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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대환이 어느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일명 한예종이라고 불리는 대학에 합격 비화를 공개하며 고등학교 재학 당시 테스트한 IQ가 88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MC인 홍진경은 오대환에게 “한예종 출신으로 알고 있다. 한예종에 들어가려면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야 할 거 같은데, 의외로 IQ가 88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오대환은 “내가 한예종 입시 준비를 할 때만 해도 공부보다는 실기 비중이 더 높았다. 그래서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답했습니다. 이어 “아이큐 테스트는 고3 때 받았다. 난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런데 결과 공개 날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에 돌고래 친구’가 있다고 하시더다. 그래서 제가 막 웃었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그게 너야, 이 자식아! 나와!’라고 말씀하시며 혼내셨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오대환은 대학입시를 봤을 당시에 한예종을 연기학원정도로 오해했다고 합니다. 오대환은 “내가 연기 학원을 다녔는데 학원 선생님도 한예종을 잘 몰랐다. 그래서 한예종의 실기시험 일정이 제일 빠르니 경험 삼아 시험을 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이라 대학교가 아니라고도 하셨다”라고 털어놨습니다. “만약 학교 수준을 제대로 알고 긴장했다면 실력 발휘 못 했을 것”라며 합격 비결을 고백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배우 오대환은 “그래서 시험을 되게 편하게 봤다. 같이 대기실에서 연습하는 친구들을 보며 신기했던 게, 난 그냥 교복 차림으로 대본만 봤는데 다른 입시생들은 엄청 준비를 해왔더라. 내 눈엔 너무 잘해 보였다”라고 덧붙이자 MC인 윤종신은 “한예종의 가치를 몰랐기에 합격했던 것”이라고 말해서 모두에게 웃음을 안겼습니다. 결국 오대환은 쟁쟁했던 이들을 제치고 한예종에 최종 합격해서 고등학교에 알렸더니 “음악 선생님께서 ‘대견하다’며 저를 안아주시면서 한예종이 어느 정도 수준의 학교인지를 입에 거품을 무시면서 한 시간 정도 설명해 주셨다”며 그 이야기를 듣고 한예종 입학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오대환이라는 배우는 학교 수준이 어떤 지도 모르고 가치를 몰라봤던 곳을 우연히 시도했다가 합격을 얻게 되니 감격하고 기뻐서 학교를 다녔고 이로 인해 인생에 엄청난 보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선물로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그 예수님의 가치를 몰라보는, 얼마나 소중한 지 그 능력을 몰라보는 예수님 고향마을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린 시절부터 봐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부터 무시하였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얻고 의미있는 인생, 영원한 생명의 인생을 살게 되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소중함을 몰라본 이유, 첫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라는 편견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5, 56절입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오늘 본문을 보시면 나사렛 동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선포를 들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지혜가 어디서 나왔는 지 궁금해 합니다. 이런 놀라운 지혜에 대해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금 말씀을 풀이해 주는 사람이 ‘우리 동네에서 살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다.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이 곳에 살았던 어릴 때부터 우리 동네에서 살았던 이웃 사람 예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감동적인 복음, 진리의 말씀, 생명의 선포를 들을 때에도 더 큰 감동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데 감동도 받지 못하고 구세주라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사람들의 외모나 자격을 따지며 환경적 배경을 따지게 될 때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사도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을 택해서 놀라운 선교역사를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지만 이방인들을 반대하는 유대파 기독교인들로 인해 정말 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35절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시행하려는데 우리 시각적인 편견, 우리 고정관념에 차서 우리 사고체계가 꽉 막혀 있으면 잘못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UCLA대학 의대 교수가 곧 의학 과정을 끝내고 현지 병원에 나가 환자들을 만나게 될 학생들에게 마지막 특강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실제 의료행위 중 생길 의료적 판단이 미칠 결과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또 임신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음악의 지성 베토벤은 아버지는 매독 환자,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된 환경에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고 결국 그도 나중에 청각장애인이 되었지만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도 불후의 명곡을 작곡해서 후대에 남겼습니다. 무릇 우리 인간이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생각의 한계를 가지고 일들을 잘못 판단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할 때 나다나엘의 고정관념을 밝힙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이렇게 작은 고을 “시골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오고 구세주가 나오고 세상을 변화시킬 위대한 사람이 나올 수 있냐?”라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빌립에게 고백하자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그럼 와서 우리 선생님을 한 번 만나보고 이야기 나눠봐라. 그리고 옳지 않다면 그 때 거부하고 돌아가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아예 이건 아니다, 이 방법은 될 수 없다’라는 판단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시도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이미 실패할 것이라고 단정지을 때도 있습니다. ‘시도해 본 후에 아니다’라고 해도 늦지 않은데 미리 판단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우리는 특히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너무나 쉽게 합니다. 너무나 많이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어떤 일을 그르치는 잘못된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이 꼭 옳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의견이 나올 때, 정말 그 의견이 괜찮다고 생각될 때 내가 생각했던 방식이 아니라도 인정해 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고정관념, 우리 편견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마저 거부하는 그릇된 신앙이되지 않도록 고정관념, 편견에 매이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소중함을 몰라본 이유, 둘째는 공과 사의 판단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7절입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며 놀라운 권능까지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말씀도 권능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로 여기면서도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 방금 읽었던 본문의 말씀처럼 상황을 해석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받는데 자기 고향, 자기 친척, 자기 집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무리 권능이 있고 말씀의 큰 능력이 나타나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능력이 보여지는데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편하게 대하고 너무 쉬운 관계로 대하기에 존경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명인사가 가족들에게는 그냥 자녀, 배우자, 부모, 동기간으로만 대접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친구들 중 어떤 친구는 그냥 편하게 친구로만 대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는 복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간증을 말해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냥 친한 개인적 이야기만 할 뿐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개인적인 전화를 할 때와 목회적인 상담과 신앙적인 나눔을 할 때를 구분하며 평소에는 편하게 부르다가 공적인 만남이나 조금 격을 갖춰야 할 때 깍듯이 ‘목사님,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적인 대화나 모임, 공적인 대화나 모임에서 호칭도 구분하고 대화 내용도 구분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신앙적인 나눔이 가능하고 목회적인 상담을 해주곤 합니다. 하지만 너무 편하게 이름 부르며 대하는 친구는 신앙상담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기 정말 불편하고 그런 대화를 꺼내기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정말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완전히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듭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되는 마가복음 6장을 한 번 보십시오.
마가복음 6장 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은혜로운 삶, 복된 삶을 위해서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전에 대통령이 국무위원인 장관을 임명하기 위해 어느 대학교수를 장관후보로 지명해서 청문회를 받게 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 대학교수는 결국 청문회 후에 낙마하게 되었는데 국민정서와 맞지 않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일이 드러나서 낙마하게 되었습니다. 청문회 과정에 그 분이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교 경비와 한국연구재단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지원하는 해외세미나를 5년간 6차례 다녀온 적이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미국 하와이, 일본 오키나와, 스페인 바로셀로나 등 사실 교수의 전문 분야의 연구와 관련된 장소가 아닌 세계적인 관광지에 세미나를 갔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수 천만원의 경비지출이 문제였고 자녀들을 동행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한 야당의원은 “국가 예산으로 두 딸을 데리고 네 번이나 출장을 갔다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장관 자질이 없다…”라며 이 후보자를 질책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느끼신 모멸감, 배신감이 요한복음 4장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44~4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갈릴리로 가셨을 때에 그 곳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환영을 받았고 그 곳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사렛의 말씀사역과 권능의 기적이 갈릴리에서는 달랐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이나 예루살렘이나 가버나움이나 사마리아지역이나 동일한 말씀과 동일한 이적을 행하시는 구세주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나사렛은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들이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사적인 감정으로 예수님을 대했기에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고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과의 첫 만남부터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공적으로 만났기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따져보자면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유명한 사람, 너무나 뛰어난 인물, 너무나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사람을 사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굳이 우리에게 좋은 점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적으로 너무 편하게 대했기에 공적인 면에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교회의 중직자들, 영적인 교제를 해야 할 중요한 사람들을 너무 사적인 감정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적으로 잘 아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결국은 우리가 누려야 할 은혜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기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위에 너무나 뛰어난 영적 지도자, 너무나 영적인 은혜의 설교자, 너무나 영적인 지도력을 갖춘 귀한 목회자가 있는데 나와 사적인 교감이 있기에 그 능력을 무시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인 나눔을 풍성히 나누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모든 일에 공과 사를 잘 구분하여 은혜도 충만하고 세상사에도 바른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소중함을 몰라본 이유, 마지막 셋째는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고향이신 나사렛에 방문하여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그들은 참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냥 그들이 잘 아는 어떤 사람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만난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기를 ‘우리가 아는 예수가 어떻게 저렇게 뛰어난 식견을 가지게 되었고 어떻게 저렇게 신기한 기적을 행하는 것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 마음속에 ‘혹시 저 분은 인간이 아니고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해 볼만 할텐데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동네사람, 우리가 봐왔던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야라고 생각하니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사렛지역 사람들에게는 그런 예수님의 본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어릴 때부터 자신들 주위에서 보아왔던 모습에 한정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서도 어릴 적 예수님만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나님의 사역을 함께 했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정확한 뜻을 전해주시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셨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리고 귀한 음식을 준비해 놓아도 그 밥상을 걷어차면 못 먹는 것이고 그 밥상에 숟가락을 가져가서 떠먹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부어주셔도 거부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멸망의 길이 놓일 뿐 입니다.
마가복음 6장 5, 6절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조용히 전도하며 조용히 치유의 사역만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떠들썩할만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 신기하게 보여질 정도로 전도가 되지 않는 나사렛 땅을 경험하며 의아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들이 이상했을까요? 지금까지 본 것을 보고도 믿지 않으니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들은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믿을 것 같은데 믿지 않으니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상할 게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지옥불에 떨어진 부자는 천국에서 나사로와 함께 있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다시 세상을 돌려보내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려주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이제라도 바로 깨닫고 지옥에 오지 않을 것인데 자기 형제들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좀 막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16장 31절입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사탄의 지배를 받고 구원의 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며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 돌아와서 죽은 이후의 영적 세계에 대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줘도 믿을 사람은 그 말을 믿고 변화되지만 믿지 않을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전도하시는데 어떻게 전도가 되지 않고 기적을 행할 수 없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왜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안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할지라도 전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구원받을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을 전하셔도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예수님께서 살던 동네 나사렛 사람들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보여주셔도 전도가 되지 않는 나사렛 마을을 보며 ‘정말 복음 전도는 우리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님,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시며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이 계신데 왜 전도하는데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을 ‘안’ 하시는 것일까요? ‘못’ 하시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나사렛동네에서 보여주신 전도의 사역과 열매없는 권능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켜 예수믿도록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악한 모습 그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억지로 만드실 수는 있지만 그렇게 안하십니다. 그 분이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도하고 간증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여전히 문이 열리지 않는 상황에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안 하시는 일, 예수님도 포기하신 일을 우리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대로 열심히 살아가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믿음으로 살고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을 전하셔도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예수님 살던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도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대 우리 마을, 우리 가족을 찾아와 주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이 마을이 금방 별할 것이라는 생각, 우리 가족이 놀랍게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당장 예수님이 찾아오셔도 예수님을 배척할 것 같은 가족과 이웃이 우리 주변에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도 안되는 나사렛 마을을 보며 정말 복음전도는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햇수로 15년째 고주리 마을을 섬기며 복음사역을 감당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라는 느낌으로 요즘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렇지만 정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우리 주님까지도 배척당하시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시기에 여전히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우리 고주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여전히 복음을 전하면 언젠가는 이 사람들도 하나님앞에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역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이 땅을 품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믿게 되는 우리 주를 만나는 이 땅이 되기를 소망하며 여전히 복된 사역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