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엔 엄마로 부터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고 주머니 돈 헐어서 맛있는 것 나만 사 주셨지요. 외가에 가면 사랑을 독차지 하였으니 이 세상에 나만 있는 줄 버릇 없는 행동도 했었지요. 내가 철이 들고야 알았습니다. 외가에서는 외할머니에게는 삼촌도 필요 없었지요. 오직 나에게만 " 뭐 해주랴?" "뭐 주까? " 선택권은 나에게만 있었지요. 다른 이들은 내 귀볼기를 먹었습니다.
주름이 많고 허리 굽었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보고 싶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밭에서 일하시다가도 내가 가면 치마에 손 쓱쓱 문지르시고 부엌으로 가시던 모습이 엊그제 일같이 내 뇌리를 스쳐갑니다.
엄하시고 사리에 분별하셨던 외할머니. 이제와서 생각 해 보니 다른 외손자보다 나를 무척 사랑 했던 것같습니다. 할머니주머니에 꼬기작 꼬기작 접어 놓은 지폐를 손에 꾹 쥐어주시던일, 명주실 내면서 나오는 번데기를 옆에 쭈그리고 앉은 나에게 주시던 그리움.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너무 그립습니다.
외할머니에게는 효도할 기간이 많이 없었습니다. 내가 자립하여 생활 할 때는 벌써 내 곁에 안 계셨으니까요.
추석이 다가 오니까 외할머니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얼굴은 볼 수없지만 팔월 한가위 휘영청 둥근밝은달 밤에 환하게 웃으시는 우리 할머니 얼굴인양 봐야겠습니다.
잠시 이글을 보니 외할머니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군요. 외가와 우리집과는 한 1. 5km쯤 거리가 대강 될듯 합니다. 그때는 제가 7살쯤 된 시절인데요. 논길 밭길 신작로길 산길을 거쳐 걸어서 외가집을 갔던 정겹던 들판과 그시절이 생각납니다.검은머리에 쪽을 올리신 모습 엄마 귀찮게 한다고 야단 맞았던 기억도 그립고 그립고 그립습니다~~
형이랑님 전 손녀 였담니다~ 제나이 벌써 지천명을 가리키네염, 세네기 주부시절이나 형편핀 시절이나 생활 습관이란 변화를 힘들게 하더군요. 불확실한 미래만 보고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달려만 가더라구요. 오십줄에야 이웃도 친구도 제 마음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느끼면서 인연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첫댓글 좋은글 잘 보고갑니다.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잠시 이글을 보니 외할머니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군요. 외가와 우리집과는 한 1. 5km쯤 거리가 대강 될듯 합니다.
그때는 제가 7살쯤 된 시절인데요.
논길 밭길 신작로길 산길을 거쳐 걸어서
외가집을 갔던 정겹던 들판과 그시절이
생각납니다.검은머리에 쪽을 올리신 모습
엄마 귀찮게 한다고 야단 맞았던 기억도
그립고 그립고 그립습니다~~
어쩜 모든 할머님들의 손자 사랑은 비슷했을까요.
잠시 할머니께 효도 할 시간을 가지셨다니 고맙습니다.
형이랑님 전 손녀 였담니다~
제나이 벌써 지천명을 가리키네염,
세네기 주부시절이나 형편핀 시절이나
생활 습관이란 변화를 힘들게 하더군요.
불확실한 미래만 보고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달려만 가더라구요.
오십줄에야 이웃도 친구도 제 마음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느끼면서 인연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봄이님 외할머니는 언제나 고달파도 다정하게 웃으시는 건 딸같이 보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항상 우리는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날을 후회하고 그리워한가 봅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행복한 나날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주신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