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2일(화) 09:30분에 갈마역에서 만나서 출발한다.
논산 풋개마을을 향해서.
풋개다리 위치와 역사를 알고 싶기도 하고, 우금치전투에 투입된 동학농민군의 주둔지 이야기가 궁금해서이다.
<정감록(鄭鑑錄>에는계룡석백(鷄龍石白하고 淸浦竹白하고 草浦潮生行舟하고.... ) '풋개(草浦)에 바닷물이 들고 배가 다니면' 하는 구절이 나온다. (계룡석백 초포주행 ) 대중화. 소중화(大中華 . 小中華)가 함께 망할 것이다.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말하는 대목이다. 전봉준의 남접군이 머물던 곳... 풋개와 인근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해서 찾아간다.
세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묻혀버린 이야기를 찾아볼 요량으로 이다.
얼마전 우연히 < 풋개다리> 근처 대전-논산 국도를 지나가면서 이웃 풋개마을이 자신의 고향이라면서 들려주던 한 지인의 이야기 : 자신의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 중에 동학농민군이 며칠간 풋개마을에 머물렀었다는 이야기가 웬지 머릿속에 깊히 박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마도 1894년 11월 9일부터 4일간 이어진 우금치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계룡산과 정감록, 동학농민운동과 우금치전투가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물고 도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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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과 계룡시를 우측으로 바라보면서 양정고개를 넘어간다.
계룡산 천황봉(상봉) 동남쪽 아래에는 군부대 안에 태조 이성계가 궁궐 작업을 하다 만 터와 지명 주춧돌이 아직도 남아 았는데.)
계룡산 줄기가 양정고개에서 낮아졌다가 다시 천호산으로, 대둔산으로 해서, 마이산울 지나 장수에서 백두대간과 이어지는데, 양정고개를 넘으면 천호산(옛 황산)과 황산성이 있는 산 줄기 사이의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연산(連山)이 있고 부적에서 풋개마을을 찾아 들어간다.
(광석면) 항월1리 풋개마을회관 이다.
- 붉은 점 표시가 계룡산 정상인 천황봉이고 이곳 사람들은 상봉으로 더 많이 부른다. -
- 도착한 항월리 초포( 草浦:풋개)마을 회관 -
마을회관 정자나무 아래에는 동네 사람 여러분이 더위를 피해 정자와 나무 아래서 한담을 즐기고 있었다.
오른쪽 분이 이상우씨,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분이시다.
전에 이장도 지내셨다는 분에게서 마을 안내를 부탁드린다.
초포정에는 아낙네들이 더운 여름을 피해 있었고, 부채도 갖다 주면서 더위를 식히라고 친절을 베풀어주신다.
-풋개다리(초포교)를 일러주러 나선 길, 멀리 보이는 길끝에 마을버스 정류소가 있고 거기에는 초포교 다리 중수비가 있단다.
앞쪽에 보이는 숲이 있는 산이 통미이고, 그 우측 비석있는 쪽으로 주막이 두어 채 있었다고 한다.
(초포)다리를 건너오면 주막이 있고, 초포원이 있을 것이고 한양으로가는 대로가 마을 안쪽으로 이어지고...,,,
항월리 버스승하차장이다. 하도리에서 왕전리로 가는 버스길.
그 왼쪽에는 초포교량중수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최근에 세운 공적비도 있고.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인 셈이다.
조금 뒤 오른쪽 뒤편에는 항월리보건지소가 있다.
초포교량중수비를 들여다본다.
마모가 심해서 잘 읽혀지지 않는다. 간신히 초포교량 중수비와 강희 13년 ...몇자를 겨우 찾아읽는다.
강희 13년(1674년)은 우리나라 숙종 원년이라는데....
-초포교 안내문 -
- 초포석교 잔해 -
- 안내문으로만 읽는 초포교 내력 -
초포석교 잔해가 동네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데.... (샴안집에도, 큰샴에도 남아있는 잔해들.)
<초포교에 대하여 <네이버지식백과>를 열어본다>
- 1674년(숙종 즉위년) 초포교를 중수하고, 중수하는 데 기여한 시주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초포교 중수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 논산시 광석면 항월리 초포 냇가 땅속에 묻혀 있던 초포교 중수사적비를 찾아내어 냇가 둑 옆에 세워 놓았다.
비의 석질은 화강암이며, 귀접이 단갈(短碣) 형태로, 비의 높이는 130㎝, 폭은 53㎝, 두께는 23㎝이다.
- 비의 전면에 ‘초포교량중수(草浦橋梁重修)’라고 쓰여 있으며,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말미에 ‘강희십삼년갑인사월일립(康 熙十三年甲寅四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어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금석문의 내용은 “대시주화주(大施主化主) 이시동(李始東)/ 공양대시주(供養代施主) 이시산(李始山)/ 남시대시주(南施大施主) 이씨다례(李氏多禮), 한귀봉(韓貴奉)/ 철물시주(鐵物施主) 최공로(崔公老)/ 술수(術手)/ 공양주(供養主)/ 별좌(別座) 덕련(德 連)”과 같다.
- 초포교 중수사적비를 통해 조선시대 옛길을 추적해 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 석교의 건축 현황과 석교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공사 내역의 기록을 통하여 관련 시주자와 건립 연도까지 밝혀 놓아 좋은 자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초포교 중수사적비 [草浦橋重修事蹟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회다리를 부수고 새로 만든 <풋개다리>를 건너가는 성지기 모습이다.
-현재 교량의 준공판 보기-
안내해 준 이상우씨(붉은 점 표시) 로부터 자세한 지형과 유래를 듣는다.
노성천과 왕덕천이 합류하는 곳에 초포교가 있고 왕덕천 위로는 연산천이 합류한단다.
멀리 깃대봉 아래 황산벌이 펼쳐지고, 역사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던 들판. 전쟁판이다.
(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며, 왕건과 견훤의 최후 결전지며. 동학농민군의 전투까지.... )
-초포교 아래쪽으로 흘러서 논산천 논산대교로 이어진단다.
안내인 말씀에 예전에는 강경에서 논산까지 통통배가 다녔다고, 그것이 1970년대 이야기이다...근대화 이전의 이야기...
노성천에는 옛날 임금에게 진상하던 노성참게가 많았고, 물고기도 흔해서, 시시한 미꾸라지 같은 것은 물고기 취급도 뭇받았을 정도였다는 데, 아마도 금강물길이 여기까지 영향을 미친걸까?
풋개다리 위 연산쪽을 좀 더 가까이 잡아본다.
- 다리 아래로는 옛날 일제시대때 회다리 흔적이 냇가 양쪽에 조금씩 남아있다. -
고지도로 보는 풋개다리(초포교 )
노성 옆에 봉수대 표시가 있고 남쪽으로 초포가 있다.
<향토연구>지에 나오는 풋개다리 내용 보기
(춘향가 한 대목 중에서 ) 노성을 "뇌성"으로 발음나는 대로 써놨다. 뇌성풋개 닥다리로
논산에는 옛다리들이 많이 있다. 강경 <미내다리> 를 위시해서 원목다리도 있고...석성 돌다리도 있고.
<원목다리> 전경사진과 부분 사진을 찾아서 본다. (2021년 2월 2일 답사시 사진)
"이런 옛 돌다리"러니 하고 왔는데, 그 흔적이 거의 사라지고 다만 안내문으로 대치하는 아쉬움만 있지만...
대강 이런 종류의 돌다리 이었을까?
<초포석교잔해 안내판>에서 우리말들을 만난다.
옛초포교 돌 석재 들은 공동빨래터에 남아있다니 동네 이름 "샴안집"이니 "큰샴"이니 하는 마을 이름이 정겨웁다.
표준어 "샘"의 우리말 토박이 말 "샴"을 들어 본다. 샘< 시암, 샴... 등으로 지금도 흔히 쓰이는데 표준어한테 밀려서 사라져가는 말들 중 하나이다.
풋개 옛다리는 못 보고 대신 지형과 역사로 가름하고 마을 안쪽으로 다시 되돌아 간다.
멀리로 통미와 가까이로는 마을 옛주막자리를 지나서.
옛길 이정표 있는 대로 우리를 안내해주신다.. 마을회관 옆에 이정표가 있단다.
((2편)에서 계속된다. 2023;09;23(토) 카페지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