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님의 '주실마을'을 찾아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승 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시인의 고향 "주실마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속하는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다.
주실마을은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이 마을 한복판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고, 옥천종택(玉川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월록서당 등 숱한 문화자원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주실마을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주곡리이며, 1630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주곡리 보다는 주실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주실은 한양조씨들이 모여 사는 동성마을이며, 이 마을의 조씨를 흔히
주실조씨라고도 한다. 주곡리는 본래 주실이라 불리던 곳과 또 다른 자연
마을인 감북골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입구에는 당제를 지내는 당나무와 조지훈의 시비가 있다.
마을 입구 두곳에는 수령 400년과 500년을 자랑하는 소나무가 있다.
마을의 중앙으로 일월산 동쪽에서 발원한 장군천이 흐르고 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음지마와 양지마로 나누어진다. 음지마는 청기방면으로 장군천
왼쪽에 있는 마을로 1998년 현재 약 10여호 정도, 건너편 양지마에는 40여
호가 살고 있다. 조전이 입향할 당시에는 음지마에만 살았지만 점차
양지마까지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양지마 앞에는 인근에서 쉽게 보기
힘든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면적은 약 만평 정도 된다. 고추는 영양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인 동시에 지역민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는 작물이며,
주실마을의 경우에도 논농사와 고추 재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그의 문하생들이 세운 시비에는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
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잡는다.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중략)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호은종택은 조선 중기인 인조 때에 지은 것으로
한국전 때 일부 소실되었던 것을 1963년 복원하였다. 언뜻 보기에도
고고한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듯한 이 호은종택은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가에는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태실이 그대로 남아있고 인근에는 어렸을 적 수학했던
월록서당도 그대로 있다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삼불차(三不借)’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 재물을 빌리지 않음)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양자를 들이지 않음 않음)
셋째가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음)로
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조지훈도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라나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굳세게 명가의
지조를 지켜오면서 박사만 14명 배출시킨 주실마을이다
"지훈 문학관"
조지훈 시인의 생애를 둘러볼 수 있는 주실마을에서는 지훈문학관
뿐만 아니라 매년 지훈예술제도 시행하고있는데 올해로 6회를 맞는
지훈예술제는 2012년 5월19일~20일 이틀동안 주실마을에서 개최된다.
조지훈의 사상과 지조를 계승, 발전시키고 영양을 문향의 고장으로
알리고자 기획된 행사로 전시, 공연, 체험 등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되어있으니 문학도 즐기고 멋진 주실마을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호은종택-조지훈 생가"
이 집은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본관은 한양이고 본명은 '동탁'이며 '지훈'은 호이다. 선생은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등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것은 물론 지조 있고, 풍류 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주곡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이
조선 인조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선생의 태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 복구되었다.
"주실마을 전경"
가운데 기와집이 몰려있는 곳에 종가인 호은종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와혈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매를 날려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록서당"
이 건물은 조선 영조 49년(1773)에 옥천 조덕린(1658~1737)의
손자인 월하 조운도( 1718~1796)가 발의하고 한양조씨, 야성정씨,
함양오씨 등이 주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과 명현들이 배출되었다.
한양조씨는 원래 영양에 입향한 후 원당리(영양읍 하원동)에 살다가
호은공 조전선생이 주곡동으로 옮겨간 뒤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과 학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호은선생의 아들 정형선생은 1630년(인조8年)에
진사하고, 증손 호봉 덕순선생과, 옥천 덕린선생의 형제가 숙종조에
대과하여 호봉은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고, 옥천은
승지로서 성학과 문장으로 당시 남인의 사표가 되었다. 그러나 옥천
선생의 손자 월하 조운도 선생과 만곡 조술도선생이 서당이 없어 학자의
수업에 지장이 있음을 크게 개탄하고 월록서당을 영건하게 되었다.
월록서당은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한 후 서당으로서 본군에서는
처음이며, 일월산록에 간좌곤향으로 위치가 한적하고 집이 4칸 겹집으로
넓고, 앞으로는 장군천이 남쪽으로 흘러 서당 앞을 돌아서 낙동강의
원류를 이루었으며, 주봉인 일월산이 뻗어내려 만장광경을 이루었으니
그 전망이 화려하며 수석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유생들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앞으로는 독산과 멀리는 흥림산이 안대를 이루고 있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이 방인데, 왼쪽은 존성재,
오른편은 극복재라는 편액이 불어 있으며, 대산 이상정의 서당기와
천사 김종덕과 간옹 이헌경의 시판이 새겨져 있다. 이 서당은
월하와 만곡을 위시하여 향내 후진양성은 물론 동남문풍의
중심이 되었다.
서당의 현판은 숙종조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 선생의 친필이다.
"옥천종택"
이 집은 17세기말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조씨 옥천
조덕린(1658~1737)의 고택이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 17년(1671)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와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과 글을 읽는 별당인 초당과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채는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ㅁ자'형 뜰 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이는데 다만 안방이 동쪽에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만이 다르다.
집의 평면구성에 좌우가 바뀐 이 같은 형식은 18세기부터 안방과
부엌이 서쪽으로 배치되는 평면구성으로 통일되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살림집은 지붕을 박공으로 처리하는 등 상당히 오래된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초당은 전형적인 서당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사당은 18세기말 건물로서 일반적인 형식에 속한다.
이 집은 경북 북부지방의 폐쇄적인 “ㅁ자형 뜰 집”의 민가(民家)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주실마을의 상징인 '문필봉'
단아한 모습은 '문필봉'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주실마을 앞의 '문필봉'은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원천이다.
문필봉 옆의 "연적봉""
붓처럼 생긴 "문필봉"
호은종택의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아주 인상적인
봉우리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봉우리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 바로 문필봉(文筆峰)이라서 그렇다.
집터나 묘터의 정면에 위치한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는데,
홍림산이라고 불리는 문필봉이 호은종택의 안산에 해당된다.
이 문필봉이 왜 눈부신가 하면, 그 모습이 너무 문필(文筆)
처럼 뚜렷하고 대문의 정면 일직선상에 교과서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필봉은 글씨 쓰는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정삼각형 산이다.
삼각형 모양의 산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형(木形)의 산이다.
풍수가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본다. 문필봉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하면 그 기운을 받아 사람도 역시
문필가나 학자가 된다고 신앙하는 것이 풍수이다.
‘천지여아동일체 아여천지동심정(天地與我同一體 我與
天地同心正, 천지와 내가 한 몸이요, 나와 천지가 같이
바른 마음)’이라는 한자 문화권의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신앙은 납득이 간다.
주실마을의 상징인 단아한 모습의'문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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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음보내요 덕분에 감사해요 ....................
주실마을 오셨으면 들렸어 차 한잔 하시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되요.
저가 근무하고 있는 학구내 마을이랍니다. 좋은날 되시기 바랍니다.
나빌레라
감사합니다.
더운날 건안하셔요.
박하향님, 혹 사학과나 지리학을 전공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료들을 올려 주시네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글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