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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계명 - 가장 기뻐하는 날
20: 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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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네 번째 계명입니다.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불안과 공포, 긴장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데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 다. 하나님은 긴장되고 지치고 피곤한 인간들을 위하여 이레 중에 하루를 예배드리므로 영혼에 힘을 얻게 하는 날로 정하여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피곤한 세계의 인류들에게 이처럼 안식의 축복을 준 종교입니다.
여러분, 유교에서 이런 계명을 보셨습니까?
불교에서 이런 규례가 있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에서만 있는 것이고 사 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전 세계가 이와 같은 안식의 축복을 받게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심신이 피곤해지기 때문에 때때로 안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쉬는 가운데 피로가 회복되고 쉬는 가운데서 병도 낫습니다.우리가 쉬는 가운데서 새로운 정력이 축적되는 것입니다. 여름에 흔히 휴가를 하는데 더워서 쉬는 것보다도 얼마를 쉬면서 새 힘을 기르는 뜻이 있습니다. 이레 중에 하루를 쉬는 일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합니다. 쉴 때 쉬어야 사실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해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육신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을 위해서도 안식일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활을 위해서도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그 육신의 생활로 인해서 우리의 심령이 약해 져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심령은 말하자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령한 세계를 앙모하는 날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이 도시에서 아스팔트만 내려다보고 빌딩만 쳐다보다가 눈을 들어 가을의 새파란 하늘을 바라볼 때 시원함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죄악된 세상에서 시달려 피곤하다가 이 렇게 하나님의 전에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게 될 때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 니다. 하늘의 영광과 접촉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안식의 복을 주시고 그 날을 정해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억압과 긴장 속에 사는 인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처방이 있습니다. 이레 중 하루를 쉬어라. 마음을 쉬게 하고 육신도 쉬게 하라. 그리고 믿음으로 영혼을 채워서 새 용기를 얻고 육신의 휴식으로 몸의 힘을 회복하도록 하라 하십니다.
이사야 3장 15절에도 잠잠하고도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체질을 너무 잘 아 십니다. 그래서 지쳐서 피곤해 하는 인간을 위해서 이레 중에 하루를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정 하므로 영혼에 힘을 얻게 하는 날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넷째 계명이야말로 정말 우리에게 타당한 계명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러면 이 안식일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교리문답 59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까지는 7일 중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명하셨고(그러니까 이레 중 일곱째 날은 토요일입니다. ) 그 후부터는 세상 끝날까지는 7일 중 첫째 날을 명하셨나니 그 첫째 날은 일요일(主日)입니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은 이레 중에 첫 째 날인 일요일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구약 전체의 가장 큰 일은 천지창조입니다. 인간까지 합쳐서 이 우주의 창조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 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천지창조를 엿새 동안에 다 마치고 이레 중 마지막 날 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죄악 가운데 빠져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는 일입니다. 이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구속의 사업을 어느 날 이루셨습니까?
주님의 부활하신 바로 그 날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와서 주님께서 구속사업을 완성하신 그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시대에는 토요일로 지켰지만 신약의 은혜시대에 와서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날을 주의 날 또는 주일(主日)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이 날을 축복하셨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열 한 제자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실 때에도 이레 중에 첫날에 꼭 나타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신 날도 이레 중에 첫날인 주일에 모인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러 모였더니” 하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란 바로 주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도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매 주일 첫날은 일요일 바로 주일입니다. 그때 모여서 예배 드리고 헌금을 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계시를 받고 계시록을 쓰 게 된 것입니다. 이레 중에 첫날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구약시대에 있던 행사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달라진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가령 구약시대의 할례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세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예배의 날이 구약시대 일곱째 날이 신약시대에는 첫째 날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날을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요리 문답 60문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날에 합당한 여러 가지 세상일과 오락까지 그치고 그 시간을 공사 예배에 바쳐서 사용할 것이요, 그 외에는 사세 부득이한 일과 자선 사업에 사용할 수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노는 날이 아닙니다. 공적 또는 사적으로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의 문자 적인 해석은 이 시대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가령 주일에는 모든 일은 누구나 중단한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간단한 예로 지금 이 예배당 안에는 전기 불이 켜지지 않으면 어두워서 그리고 더워서 예배드릴 수가 없습니다. 전기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곳까지 오시는 데는 물론 댁에서 걸어오신 분이 몇 분 계실 것이고 99퍼센트는 다 차를 이용해서 오셨습니다. 개인차를 타고 오신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버스 운전사,안내양, 지하철에 표 파는 사람, 받는 사람, 운전하는 사람, 교통을 정리하는 사람은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계명의 정신을 따르지 않고 문자 적인 해석만을 따른다고 하면 우리 는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계명은 축복이 아니라 짐이 될 것입니다. 휴식의 날이 아니라 긴장과 수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문자를 따르려는 바리새 사람들과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의 뜻대로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해석대로 받아 지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막2:27).
안식일은 우리를 위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피곤하고 지치고 긴장하고 유혹 받고 고통 속에 있는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을 부정적인 제한으로 채우지 마십시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찾아 주신다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산업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여야 안식일을 바로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큰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원칙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는나 스스로 신앙의 양심과 성령의 지도를 따라 작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은 할 수 있고 어떤 일은 할 수 없다고 규칙을 정해 놓으면 옛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꼭 같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신앙 양심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꼭 같은 신앙과 자세로 이 날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옛날 바리새 사람들처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양심과 같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약성경 중에 복음서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 사람은 이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연구를 하여 금하는 것을 많이 만들어 놓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규례 대로하면 안식일에 5리이상 걸으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렇게 보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이미 안식일을 범한 셈입니다.
병 고치는 일도 그렇습니다. 여기에도 복잡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생명이 위급한 일에만 안식일에 손을 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어떤 부인이 안식일에 해산을 하게 된다면 도움이 필요 하고 돕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목에 병이 나서 숨쉬기가 곤란하게 되면 치료해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치료하지 아니하면 숨 못 쉬고 죽으니까요. 만일 어떤 사람이 우물에 빠졌으면 물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려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하고 살았으면 그를 도와 건져야 하고 죽었으면 이튿날까지 시체를 물 속에 버려 두라는 것이 안식일의 준수 세칙이었습니다.
손가락이 잘려서 피가 나면 처매기는 하여야 하지만 약은 바르지 말고 처매라고 했습니다. 약을 바르는 것은 치료가 되니까 금했습니다. 이런 법을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문자의 법대로 살려는 서기관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불쌍히 여겨 고쳐주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러분, 율법을 읽는데 이렇게 문자의 표현된 그 뜻만 읽어 깨닫고 그 뒤에 있는 정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보통 문자주의라고 합니다. 문자 적으로 일하지 말라고 한 것만 깨달았지 왜 일하지 말며 무슨 이유로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셨는지 그 계명의 근본 정신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이 꼭 옳고 절대적이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 만이니까 자연히 독선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까지도 이단이라는 판단과 정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조그만 일을 해도 안식일을 범한다고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고 배고파 먹은 것은 죄가 아니나 손으로 비볐으니 타작하는 일을 했다고 예수님께 와서 보고하던 사람들, 예수님이 손이 말라 고생하는 사람고쳐 주었다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고발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모여서 안식일에 예수를 죽일 의논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독선주의에 빠지면 사람을 죽이는 음모를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옳게 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이 하루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 심령을 위해서, 봉사를 위해서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날을 마귀의 날로 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죄 짓는 날로 삼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안 믿는 사람처럼 공일(空日)로 삼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이 날을 공일이라 불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날은 주일(主日)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공일이라고 해서 무슨 행사도 하고 놀기도 하고 별에 별 일을 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처럼 분주한 세상 에서 일에 쫓기다 보면 안식일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구경가는 일에 바빠서 주일을 잊어버리기 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하느라고 주일을 잊어버리는 일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등산하느라고 주일을 잊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골프 치느라고 주일을 잊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낚시하느라고 주일을 잊어버립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대동강 가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수영하는 일과 낚시질을 좋아했습니다. 주간에는 학교에 다니느라 못하고 주일에는 꼭 낚시질을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해서 속으로 얼마나 불평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낚시 통을 어깨에 메 고 왼쪽에는 미끼 통을 들고 강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주일 교회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큰 은혜를 받고 목사로 부르심을 입어 오늘의 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지난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하기만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날들은 저에게 사실 안정과 평화 그리고 가장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여러분, 주일은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 뵙는 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 합니까?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기다리며 즐거워합니까?
주님을 위해 이 날을 지키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질투하십니다.
이 날이야말로 우리의 심령이 새 힘을 얻어서 인생길로 바로 걸어가며 승리하게 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길에 오아시스 같은 것입니다. 샘물을 마시는 날입니다. 매주일 생명수를 마셔야 우리의 생명이 삽니다. 이 날을 내가 가장 사랑하고 사랑 받는 분을 만나서 가 장 즐거운 날입니다. 이 즐거움, 기쁨이 우리 하나 하나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