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
살후 3:13
〈 여러분에게 선은 무엇입니까?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이 구절은 저를 이끌어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목회의 길을 가야 하리라는 판단이 서자, 저에게는 ‘목회=선’이라는 가치를 확인했습니다.
늦게 시작했지만, ‘목회의 길을 가는 중에 낙심하지 아니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이 가는 길, “선”은 무엇입니까?
가다가 힘들어 자빠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가야하는 그 길, “선”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그 길을 잘 가고 계십니까?
낙심될 때도 있지만, 이 말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에 힘입어 다시 걷는 그 길!
여러분에게 그 “선”은 무엇입니까?
(13절)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병행구절이 있습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말씀이 저의 목회를 이끌고, 저의 인생을 이끌어줍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그런데요, 이 말씀을 오늘 설교 제목을 삼고, 뒤에다 물음표를 붙였습니다.
제가 왜 물음표를 붙였게요?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양날의 검 〉
인생길 여정을 가는 중에 고난과 맞부딛치거나 무엇이 옳은지 망설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인지 말씀해 주시면 그 길을 가겠습니다!”
응답이 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 길을 갔습니다.
한번 응답을 받고 가는 도중에 다시 난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하셨으니 낙심하여 포기하게 되지 않도록 채찍질했습니다.
“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이 말씀은 사실은 양날의 검입니다.
누구든지 “선”이라는 결론에 따라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인줄 모르고 그 길을 가면서, 낙심하지 말랬다고 돌이키지 않으면요?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민족이 세계 최우수민족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지구상에서 ‘청소’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히틀러도 “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이 구절을 알았을 겁니다.
‘자기확증’에 빠져 끝까지 밀어부쳤습니다.
세계는 제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이 말씀을 잘못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제목으로 이 말씀을 정하고 뒤에 퀘스천마크를 붙였습니다.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
〈 선과 악 〉
이 말씀은 ‘양날의 검’이라 하면서, 히틀러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창하게 가기 전에 개개인에게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목표로 정하고 달려가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부가 되었든, 권세가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저마다 열심히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건강이 목적일 수도 있고, 자식의 출세가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이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목표를 세우고 매진합니다.
이렇게 달려가면서 ‘내가 향하는 곳은 선하다!’라고 확증합니다.
“나는 지금 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은 선하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목표삼은 것이 분명 “선”이라면요?
세상에 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평화를 누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이 횡행합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사람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역사마다, 모두가 선을 표방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 전쟁은 어떻습니까?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중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과도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하는 쌍방이 모두 주장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있으며, 낙심하지 않겠다!” “결코 낙심할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멈춘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갈등과 분쟁이 없던 때가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론은 “누가 선을 정하느냐?”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선이다”라고 누가 정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 선과 악을 누가 정하느냐? 〉
열 살 손녀와 일곱 살 손자가 만나면 티격태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가 ‘선’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옳다’ 각자가 결정하고, 자기의 결정을 주장합니다.
그러니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는 이유, 악이 횡행하는 이유, 각자가 선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에 대한 결정권을 사람들이 가지고, 사람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 언제부터 사람들은 이렇게 각자가 선악을 결정했습니까?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있지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부부! 그들이 따먹은 선악과 열매!
그때부터 사람들이 저마다 선악을 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이 뜻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인간이 선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선악에 대한 결정권을 하나님이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선악을 결정합니다. 사람들은 그 결정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면 다툼이 없습니다. 평화가 넘칩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 ~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이 “하나님은 없다”라는 오만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분’이라고 단정하고 수풀 속으로 숨었습니다.
‘없는 분’과 만나기 싫다는 것이지요!
부모와 의절한 자식은 “나에게 부모는 없어!”라고 큰 소리 치고 달아납니다.
부모와 만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달아나서 부모를 부인하면서 그곳에 삽니다.
에덴동산과 선악과 이야기는 세상을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그런데 어설프게 믿는 사람들이 창세기를 ‘신화’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 역시 선악을 자기가 결정하는 폭력적 행동입니다.
〈 선악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
어떻게 하면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부부간에도 서로가 선악을 결정하는 한, 금슬은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족간에도, 이웃간에도, 지역간에도, 국제관계에서도, 선악을 각자가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전쟁이 멈추며, 어찌 평강이 있겠습니까?
부부간, 가족간, 이웃간,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센 쪽이 선악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결정된 선악의 기준에 힘없는 자들은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세상에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위장된 평화일뿐입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한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어느 때 가능합니까?
하나님 한 분, 살아계신 하나님이 선악을 결정권을 행사하실 때, 진정한 샬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악 결정권을 돌려드리고 순종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 참 행복, 참 기쁨, 참 평안 〉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선’을 내가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결정하시도록 내어드리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결정해 주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거든 기도하여,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선을 구하십시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여질 때 기도해야 합니다.
세 갈래길 삼거리에서 어느 길을 갈까, 내가 결정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선악간의 결정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답해 주시면, 그 길, 선한 길, 가야 합니다.
그 길 가다가 힘들다고, 지쳤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이 길을 가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로 모여 예배합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선악간에 결정해 주시옵소서!”하면서 간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면, 저는 그 길을 가겠습니다. 가다가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도중에 내 생각으로, 세상 사람들의 조언으로, 내 유익을 위하여 변개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13절)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주님이 정해주신 ‘선을 행하는 길’ 그 길을 가는 참 기쁨을 누리십시오!
주님이 정해주신 ‘선을 행하는 길’ 거기에만 참 평안, 참 행복이 있을 체험하십시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