위한 한국 가톨릭교회 제안서>에 대한 대선 후보자들의 답변서를 토대로 이들의 정책 공약을 평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마감 기한 전인 12일에,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는 21일에 답변을 보내왔지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몇 차례 마감 기한을 미루다 아직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때문에 박동호 신부는 박근혜 후보의 경우 언론 보도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실린 공약 내용을 중심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안철수 전 후보는 11월 23일에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지만, 박 신부의 발표문에는 안철수 전 후보의 공약에 대한 평가도 포함됐다.
먼저 박동호 신부는 사형제도에 대한 후보들의 정책 공약을 평가했다. 그동안 박근혜 후보는 사형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고, 문재인 후보는 사형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제안서를 통해 ‘사형제도 폐지’가 정책 공약에 반영해주기를 후보들에게 주문했다. 박동호 신부는 “문 후보와 박 후보 순으로 생명권에 대한 국가의 ‘존중할 의무’와 ‘보호할 의무’를 다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적 자유권’과 관련한 정책에서도 두 후보는 입장이 다르다. 언론의 공공성 · 독립성에 대해 박근혜 후보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을 논의할 공론의 장”을 강조했으며, 문재인 후보는 미디어 관계법의 진입 및 소유 관련 규제의 정비를 공약으로 내놓았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박 후보는 유지, 문 후보는 폐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박 신부는 “문재인, 박근혜 후보 순으로 시민적 자유권을 국가가 ‘보호할 의무’에 대한 의지를 정책공약에서 읽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최저임금, 고용안정과 일자리 창출, 해고 요건 강화 등 고용과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경제적 권리의 관점에서 평가해, 모든 후보가 시민의 경제적 권리에 대한 국가의 ‘보호할 의무’를 정책공약에 담았으나 “박근혜 후보는 원론적으로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문재인 후보는 법률적 구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해석했다.
문재인 박근혜 후보 정책 내용 상반 대체로 문재인 후보가 가톨릭 교회 입장에 가까워
복지정책에 관해서는 박근혜 후보가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정책을 통해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여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겠다고 한 반면, 문재인 후보는 보편적 복지와 보육 · 교육 · 요양 · 의료 · 주거 등 주요 민생지출을 국가 책임 하에 줄일 것을 약속한 점을 지적했다. 박 신부는 “박근혜 후보는 복지정책을 경제발전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문재인 후보는 복지권을 국가의 ‘충족시킬 의무’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두 후보가 제시한 아동성폭력, 청소년 성매매, 학교 내 폭력과 청소년 자살 등 사회문제에 대한 정책 공약은 인간 존엄성과 문화적 권리의 관점에서 평가했는데, 박동호 신부는 모든 후보가 이 문제들에 관해 대증요법 차원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 문재인 두 후보 모두 학교 현장과 교육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공감하면서도 접근 방법은 달랐다. 박근혜 후보는 교과서만으로 학교의 기본교육이 완성되는 ‘교과서 완결 학습체제‘와 ‘공교육정상화촉진특별법’ 제정을 앞세웠고, 문재인 후보는 일몰 후 사교육 금지, 연령별 학습시간 기준과 적절한 휴식, 문화 활동에 대한 권리기준이 포함 되는 ‘아동교육복지기본법’ 제정을 통해 교육 출발선을 공정하게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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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호 신부 발표문 중 ‘각 후보의 정책 공약 평가’ 부분 발췌 ·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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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4대강 사업 입장 안 밝혀 … 문재인 ‘재자연화’ 공약 원전, 박 “추가 건설 신중” … 문 “신규 원전 건설 불가”
4대강 사업과 탈핵 문제는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의 권리’ 관점에서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정책 공약 제안서에서 ‘핵발전소 확대정책 중단 및 탈핵’과 ‘4대강 사업으로 인한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정책 공약에서 4대강 사업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문재인 후보는 4대강 재자연화와 국토의 난개발 방지, 수변개발 사업 중단, 친수구역특별법 폐지를 내세웠다. 탈핵에 관해서 박 후보는 기존 원전을 철저히 관리하고 추가 건설은 신중을 기하겠다는 입장을, 문 후보는 원전 수명 연장 포기, 신규 원전 건설 불가,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공약으로 밝혔다. 이를 종합해 환경에 대한 공약에 있어서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 보다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게 박동호 신부의 평가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는 두 후보가 모두 경제적 접근을 하고 있으며, 공공부문 민영화 정책에 대해서 박근혜 후보는 국민복리적 측면에서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계속 추진한다는 조건부 찬성 입장, 문재인 후보는 공공성 저하, 민간 독점, 요금 인상, 국부유출 등의 우려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전하며,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 보다 ‘재화 사용의 보편 목적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봤다.
남북 평화 문제에 대해 박동호 신부는 박근혜 후보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당국자간 남북대화 재개, 인도적 지원 활성화, 남북한 간 및 북한과 국제사회 간 기존 약속 확인 및 실천 시작) 제창, 문재인 후보는 남북경제협력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를 통한 동북아 평화 비전, 국방개혁 기본계획 재수립 정책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문재인 후보는 “현재 추진하는 사업을 중단하고 재검토하겠다”고 밝혔으며, 박근혜 후보는 “국가안보와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필요한 사업”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박동호 신부는 두 후보 모두 “해군기지 건설 백지화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동호 신부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지난 4월 총선에 이어 이번 대선을 앞두고 ‘정책 제안서’를 마련한 데 대해 고마운 마음을 표하며, “제안서 내용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신앙 실천으로 이어져 복음화의 결실로 나타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지난 총선 때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정책질의서를 마련했지만, 교회가 할 일이 아니며 교우들을 분열시킬 수 있고, 그 내용이 이념 편향적이라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혀 서울대교구 신자들에게 소개할 수 없었다며 아쉬운 감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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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김형준 · 이정희 · 김녕 교수 ⓒ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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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역할 마다않는 정치인 찾아야 … 없다면 기존 정치인을 회심시키자”
그밖에도 이날 세미나에서는 김형준 교수(다니엘, 명지대 정치학)가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한국 민주주의 현실’을 주제로 발표하며 이번 대선에서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같이 ‘묻지마 식 투표’에 매몰되지 말고 누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평가해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립과 증오의 정치를 끝낼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장애우,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아온 후보를 선택하라” 등 ‘좋은 후보 선택 십계명’을 제시했다.
논평자로는 이정희 교수(베드로, 한국외대 정치학) 와 김녕 교수(엠마누엘, 서강대 정치학)가 참여했다. 박동호 신부의 발표에 대해 논평한 김녕 교수는 “당파적 이해관계, 제도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올곧게 가톨릭 사회교리가 가르치는 방향을 소신을 갖고 추진할 수 있는, 때로는 예언자적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그러한 정치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찾는 일이 중요하며, 그런 정치인을 당장 찾을 수 없다면 기존의 정치인들을 그렇게 회심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김 교수는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롤 모델(role model)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제2공화국 장면 총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형준 교수가 제안하는 ‘좋은 후보 선택 십계명’ |
제1계명 : 역사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제2계명 : 민주적 발전을 위한 철학과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제3계명 : 시대정신에 입각한 비전과 정책을 갖고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제4계명 : 대립과 증오의 정치를 끝낼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제5계명 :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끊임없이 남을 배려한 후보를 선택하라.
제6계명 : 장애우,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아온 후보를 선택하라.
제7계명 : 실현 가능성이 높고 지속 가능한 공약을 제시하는 후보를 선택하라.
제8계명 : 낮은 자세로 국민과 진정성 있게 소통할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라.
제9계명 : 약속을 지키고 긍정적 사고를 하는 후보를 선택하라.
제10계명 : 지역주의를 배격하고 포지티브 선거운동에 열심인 후보를 선택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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