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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묵상글 들 ( 연중 제2주간 수요일. - 다윗에게 배우는 싸우는 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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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다윗에게 배우는 싸우는 법
이때까지만 해도 사울은 다윗을 사랑했고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가는 것을 말립니다.
사울의 말대로 다윗은 아직 소년이었고 그래서 경쟁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가 다윗을 경쟁 상대로 보고 그래서 미움이 생기는 것은 내일 독서이기에
오늘은 사울 탐구를 잠시 멈추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서만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까짓것'의 영성 차원에서만 봤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어리석은 사람은 사울처럼 그것을 너무
큰 일로 여기기에 해결치 못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다윗처럼 "까짓것'
할 수 있기에 해결하는데 다윗이 '까짓것'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느님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고 하느님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른 차원에서 이 얘기를 교훈 삼고자 합니다.
다윗에게서 싸우는 법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거운 짐을 고생스럽게 지는 사람에게
편하고 가볍게 지는 법을 가르치시면서
당신의 멍에를 메고 지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당신의 멍에는 마음의 온유와 겸손이라고 하셨고요.
왜 내게 무거운 짐이! 또는 왜 내게 이 고통이! 또는 왜 나한테만!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고 그것도 거칠게 따지기 시작하면
짐은 더 무거워지고, 그 이전에 그 짐과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처럼 싸우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겁 없이 그리고 칼 없이 싸우는 겁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런데 겁과 칼이 없이 싸우는 것이란 단순히 겁과 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칼이 없어도 문제 없다는 자신이 있는 것이고,
자신이 있는 것은 자기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으면 된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겁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없이 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우리에게도 각기 싸워야 할 골리앗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혹과 욕망일 수도 있고,
불의한 세력일 수도 있고,
두려움이나 병마일 수도 있고,
요즘 우리 모두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는 코로나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거시 무엇이든 우리도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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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 손에 못을 바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하여, 당신은 참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저희가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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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번 비뚤어지면
오래전 일입니다. 얼음이 깨지면서 어린이 3명이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를 목격한 시민이 물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한 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두 명은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지만,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하고자 노력한 시민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출애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날인 동시에 사랑하는 날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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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오늘 미사의 독서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복음에서는 안식일 논쟁이 나옵니다. 골리앗은 필리스티아의 장수였고 필리스티아는 당시 강성하던 철기문명의 나라였으나 우상신을 숭배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이 철제 검을 들고 나온 골리앗을 대적하려 준비한 무기는 겨우 양치던 목동 시절에 익힌 돌팔매질에서 쓰던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였던 것이 이 상황의 우열을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집트 탈출 시에 역사적으로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그 하느님과 동족이 맺은 시나이 계약 정신에 투철한 젊은이였습니다. 위기 때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도와주심을 철썩같이 믿었던 다윗이 겁도 없이 칼을 든 필리스티아 장수 골리앗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용기와 뒷배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다윗은 임금이었던 사울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게 되고, 결국 이 인기를 바탕으로 왕위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사울 대신에 다윗을 왕위에 앉히게 된, 사무엘을 통한 하느님의 개입도 결국 다윗의 실력과 백성의 민심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필리스티아를 물리치고 국권이 튼튼하게 된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시에 모세로부터 배운 하느님 신앙을 유다교로 굳건하게 발전시켰습니다. 유다교의 핵심은 시나이 계약이요 그 중에서도 십계명이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그 십계명 안에서도 세 번째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계명이었지요.
오늘 복음의 상황은 이토록 중요한 계명이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은 물론 백성의 형편과도 상관없이 매우 편협하고 비인간적으로 적용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굳이 안식일에 회당에 데려다 놓고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사이를 비롯한 지식층 유다인들의 마음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 이상으로 오그라들어 있었습니다. 모든 법은 입법취지를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는데, 안식일 법에 대해서는 입법취지와 상관없이 매우 형식적으로 답습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나더라도 안식일에는 고쳐주지 말아야 한다고 여길 정도로 고답적인 인습이 마치 대단한 종교적 진리인 양 행세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이 되어 버린 형국이었습니다.
이 고약한 대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근본 취지를 상기시키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꼼짝없이 이 대결에서 패배한 바리사이들은 그 무렵부터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는데, 하필 그 음모에서 야합한 상대는 평소에 앙숙으로 지내던 헤로데 당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야합 사실은 바리사이들의 종교적 소신이 일관성도 없고 백성에 대한 진정성도 없었음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독서에서 다윗의 하느님 신앙과 골리앗의 우상숭배 종교가 대결했다면, 복음에서는 인습적으로 고착되어 우상숭배적 혐의가 짙어진 유다교의 종교 질서와 예수님의 신앙이 대결하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 전 9일 기도를 바치는 주간의 취지에 따라서 그의 선교 활동과 연관지어 묵상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긴장스런 국면은 여지없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겠다는 약속의 상징이었던 할례를 면제하고자 했는데, 비록 유다교인은 아니더라도 유다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기성 제자들은 할례를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으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이므로 유다인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까지 씌울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예루살렘 사도회의까지 열려서 격론을 벌인 끝에 이방인 할례 면제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초대교회의 첫 번째 위기가 가까스로 봉합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사도 바오로는 할례를 면제받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간소화된 세례조차도 극도로 삼갔으며(1코린 1,16-17),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로 봉헌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가르쳤습니다(로마 12,1).
사도 바오로가 고군분투하며 확립해 놓은 예수님의 계시, 즉 종교 질서는 신앙 진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진리조차도 교회의 역사와 현실에서는 종종 철제 검을 든 골리앗과 작은 돌맹이를 쥔 다윗의 싸움처럼 불리하게 전개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세례 받은 신자의 수로 표시되는 교세가 중요한 지표가 아니며 그 중에서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하는 열성 신자의 숫자 역시도 중요한 참고 지표가 되지 못합니다. 세례나 영성체와 상관없이 실제로 실천되고 있는 삶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세례와 영성체와 같은 성사의 은총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생활을 하라고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진리는, 안식일로 대표되는 모든 종교 질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신앙 진리에 종속되는 것이며 그 최고 기준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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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이웃과 서로 나누는 음식이 참 많았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조금 많다 싶으면 어머니께서 싸주셔서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나눔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그 나눔이 사라졌을까요? 어느 책에서 보니, 냉장고가 커지면서 나눔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냉장고를 통해 유통기한이 길어졌습니다. 냉장고가 없을 때는 버리지 않으려면 당연히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냉장고가 없으니 보관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고, 음식을 상해서 버리는 것보다는 이웃과 나누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장고가 생기면서 이웃과 나눌 이유가 줄어들었습니다. 냉동실에 넣어두면 아주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 냉장고가 처음 생겼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는데, 아이스크림과 같은 시원한 얼음을 1년 내내 먹을 수 있었으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나눔을 방해하는 물건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내게 편안함을 주지만 따뜻함을 나눌 수 없게 했습니다.
나만 편한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까요? 냉장고를 치워야 할까요? 그런데 이제 냉장고 없이는 못 살 것 같습니다. 나의 편안함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논쟁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인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면서 그 어느 것보다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굳어 버리다 보니 율법이 곧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가장 편안한 냉장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자렛인들의 복음서’라는 외경에 나와 있는데, 그는 오른손으로 밥벌이하는 장인이었고, 손이 오그라들어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병자 앞에서 치유의 합법성 문제를 따지고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완고한 모습에 화가 나셨습니다. 치유될 수 있음에도 안식일 법에 따라서 모르는 체하는 그들의 위선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냉장고처럼, 사랑이라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있는 율법이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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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근심, 공포와 불안 가운데 그대 앞에 빛나고 있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은 그대에게 더 많은 시간을 줄 것이다(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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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우리는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의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던 자매님이 당신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지며 화난 얼굴을 합니다. 이때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나 때문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내가 싫은가?’ 등의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연관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 자매님의 자녀가 장난치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음의 답을 머릿속 생각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17 x 24 =”
그냥 대충 1724라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정답을 이야기하려고 할 것입니다. 정답은 408이지만, 암산으로 정답을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정답에 가까워집니다.
생각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또 정답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내 생각을 정답으로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소에 자기 생각을 통제할 수 있고,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지만 정답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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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트라우마(상처)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상처가 다 아물었지만 우리의 마음에 남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몸에도 몇 곳에 상처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날 연탄재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눈가에 연탄재를 맞고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5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을 실수로 눌러서 다리에 화상을 입은 적도 있습니다.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뜨거움이 생각납니다. 사제가 된 후에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서품 받은 지 보름 만에 있었던 일입니다. 30년이 넘었지만 얼굴이 부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육체적인 상처도 있지만 정신적인 상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뜻밖의 재난, 갑자기 찾아온 질병, 사업의 실패는 정신적인 상처를 깊게 남기기 마련입니다.
유명한 행동 연구가인 안탈 페슈테틱스(Antal Festetics)는 ‘인류의 세 가지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별이며, 태양은 우주의 변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우주에서 지구는 우주의 변방이고, 작은 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기에 충분이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인격은 수치와 수량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예언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되찾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틀렸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과 같다고, 천년도 주님의 눈에는 마치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쉴 때까지는 실로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자칫 우리의 의식과 자유의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온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이들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주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우리의 의식을 초월하여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교회의 영성가들은 바로 그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골리앗은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리앗 앞에서 무서워 떨었습니다. 골리앗은 막강한 힘으로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아직 어렸고,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와 같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율법과 계명을 독차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의 권위와 독선을 나무라십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빛이 드러나면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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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전쟁
- 주님의 전사戰士로 삽시다 -
2022년 2월호 생활성서를 펼치는 순간 첫 페이지 사진과 함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나라로 향하는 길 전체가 하늘나라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여정중의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기 시작한 하늘나라입니다. 하루하루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는 제 좌우명입니다. 하루하루중 아마 가장 기다려지는 행복한 시간은 하루의 영적전쟁이 끝난후 잠자리에 들 때이고, 또 하나는 새벽 잠깨어 일어나 외딴곳에서 그날의 강론을 쓰며 주님과 함께 하루의 영적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수도생활이기에 가능한 하루 일과표의 시스템입니다.
수도생활은 전통적으로 영적전쟁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現役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수도생활 만 40년 동안 강론중 참 많이 사용했던 제목이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인 “영적 전쟁-주님의 전사戰士로 삽시다-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중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평생 주님의 전사로,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평생 주님의 형제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의 자랑스런, 행복한 신원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평생 주님의 전사이듯 죽어야 졸업인 평생 주님의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그날까지 치열한 영적전쟁의 삶이요, 치열한 영적공부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네 충고가 적절하다 싶습니다.
1.기도하라
2.공부하라
3.일하라
4.운동하라
요즘 제 산책중 자주 즐겨 부르는 늙은 군인의 노래가 있습니다. 모교수는 고인이 된 신영복 교수, 전유성 개그맨, 김민기 가수를 3대 천재로 꼽았습니다. 바로 김민기씨가 늙은 군인의 일화를 듣고 작곡한 곡입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1절은 이대로 부르고, 2절은 ‘이 강산’을 ‘수도원’으로, ‘군인’을 ‘수도자’로, ‘30년’은 ‘40년’으로, ‘푸른옷’은 ‘검은옷’으로 바꿔 부르면 참 실감이 납니다.
영적 전쟁에 영적 전사, 주님의 전사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더불어의 영적 도반道伴이자 더불어의 영적 학우學友이자 더불어의 영적 전사,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전사를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 바꿔 말할 수 있겠고, 결국 주님의 자녀다운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영적 전쟁에 임하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의 최고의 무기는 기도와 말씀입니다. 일어나자 마자 기도와 말씀의 영적 훈련의(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인류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시작된 전쟁같습니다. 전쟁없는 평화의 세상을 꿈꾸지만 지금도 계속되는 온갖 형태의 생존경쟁 치열한 전쟁의 현실입니다. 태어나자 마자 시작된 전쟁은 아마 죽어야 끝날 것입니다. 그 실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러했고,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다윗이 그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예수님과 다윗, 두 분 다 하느님의 전사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여기에 한 분 더 추가한다면 바오로 사도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 치열한 영적전쟁의 현실에서 참으로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 항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은 하나 하느님으로 완전 무장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신망애의 향주삼덕으로, 기도와 말씀으로, 분별력의 지혜와 용기로, 온유와 겸손으로 완전 무장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영적 무장武裝입니다. 예수님의 바리사이들에 대한 격퇴가 얼마나 통쾌한지요! 예수님께 분별의 잣대는 상대적인 안식일법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의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는 이미 답이 전제되어 있기에 바리사이들은 전전긍긍 대답을 못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병, 완고함으로 굳어진 바리사이들의 마음입니다. 마침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시니 그대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용기있는 주님의 전사, 예수님의 모습인지요!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은 치유되어 성하게 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전사인 예수님은 우리의 오그라든 심신을 활짝 펼쳐 주시어, 오늘도 건강한 심신의 주님의 전사로서 영전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니 계속되는 영적전쟁임을 감지합니다. 그러나 궁극의 승리는 파스카의 예수님께 있습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궁극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겨 놓고 싸우는 영적전쟁의 수행입니다. 이미 널리 알려져 회자되고 있는 오늘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일화는 늘 들어도 흥미진진하고 주님의 전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하느님의 성소가 옳았음을 입증하는 참 통쾌한 다윗의 승리의 장면입니다.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 다윗이, 백전노장의 용사 골리앗을 이기리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나 결국은 하느님으로 무장한 다윗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흡사 다음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말은 실제 그의 육성을 듣는 느낌입니다.
“너는 칼과 표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각계 각층의 우두머리들이 이 말씀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을 다시 점검케 하는 말씀이자, 용기백배勇氣百倍 영적 사기士氣를 충전衝天케하고 영적 전의戰意를 새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완전 무장 시켜 주시어 오늘도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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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손을 뻗어라."(마르3,5)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사람들, 곧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구원의 행위를 보고, 곧바로 나가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탈출20,8-11)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안식일 규정에 근거하여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4)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입을 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보시고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인 주일'입니다.
주일은 '구원의 날'입니다.
주일은 '다시 태어나는 날'이며,
'죄를 용서 받고 부활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쉽니다!'
안식일인 주일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쉬는 날이 아니고, '구원과 다시 태어남과 부활이 함께하는 날'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살고 싶어 합니다.
지금의 약함과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나와 너 그리고 모두가 죽지 않고 함께 살기 위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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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는
어제 예수님의 선포가 오늘 치유 기적으로 증명됩니다.
이 기적은 유다인들에게 중요한 시간(안식일)과
공간(회당)에서 일어납니다.
안식일, 어느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위축된 삶을
살았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 질문은 ‘선한 일’이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율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소외되고 위축된 삶을 회복시켜야 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하시려는 일입니다.
“손을 뻗어라.” 이렇게 치유는 안식일을 위반하는 구체적인
행동 없이 권위 있는 말씀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사형 권한을 지닌 헤로데의
추종자들과 예수님을 없애기로 모의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남을 해치는 일”, “죽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 “목숨을 구하는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을 위하여 생긴”(마르 2,27)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자유와
구원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12-15 참조).
우리도 모든 죄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져, 우리 안에
담긴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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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해도 되느냐?’고 물으셨다면 그들은 즉시 ‘당신은 율법을 거슬러 말하고 있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 의미를 말씀하신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 (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라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시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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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마르 3, 5)
더 나은
길을 제시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더 나은 길이란
아픔을 이겨내고
손을 뻗는
용기의 삶이다.
손을 뻗어
만나는 삶이
진짜 우리들
삶이다.
손을 뻗는
현실의 접촉이
용기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가장 중요한
우리자신을
만나는 치유의
시작이다.
오그라든지도
모른 체 살았다.
손을 뻗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자신임을
뒤늦게
알게된다.
부정적인
방식을
바꾸는 것이
손을 뻗어
만나는 건강한
방식이다.
올바른 방향은
손을 뻗어
주님을
향하는 것이다.
깨어있어야
손을 뻗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에
묶여 우리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
손을 뻗어야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잔치의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다.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뻗어
삶을 나눈다.
두려움이 아닌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잘못된
믿음은
가치 없는
존재로 우리를
이끈다.
진실한 믿음은
손을 뻗는
용기와 감사이다.
손을 뻗는
집중과 선택
손을 잡는
소통과
기쁨이다.
오그라든
오늘이 아닌
손을 뻗는
뜨거움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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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르 3,1-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자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바리사이들이 일부러 데리고 온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장애자를 고쳐 주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그 장애자를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런 장애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고쳐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예수님의 자비를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예수님의 권한도 믿지 않고,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도 그런 태도를 취할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이 만든 법이니 당신부터 잘 지키셔야 합니다.”
이런 말은 인간 세상의 입법자들을 향해서는 옳은 말이 되지만,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을 향해서는 옳지 않은 말이 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든 계명들에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니
예수님도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마르 3,3-4).”
지금 ‘안식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라고 말씀하셨지만,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즉 ‘모든 날’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해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날’에, 즉 요일과 상관없이 날마다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에는 특히 더 많이 실천해야 합니다.
(만일에 주일에만 실천하고 평일에는 안 한다면, 그것도 율법주의입니다.)
이 말씀은 종교 전체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종교는 날마다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만일에 선행과 사랑 실천이 없다면, 또는 공동체 안에서만 하고,
밖에서는 안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그냥 이기적인 집단입니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의 심각한 고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말씀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아마도 그들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5-6).”
4절의 예수님 말씀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합당하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인데,
하느님의 뜻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간도, 중립도 없습니다.
선이 아니면 악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여워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에 대해서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대해서는 노여워하셨지만,
바리사이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라는 말은,
고집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사랑’입니다.
‘슬퍼하시면서’ 라는 말 때문에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무능력을,
즉 당신에게 바리사이들을 변화시킬 힘이 없음을 슬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듣지 않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회개와 마음의 변화는 억지로 시킬 수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구원도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쪽에서 스스로 원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만으로 장애자를 고쳐 주십니다.
‘몸의 장애’는 당사자의 희망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그냥 고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병과 장애는 본인이 깨닫지 못하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누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장애자를 고쳐 주셨고,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하는 이가 있는데,
바리사이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떤 동작으로 고치든지
말씀만으로 고치든지 간에 안식일에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 주는 것은 모두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논리적으로는 예수님 말씀에 반박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우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려고 애를 쓰시는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못된 신념에 빠지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고,
모든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신념’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ㄴ).”
이 말씀은 외부의 박해보다 잘못된 신념 때문에 생기는 내부의 박해가
더 끔찍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라는 말은,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죽이는 방법을 의논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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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드러운 마음과 사고의 유연성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마르 3,5)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법을 위반하는 자는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해졌습니다(탈출 31,14).
적대자들의 노림수를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하고 묻습니다. 안식일법에 매여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잘못임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3,4),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시며 그들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십니다.’(3,5)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완고함과 불신앙, 생명 경시와 무관심에 대해 분노하시고 슬퍼하신 것입니다. 이어 “손을 뻗어라”(3,5) 하시어 그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사람은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의 기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을 치유하신 것은 율법을 어긴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에도 죽을 위험에 있는 이들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아픈 이는 다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한계나 조건 없이 사랑과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부드럽게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완고해져 헤로데 당원들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없애버릴 모의를 꾸밉니다(3,6). 그들이 바로 영혼이 굳고 오그라든 불쌍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혼없는 규범을 앞세우는 완고한 바리사이들처럼 내 생각과 판단이 옳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오만과 고집, 편협한 사고와 경험에 기초한 신념, 닫힌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겸손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 생각과 욕심과 집착 때문에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마음이 고약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딱딱해지고 차가워지고 매몰차지며 완고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때문에 문을 활짝 열고 사는 우리는 그래선 안되겠지요. 부드러워지기 위해 내 몸과 마음과 생각의 힘을 빼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관대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의 선을 한 없이 넓혀가고, 모두를 사랑으로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생명 넘치는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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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복음 선포 여행을 떠난 예수님과 제자단의 행보는 지극히 소박하고 가난했습니다.
많은 짐을 실은 낙타 부대며, 여러 명의 노예며, 큼지막한 가마를 갖춘 럭셔리한 여행단이 아니었습니다.
손에 든 것이라고는 고작 뱀이나 전갈 방어용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짐보따리도 없었습니다.
갈아입을 여벌 옷이나 비상식량도 없었습니다.
우르르 무리지어 다니면서 누군가가 숙소를 제공해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습니다. 한끼 식사라도 제공해주면 감지덕지하면서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발길 닿는 고을마다 환대한 것이 아니었기에, 때로 몇 끼니나 쫄쫄 굶으며 건너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밀밭 사이를 걸어가던 제자들이었기에, 자동으로 손이 밀 이삭으로 갔었겠지요.
지독한 허기를 조금이라도 면하려고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입에 털어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은 이게 웬떡이냐며 즉시 예수님께 태클을 걸어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코 복음 2장 24절)
여기서 눈 여겨봐야 할 한 가지 포인트! 안식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과도한 해석입니다.
이스라엘 전통 안에 이런 예외가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밀이삭을 자르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이웃의 포도밭에 들어갈 경우, 원하는 만큼 배불리 포도를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릇에 담하서는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
(신명기 23장 25~26절)
바리사이들은 특별히 안식일 규정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과도하게 해석했고, 무리하게 적용시켜 가난한 백성들을 억눌렀습니다.
그들은 밀 이삭 몇 가닥 자르는 것도 추수의 한 형태로 봤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어기고 훼손시키는 노동 행위 29가지를 나열했고, 29가지는 각각 또 다른 가지를 쳐서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그 얼마나 답답하고 고약한 안식일 규정이었겠습니까?
만일 부주의로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면 1차 경고를 받고 벌로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1차 경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시 목격자가 있는 앞에서 안식을 규정을 어기게 되면, 그 벌로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비인간적으로 가혹한 안식일 규정의 폐단을 똑똑히 당신 눈으로 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중요시 여겼던 안식일 규정을 보란듯이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안식일을 선포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복음 2장 27~28절)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율법 조항 하나 하나에 얽매이신 작은 분이 아니라 자비로 충만한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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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일은 대체 무엇을 하라고 있는 날인가?
오늘 복음도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는데 그것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마르고 있다는 말은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나, 하지 않으시나만 관찰합니다.
그들은 참다운 안식이 하느님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을 모릅니다.
그저 안식일에 일만 안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것만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지 않는 목적이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임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데 어떻게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지 않을 수 있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어 오신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안식일의 주인으로 섬기려면 그리스도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신학생 선배가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부드러운’ 분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운 예수님은 정의와 심판을 하시는 딱딱 떨어지는 그런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예수님은 잠깐만 읽어보아도 너무 착하시고, 너무 부드러우시고, 너무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제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때와 그분이 예수님과 머물 때, 누가 더 편안함을 느끼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분으로 믿는 사람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신학교에서 예수님에 대해 많이 공부해도 그분을 더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부라면 실제로
점점 예수님과 함께 머묾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사람을 살리시는 착한 분이시라는 체험을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노숙인 무료 숙박 시설을 운영하는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시설에는 40여 명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추운 겨울에도 열댓 명밖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따듯한 방도 있고 침대도 있고 따듯한 물이 나오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노숙인은 추운 곳에서 자면서도 여기에 잘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그분들이 그곳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이 그만큼 자비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하늘 나라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하느님 자비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불편해서 차리라 지옥으로 가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저지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여겨 숨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그분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하루 동안 그분과 함께 지내며 그분이 너무 착하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죄는 보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로스트 인 스페이스 시즌 1’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가족이 지구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되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 커다란 우주선, 레솔루트를 탑니다.
그러나 어떤 일로 우주선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탈출하여 이상한 별에 불시착합니다.
이때 로빈슨 가족 중 막내 윌이라는 어린아이가 한 로봇을 구해주어 그 로봇과 함께 왔는데 때마침 자신의 일가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봇은 윌에게 충성을 다하는 터라 가족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윌의 가족은 로봇의 능력과 함께 아무리 이상한 행성이라 하지만 안전함을 느낍니다.
문제는 그 로봇이 자신들의 우주선을 파괴한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로봇이 윌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능력이 인간이 감당할 수는 없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계를 합니다.
이때 스미스라는 박사는 로봇의 힘으로 그들이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가게 되면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로봇에 대한 미움을 갖게 만들어 그 로봇을 총으로 쏘고 결국엔 자신들 밖으로 몰아내게 만듭니다.
하지만 로봇이 없으니 외계 행성에서 그들을 도와줄 것이 하나도 없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로봇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안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같은 한 로봇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편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로봇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분은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구원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심판하는 분이심을 잊어버리십시오.
심판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로빈슨 가족처럼 그분과 함께 지내며 그분이 좋으신 분임을 믿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유학을 하러 갔을 때 누구나 그랬겠지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려 했습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니 기도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통해 몹시 어렵지 않게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믿고 함께하다 보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러면 그분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더 커집니다.
그럴수록 매일이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로빈슨 가족이 로봇과 함께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는 것, 이것이 안식일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그분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분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지옥에 보내 달라고 스스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그분이 하느님이시기에 그 믿음만으로 모든 날이 안식이 될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라고 있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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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2 주간 수요일-묵상과 기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사무엘기는 다윗의 필리스티아 장수를 무찌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장수는 칼과 표창과 장을 가지고 나왔지만, 그는 메끄러운 돌맹이 다섯개를 가지고 대결에 나섭니다. 다윗은 돌 하나로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장수의 이마를 맞쳐 쓰러뜨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 줄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이를 고쳐주십니다. 한 쪽에서는 안식일에 그를 고쳐주시는지를, 고발하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노기를 때고 돌아보고 그들의 완고함을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어라."하며 그의 손을 성하게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1사무 17,32-33.37.40-51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마르 3,1-6
실천
우리는 어떤 난제를 해결할 때 과거의 방식으로 과거 해오던 습관으로만 해결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맞기는 하지만 꼭 맞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필리스티아 장수는 다윗을 제압하기 위해서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매끄러운 돌을 들고 나온 다윗의 복장을 우스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팔매질의 명수였습니다. 전장에서 모든 것을 갖추고 나온 장수를 무너뜨렸습니다. 각자의 문제 해결은 그 사람의 기술, 몸에 밴 것, 그 신명난 일에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자신, 가족, 이웃, 사회, 교회 모든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금지한,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 날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이를 고쳐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언제 어디서나 어느 조건이나 환경에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어떤 제약과 규정 속에서도 그 자비와 자애가 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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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 220118. 화요일 복음 아래에 있음
화요일 복음*의 연장선에서 수요일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먼저 전체적인 틀입니다. 계명과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는 게 아니고 그게 우리를 보호하는 기능도 있다고 하는 게 저의 화요일 복음 묵상의 일부 요지입니다. 오늘 수요일 복음의 묵상글 제목을 제가 '율법에 매이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한 사람이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를 하시는지요? 보통의 경우에는 동의도 잘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게 무슨 말인지 하고 어리둥절할 수 있을 겁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랑을 완성한다."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는 이런 게 아니고 오히려 이와는 다른 역발상입니다. 지금부터 그에 관한 내용을 묵상해보겠습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말은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 이와 같은 표현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요? 이분법적인 논리로 접근하면 다른 사람은 법이 있어야 산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좀 더 확대를 하면 이런 사람들은 만약 법이 없다면 법 질서를 어기며 살 사람일 경우가 다분히 높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준법정신이 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겉으론 법을 지킬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어떤 물리적인 제제가 가해지기 때문에 그 제제를 받지 않으려고 법을 지킨다고도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에게 법이라는 것은 법 자체의 존제 유무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자유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이미 그는 인간이 만든 법 이전에 이미 벌써 인간 내면에 있는 '양심의 법'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지식이나 학벌 같은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람은 선천적으로 이미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그런 마음, 바로 하느님의 마음도 기본적으로 내재돼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가능할 수 있다는 것도 그냥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양심의 소리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긴 하지만 그 근본 속성은 하느님의 소리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음성 파일이 인간의 마음에서 재생된 것과도 같다고 보면 어떨까요? 우리도 만약 유튜브를 통해서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듣는다고 해서 폰이 강론을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소리는 폰에서 나오지만 실제 그 목소리가 전해주는 가르침은 신부님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를 적용하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긴 하지만 근본적인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그자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바람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바람은 그물이 있어도 그 그물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물로 포획을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듯이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다 대변할 수 있고 또 '사랑' 하나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미 사랑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사랑을 완성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주 힘든 일일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만큼 하느님이 되기가 싶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될 것 같으면 하느님이라는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위엄 또한 약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게 단순히 어려운 일이라서 어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묵상을 해보면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있는 완고함이라는 속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도 묵상을 해봅니다. 하느님께서 원래 저희를 창조하실 때 그 본성 속에 사랑이라는 DNA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심어놓으셨는데 그만 완고함이란 녀석이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 우리를 포위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포위망을 뚫으면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그 포위망을 뚫지 못하면 그 속에 갇혀서 계속 나오지 못하게 되는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머리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좋은 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그렇게 살자며 호소를 한들 입으로만 앵무새처럼 부르짖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그건 자신을 속이는 것만 아니고 남도 속이는 것이 되게 됩니다. 어디 남만 속이게 되는 것일까요? 하느님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정작 본인은 하느님을 속이는 주체의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피부로 의식을 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불쌍한 사람을 보게 되면 하느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인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우리의 마음이 오그라든 완고한 마음 또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이 두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이 이기게 되면 바로 그게 자비로 이어져 자비를 실천하게 되지만 오그라든 완고한 마음이 우세하게 되면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는 모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사랑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 오그라든 손처럼 완고한 마음도 손을 펴듯이 펴야만이 그 사랑 실천이 빛을 낼 수가 있는 것이지 사랑실천과 따로국밥처럼 놀게 되면 그 사랑실천은 가식적인 사랑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마음속 한켠에 완고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서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걸 펴도록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길이 바로 우리도 어떤 틀이나 규정에 얽매여 자연스럽지 못한 왜곡된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참사랑의 기쁨과 자유를 만끽하는 신앙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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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굴레가 되지 않으려면......
강만연 어부베드로추천 0조회 722.01.18 12:55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법이 필요합니다.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까요? 법이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근데 잘 생각해보면 자유를 제한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제한이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보장적 기능도 있습니다. 그래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면에서는 순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자유를 침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것도 온전히 모든 것을 제한하고 보장해 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규정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걸 보완하는 기능을 사람인 법관이 법의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일종의 유권해석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유권해석도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의 존재 형식을 법학에서는 법원이라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익인 법익을 고려해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보통 보면 행정에 관한 판례를 보면 공익과 사익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공익을 보호해야 하는지 사익을 보호해야 하는지에 따라 똑같은 사안이라도 판단기준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익을 판단하는 것도 법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신을 가지고 이익형량을 따지게 됩니다. 그런 판단의 최종적인 기준은 물론 최상위 규범인 헌법입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을 하게 됩니다. 개별적인 사안만을 가지고 하면 법이라는 게 주먹구구식으로 전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하게 되면 사실 고해성사를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걸 구속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가령 법이라고 하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겠지만 영적으로는 사실 죄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맞을 수 있지만 그게 단순히 생각만큼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나옵니다. 안식일 규정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기 위해서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규정은 사실 우리가 느끼기엔 우리의 삶을 제한다고 구속하는 굴레 같지만 사실 그 굴레가 바로 세상으로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굴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를 하느님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보호막을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게 장애물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장애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 장애물이 자신의 영혼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계명과 율법을 하나의 굴레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같습니다. 나무를 보지 않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율법을 해석해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규정이나 제도의 틀에 매여 그로 인해 오히려 그게 자신이 나아가야 할 신앙의 장애물과 같은 것은 없는지 한번 성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율법을 초월한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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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1사무17,32-33.37.40-51)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 (47)
사무엘서 상권 17장 47절은 목적절을 이끄는 '키'(ki)로 시작되는데, 전쟁에 모인 무리들이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통해 알게 될 내용을 나타낸다.
여기서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 '뻬'(be)가 사용되면서 주님의 구원은 칼이나 창을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내용은 사무엘서 상권 14장 6절의 요나탄의 신앙고백과 맥을 같이 한다.
"자! 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전초 부대로 넘어 들어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승리하시는 데에는 수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다윗과 요나탄은 모두 주님의 구원이 객관적인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에 해당하는 '키 라이흐와 함밀르하마' (ki laihwa hammilhama; for the battle is the LORD's)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 for)가 등장하여, 주님의 구원이 세상적인 무기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를 나타낸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는 말은 '전쟁'('함밀르하마'; hammilhama; the battle)의 승리와 패배 여부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다'('라이흐와'; laihwa; is the LORD)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여러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주님의 계약 궤로 인하여 필리스티아의 여러 도시들이 재앙을 받은 사건(1사무5장), 사무엘을 통한 필리스티아와의 전쟁 승리(1사무7장), 사울을 통한 암몬족과의 전쟁 승리(1사무11장), 요나탄을 통한 필리스티아와의 전쟁 승리(1사무14장) 등은 모두 전쟁이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입증하는 사건들이었다.
말하자면 본문은 전쟁의 결과가 인간의 노력이나 군사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는 문장은 사무엘서 상권 17장 46절에 대한 반복인데, '너를'이 '너희를', '내 손에'가 '우리 손에'로 보다 확대되었다.
'넘겨 주실 것이다'에 해당하는 말이 사무엘서 상권 17장 46절에는 '예싹게르카'(yesaggerka; will hand you over; will deliver you), 사무엘 상권 17장 47절에는 '웨나탄 에트켐'(wenathan ethkem; and he will give all of you; and he will give you)으로 나온다.
'예싹게르카'(yesaggerka)는 '닫다', '폐쇄하다'라는 뜻의 원형 '싸가르'(sagar)의 강조형과 필리스티아 사람을 지시하는 2인칭 대명사 접미어 '카'(ka)가 결합된 것으로서 직역하면 '그가 너를 반드시 닫으실 것이다'가 된다.
이 동사에 '내 손에'라는 뜻의 전치사구 '뻬야디'(beyadi; into my hand)가 결합되어 '주님께서 다윗의 손안에 필리스티아 사람을 가두어 놓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일반적으로 '누구의 손에 붙이다(넘겨 주다)'라는 표현에는 사무엘 상권 14장 10절과 17장 47절처럼 '주다'라는 뜻의 '나탄'(nathan) 동사가 사용되는데, 사무엘 상권 17장 46절처럼 '싸가르'(sagar) 동사를 사용한 것은 필리스티아 사람(골리앗)의 목숨이 완전히 다윗 자신의 손에 맡겨져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구체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다윗이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근거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는 표현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다윗의 확신이 사무엘서 상권 17장 47절에서 확대되어 다윗과 필리스티아 사람의 싸움이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 전체의 싸움이라는 사실로 넘어가고, 다윗 개인의 구원이 이스라엘 전체의 공동체적 구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골리앗은 필리스티아의 대표이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대표이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을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필리스티아인들은 그들의 용사인 골리앗이 다윗에게 죽임을 당하자 도망을 쳤던 것이다(1사무17,51).
다윗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승리케 하심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필리스티아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2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뜻이 오그라든, 굳은 마음을 보라 하신다.
보는 것, 그것이 풀리는 길이다.
(마르3,1-6)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 회당(성당) 안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의 대표인 것이다.
전에 안식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맨 나중에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묵상했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그 안식의 길을 잃어 버렸음도 봤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으로 먹게 했던 그 뱀의 유혹으로 따 먹었던 손이다.(창세3,6)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그 사람 안에서 ‘오그라들어 있다’는 것이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예수님의 십자가 그 대속으로 얻는 쉼, 안식을 깨닫지 못했으니, 법으로 지키는 안식일, 그 자신들의 행위만을 의지했고, 그런 자신들을 가치로 여기는 신앙이 된 것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 오그라든 자리, 그 회당(성당), 그 신앙에서 일어나 가운데에 계시는 안식의 실체인 당신께 나오라는 것이다.
4(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 좋은 일이란? - 사람을 살리는, 곧 하늘의 생명을 알려주어 살게 하는 일이다. 그것이 안식을 살게 하는 안식일인 것이다. 법으로 지키는 행위, 자기 의로움의 신앙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 안식을 주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르14,3-6) 3ㄱ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 나병환자와 함께 하시는, 곧 죄인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3ㄴ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자신을 깨트리는 그 자기 버림(否認)으로 죄인과 하나(한 몸)가 되시는 예수님을 자신의 머리(주인)로 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4그러자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5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 말씀을 선악으로 따로 먹고 보는, 하느님의 뜻이 오그라든 사람들의 말이다.
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일이 아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도리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 구원의 예수님을 주인(주님)으로 따르고 이웃도 따르게 알려 주는 것, 그것이 좋은 일인 것이다. 그 좋은 일, 하느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재물을 이웃과 나누는 그 행실도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예물기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 그 제사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졌고(히브10장 참조),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졌음을 믿고 안식을 사는 그 믿음의 삶, 그 거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도 믿음도 없이 기념하며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 말씀이 치유하셨다. 말씀 앞에 뱀의 유혹을 먹은 손이 회복 되었다. 곧 뱀의 유혹 그 거짓이 쫓겨난 것이다. 우리도 말씀을 알아야 뱀의 거짓 가르침,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의 행위의 신앙으로는 절대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 참으로 인간의 죄성은 집요하다. 첫 인간 아담이 자신의 뜻을 위해 하느님을 배반했고(창세3장), 그렇게 온 인류가 뱀의 말로 자신의 뜻을 위해 사는 그 악한 세상이 되어 홍수로 다 멸망(滅亡) 하시고(창세6장), 그러나 인간의 그 악한 뜻은 변하지 않음을 보시고 하늘이 대신 죽으시겠다는 무지개 계약을 주신다.(창세9,9참조) 그래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름(뜻)을 높이겠다는 그 생각을 고집하며 바벨탑을 세운다.(창세11장 참조)
그렇게 창세기 1장부터 11장 까지 죄의 원역사가 있고, 12장부터는 구원역사가 시작되는 것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로마15,4) 4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 오늘 바리사이들의 죄성, 그 안에 우리의 모습을 ‘보라’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들의 헛된 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그 구원의 진리, 그 길로 돌아와 안식을 누리라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그 하느님의 의지, 자비, 사랑, 그 구원의 계획이 들어있는 것이 십계명이다.
그 열 개의 계명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그 하나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 하나를 깨닫고 그 사랑의 하느님께 감사로 찬양을 드리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다.
(히브7,2) 2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 아브라함이 대사제께 드린 ‘십분의 일’이다. 십분의 일 - (마아세르). 마아(진리)+세르(10) = 10을 진리로, 곧 열을 진리 그 하나로 드리는 것이 십일조 이다.
다시 아브라함은 영원한 대사제, 곧 정의와 평화이신 그리스도께 ‘당신이 구원의 진리이십니다.’를 고백한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오그라든 사람은 십일조를 예물, 돈으로 드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헌금은 해야한다. 당신의 죽음으로 내 죄를 씻어 살려주신 그 주님께 감사로 드리는 마음이 헌금이다.)
*마음에 새기자*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구원, 안식) 갈 수 없다.
(마르2,28)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히브6,17)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믿는)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 천주의 성령님! 당신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오그라든, 굳은 마음이 펴지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3,1-6)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5)
여기서 '노기'에 해당하는 '오르게스'(orges; anger)의 원형 '오르게'(orge)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일반적으로 감정적 분노를 나타내며, 성경은 이런 종류의 감정 표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야고1,20).
그러나 이 단어가 마르코 복음 3장 5절처럼 악(惡)에 대한 신적(神的) 반응으로서 언급되면, 이것은 하느님의 공의의 심판과 형벌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 분노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쌓아 놓았다가 부어지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진노(indignation)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로마2,5; 묵시6,17).
마르코 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의 분노 역시 공의의 분노이다.
이것은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과 결탁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몹시 슬퍼하시면서'로 번역된 '쉴뤼푸메노스'(syllypumenous; being grieved; deeply distressed)의 원형 '쉴뤼페오'(syllypeo)는 '함께'라는 뜻의 '쉰'(syn)과 '슬퍼하다','괴로워하다'라는 뜻의 '뤼페오' (lypeo)가 결합되어,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아 또는 그와 함께 '깊이 슬퍼하다' 또는 '고뇌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당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 대한 편협한 해석에 연연하여 당신을 감히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바리사이 무리들에 대해서 공의로운 분노를 품으시면서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깊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심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자신의 손을 '뻗어' 순종하자 '다시 성하여졌다'는 즉각적인 결과가 나왔다.
특히 '다시 성하여졌다'라고 번역된 '아페카테스타테'(apekatestathe; was restored)의 원형 '아포카티스테미'(apokathistemi)는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다'(히브13,19)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하느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사도1,6).
따라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의 첫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더군다나 이 회복은 첫 창조보다 더 나은 상태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 궁극적인 상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주님 앞에 나아오는 이들이 모두 온전하게 회복되어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광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 3장 2절에 나오는 데로, 바리사이들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관하여 자신들이 따르는 규정들보다 당신 자신의 해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단죄하기 위한 구체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의 시제가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보여주는 미완료의 시제로 기록된 점을 볼 때, 마르코 복음 2장 23~28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며 당신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곡식을 자른 행위를 정당화시킨 사실을, 바리사이들이 공개적인 석상에서 드러내어 율법을 어긴 자로 고발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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