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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샘통신 229/0901]40년 전의 ‘대학성적표’ 유감
일요일 익산역에서 새마을호 환승 대기 중에 ‘솜리’에 사는 오래된 ‘여친’에게 전화를 하다. 요즘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와 컨디션이 좋지 않다하여 은근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집에 가는구나?” 반가운 목소리. “집? 그래. 지금 가는 데가 ‘나의 집’이지” 하며 웃었다. 나의 부재不在 속에도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아내가 사는 나의 집. 고향의 집도 나의 집이니 1가구 2주택인가? 흐흐.
오랜만에 단 둘이 저녁을 맛있게 먹고, 오래 된 부동산 서류를 뒤지는데, 툭 떨어진 게 나의 ‘대학성적표’였다<사진>. 아내에게 보이기도 민망할 정도의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여다보다. 모두 57과목 147학점 평점평균 2.94, 아아- 3점도 못넘었다니? 남우세스러웠다. 쪽은 많이 팔리지만 공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간신히 졸업했던 그 시절을 몇 수십년만에 회억回憶해본다. 유일한 A+가 ‘셰익스피어’라니,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영미소설, 영시 등 A학점이 모두 합해 7개에 불과. 참으로 가관이다. 대부분 B, 회화실습은 싸그리 C와 D이다.
영어만 10년을 배웠는데, 미국인만 보면 슬슬슬 뒤로 빠지고 입이 벙어리가 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구나. 전공필수 ‘영어회화’ 1학점(1학년때 포커를 치다 빵꾸가 났다)을 따지 못하면 졸업을 하지 못할 실정. 할 수 없이 1학기를 마치고 회화를 잘하는 친구와 함께 ‘짠돌이’ 원어민 선생의 가회동 하숙집을 찾아 점수를 구걸했다. 당신이 1학점을 주지 않으면 졸업을 못하게 되고 ‘농촌장학금’만을 받아온 나는 죽음이라고 친구에게 통역을 시켜, 수업만 들어오면 C는 주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히히. 웃긴다. 졸업논문이 '윌리엄 워즈워스의 자연론自然論'이다. 백퍼100% 벗긴 그 논문이 무슨 '영양가'가 있을까. 소가 웃을 일이다. 원래는 '월든'이라는 수필집으로 유명한 '헨리 D. 소로에게 미친 장자莊子의 사상'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중동무이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1980년 2월 졸업했으니 40년 전의 일. 나는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그렇지. 특이한 것은 라틴어 4학점이 모두 A이다. 그것도 서울교구장을 지내신 유명한 정의채 신부로부터 배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진리는 나의 빛veri lux tas mea’ ‘이 순간을 즐겨라carpe diem’ ‘운명적 사랑amor fati’ 등은 지금도 기억한다. 선택과목으로 ‘인도사상사’ ‘블교학특강’ ‘법철학’ ‘경제사’ 등이 눈에 띈다. 선택과목을 보니, 나의 젊은시절 지향指向한 학문영역을 엿보듯 했다. 스스로 선택한 과목들인지라 그나마 성적이 좀 나았다. 지금의 ‘전공’이랄 수 있는 ‘한국사’와 ‘국어강독’이 C와 D라니, 기가 찰 일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공부는 완전히 뒷전인 채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며, 나는 그 ‘빛나는 청춘’을 보낸 것일까? 거의, 별로 한 일이 없다. 의문이다. 수수께끼다. 우연케 40년 전의 성적표를 보며, 자괴감自愧感과 자책自責과 회한悔恨이 전신全身을 휘감아 돈다. 명색이 ‘문청文學靑年’이라도 되어 시 한 편, 소설 한 편이라도 남겼다면 말을 하지 않겠다. 방황彷徨을 심하게 한 것같지도 않은데, 왜 그랬을까? 고향에서는 우리 부모는 죽어라고 뼈빠지게 농사만 지어 ‘상아탑象牙塔’ 등록금 대기에 늘 허덕허덕하셨는데. 그 흔한 장학금 한번 받지 못하고 자신을 비웃듯 ‘농촌장학금’이라 낄낄대면서,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막걸리나 마셔가며 나는 무엇을 했을까?
지금도 생각난다. 명륜동 대명거리의 ‘4‧19’ 막걸리집. 잔술도 팔았는데 한잔에 50원이었던가? 혜화동에서 삼선교 넘어가는 양편 석벽의 동굴술집 ‘알타미라’와 ‘석굴암’. 제가 무슨 조선시대 선비라고 학교 후문 근처의 ‘옥류정’ 에피소드를 만들었을까? 아아- 술잔 기울리기가 무릇 기하였던가? 바둑 말고는 당구, 포커, 게임 등 잡기雜技도 할 줄 몰랐던 놈이 말이다. 그때 어울리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늙어가고 있을까? 고교시절 그랬듯, 스스로 왕따가 되어 개똥철학자처럼 학교를 다녔던 것일까? 하나도 그립지 않은 세월인가?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나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여자친구와 계룡산 동학사 데이트 약속이 있어 대전으로 향하던 1979년 10월 27일 아침, 학교 근처 친구집에서 잠을 자고 나오는데 정문에 대문짝만하게 써붙여진 ‘대통령 유고’라는 안내판 정도다.
아무것도 모르고, 미끄러지듯 나는 '6학년 4반'이다. 여기까지 왔다. 취업을 하고,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하여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고, 집을 사고, 어찌어찌 직장을 세 군데나 옮겨 다니며, 아들들을 결혼시키고, 알탕갈탕 정년퇴직을 하고, 40년만에 내가 태어난 고향집을 고쳐 귀향을 하고. 지금 여기에 섰다. 느지막이 쓰기 시작한 생활글들을 묶어 몇 권의 수필집을 내긴 했지만, 그게 뭐 별 것인가. 만약에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마지막 학점 취득을 위하여 나 대신 통역을 해준 ‘공부선수’(찬샘통신 224편 ‘33년만에 우리집에 온 친구야’ 참조) 친구처럼 미친 듯 공부를 하고 싶다. 그것이 영문학이래도 좋다. 아니, 영문학은 안된다. 한국사나 국어라면 몰라도. 무엇이든 대충대충, 전력투구全力投球해본 적이 없기에, 뒤늦은 반성反省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보다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 지금도 농담으로 말하는 ‘영문도 모르고 간 영문과’에는 대체 왜 간 것일까? 원래는 국문학과나 사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진학담당 선생님이 ‘두 과목은 원체 잘하니 영문과를 가라’는 한마디 때문이었다. 철이 없었고, 못나도 한참 못났다. 과외 아르바이트도 한 적이 없다. 남들은 학교 추천장 받아 종합상사, 금융권에 잘도 취직을 했건만, 나는 ‘미래’도 불투명한 채 군대를 가야 했다. 제대 후 찾은 학과 사무실엔 2년 전엔 쌓여 있던 추천장이 남아돌지 않았다. 내 힘으로 어떤 정보도 없이 취업을 해야 했다. 만약에 몇 달 내에 하지 않으면 부모님을 어찌 뵐 수가 있을까? 불 보듯 뻔한 ‘백수白手’ 예감에 제대 말년 서너 달 동안 ‘영어와 일반상식’을 바짝 공부한 덕분에 신문사 명함을 내밀 수 있었으니, 궁즉통窮則通이라더니, 죽으란 법은 없었나보다. 흐흐.
이제라도 계획을 세워 노후老後를 잘 살아야 할 일이다. 퇴직하면서 마음먹은 ‘버킷 리스트’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늘 “어떻게 이렇게나 많이 나이가 든 것인지 모르겠다. 한 순간이구나”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 30세와 당신의 할아버지 60세를 합친 세월을 훌쩍 넘어 94세로 건재하시니, 생각해 보면 ‘꿈같은 인생’이실 게다. 일장춘몽같은, 부나비 호접몽胡蝶夢같은 우리네 삶, 건강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보는 구월의 첫날 새벽의 일기다.
첫댓글 친구의 글속에서 정의채신부님을 기억하게 해주네요.
가톨릭대 총장님도 하셨지요
신부님께 좋은 이야기 청춘을 보내는 이야기
그분에게서 들었던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삶의 교과서가 됐었지요
뒤를 돌아보니 꽤많이 왔네요
오늘도 친구의 솔직한 글이 나를 돌아보게합니다
정말 나비의 꿈 속일지도 .....
유수같은 세월일세.
단, '하루가 짧으면 인생이 길다.'는 말에 의지하네. 혹여 하루가 길고 지루하다면 남은 생이 짧겠지?
계속 건승하시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