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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현(鎭海縣), 창원시 진동면 제영(題詠)편 3.> 총4편 中.
● 다음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慶尙道) 진해현(鎭海縣) 제영(題詠)편을 살펴보자. 운자(韻字)는 ‘麻’‘歌’‘先’ 자(字)를 사용해 차례로 기술하였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청에 유명한 분이나 고위공직자가 방문하면 기념으로 시(詩) 한편을 지어 감회를 피력하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에 걸어 두기도 했다. 다음 ①~⑥편까지는 당시 진해현 객사에 현판시로 걸려 있었던 시편들이다. 이후 1581년 홍성민(洪聖民 1536∼1594)도 현판시 중에 ‘歌’ 운을 차운하여 7언절구 2편을 지었다.(앞서 소개함)
① <해천고진수기사(海天孤鎭戍旗斜)> 1395년 합포유배 時, 진해현에 왔던 이첨(李詹 1345-1405)의 칠언시(詩).
"바닷가 외로운 진에 깃발이 비스듬한데 말을 몰아 남쪽으로 오니 집에 가는 것 같구나. 저녁 봉화(烽火)가 한 줄기만 전하는 것 보았으니, 고깃배 타고 갈꽃 속에 자고저."
② <방변촌점진어가(榜邊村店盡漁家)> 1446년 경상도관찰사 김조(金銚 ?~1455)의 칠언시(詩).
"바닷가 외로운 성(城)에 좋은 경치 많은데, 이웃한 시골 가게는 다 어부의 집일세. 섬 오랑캐 심복하여 싸움 없으니, 곳곳에 격양가(擊壤歌)만 들려오누나."
③ <월명남포청어가(月明南浦廳漁歌)> 1437년 경상도관찰사 조서강(趙瑞康 ?~1444)의 칠언시(詩).
"푸른 바다 끝없고 여기 저기 산도 많은데, 한 조각 외로운 성에 수십 집이로다. 나그네 밤 깊어도 잠 못 이루고, 달 밝은 남포에서 고기 잡는 노래 듣노라."
④ <팔진증경전수다(八鎭曾經戰戍多)> 1415년 경상도관찰사 안등(安騰)의 칠언시(詩).
"팔진은 일찍이 전쟁을 많이 겪었고, 밥 짓는 연기 십 리까지 인가가 있구나. 강바람이 두세 곡조를 실어 보내니, 날 저문 어촌에 장단가(長短歌)일세."
⑤ 또한 여지승람(輿地勝覽)편 題 <진해[鎭海]>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칠언시(詩).
粉堞嵯峨鎭海邊 흰 성가퀴가 우뚝하여 바닷가를 진압하고,
新樓斗起鳳孤騫 새 누각은 불쑥 솟아 봉새가 높이 나는 듯하네.
鴉鬟點點呈羣島 검 같은 여러 섬이 띄엄띄엄 있고,
鯨浪鱗鱗帖一天 고래 같은 물결은 번쩍번쩍 온 하늘을 덮네.
日落漁村閑占月 어촌에 해가 지니 한가하게 달을 차지했고,
潮回塩竈煖生烟 염점(鹽店)에 밀물 드니 따뜻한 연기가 난다.
悠悠遠客多情思 멀리 온 나그네 유유한 생각 많아,
徙倚欄干眼欲穿 난간에 기대어 눈이 뚫어질 듯하네.
⑥ 김안국(金安國)이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경상도를 순행하다, 진해현에 이르러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현판시를 보고, ‘灰‘ 韻에 차운하여 지은 시(詩)이다.[鎭海次四佳先生韻]
僻邑人煙少 궁벽한 고을에는 밥 짓는 연기 드물고
窮邊客罕來 외진 변방에는 나그네가 드물다하네.
樓喧戍鼓動 떠들썩한 다락집엔 병사들의 북소리 울리고
城暗瘴雲回 어두운 성(城)으로 습기 많은 구름이 돌아온다.
空碧天呑海 푸른 하늘이 부질없이 바다를 삼키더니
輕黃雨熟梅 누런 비가 매화를 빠르게 익게 하네.
羈愁兼遠興 나그네 시름은 멀어질수록 더욱 쌓여
應是兩相催 응당 이에 둘이서 서로 재촉하겠네.
/ 오랜만에 홀로 짓다.(罕一作獨)
⑦ 진해 밤비[鎭海夜雨]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1517년 경상도관찰사.
客裏三更雨 객지에서 한밤중(三更)에 내린 비가
蕭蕭到枕邊 쓸쓸한 베갯머리에 이르렀다.
燈殘猶曳燼 가물거리던 등불이 깜부기불로 나부껴도
思苦祗難眠 깊어지는 사색에 잠들기 어렵구나.
海氣腥吹瘴 바다에 어린 비릿한 냄새가 독한 기운을 부추기니
庭花落損姸 정원의 꽃이 떨어져 아름다움이 줄어드네.
明朝須起早 내일 아침에는 모름지기 일찍 일어나
惆悵惜春篇 날리는 봄을 아쉬워하며 슬퍼하리라.
⑧ 진해공관[鎭海公館] 즉석에서 제군자에게 전송하며 보이다.(卽席示餞送諸君子) / 정사룡(鄭士龍 1491∼1570)
鼓笛華譙落日邊 지는 해 언저리에 화려한 문루(門樓)의 북과 피리 소리가
令人去住轉茫然 사람으로 하여금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더욱 망연케 한다.
海邦奇勝應須記 바닷가 기묘한 경치를 기록하여 전하려고
望裏鼇岑翠揷天 해중(海中)의 신산(神山)을 바라보니 비취색 하늘이 걸렸네.
翠竹蒼梧又紫薇 푸른 대나무, 싱그런 오동잎 또한 백일홍,
秋深風物媚官扉 깊어가는 가을 경치에 관리의 사립문에서 아양을 떨고나.
南溟煙月東華土 큰 남쪽바다에 구름 가린 희미한 달, 우리나라 국토인데
別後相思有夢歸 이별 후에 서로를 생각하며 꿈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네.
蜑戶般般傍海濆 이러저러한 바닷가 미천한 집 옆에는 바닷물이 출렁출렁,
平生網擉替耕耘 평생 그물과 작살로 고기 잡다가 김매고 밭을 간다.
風濤一葉看掀舞 바람과 큰 물결에 배 한척이 하늘 높이 치솟는데
不恨冥行路不分 어두운 길을 간다고 탓하진 않으나 길조차 분명치 않다네.
重膇從前謹下堂 종전부터 다리가 퉁퉁 부어 조심스레 뜰로 내려왔는데
南來都爲雪溫湯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니 눈(雪)이 따뜻한 물이 되었다.
除書喚起漁樵夢 제수하는 글을 보니 고기 잡고 나무하던 꿈이 생각나
釣手炎塵障夕陽 낚시를 하는데 더운 여름 먼지가 석양을 가로막네.
留連杯酒動遭牽 머물려 있으니 걸핏하면 술잔을 권하며 부산스러운데
離合人生本偶然 만나고 헤어지는 인생, 본디부터 우연이라지.
四座賓朋休懊惱 손님과 벗 등등 주위 사람 있으니 한탄하고 번뇌하지 않으리.
明年投效早歸田 내년에는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 충실히 살리라.
[주] 오잠(鼇岑) : 큰 자라가 등지고 있다고 하는 해중(海中)의 신산(神山).
⑨ 팔진관에서 숙박[宿八鎭館] / 정사룡(鄭士龍 1491∼1570)
傍海孤城暮 바다 가까운 외론 성에 날은 저물고
譙樓返照懸 문루(門樓)에 저녁햇빛이 걸렸구려.
民居聯蜑戶 백성은 바닷가에 연이어진 미천한 집에서 사는데
山氣雜炊煙 씩씩한 산세는 밥 짓는 연기와 뒤섞였네.
下榻逢殊遇 숙소에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어도
羅羞直幾錢 상 위에 나열한 음식값, 몇 푼 받지 못할 텐데.
殷勤伴淸坐 은근히 객상(客床) 앞에 조용히 앉아보니
唯有月當天 오직 하늘에 뜬 둥근 달과 짝하누나.
⑩ 무민당[無悶堂] 진해 마을 집이다.(鎭海村堂) / 정사룡(鄭士龍 1491∼1570)
湖邊試輟扶犁手 호숫가에서 손수 농사를 짓기 시작하려고
海上還思舞鳥親 해상으로 돌아온 뜻에 새가 친히 춤추고나.
只是鳩巢功誤拙 다만 비둘기 둥지 같은 초가집에서 질박함에 그르치니
可辭蝸殼劣容身 달팽이집 같이 좁은 곳과 험한 내 얼굴은 사양하리라.
明螺島近長凝望 명라도 근처를 늘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點芥舟輕不見津 점을 찍듯 작은 배가 달려가도 나루터는 보이질 않네.
坐看桑田變深渺 앉아 바라보니 뽕나무 밭이 변한 듯 심히 아득해도
高翔霞佩控騏驎 패옥(霞佩) 차고 천리마를 이끌어 높이 날아오르리라.
[주1] 무민(無悶) :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에 남방의 승려로 서기 930년경의 인물로만 알려짐. 당시에 시에 능했다 함. 전당시에 두수가 전해짐.
[주2] 하패(霞佩) : 신선(神仙)이 차는 옥을 말하는데, 전하여 패옥을 고상하게 이르는 말이다.
⑪ 팔진성에 있는 선조(先祖) 운에 차운하여[在八鎭城 次先祖韻] / 이육(李陸 1438∼1498)
天涯隱映海雲多 하늘 끝 밤바다에 구름이 은은히 비치고
漁火遇連竹裏家 고기잡이 횃불이 잇닿아 대숲 집까지 이어진다.
月白殘城偏有興 달 밝은 쇠잔한 성(城)에 지나친 흥취가 있으니
騷人更賦扣舷歌 시인과 문사가 뱃전을 두드리며 계속 노래를 짓노라.
⑫ 흥에 겨워[遣興] / 이육(李陸 1438∼1498)
一片深冬雪 한조각 겨울눈이 심해지는데
終年賦遠行 먼 길을 여행하다보니 한 해가 지나가네.
詩顚慙北客 시(詩)에 미쳐 부끄러운 북쪽 나그네,
酒癖愛東京 동경(경주)를 사랑하는 술주정꾼일세.
劇飮三巴月 질탕 마시고 재삼 바라본 달,
扁舟八鎭城 조각배 떠있는 팔진성(八鎭城),
向來疏放意 본래부터 자유로운 마음에
隨分不經營 분수에 따라 경영하지 못했네.
<창원시 합포구 진북면 여항산 의림사[餘航山義林寺] 4.>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인곡리 여항산 기슭에 있는 의림사(義林寺)는 688년(신문왕8)
위웅 대사(爲雄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절 이름은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신문왕이 빈번한 왜구의 약탈 행위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물리치려는 원력으로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봉국사(奉國寺)라 이름 했다고 한다. 한편 사중에서는 봉덕사(奉德寺)라 했다고 전하며, 조선 초기까지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로 선종(禪宗)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전해지는 최근의 의림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알기 어렵다. 그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창건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의 삼국 통일 직후 688년(신문왕8)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는 설, 둘째 고려 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설이다. 다만 현재 대웅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이 9세기 양식이라고 하여, 늦어도 그 당시에는 이미 사찰이 존재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 조선초기 1400년대 후반 이육(李陸 1438∼1498)과 조려(趙旅 1420∼1489) 선생이 의림사(義林寺)를 방문하여 남긴 시편이 있고 1537년 경남 곤양군수(昆陽郡守)를 재임시절 방문한 주세붕(周世鵬 1495∼1554), 그리고 1804년경 김려(金鑢 1766∼1822)가 진동면에 유배시절 방문하기도 했다.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의림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1,500여 명의 승병(僧兵)을 이끌고 이곳에 머물자, 인근 각지에서 의병이 숲[義林]처럼 모여들었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지금의 의림사로 고쳐 불렀다는 설화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의 대다수 사찰과 마찬가지로 의림사도 쇠락의 길로 들어섰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기록에서 계속 의림사를 소개하는 글이 등장하고 있으니, 조선 후기에 중창된 후 계속 존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 한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대 이후에 제작된 『의림사 도형(義林寺圖形)』이라는 지도를 통해서 당시의 사찰 규모를 살펴보면 그때까지는 상당히 큰 도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법당, 노전(爐殿),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국사영당(國師影堂), 청원루(淸遠樓), 영원당(永元堂), 금장각(金藏閣), 북암(北庵), 남암(南庵) 등이 있다. 그 이전에 세웠던 보광전(普光殿), 관음전(觀音殿), 천왕문(天王門), 청하당(淸霞堂), 백하당(白霞堂), 만월당(滿月堂), 망월암(望月庵), 동암(東庵), 해행당(解行堂), 미타전(彌陀殿) 등도 나와 있다. 또한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월정암(月精庵), 옥계암(玉溪庵) 등의 산내 암자를 7개소나 두고 있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의림사는 전각의 수나 도량의 규모가 여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며 산내 암자는 한 곳도 남아있지 않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다.
◯ 1950년 6·25 전쟁 때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조금씩 새롭게 중창한 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모두 6·25 전쟁 이후에 새롭게 중창 및 건립한 것으로 대웅전, 염불당, 나한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그리고 종무소로 사용하는 시설물 등이 있다. 의림사에는 3층 석탑과 3기의 부도가 있다. 염불당 앞에 있는 ‘의림사 3층 석탑’은 3m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주변에는 석등의 하대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모여져 있다. 의림사 부도군(浮屠群)은 절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있는 3기의 부도이다. 모두 석종형(石鐘型) 부도로, 가운데 한유당(閑遊堂) 부도와 그 오른쪽 부도는 4각 옥개석을 눌러쓰고 있다. 한유당 부도는 명문을 옥개석에 새긴 점이 특이하다. 가장 왼쪽 부도는 탑신이 잘린 듯 연화대석 사이에 8각 석재가 끼워져 있다.◯ 이육(李陸) 선생이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丹城面)에 있던 절인, 단속사(斷俗寺)로부터 진해현 의림사((義林寺)로 이동하여 ‘尤‘ 韻으로 지은 오언율시이다.
1) 단곡에서 의림사로 옮겨와[自斷俗移義林寺] 사찰은 팔진현 서쪽에 있다.(寺在八鎭縣西) / 이육(李陸 1438∼1498)
天涯義林寺 먼 하늘가에 있는 의림사(義林寺)의
風景似頭流 풍경이 두류산(頭流山)과 닮아
犬吠仙家暮 선가(仙家)의 저물녘에 개가 짖고
雞鳴水國秋 수국(水國)의 가을에 닭이 울고나.
漁舟煙外月 고깃배는 안개 너머 달을 향하고
蘆葉客中愁 갈대 잎은 나그네의 시름이로다.
出手無佳向 시문(詩文)을 막 탈고(脫稿)하니 아름다운 점이 없으니
空慙趙倚樓 조의루(趙倚樓) 보기가 헛되이 부끄럽네.
[주1] 의림사(義林寺) :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진북면 여항산에 있는 절.
[주2] 조의루(趙倚樓) :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조하(趙嘏)의 〈조추(早秋)〉 시의 “스러지는 별 몇 점 깜박이고 기러기는 변새를 가로지르는데, 긴 젓대 한 소리에 사람은 누대에 기댄다.(殘星幾點鴈橫塞 長笛一聲人倚樓)”라는 구절을 매우 좋아하여 조하를 조의루(趙倚樓)라 불렀다.
◯ 예조참의 이육(李陸 1438∼1498)의 글을 보고 ‘尤‘ 韻字를 차운한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2) 이참의 의림사에 차운하여[次李參議義林寺韻] / 조려(趙旅 1420∼1489)
義林眞巨刹 의림사는 참으로 큰 사찰로써
境界儘淸幽 경계에는 극히 맑고 그윽하다.
古柏窓前翠 늙은 측백나무가 창문 앞을 푸르게 하고
靈泉砌下流 신령한 샘물이 섬돌 아래쪽에서 흘러간다.
沈吟塵外景 깊이 생각하니 속세 밖의 풍경 속에
消遣客中愁 하 세월 보내는 나그네의 시름일세.
端坐僧何事 스님은 무슨 일로 단정하게 앉았는가?
趙州學話頭 조주(趙州)의 화두(話頭)를 배우려나.
[주] 조주(趙州) : 중국 당나라 때 승려 조주(趙州 778~897) 선사의 ‘무(無)자 화두’였다. 화두로써 교화에 힘쓴 유명한 스님이었다.
3) 의림사 위 석굴에 보조상이 있다[義林寺上石窟 有普照像] 나뭇길로 들어서니 세상 일이 사라지는 듯하였다.(擬捨事入樵逕 李補闕華) / 김려(金鑢 1766∼1822)
客行無期程 기약 없는 일정의 나그네 길인지라,
心心進谷口 심심하여 골짜기 어귀로 올라갔다.
萬山喬木內 첩첩의 깊은 산중 교목 속에
一溪秋雨後 가을비 내린 뒤에 한줄기 시냇물,
亂石忽中斷 어지러운 돌무더기가 홀연히 끊어진 곳에
兩巘如杵臼 절굿공이와 절구 같은 쌍봉우리,
林安鳥性善 숲에는 성품이 착한 새가 편히 쉬고
巗靜虎氣厚 고요한 바위에는 호랑이 기운이 두텁다.
初旭破紅霞 아침에 처음 돋는 태양이 붉은 노을을 지우고
靈岑顯其右 신령한 산봉우리가 그 우측에 뚜렷하고
潭窟洞深黑 물가 동굴 깊은 골짜기는 어둑한데
殷雷六時吼 우렛소리처럼 육시(六時)의 설법이 들려오네.
羅佛坐寂寞 나불(羅佛)이 적막하게 앉아 있는데
紺壁映金肘 감색 벽에서 누런빛 팔꿈치로 빛을 비춘다.
銕馬歕朱汗 검은 쇠 말은 붉은 땀을 토하니
竦風欲飛走 놀란 바람이 날아서 달려가려네.
塵想了不存 속된 생각이 마침내 없어졌으니
冥觀應已久 어리석은 생각은 아마 이미 오랜가보다.
願辭歧路間 바라건대 갈림길 사이에서
長年與爾守 오랜 세월동안 네가 지켜 가시라.
[주] 육시(六時) : 불교에서 하루를 여섯으로 나누어 염불과 독경을 하는 시간
4) 여항산 의림사에 머물다가[棲餘航山義林寺] /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조선중기 학자이자 문신인 주세붕은 고향이 경남 칠원이었고 1537년 경남 곤양군수(昆陽郡守)를 재임했으며 죽은 후에 소원에 따라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가 경남 지방에서 지은 시편들은 곤양군수 재직 전후에 지은 작품이다.
采蕨手邊晨靄綠 고사리를 손으로 캐다보니 새벽 운무(雲霧)가 푸르고
翦芹刀末石泉明 칼끝으로 미나리를 베다보니 돌샘이 깨끗하네.
歸來茶罷松窓下 소나무 창가 아래에서 차를 마신 후 돌아오니
明月一庭山鳥聲 온 정원에 밝은 달이 비추고 산새가 지저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