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자 꽃이 지면서 치열했던 여름도 가버렸다
어느 날 부모님 산소가 있는 산의 정상이 궁금해 등산 준비를 하고
"산소에 갔다오마" 하고 혼자서 집을 나섰다.
사상 버스터미널에서 진영공설운동장 -수산 -초동 -인교 -무안 -구기행 버스로 무안 정류소에 내려
아스팔트 길 옆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보며 "언제 피었을까" 궁금해하며 걸었다.
산소에 오르는 길 옆에 크지 않은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고
돌길이라 오르기가 십지 않다.
돈 벌어 목재 테크를 설치해야겠다,
산소 옆에 오동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림자가 산소를 드리워 한 폭의 수묵화다.
산소 뒤 쪽에는 내가 거제에 있을 때 묘목으로 심은 백일홍의 삣쩍 마른 가지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제멋대로 쏫아있다.
뜨거운 초가을이 지나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초가을 가을볕에 몸을 묻는다.
예를 올리고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이름도 모르는 산의 산길을 찾으려 龍尾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의외로 용미 뒤쪽은 가파르다
이곳을 오르려니 시작부터 기어야 했다.
기어오르다 보니 위로는 가시덤불이 얼굴을 찌르고
밑에서는 칡덩굴이 발을 감고
땀에 젖어 등산복은 무겁고
등산배낭은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지지 않고
산에 오를 때마다 생고생을 했음에도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오는 게 버릇이라 하겠지만
평탄한 길보다 오히려 성취감은 더 크다
발목을 돌돌 감고 있는 칡덩굴을 풀어내고 가시나무의 넝쿨의 끝을 찾아 걷어 내면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한발 한발
올라가면 어느새 또 칡덩굴이 자라는지 발목을 감는다
태양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달이 보인다.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도니" 돌고 돌아 "달인들 취하지
않으리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 없다
등산객들이 산기슭에 다 와서 조난 되는 이유가 이런 것이구나
다시 달을 보니 하현달이다
낮달은 푸른 하늘에 보인다.
"1924년 윤극영 님이 작사 작곡한
' 반달 '이 푸른 하늘에 뜬다" 라고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
계수 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 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태양이 눈부시게 비치는 푸른 강물에 떠있는 하얀 돛단배에
몸을 실었으니
내 마음만 여유 있게 다스리면
샛별을 찾아
이 맑은 날을 즐길 수 있으리!"
목적을 이루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오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하산할 수도 없으니 네 발로 기어서 오르고 세 발로 서서 오르자
겨우 산길 흔적이 보인다
낙엽으로 덥힌 희미한 산길은 중간중간 사라졌다가 다시 보인다. 내가 살길은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한 발짝 띄기도 힘들어 큰 숨 쉬며 허리를 펴니
무성한 잡목 잎사귀들 틈으로 새어 나오는 실낱같은 빛에 눈이 부신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이다.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한참을 올라가니 이제 칡덩굴도 가시덤불도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산길로 들어선다.
처음엔 제법 길이 있어 보였으나 이내 잡목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한동안 힘겹게 치고 올라가야 했다
황혼도 저물어 가니 어둑 해지고 추워지기 시작한다.
개밥바라기가 보이기 전에 사람을 봐야 한다.
나는 걸음에 호흡을 맞추며 앞과 내 발밑을 번갈아 보면서 길 따라 걷는다.
나무 그루터기(stump)에 앉아 쉬어 갈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마저 보이지 않는다.
맨땅에 퍼질러 앉아서 산세를 보니 옴빡한 것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山勢가 험하지도 않아 솔잎 긁어 등짐 져 간 흔적이 있을 듯 하나 없고
잡목만 우거져 나무꾼도 여기를 올 이유가 없겠다,
주능선은 아니지만 좌우가 툭 터진
7부 내지 8부 되는 지능선이겠다.
여기가 아무리 후하게 주도 높이가 300m 정도이다
아무래도 반경 100 m 안에서 왔다리 갔다리 깨춤을 춘 것 같다
왼쪽에서 황혼이 지기 시작한다
곧 어둠이 온다
저쪽이 서쪽이면~
나의 위치가 북동쪽인가 헷갈린다
사방을 모르겠다.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
정상에 오르는 것도, 길을 찾는 것도 미련을 두지 말고 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자.
十里無人響
山空春鳥啼
逢僧問前路
僧去路還迷
我連和尚都沒見着
산허리를 아래로 가로지르며 잡목 숲을 헤쳐 나가니 산길이 나타났다.
산길로 하산하기엔 너무 어두워 졌다.
다시 어림잡아 마음속에 좌표를 찍고 구르듯이 아래로 달렸다
발목 외에 상처는 문제 되지 않는다
물은 말랐지만 미역을 감고 누워도 될만한 너럭바위가 나타났다
반갑다. 긴 숨을 내쉬고 너럭바위에 짐을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서너 시간 물을 한 모금도
안 마셨구나" 마실 물도 없었지만
산속에서 없는 물 찾으면 호랭이 온다 했던가
산속의 어둠은 순식간에 왔지만
저 너머 마을의 자동 점멸 가로등 불빛은 서서히 어둠을 거두어 낸다
산기슭에 비닐하우스도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
물이 잘 흘려 내리도록 붓 도랑에서 살포를 들고 논의 물꼬를 보고 있는 농부를 보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하니 흘러가는 물도 떠 주면 공이 된다는 듯이
" 신법 마을이요" 한다.
내가 온 길을 대충 이야기하고 산 이름을 물으니 "하서산"이요
산소가 있는 산은 하서산이다.
"무안면 사무소에 갈려는데 어째야 됩니까" 하니
큰 길로 나가 버스를 타라고 한다.
큰 길까지 나가서 한참 기다렸는데 버스는 오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류장인 듯
한곳이 있어 가보니
그기에 낡은 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다. 하루에 두 번 운행한다.
걷기로 작정하고 지형을 살펴 면사무소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목이 말라 물보다는 시원한
냉 막걸리가 절실하다.
면사무소 옆에 전에 못 보던 가게에 파전, 막걸리 등이 쓰인 A 포 용지가 유리 창문에 붙어 있다
가계 문을 밀고 들어가니 상큼한 분위기였다.
술 파는 가계란 주모가 야물고
깔끔하지 못하면 가계 꼬락서니가 마구간과 진배없이 꾀죄죄한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주인장 ! 여기 파전하고 막걸리 한대 주세요"
한 사발 쭉 들이키고 깍뚜기 한 개를 깨무니 깍두기에 막걸리 향이 베어 코를 찌릿하게 한다.
냉 막걸리의 질쩍한 맛에
깍두기의 시원하고 달달한 맛이 보태지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깍두기를 좀 더 달라고 했다.
여기까지 온 사연을 듣고 있던 어디선가 본 듯한 주인은 김민과 관계를 묻는다.
"사촌 형 됩니다"
가지고 갈테니 막걸리 한 대 팻트병에 넣어 달라고 했다.
별도로 깍두기도 한 통 덤으로 주며 "집에 가서 맛있게 드세요"하며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띈다.
나는 파티를 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안 보이고
오지 말기를 바라는 사람만 보이는 기분이다.
무안 정류소에서 부산행 차표를 끊으니 많이 기다려야 했다.
할 수 없어 큰 집에 가서 술 가계 집 이야기를 하니
큰 엄마가 "너 누나 된다" 라고 한다.
"궂은일에는 일가만 한 이가 없다"라고 했는데 참말로 큰 일이다.
큰집의 기와집은 軺軒도 드나들 수 있도록 솟을대문이 있는 집이다.
술 도가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큰 부잣집 막내였다. 아버지가 동경에 유학 갈 정도였다
아버지는 박지호 교장, 대동병원 박영섭 원장 등과 교류했다.
큰 아버지는 면장도 했다. 그런데 욕심이 너무 많았다 . 再娶를
한 여자도 성격이 별로였다.
현재 큰 엄마다.
외갓집은 밀양 예림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외할아버지는 말을 타고
다녀닸는 집안의 막내가 엄마다.
엄마도 일본에서 여학교를 졸업했다
할아버지는 친일은 아니지만 일본과 다투며 살지는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항일을 했다
외삼촌이 일본 감옥에
계셨으니까.
이 두사람의 혼사는 축복 받는 혼사 였지만
고향을 떠날 때는 男負女戴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딸뿐인 박 면장이 길을 가다가 농로에서 고추를 내놓고 쉬를 하고 있는 애를 만났다.
"애야 요게 무엇인고" 고추를 톡 치며 말했다.
애가 열받아 말했다
" 시바!~ X 도 모르네, 면장이란게 "
지금은 사촌 형이 술 도가 자리인 무안 농협 맞은편에서 큰 슈퍼를 한다.
이성에 대한 그리움과는 또 다른 그리움이 고향이다.
어릴 때 평상에서 장독대에 아름답게 핀 분꽃을 보며
가족과 함께 저녁밥으로 된장찌게와 보리밥을 먹었다.
하지만 분꽃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가족의 웃음만큼 아름다울까
1933년 이동면과 하서면이 합하여 무안면이 되었다.
밀양시로부터 서쪽으로 14km 떨어진 중산간 지역이며 부곡온천과
인접하고 있다.
표충비각 →사명대사유적지→
서가정불교연수원
→ 대법사 → 부곡온천을 잇는 관광벨트화 사업으로 고가도로를 건설하고 있는데 몇 년간 매 그대로다
1915년 4월 27일
무안초등학교가 개학했다.
1947년 4월 17일
무안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66년 12월 9일 한국나노마이스터고가 개교했다.
표충각은 무안리에 조선시대의 충신 李彭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旌閭閣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표충각의 뒷 편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때면 땀을 흘리는 유명한 표충비가 있다.
무안리 향나무는 나무의 높이 1.5m,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가 1.1m이며,
樹冠은 고루 넓게 퍼져서 평평하다.
넓게 퍼진 곁가지를 지탱하기 위해서 받침대가 서있다
나무의 높이가 높은 것은 아니나 꼭대기가 평평한 수관이 멋있다.
이 나무는 1738년 사명대사의 5대 法孫인 南鵬禪師가 表忠碑를 이곳에 세우고
그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라리에 있는 사명대사의 생가지는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내 생가인 집은 삼간초가였고 별채가 한 채가 있는데 이를 지을 때의 기억인데
친척인가 한 사람이 지게를 내려 놓고
담배를 피우며 "아버지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한다
뭘 말하지 말라는지 "쉬고 있다는 것일까"아니면 "담배 피고 있다는 것일까 "
이 정도의 기억은 몇 살이면 가능할까 하고 이때의 내 나이를 가늠해 본다
삽짝에서 2m 정도 되는 길 건너 편에 조그만한 교회가 있었다.
내 나이가 몇 살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예배 중에 똥을 싸서
나도 모르는 사람이 집에 데려와 씻겨준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왜 혼자였을까.
엄마는 집에서 부른 나의이름은 "호야"였다 고한다
부르는 호칭에 걸맞지 않게 꼬쟁이를 사타쿠리에 끼고 거리를 질질 끌며 다니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20대 초에 친구인 영혜와 함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고향 집을 찾아 간 적이 있었다.
영혜와 함께 간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내가 태어난 곳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내 키보다 낮은 흙담 너머로 보이는 초가집 지붕이 씨커먼케 변했고 용마루가 비툴어져 있다.
무안리에 언제부턴가 벼농사가 없어 졌으니 볏짚도 구하기가 힘들겠다.
어쨌든 볏짚을 구해 이엉을 새로 올려야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겠다.
내가 사는 곳도 아닌데 애달프다.
뒤 켠 담 모퉁이에 비바람이 끝 친 후 떨어진 감 꽃을 주워 먹던 아련한 추억이 있는 감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한 칸 대청 좌우에 안방, 건넌방이 있고 건넌방 옆에는 사랑방, 안방 앞에는 부엌인데 전형적인 초가집이다.
내가 안방에서 부엌으로 떨어져 생긴 십자 모양의 콧등 흉터는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희미하게 보인다.
어릴 때는 이 십자모양의 흉터가 내게 스트레스였다.
아무리 돌팔이가 꿰맸더라도 하필이면 기독교를 상징하는 열 십자였을까.
나는 철들고 나를 치료한 돌팔이가 그리스도교 이단이라기 보다는 사이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진실과 관계 없는 것에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고 세월은 쌓이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 후에 새로 지은 별채에는 마루 앞에 유리창으로 된
미닫이문이 2개 달린 슬라브 집이다.
이 집 마당에서 햇볕이 시들해지면 맨드라미와 노란 분꽃이 피어있는 장독대 쪽으로
노란 병아리를 쫓아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그런데 그 당시의 마당이 이처럼 좁았나 싶다.
" 분꽃 피었다 저녁밥 준비해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나팔꽃과는 정반대다.
아버지가 무안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풍으로 교사가 무너져 버렸다.
이 사건이 고향을 떠나게 했다.
아버지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과 밀양읍내에 있는 '치과에 이빨 치료하러 갔는데' 무슨 까닭인지 그냥 돌아 왔다.
이때 부터 관리하지 않은 이빨은 평생 나를 괴롭혔다.
내가 몇 살에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방에서 기어나와 부엌에 떨어져 생긴 '코 등의 흉터'가 아직 선명하고
영혜와 함께 고향에 갔을 때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찿아 갈 수 있었고
형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새벽에 '엄마가 주먹밥을 만들던 것'이 희미하게 생각난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자다가 일어나 컴컴한 밤에
큰 집까지 '큰 소리로 울면서 가기도 했다'고 한다
여섯 살까지는 고향에서 살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누나가 몇 학년인지 모르겠으나 무안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
누나와 나는세 살 터울이고 누나가 장산 초교에서 졸업할 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나는 그때 장산 초교 3학년 이었으니
그 때는 셋 살쯤인것 같다.
셋 살이면 혼자서 놀 수 있다.
나는 운동장 철봉대에서 혼자 놀면서 누나가 수업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왔다.
동무들과 치고 받으면서 부닥쳐 가면서 철이 드는 것인데 나는 혼자서 노는 외톨이였다 .
평소 말이 없던 내가 이렇게 내 어린 시절에 대하여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니
영혜가 " 너는 어린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얼마나 크기에 남도 다 겪은 아쉬움을 그렇게 아쉬워 하느냐"
라고 안타까운 듯이 이야기 한다
"내 어린 시절의 아쉬움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고 너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 뿐이다."
이삿짐을 실은 차에서 뿜어 내는 연기와 발통에서 나는 마른 먼지가
덜컹덜컹 가는 트럭 뒤에 타고 있는 나를 덮어 씌운다 .
오는 도중 밥을 먹었는지
부모형제는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터 잡고 살 곳이 어디메쯤인지~
덜컹거리는 차 뒤 칸에서 피곤하니 잠이 들었다.
나는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들기도 했고 환상과 현실의 혼돈 속에 빠져 들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 했다
돌맹이로 비석치기를 했다
백발백중이다
부로숫골못에 강렬한 해빛을 받은 버드나무의 잎사귀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도깨비불 모습을 한
수묵화를 그려냈다
이 연못에 서식하는 왕잠자리 수컷은 자신만의 영역을 잡아놓고 순찰을 돈다.
고공으로 빠르게 나르고 경계심도 많아서 맨손으로 잡는 것은 어렵다
늦가을에 힘빠진 놈이 쉬고 있을 때
뒤뚱뒤뚱 걸어 엄지와 검지로 잡는다
잠자리채로 잡을려고 해도 배만 고프다
중국 병법에 있는 미인계를 본따
암컷을 실에 묶어 날리면 수컷이 날아와 짝 찍기 할 때 잡았다.
투망을 친다.잉어를 잡으려고
먹고살기위해 고향을 떠나 해운대구 반여동 으로 옮겨 졌다.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소달구지 덜컹대던 길/시냇물이 흘러내리던/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이런 노랫말 같은 고향이 있는 사람이 부럽다.꿈 속 에서라도 이런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던져 놓았던 휴대폰을 보니
"아빠 담 주 일요일은 바람 좀 쐬기로 하세요" 문자가 와 있다.
딸자식들에게 신경쓸 일이 없도록
해야 할텐데~
첫댓글 욱곤씨 글잘읽었소 읽다보니 반전의 연속, 고향에 대한 그리움 , 노년의 애잔함이 묻어나는구려~그대의 글이 58마당을 더욱풍성하게 한다오^^ 계속해서 좋은글 올려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