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68)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47) – 베드로전서 강해(4)
베드로전서 강해(4) – 베드로전서 3:1 – 3:18, 19-22
성령을 받아서 새로운 창조가 막 일어난 형제들, 또는 새로운 창조를 소망하는 형제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권면으로서 2장(18~21)에서는 하인 신분인 사람들의 경우를 이야기했고, 3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된 자매들의 경우와(1~6절) 남편의 포지션에 있는 형제들의 경우에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성경적인 삶인가를 설명하고 있다.(7~9절)
그러면서 수신자들이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가 보인 발 자취를 따라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귀한 일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은 두 영역이 있다. 경쟁 속에서 먹고 사는 삶에 골몰하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내가 현실에서 우위를 점하느냐가 최고의 목표이고, 또는 어떻게 하면 내가 신의 사랑을 독차지 하느냐, 즉 신과의 거래를 통해서 영원히 나를 높이겠다는 종교의 영역에서의 삶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영역은 모두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야망에 불 타오르는 삶으로써 이것이 세상 원리이며 인류 정신 문화의 역사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삶을 수신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2장(18~21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인인 신분인 사람들에게, 온화한 주인 뿐 아니라 심술 굳은 주인에게도 순종하라고 권면하면서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겪고 참아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그대들로 하여금 그 발자취를 따르게 하려고 본을 남기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란 고난을 인내하는 것이다. 고난을 인내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본이라는 것이다. 인내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존재의 이유는 각자 자기를 영원히 세우기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형성과 성장과 확산이 마음속의 소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수신자들도 고난을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아내들의 경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서,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말씀을 불신하는 남편을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 그대의 품행으로 말미암아 남편을 클레로스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아내 포지션의 존재의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기를,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않는 남편이 헤어지자면 헤어지고, 같이 살기를 원하면 헤어지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남편을 클레로노모스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가 클레로노모스가 되면 진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순결한 품행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겉모습을 단장하지 말고 오직 온유하고 안정된 영으로 사람의 내면의 마음을 단장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귀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어서 자기를 위해서만 사고가 돌아가기 때문에 온유할 수 없다. 인간은 일단 내가 배부르고 등이 따뜻해야 온유할 수 있고, 나에게 유리해야 온유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온유할 수가 없고 신실할 수 없는데, 베드로 사도는 아내들에게 신성으로 가득 찬 모습을 남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날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가졌던 거룩한 부인들도 자기 남편에게 순종했다는 것이다.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면서 순종했고, 그대들도 사라의 딸들이 되었으니, 선행을 하고 어떤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들의 경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서, 남편 된 그대들도 지식을 따라 아내와 함께 살아갈 것이니, 연약한 존재인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다.
아내는 생명의 은혜의 공동상속자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대들의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깨지면 기도가 막히고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부의 관계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대들 모두는 한 마음을 가지며, 함께 공감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롭고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또는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복을 비는 사람들로서, 복을 상속받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은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베드로 사도는 시편을 인용하면서(시34:12), 수신자들에게 그대들이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그들에게 해를 가하겠느냐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그대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종국적으로 그대들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대들에게 해를 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즉 그대들은 피해자의 포지션에 서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자신이 해를 당했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망이나 복수심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겪게 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되며, 하나님은 신실하지 않은 분이 되고 하나님을 무능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셨다. 그 발자취를 우리도 따라 가는 것이다. 실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극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대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거룩하게 하고, 그대들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한 이유(말씀)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든 온유한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선한 신념을 가지라고 권면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들의 선한 품행으로 인하여 그대들이 악을 행한다며 비난하던 자들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15)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한다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귀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한 차례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는데, 이는 의로운 분이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당하신 것으로서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음으로써 그대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우리도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우리는 세상에 있는 좋은 진주들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일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다.
나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을 무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고난을 참으셨다. 그 길을 우리가 따르는 것이다. 푯대를 향해 달려갈 때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피해자로 인식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피해자라고 인식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되는 것이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선한 신념의 간구이며 이는 그리스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다(19-22)
그리고 그분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영으로 가셔서 전파하셨다. 그 영들은 옛날 노아의 때에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께서 끝없는 열정(마크로뒤미아) 으로 기다리실 때에 불신했던 자들로서 당시에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은 겨우 여덟 목숨(프쉬케) 뿐이었다. 그 물은 지금 우리들을 구원하는 세례의 모형이다 세례는 육체(싸르크스)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선한 신념(쉬네이데시스)의 간구이며 이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 아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조혜자 권사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