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
(시 110:1~3)
이 시간에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라는 제목입니다. 교회에 청년이 많다면 희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라면 그것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청년, 그러면 어릴 때 동네 청년들이 생각납니다. 그 때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이 일어나 동네에 집집마다 스피커 시설을 장치해 주고 야학을 가르친다. 4H운동을 한다. 무엇을 한다. 동네를 얼마나 활기차게들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농촌의 현실은 청년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있다 해도 요즘 청년들의 형편이 말이 아니랍니다. ‘이태백’이란 현대어를 아십니까? 이태백은 불행하게도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뜻의 준말이랍니다. 어쩌다 이런 말이 다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백수들의 애환을 얘기하면서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너 취직했니?”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몸은 청년이지만 현실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청년이기를 원하십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갈렙과 같은 청년이기를 원하십니다. 정확히 어떤 청년이길 원하실까요? 본문 3절에 그 답이 나타납니다. 무엇입니까?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입니다. 새벽이슬, 이름만 들어도 뭔가 참신하고 생명력이 치솟고 약동하는 것을 느낍니다.
정확히 새벽이슬 같은 청년은 어떤 청년일까요? 이스라엘에는 새벽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곡식과 산천초목은 이 이슬을 먹고 자랍니다. 호14:5에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이처럼 새벽이슬 같은 청년은 온 세상을 꽃피고 열매 맺고 복되게 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예수 닮은 사람이 바로 그런 청년입니다. 우리 남전도회 회원들과 성도들 모두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 되려면 성령을 인정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1-2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만왕의 왕으로서의 통치를 말합니다. 그리고 3절의 “주의 권능의 날”이란 오순절 성령강림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날에 주의 청년들이 나오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청년이 만들어지는 것 아니란 말씀입니다. 성령이 강하게 임하셔야 됩니다.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마음도 늙으려고 해서 그게 문제입니다. 저도 많지 않지만 자꾸만 마음의 늙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몸은 그래도 마음은 늙지 않아야지, 하나님 나라는 노인은 없습니다. 청년만 있습니다.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도 청년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인정하고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정통신앙을 가진 자라면 성령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경우는 없지만 소극적인 것도 무관심도 부정입니다.
욜2:28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무관심하는 교인은 석고상 같습니다. 생명력도 없고 감동도 능력도 없습니다. 생각은 낡아있고 추구하는 것도 비전도 없거나 맞지 않습니다. 마음에 성령이 없으니 어떻게 새로운 비전과 능력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 받아야 하나님의 쓰시는 종으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행1:8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다른 교회 일 잘하는 일군들 부러워 마세요. 성령이 임하면 일군들이 생겨나고 세워집니다. 여자 분들도 여장부 같은 믿음의 일군이 되고 남자는 남자니까 더 말할 것 없고, 성령 받으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고 바울과 바나바와 같고 스데반과 빌립 같은 일군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제자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3년 반이나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없는 제자교육은 교육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오순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제자가 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갈팡질팡하고 두려워 숨었던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모두 강해졌습니다. 담대해지고 거룩해지고 위대해지고 능력이 있고 생기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여 예배하고 사랑하고 전도하고 교회를 일으키고 온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모두 새벽이슬 같은 일군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남전도회도 성령 받아 가장 생각이 젊고 앞서가고 활기차고 큰 일하시기 바랍니다.
2.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은 제사장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할 때 나옵니다.
또 3절에 무엇이라 말씀했나요?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그랬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무 옷이나 거룩한 옷이라 칭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옷은 제사장복입니다. 출28:2에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그리고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닙니다. 거룩한 옷은 제사장만이 입는 옷입니다.
성경에 제사장에 관한 기사가 얼마나 길고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귀합니다. 출 29장을 보면 제사장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29:5-9에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그런데 지금은 신약시대인데 어떻게 제사장 옷을 입습니까? 벧전2:9에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마음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제사장복을 입고 섬기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용서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엎디어서 이 일을 잘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죄인들을 사랑으로 덮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교회도 죄인이 모이는 곳입니다. 사람 옳고 그름 따져 기도해 주려면 기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 선지자는 꽤 되는 것 같은데 제사장은 너무 부족합니다. 추한 것을 보더라도 사랑으로 덮고 기도해 주면 그들이 성령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 일군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옷을 입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신하되 왜 즐거이 헌신하라 했을까요?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쉽습니까? 나도 모르게 비난하고 비판하는 대열에 끌려가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제사장 자격이 없습니다. 죄인을 사랑으로 아우르지 못하면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배의 제사장 직분을 잘하십시다. 그리고 기도의 제사장직분을 잘하십시다. 성령이 그냥 임하는 것 아닙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주야로 찬송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고 핍박하던 원수들을 사랑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많지 않습니까? 몸을 그렇다면 몸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초대교회에는 “날 연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울 때에 드릴 것이 없어서 주일 외에 일주일에 하루를 봉헌하는 제도였습니다. 특히 시골에서 성행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혹은 이틀씩 교회에 나와서 몸으로 봉사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제사장으로 가득 찰 때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처럼 새벽이슬 같은 일군들로 가득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최고의 봉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지역과 교회와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뭔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나도 교회도 나라도 민족도 세계도 뭔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중동에서는 민주화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바람으로 독제가 무너지고 이슬람공화국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가 꽃을 피고 선교의 자유가 활짝 열렸으면 합니다. 우리 한국도 이슬람과 협약이나 맺는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주신 신앙의 복이나 잘 지켰으면 합니다. 한국교회도 더 복 받고 부흥되고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많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섬김의 길을 따라가는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2011년 올해가 한경직목사님 천국 가신지 11주년이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땅 한 평, 집 한 켠이 없다. 내 이름으로 있는 재산이 있다면 그것은 공적인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남기는 것은 없지만 너희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고 한경직 목사(1902~2000)가 1981년 육성 테이프를 통해 가족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유언에서 잘 드러나듯 한경직 목사는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이 시대 대표적인 성직자였습니다. 한목사님은 한국 개신교계의 거목이었습니다. 그가 일제시대 신사참배한 과오도 있었고 군사정권을 협력한 적도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삶은 예수님의 제자답게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 복 받고 은혜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줌으로 자기를 비운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한목사님의 뒤를 따라갔으면 합니다. 이 행렬이 거대한 대열이 될 때 더 아름다운 향내를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 중의 청년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청년이셨습니다. 몸도 청년, 마음도 청년이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은혜 끼치는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성령을 인정하고 사모하고 예배와 기도와 사랑의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자신도 우리도 모두가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