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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사도행전 10장 1-16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과거와는 달리, 크게 변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스가 1543년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정지해 있는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합니다. 이전까지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을 비롯한 모든 별들이 지구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을 믿고 있었을 때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는 특별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 중에 있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십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불러오라는 지시였습니다.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할 즈음, 기도하러 올라간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환상을 보게 됩니다. 부정한 음식들을 보여주시면서 잡아먹으라는 환상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집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본 환상(1-8)
세상의 모든 분열과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극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한 영혼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기쁨과 열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1-8)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사도행전 9장의 베드로와는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과의 사도는 오늘의 사도와 다른 일군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0장에서는 고넬료의 회심에 초점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 그리고 이방인의 세례 같은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있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유대인 교회에서 대표격인 베드로가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 회심보다 베드로의 회심을 더 중요하게 본 이유입니다.
(1)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1-2)
하나님께서는 먼저 베드로를 룻다를 거쳐 욥바로 보내시고 무두장이 시몬 집에 머물게 하셨습니다(9:32-43).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울타리 밖에 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불러드린 사역을 준비하십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이러한 편협한 생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려있음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합니다. 고넬료는 10-11장에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그의 회심 사건은 크게 네 장면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장면은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 이야기(10:1-8)로 시작하고, 두 번째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의 환상 이야기(10:9-23a), 세 번째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운명적인 만남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이야기(10:23b-48)로 전개됩니다. 마지막 장면은 이방인의 회심 사건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는 일(11:1-18)로 구성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향한 구원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성취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첫 번째 장면은 가이사랴에서 시작됩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새로 설립한 신도시로서 유대 속주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부가 있던 곳입니다. 누가는 먼저 그 도시에 있던 고넬료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을 소개합니다. 그의 이름 코르넬리우스는 당시 흔한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주전 82년에 코르넬리 우스 술라(Cornelius Sulla)라는 로마 장군이 만 명의 노예를 한 번에 해방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자유민이 된 자들이 모두 그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후손들도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정할 수 없지만,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 역시 그 자유민 출신이거나 그러한 자들의 후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식민지인 유대 지역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2)라는 말은 고넬료가 하나님 경외자였음을 시사합니다.
(2) 고넬료가 기도 중에 환상을 봄(3-6)
하나님 경외자는 당시 이방인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열정과 관심을 보이며 유대교 회당을 출석하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다른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취급했지만,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들을 포용하고 받 본문에서 고넬료가 소개됩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헤롯이 건설한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 곳에 로마의 유대 총독부 관저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많고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도시입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아 부대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에도 충실해서 온 집안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란 유대교의 유일신을 믿고 유대교의 윤리적인 기준은 받아들이지만, 율법을 지킬 의무는 없는 개종자, 할례를 받지 않아서 유대인이 안 된 사람을 의미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언약에는 외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같이 식사할 수 없고, 합석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성전에서는 이방인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고넬료의 마음을 열도록 하며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가 유대인의 기도 시간인 제 9시(저녁 번제 드리는 오후3시)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보냅니다. 고넬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질겁했을 것입니다. 두려웠지만 소리 나는 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여 무슨 일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에는 신이 자신의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였습니다. 주의 사자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기도와 구제가 상달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고넬료의 마음을 알아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들이 구원의 근거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몸에 배인 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환상 중에 보내셨을 때, 그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욥바까지는 약 51km로 장정이 보도로 거는 시간만 8-9시간 걸린 거리였습니다. 고넬료는 환상을 통해 알아들은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환상을 따를 만한 사실인지에 대한 결정은 고넬료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이라고 보기에는 정보가 너무 상세했습니다. 지명, 만나야 할 사람, 묵고 있는 숙소의 위치, 그 집 주인의 이름과 직업까지 너무 구체적으로 말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무두장이 집에 묵고 있다는 사실에, 고넬료는 어쩌면 그런 사람이면, 유대인이라도 이방인인 자기가 초대하면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천사는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더 잘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게 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고 성령도 받게 하시고 계십니다.
(3) 고넬료가 욥바에 사람을 보냄(7-8)
군인인 고넬료는 단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그는 직접 가지 않고 하인 두 명과 경건한 군인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이제 장면이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로 옮겨집니다. 이 시간이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했을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려고 시몬의 지붕 위에 있는 평평한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정오가 되자 베드로는 출출해졌습니다. 하인들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고, 베드로는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황홀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속에서 하늘이 열리고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큰 그릇의 보자기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세상에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정한 짐승도 들어 있지만, 유대인이라 하면 누구나 협오스러워 하는 짐승도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이렇게 뒤섞여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베드로에게는 시험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토라를 통해 명령하셨던 것을 스스로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다운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손색없는 대답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 대답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고백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깨지고 무너지고, 열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시각을 넓혀 주시기 위해 또 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라는 말이 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짐승이라도 깨끗하게 하셨다면, 더 이상 사람들이 속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철저한 율법 준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거절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 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는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또 같은 일을 세 번이나 하셨을 때는,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이런 환상을 주셨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환상이니 진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이 손수하신 율법을 부정하면서까지, 자신에게 환상 중에 이런 명령을 하시는지 알 리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봄(9-16)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부분과 볼 수 없는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들은 볼 수 있는 부분은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우연이나 기적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이해함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9-16)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일들을 이루시기 위한 사역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적으로 깨어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싶은 일들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이방인들의 구원까지 역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베드로가 기도함(9)
이제 다음 장면은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욥바로 바뀝니다. 다음 날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제 육 시’는 약 12시 정오를 가리킵니다. 아마도 습관을 따라 베드로도 정오쯤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하는 기도 중 두 번째 기도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그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낮 12시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식사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느지막하게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늦은 오후 시간에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식사 방식이었습니다.
(2) 기도 중에 환상을 본 베드로(10-16)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던 중에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하늘이 열리고 네 귀를 메어 땅에 드리운 큰 보자기가 내여 왔습니다. 그 안에 담긴 세 가지 종류의 짐승들이 그릇에 담겨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온갖 짐승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짐승들은 레위기 11장에서 식용으로 금지된 부정한 짐승들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 1:30에 따르면 이 음식들은 사람이 먹을 음식으로 주신 것들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에 담긴 것을 자세히 보고 파악했을 때, 곧이어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와 같이 깨끗하지 않고 부정한 음식을 자기는 결코 먹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14).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규정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환상은 사라졌습니다(15-16). 이러한 반복은 이 이슈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하고 공고해진 편견과 인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본 환상은 무슨 의미입니까? 베드로가 본 환상은 이제부터 구약에서 규정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이 사라졌으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환상의 의미는 다음 단락에서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음식의 구별을 없애신 것입니까?
물론 간단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선언하셨을 때부터라는 답변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초대교회는 이 율법의 폐기는 예수님이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마가복음 7:15-16,19)라고 말씀하실 때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4:14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이러한 환상의 사역을 보여주신 이유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종교적, 문화적 장벽은 이만큼이나 공고했습니다. 오래토록 고착화된 유대인만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생각과 사상 그리고 종교를 깨뜨리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닌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분열과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극복됩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한 영혼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기쁨과 열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