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가을호 반경환의 {사상의 꽃들}에서
명함
함 민 복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
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
길의 명함은 이정표다
돌의 명함은 침묵이다
꽃의 명함은 향기다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우리는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사랑을 하고, 우리는 또한, 이름으로 자기 자신과 그 모든 사람들을 평가하며, 그리고 끝끝내는 이름을 남기고 죽는다. 명함이란 이름과 직업과 연락처 등을 간단하게 적은 종이를 말하지만, 어쨌든 이름이란 자기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름에는 그의 출신성분과 그의 명예와 영광까지도 들어 있고, 우리는 그 이름의 충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있고 이름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실제의 일상 생활에서는 이름이 있고 내가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어느 누가 이름이 없다면 그는 무호적자와 무국적자일 수밖에 없으며, 이 세상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게 될 것이다.
새들은 그 울음 소리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군인은 외부의 적을 경계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길은 이정표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돌은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꽃의 명함은 향기이고,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이지만, 그러나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함민복 시인의 「명함」에 대한 정의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의 「명함」은 모든 사물들의 존재 증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더없이 맑고 순수한 ‘시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하의 대로를 걷는 사람은 오점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시인이며, 그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단 하나뿐인 자기 자신을 깨닫고, 그 외로움 때문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하의 대로를 걸어가며, 오점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외롭고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장 자크 루소와 니체와 칸트와 헤겔과 마르크스 등은 천하의 대로를 걸어갔지만, 이 세상의 어중이떠중이들에게는 천하의 대로란 두 눈에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짜의 길에 지나지 않는다. 새들 중의 새는 어떤 새이고, 군인 중의 군인은 어떤 군인일까? 길 중의 길은 어떤 길이고, 돌 중의 돌은 어떤 돌일까? 자본 중의 자본은 어떤 지폐이고, 명함 중의 명함은 어떤 명함일까? 과연 나는 시인 중의 시인이며, 천하제일의 대로를 걷고 있다고 나 자신의 「명함」 속에다가 새길 수가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의 「명함」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삶의 철학이 새겨져 있고, 소크라테스는 이 삶의 철학 때문에, 한 사발의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고 할 수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삶의 철학이자 ‘무보수 명예직’이라는 ‘정치철학’의 근본명제라고 할 수가 있다. 정치란 국가와 공동체 사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따라서 최고급의 사상과 이론을 정립한 철학자가 단 한 푼의 혈세도 낭비하지 않도록 국가를 경영해야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국가론’은 전 인류의 고전이며, 그는 이 삶의 철학을 통해서 전 인류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그리고 더욱더 폭넓게는 미국과 영국까지도 모든 정치인들이 소크라테스의 철학, 즉, ‘무보수 명예직’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함민복 시인의 「명함」은 이름의 꽃이자 사상의 꽃이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호머,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보들레르, 랭보, 모차르트, 베토벤, 마르크스, 칸트, 함민복 등 ―. 아아, 우리 시인들이 어쩌면 이토록 고귀하고 위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름과 이름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의 수많은 계급과 서열이 존재하고 있고, 학문 중의 학문인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우리 한국인들은 그 명함조차도 내밀 수가 없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