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66
8월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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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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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3ALbNdqB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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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많이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생각할수록 고마운 분이십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만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도 꾸미시고, 다양한 동물·식물도 함께 보내셨습니다. 우리 재미있으라고 웃기게 생긴 하마나 원숭이도 만드시고, 예쁜 강아지와 고양이도 창조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절대로 그냥 파견하지 않으셨습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난 잠재력, 폭발적인 에너지와 기적을 일궈내는 역량도 함께 담아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인간 각자는 값진 보석들로 가득한 보물창고 같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탈렌트들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 한 가지는, 많은 경우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도 그 좋은 가치들을 발견조차 못하고 사장시키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만 해도 돌아보니 별로 의미 없고 부질없는 일에 소모한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시간을 좀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곳에 사용했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막심합니다.
늦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탈렌트는 무엇인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탈렌트를 찾아내서 하느님과 세상, 동료 인간의 선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 그리스도교 사상과 교의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만큼 큰 기여를 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교부 가운데 교부요, 탁월한 교회 학자, 불멸의 명저의 저자로서 교회를 빛낸 그이지만, 젊은 시절 겪어야만 했던 흑역사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단에 깊이 빠져 들어갔고,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어둠과 부끄러움을 그 어떤 가감도 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동시에 다루기 힘든 욕망에 사로잡힌 포로였습니다. 저는 한때 그릇된 방법으로 행복을 얻으려 했습니다. 피조물한테서 피조물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랬습니다. 결국 그 결과는 슬픔이요 두려움이며 불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무치는 회심과 성찰 끝에 마침내 큰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그가 교회 역사 안에 큰 별이 되기까지 아무런 노력 없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으로 거듭나기 위한 불굴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참된 행복이란 주님 당신 안에서, 당신을 위해, 당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행복이며, 그 외에 다른 행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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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7IUpvkDhL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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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나의 능력이 얼마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으실까?>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개발하거나 성장시키지 않고 게으르게 살다가 온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탈렌트는 ‘재능’입니다. 나의 재능은 어느 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요? 나의 재능은 내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나에게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자아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면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먼저 믿어주었고 내가 그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습니다. 사람은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생명을 유지할 능력도 잃게 됩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인 이춘재 씨가 잡힐 때까지 2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윤성여 씨입니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보상금을 도박으로 다 날렸습니다. 혼자라도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고 성여 씨는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이 사건 때문에 많은 경찰 간부들이 해직을 당하던 터라 경찰들도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여 씨를 고문하여 자신들이 써 놓은 대로 읽고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특히 3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을 때는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백을 시키고 무기징역을 받게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그런 죄질로 들어온 사람은 집단 구타와 따돌림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그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세상에 남겨진 그는 살 힘도 잃었습니다. 사는 것도 누군가가 기대해 주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그를 믿어준 생명의 은인이 나타납니다. 박종덕 교정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는 범죄 자체를 전면으로 그것도 일관되게 부정하는 수용자는 처음 보았다고 하며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끝까지 살아야 한다. 여기서 살아남는 길은 너의 인내심이다.”
그는 그렇게 감옥에서 20년을 버텼고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윤성여 씨는 박종덕 씨를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감사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더 힘들다고 합니다. 친척들도 왜 왔느냐며 그를 문전박대하듯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여 씨 때문에 친척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박종덕 씨의 믿음과 또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나는 이렇게 내가 믿어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가 살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교만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박지성 씨도 좌절에 빠져있을 때 큰 선수가 될 것이라는 히딩크의 그 한 마디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믿음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믿으려 합니다. 하지만 잘 믿어야 합니다. 뱀과 같은 이들을 믿었다가는 오히려 삶을 망치고 맙니다 뱀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뱀과 같이 타인을 먹는 것만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마이클 타이슨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감옥에서 살다시피 한 그의 젊은 시절에 그를 알아보고 세계 챔피언으로 키운 코치가 ‘커스 다마토’였습니다. 타이슨은 말합니다. “커스는 나 자신을 믿게끔 도와주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목수건 오타쿠이건 말이다. 나도 이제 나 자신을 믿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의 영예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커스 다마토가 죽고 ‘돈 킹’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 킹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돈 킹은 타이슨을 그저 자신의 돈벌이로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타이슨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범죄로 감옥 생활을 하고 링은 즐기는 곳이 아닌 물어뜯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점점 망하게되어 많이 번 돈을 다 잃고 파산신청까지 하게 됩니다.
커스 다마토도 자신을 믿게 했고 돈 킹도 자신을 믿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 부족합니다. 자신을 믿게 만든 사람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믿음을 준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고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탈렌트를 가진 자는 그 탈렌트에 다른 탈렌트를 더하게 됩니다. 그러나 돈 킹처럼 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믿고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모든 능력을 잃게 됩니다.
능력을 키우기 위해 나는 분명 누군가 한 명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를 어떻게 단련시키는지 보면 됩니다. 돈 킹은 타이슨을 방탕한 생활로 길들였습니다. 그러나 커스 다마토는 그를 혹독한 훈련으로 길들였습니다. 사람은 방탕해지면 모든 능력을 잃습니다. 오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게으름’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받아들였다면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커스 다마토는 말합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잠재적인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 마음 깊이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다. 스스로를 믿을만한 이유를 줘야 한다. 스스로에게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믿은 후의 육체적 훈련은 쉽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시며 우리가 당신 아드님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옥훈련을 거칠 힘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지 않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맙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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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4-30 : 탈렌트의 비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탈렌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누구를 도와주는 일일 수도 있고, 돈이나 가르침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
집주인은 만물의 주님이신 창조주이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산을 맡기신다. 이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적 선물을 주신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맡겼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액수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탈렌트를 받았다고 결코 적은 액수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한 탈렌트도 엄청나게 큰돈이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 탈렌트를 이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리고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이와 같이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의 돈을 땅에 묻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세속적인 것에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영적인 이익을 구하는 데 쓰지 않고, 세상일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오랜 뒤에”(19절)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된다. 첫째 종은 자신감에 차서 주인에게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20절) 주인은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절) 이 말씀은 온갖 축복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두 탈렌트를 더 벌은 사람에게도 같은 칭찬과과 함께 영원한 보상으로 인도되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물러가서 “탈렌트를 땅에 숨겼다.”(18절) 이 종은 자신의 것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볼 마음이 없었다. 교회 안에도 게으른 삶을 살면서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탈렌트를 주인에게 돌려주려하자,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26절) 하면서 종을 꾸짖은 다음, 그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고 한다.
사랑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선물들도 받는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가 받은 것처럼 보이는 선물들마저 빼앗긴다. 자기 능력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르며,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빼앗겨도 빼앗긴 줄도 모르게 된다. 그 때에 주인은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30절)하고 선언할 것이다. 우리의 탈렌트를 늘리려 노력하는 삶을 살도록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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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22세에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는데, 이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이라는 말을 발견하고는, 평생 지혜를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387년 세례를 받았으나 신앙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성인이 바로 그 유명한 “집어 읽어라.”(Tolle, Lege.)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3-14).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 생활에 전념합니다.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은 뒤 히포의 주교로서 공동체를 돌보고, 이단과 싸우며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이루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오, 그토록 오래되었으면서도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제가 당신을 너무나도 늦게 사랑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 저는 밖에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 저는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사로잡혀 당신을 멀리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 저는 당신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으로 인하여 허기지고, 갈증이 납니다. 당신은 저를 건드리셨으며, 이제 저는 당신께서 주신 평화를 위하여 맹렬히 불타오릅니다”(『고백록』). “모든 회개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회심하기 전까지 밖에서 살았는데, 하느님께서 그를 내면으로 끌어들이셨습니다”(모리스 젱델, 『감탄과 가난』, 28-29면).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찾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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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관 주방을 도와주시는 자매님이 1주일 휴가를 갔습니다. 자매님이 있을 때는 냉장고 안이 깔끔했습니다. 그릇도 정리정돈이 잘 되었습니다. 반찬도 정갈하게 담겨있었습니다. 아침에 냉장고를 열면 꺼내서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면서 냉장고의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그릇들이 여기저기 옮겨져 있었습니다. 반찬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냉장고를 열면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자매님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자매님이 안 계시니 그 빈자리가 컸습니다. 이제 곧 자매님이 돌아오실 것이고, 그러면 냉장고도 전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변할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답을 구하는 방식이 2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뉴턴의 역학입니다. 유명한 ‘F = ma’라는 공식입니다. 뉴턴은 그 공식으로 지구와 우주의 움직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가장 빠르지 않은 길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그런 방식으로 답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인공지능도 그런 방식으로 답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은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맡겨준 재물을 잘 관리해서 많은 이익을 낸 사람은 그만큼의 보상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맡겨준 재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더 잘 관리하는 사람에게 재물을 맡긴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성과를 내면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능력과 성과에 대한 보상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철학이며, 기준입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기회가 균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며, 결과가 정의로운’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출발선이 다른 경기, 금수저와 흙수저’의 논란이 생기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공존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위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복지 제도입니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임대주택을 공급합니다.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제도를 마련합니다. 성과에 따른 보상을 더불어 사는 이웃과 나눌 수 있도록 합니다. 자본주의와 복지제도가 만나면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건강과 신앙에도 해당이 됩니다. 적당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 이웃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삶이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지나친 음주를 하는 사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게임과 노름에 빠진 사람, 자신만 알고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삶이 고달프고, 불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걱정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늘 감사하는 사람,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신앙생활에도 사랑의 꽃이 피고, 믿음이 열매 맺습니다. 시련 중에도 희망의 등불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독서를 자주하고, 미사참례를 꾸준히 하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단체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는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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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사랑의 무게: 제대로 사랑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성실한 종은 주인이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니다. 그것이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말입니다. 나아가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종은 주인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합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는 과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일상의 작고 사소한 것을 무시하며 자신이 받은 사랑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20여년 전, 어느 젊은 아가씨가 맞선을 보던 날이었습니다. 남자가 괜찮아 보였고 간단히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한 후,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하고 함께 남자의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차가 조금 달리자 갑자기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흠짓 놀란 여자는 ‘혹시 이 남자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 아냐! 오늘 첫 만남인데, 이 남자 너무 엉큼한 것 아냐!'
긴장과 걱정 가운데 두려운 마음으로 여자가 소리쳤습니다.
“갑자기 문은 왜 닫는 거예요! 이러시면 안돼요!”
그러자 그 남자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 이 차는 50킬로가 넘으면 자동으로 문이 닫혀요!”
그러나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뭐라구요! 난 50킬로가 안돼요, 48킬로라구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요즘이야 대부분의 자동차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자동으로 문이 바로 닫히지만, 예전에 이 기능을 잘 몰랐던 여자는 시속 50km/h와 자신의 몸무게를 혼동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도 나도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날, “진정 우리의 영적 무게는 어떠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의 진정한 무게는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Pondus meum amor meus).”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 영혼의 무게는 커지고 구원에 이르는 속도는 가속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향해 달려갈 때, 세상으로부터 가벼워지고 우리 영혼은 충만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초기의 인생은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쫓으며 그것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우리가 기념한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어린 기도와 암브로시오 성인의 지혜는 그가 세상으로부터 가벼워지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안에서 충만한 하느님의 사랑의 무게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아우구스딩 성인은 자신의 회개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성인도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어떤 큰 죄를 지었던 죄인이라도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교회의 오랜 진리를 몸소 보여 준 인물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세상과 이교도를 위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그가 가진 달란트를 통해 1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졌고 그 영혼은 겸손을 통해 영적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겸손을 무엇보다 강조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나의 영혼의 무게는 어떠합니까? 지금 나의 사랑의 무게는 어떠합니까? 주인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예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을 땅에 묻어 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축일을 맞아 세상에 대해 좀 더 가벼워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달려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다짐했으면 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향해 신명나게 달려 가게 될 것입니다. 내려 놓으면 내려 놓을수록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향해 더 가볍게 달려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세상의 것을 내려 놓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었듯이, 오늘도 세상의 걱정을 주님께 내어 맡기고 작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며 사랑의 삶, 나눔의 삶을 통해 1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 가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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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영창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 이야기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각각 맡겼습니다.
탈렌트는 그 시대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입니다. 한 탈렌트는 일용직 근로자 한 사람이 20년 동안 노동하여 받는 품삯에 해당하는 거액입니다. 따라서 다섯 탈렌트는 근로자 한 사람이 백 년 동안 일하여야만 받을 수 있는 큰 금액입니다.
비천한 종에게 그런 거액의 돈을 맡긴다는 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각각 그것을 값지게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 혹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자기가 받은 것을 묻어두었습니다. 그는 받은 탈렌트를 활용하지 않고 자기의 미래를 위해 안전하게 보관하였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돌아와서 셈을 밝힙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값지게 활용하였다고 주인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불행을 당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것을 값지게 활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은 종들과 셈을 하지만, 종에게 나누어주었던 재산과 그 종이 벌어들인 재산을 회수하지는 않습니다.
주인은 각각의 종들이 받은 것을 내어주고 쏟아서 값지게 활용해 줄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값지게 활용한 종을 축복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받은 것을 베풀지 않고 숨겨두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비난과 더불어, 받았던 것마저 빼앗겼습니다. 주인이 공짜로 베풀었듯이, 받은 종도 베풀어서 값지게 활용해야 하는데도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에게 다양한 재능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각자에게 맞게 탈렌트를 받았습니다. 누구는 다섯 탈렌트를, 누구는 두 탈렌트를, 또 누구는 한 탈렌트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받은 탈렌트를 값지게 활용할 일만 남았습니다.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적게 받음을 탓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경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가 가진 몫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 몫을 불리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주인의 뜻을 지키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는 종의 태도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주인은 더 큰 몫의 일을 맡길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탈렌트를 나눈다는 것은 어리석고 손해 보는 행동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나누기보다는 다른 이들과 비교에서 그들보다 뛰어난 몫으로 그들을 내리 누르고, 자랑하려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삶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산다고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직업의 귀천이 없고, 재산의 많고 적음을 넘어서, 모두가 나누며 어울려 사는 조화의 세상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을 이루려 노력합시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과 능력을 나누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더욱 하느님의 사람으로 풍요롭게 사는 방법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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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비교는 불행을, 감사는 행복을...>
오늘 복음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 중에서 탈렌트의 비유(25,14-30)에 해당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24,44)는 말씀에 따라 종말비유의 특징을 ‘늘 깨어 준비함’으로 규정하였다.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종말의 시간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고,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종말 후에 세워질 신국(神國),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불시에 들이닥칠 종말을 깨어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종말로 시작되는 하느님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살아 있는 동안에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으로서 연중시기에 듣게 되는 마지막 복음이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오늘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행적과 가르침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묵상해 왔다.
이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한해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카복음(4,16-21,36)을 평일미사 복음으로 묵상하게 될 것이다.
탈렌트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많은 종들을 부리는 아주 부자가 틀림없다. 주인은 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자의 능력대로 재산을 맡긴다.
루카복음은 금화의 비유(19,11-27)에서 열 명의 종에게 각각 금화 한 개씩(100 데나리온)을 맡기는데 비하여 마태오복음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품삯에 해당하니 한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이다.
따라서 세 명의 종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30,000 데나리온), 두 탈렌트(18,000 데나리온), 한 탈렌트(6,000 데나리온)를 받는다. 그리고 주인은 떠났다.
종들에게 이 많은 돈을 맡기면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고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다. 따라서 맡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종들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주인이 떠나간 후에 종들은 각기 받은 탈렌트로 첫째와 둘째는 배가(倍加)시켰고, 셋째는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 느닷없이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셈을 밝히게 된다. 셈의 결과는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
탤런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종말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깨어 기다리는 것’이다. 초기 교회가 당면한 ‘재림지체 현상’을 염두에 두고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와의 맥락에서 달란트의 비유를 묵상하여야 한다.
출타한 주인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꼭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 사이의 긴장감은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믿음의 마음을 굳건히 하고, 목적의식을 뚜렷이 가지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두 번째 교훈이 들어 있다. 비유가 주는 둘째 교훈은 각자가 받은 탈렌트(Talent)를 종말의 시기까지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그릇에 맞게 능력을 주셨다. 비유에서 보듯이 받은 능력의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받은 것을 그냥 묻어두어서도 안 된다.
‘얼마나 많은’ 능력보다는 많던 적던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불행은 남과의 비교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듯이 양을 가지고 남의 것과 비교하는 순간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반대로 양에 관계없이 자기에게 맡겨진 능력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사용한다면 여기서 인간의 행복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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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프랑스 루이 왕 시대에 가난한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헐어빠진 깔개에 공과 칼을 말아서 겨드랑이에 끼고 저녁도 굶은 채 잘 만한 헛간을 찾아 걸어가던 그는 같은 길을 걷는 수도자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수도자는 바르나베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그의 순박한 마음에 감동되어 '마음이 깨끗한 사람'임을 알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르나베 친구,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소." 이리하여 바르나베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들어간 수도원에는 각자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지식을 다해 성모님께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박식한 모리스 수사는 글을 독피지에 옮겨 쓰고 일렉산드로 수사는 거기에 아름다운 세밀화를 그려 넣으며 마르보드 수사는 쉬지 않고 석상을 깎고 있어서 수염과 눈썹, 머리칼이 온통 먼지로 하얗게 뒤덮여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는 또한 시인들도 있어서 성모님을 찬미하는 송가나 산문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투어 성모님을 찬송하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쌓이는 것을 보고 바르나베는 자신이 단순하고 무지한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바르나베는 기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성당으로 달려가더니 한 시간 이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도 또 성당에 갔습니다. 이때부터 매일 성당이 비어 있는 시간이면 바르나베는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수도원장이 고참수사를 데리고 문틈으로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르나베 수사는 성모님 제단 앞에 거꾸로 서서 허공에 쳐든 발을 여섯 개의 구리공과 열두 개의 칼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가 분개하여 그를 끌어내려 할 때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제단에서 내려와 푸른 옷자락으로 곡예사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곡예사의 봉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의 가르침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기 분수에 맞는 달란트를 받았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겼습니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마태25,15) 떠났지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얼마 뒤에 돌아온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여 더 많은 달란트를 벌어들인 두 하인을 보고 기뻐하며 말합니다.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나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마태25,25)한 종에게는 호통을 치며 화를 내지요.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25,26-30)
그렇습니다. 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걸맞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는 왜 다섯 달란트를 주고 두 달란트를 주며, 또 한 달란트를 주었느냐고 비교할 필요가 없지요. 받은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여 성실한 결과를 내놓는다면 하느님께서는 더 큰 상급으로 우리를 격려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달란트는 지능, 용모, 건강, 감성 등 참으로 다양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잊고 왜 남보다 지능이 떨어지며, 용모가 뒤쳐지는지, 또 재물이 넉넉지 않는지 남과 비교하며 불평을 하지요. 그러나 비교하기보다는 남과 다른 재능을 받은 만큼 부지런히 잘 활용하여 개발해 나가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에디슨은 이런 말을 했지요. 역시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얼마나 많이 쌓고 벌었느냐가 아니라 가진 재능을 얼마나 성실하게 잘 활용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성실히 노력한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겠지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또 묵상할 것은 우리는 마치 내가 만든 재능에 내가 잘나서 내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단지 그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도대체 누가 여러분을 남보다 낫다고 보아줍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4,7)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기보다 하느님의 관리인입니다. 관리인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주인인 하느님께 대한 충성이지요. “관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1코린4,2)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이나 건강, 자녀 등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종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자 받은 재능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관리인에 지나지 않다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산다면 집착에서 오는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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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믿음의 표시’인 이 달란트는 주인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에 따르는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쓰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선물은 이미 맺혀진 열매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자돈과 같이 씨앗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와 셈을 할 때에 선물에 따라서 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어떻게 썼는지, 곧 그 소명을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따라 대가를 지불합니다. 결국, 선물에 따른 응답이 바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경기의 규칙인 셈입니다.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6)
사실,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곧 비워진 만큼만 받게 됩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어야 비워지기에, 결국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믿으셨고, 믿으셨기에 능력에 따라 충분한 선물(은총)을 주셨고, 그 선물을 통해 하늘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선물을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쓸 때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사랑,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응답하여 충성을 바치는 일’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그런데, 은총은 순전히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은총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충성에 달려있다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은총’과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은총 그 자체보다도, 은총을 실현하는데 따르는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아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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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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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25,29)
<은총에 은총을 입자!>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을 보시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조건 없이 주어진 은총입니다. 이를 '생명은총(상존은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상존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또 하나의 은총이 있는데, 도움의 은총(조력은총)입니다. 우리 안에 늘 머물러 있는 은총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조력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탈렌트의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 조건 없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이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공동선과 공동이익을 위해 더 쓰여지고 활용되어져서 은총에 은총을 더 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고,
이 은총이 나만을 위한 은총에 머물러 있지 않고, 너를 위한 은총,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은총으로 머물러 있는지 한번 각자의 모습을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한 때 방탕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다가, 어머니 모니카와 암브로시오 주교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완전한 회개로 돌아선 성 아우구스티노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과 주보 축일을 맞이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고백록)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늦게서야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났습니다. 33세 때 세례를 받고, 이후 사제와 주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에 충실했습니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주어진 은총에 충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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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
마태오 25,14-30 (탈렌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하늘나라>
하느님께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늘 일하십니다
사람이
사명을 다합니다
사명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은
늘 일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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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무엇인가를 배울 때 따라오는 어려움은 꼭 있습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남들 앞에서 멋지게 연주하는 모습만을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왼손 손가락 끝에 딱딱한 굳은살이 잡히지 않고서는 멋진 연주는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기타 배우면서 이런 굳은살이 잡히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기타만이 아닙니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에는 멋지게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수영 연습을 하며 그렇게 많이 물을 먹게 되리라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자전거 배울 때도 넘어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 자전거 배울 때는 초보자 티를 팍팍 내면서 모두 다 넘어집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되기 싫은 모습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되고자 하는 모습 자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되기 싫은 모습은 전혀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되기 싫은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되고 싶은 모습도 될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한 과정입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이라면 고통과 시련도 참아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성장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능력에 따라서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로 배분합니다. 그리고 오랜 뒤에 주인이 와서 종들과 셈을 하게 되지요. 모두 두 배로 탈렌트를 불렸지만, 한 탈렌트를 받았던 종은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받은 돈의 두 배로 탈렌트를 가져왔지만, 이 종만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은 채 한 탈렌트만을 가지고 옵니다. 탈렌트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던 두 사람의 종과 달리,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현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인의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나눠줬던 이유는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라는 것이 아니라, 탈렌트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탈렌트는 결국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종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능력들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다섯 배, 두 배로 키우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받은 능력마저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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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도록 되어 있는 몸>
덴마크 건축가 얀 겔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꽃밭을 향해 배치되어 꽃을 볼 수 있는 벤치와 거리를 향해 배치되어 걸어 다니는 사람을 구경할 수 있는 벤치 중에서 어느 쪽 벤치에 더 많은 사람이 앉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거리를 향해 배치된 벤치에 앉은 사람이 꽃을 볼 수 있는 벤치보다 10배 더 많았습니다. 다른 조건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겠지만, 10배의 차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게 끌린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사람 많은 것에 답답함을 느껴서 은퇴 후 귀농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되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연보다 사람 자체에 끌립니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도 함께 살기 위한 덕목이었습니다. 즉,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본성을 따르지 않고 혼자만 잘살려고 합니까? 우리 몸은 함께 살도록 되어 있음을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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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인과 함께 기쁨을>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기반으로 나의 노력을 더하여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를 기대만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 합리화를 꾀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투덜댈 여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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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이 됩시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자 과제요, 평생이자 영원의 구원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좋은 점도 많습니다. 자연이 살아나 공기가 깨끗해지니 올해 가을 풀벌레 찬미 소리는 유난히 맑고 영롱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자랑은 아름다운 전례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 예수님과 성인들의 아름다움, 교회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전례의 아름다움입니다. 오늘 성 아우구스티노 기념일, 성인의 삶을 요약하는 아침성무일도 찬미가도 아름다웠고, 즈키르야 후렴도 참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주여,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하소서. 당신 안에 쉬게 될 때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온치 못하리이다.”
성인이 됩시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자 과제요, 평생이자 영원의 구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으로 불림 받고 있으며 사실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은 우리들이요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삶의 궁극 목표요 바로 우리의 성소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참나의 평범한 성인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사는 이가 바로 성인입니다. 이래서 보고 배우라 계속되는 성인 축일입니다. 성인을 기리고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 분발하여 성인이 되라고 자극하는 성인 축일입니다.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자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참 보물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답입니다. 성인들이 계시기에 살 희망이, 의욕이 샘솟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어제는 모니카 성녀의 기념일이었고 오늘은 성녀의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념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모자 성인들입니다. 성녀 모니카는 56년을 살았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76년을 살았고, 모전자전 두분 다 산 햇수의 양에 상관없이 하루하루 참 치열熾熱하게 100% 삶을 사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감동적인 회심 과정과 이후 삶에 대해 고백록에 근거하여 간략히 소개합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 왜 당장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내 추루함이 끝장나지 않습니까?’ 탄식하는 중, 성인은 난데없이 이웃집에서 어린애들이 부르는 동요를 듣는다. “집어라, 읽어라!”(Tolle,lege). 그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고서 벌떡 일어나 성서를 펴들었을 때 한 눈에 들어온 것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 육신의 일을 하지 마십시오.”
더 읽을 마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마치 평정의 빛이 성인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버렸다.
이후 오로지 성인은 진리의 연인이자 하느님의 종으로서 살아간다. 약혼을 파기하고 황실 수사학교직을 사퇴하고, 밀라노로 돌아와서 387년 부활전야(4월24일 밤)에 세례를 받고 밀라노늘 떠나 고향 아프리카로 향한다. 395년에는 나이 44세에 히포 주교로 서품되어 430년 죽기까지 이후 35년간 주교로서 활동한다.
418년 한 해의 기록만 보아도 말을 타고 무려 2천 킬로를 여행할 정도로 동분서주했다. 참으로 이런 분주한 사목활동중에 그 많은 불후의 저술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의 기적이다. 이처럼 치열히 하루하루 살았다는 반증이다.-
어제 ‘열 처녀의 하늘 나라 비유’에 이어 오늘은 ‘탈렌트의 하늘 나라 비유’입니다. 기본 가르침은 분명 하나입니다. 바로 하루하루 “깨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선물인 탈렌트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활용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 심판을 상징하는 듯 받은 탈렌트를 주인과 셈하는 장면이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 받은 이도 성과의 양과는 상관없이 똑같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땅속에 묻어 사장시켜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바치니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몰아 세웁니다. 참으로 받은 탈렌트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무기력하게 아까운 인생 탕진해온 이들을 상징합니다. 모험심의 도전과 용기가 없었고 스스로 자초한 멸망의 심판입니다. 이어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끊임없이 제 탈렌트를 활용하는 자는 날로 풍요로운 영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참 귀한 인생 진리를 배웁니다. 사람마다 받은 재능인 탈렌트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받은 탈렌트는 순전히 주님의 선물이니 교만이 아닌 겸손해야 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장시키지 말고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는 결과의 양이 아니라 결과의 질입니다. 제 받은 탈렌트의 페이스대로 최선을 다하며 도중하차 하지 말고 완주하면 됩니다. 꼴찌가 들어올 때 까지 하늘 나라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는 등수가 없고 절대평가의 결과 끝까지 제 페이스대로 뛰며 제 탈렌트를 활용한 이들은 모두가 1등입니다. 넘어져도 자포자기 절망하지 말고 곧장 일어나 끝까지 뛰어 골인하면 구원입니다. 얼마전 주님의 천사가 엘리야 예언자에게 한 열왕기 상권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19,7)
일어나 다시 먹고 힘을 내어 제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마침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했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모든 것이 네가 아닌 하느님께 달린 듯이 모든 일을 행하라. 그리고 모든 것이 하느님이 아닌 너에게 달린 듯이 모든 일을 행하라.”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린 듯이 최선을 다하는 ‘겸손’을,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듯이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 서로의 탈렌트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갖거나 열등감을 갖는 일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보완하라 있는 각자의 탈렌트이니 서로의 탈렌트에 질투는 커녕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 공동생활의 풍요로운 은혜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아 다섯 탈렌트를 남긴 이들은 오늘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성인들이요 두 탈렌트를 받아 두 탈렌트를 남긴 이들 역시 평범한 성인들입니다. 한 탈렌트에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한 탈렌트를 남겼다면 이들 또한 성인이 됐을 것입니다. 비록 최대한 탈렌트를 활용했지만 이익을 남기지 못한 손해 인생이라도 탈렌트를 사장했던 이들 보다는 이들을 높이 평가하시며 그 실패는 하느님 친히 보완해 주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함으로 형제애를 돈독히 하고 묵묵히 책임을 다할 것을 권고합니다.
“더욱더 그렇게 형제애를 실천하고, 여러분에게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제자리에서 제몫의 탈렌트를 잘 활용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꽃이 없듯이 똑같은 사람도 성인도 없습니다. 다 크기와 모양, 색깔과 향기가 다른 고유의 꽃이듯 사람도 성인도 그러합니다. 복음의 주인이 상징하는 바 주님입니다. 중요한 것은 탈렌트를 받은 이들의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인생 성패를 좌우합니다. 다섯 탈렌트를 남긴 사람, 두 탈렌트를 남긴 사람, 모두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사랑했던 성인입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은 주님께 대한 신뢰도 사랑도 없었기에 삶의 열정도 의욕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바로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입니다. 주님께 받은 내 고유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면 누구나 1등의 성인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자 과제요, 평생이자 영원의 구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지난 하루 내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했는지 손익을 계산하며 주님께 셈바치는 시간이자 주님께 오늘 하루의 삶에 필요한 은총을 가득 받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셈바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살 때 마지막 셈 바치는 죽음의 날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인 기념일, 아름다운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 성인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게 하셨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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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2021년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기 다른 양의 탈렌트를 맡기고 길을 떠납니다. 기준은 "각자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출중한 종에게 더 많이 맡겼는지, 아니면 역으로 능력이 부실한 종에게 더 많이 맡겼는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지고 그저 결과를 보고 짐작할 따름입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2)
다섯 탈렌트를 가지고 다섯 탈렌트를 더 번 이와, 두 탈렌트를 가지고 두 탈렌트를 더 번 이는 주인에게 이처럼 칭찬을 받습니다. 가장 큰 보상은 물질적인 것보다 주인의 인정, 그리고 주인과 누리는 "기쁨"입니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 25,25)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내민 다른 한 종의 말이 상당히 싸늘하게 들립니다. 물리적인 수량으로 은총을 가늠하는데 익숙한 이에게는 그가 자기를 과소평가한 주인에게 서운해서 저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할지 모르지만, 그는 "두려운 나머지" 그렇게 했다고 제 입으로 이유를 말합니다.
앞서 칭찬을 받은 두 종과 나머지 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받은 만큼의 탈렌트를 더 벌어 기쁘게 주인에게 돌려드린 두 종은 주인과 자기들 사이에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고, 나머지 종에게서는 그냥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식의 단절이 느껴집니다.
먼저의 두 종은 자신들이 주인에 속해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성을 느낍니다. 그래서 맡겨주신 것에 대해 책임있게 헌신하여 결과를 자아냈지요. 반면 마지막 종은 주인을 모질고 가혹한 존재로 여겨서 자칫 손해라도 보면 큰일날까 두려워 잔뜩 경직되어 있습니다.
종들은 자기들이 믿는 대로 보상을 받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임한 태도를 알아주는 주인은 자신의 기쁨을 종들에게 나눠주고, 모진 주인은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둠 속에 내던져 버리라는 험한 명령을 내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전히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칭찬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느님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테살 4,9)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는 누가 따로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고 사도는 극찬합니다. 실제로 그들이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표현대로라면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진정 "착하고 성실한 종들"입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들에게 전해받은 사랑의 계명에 최선을 대해 투신합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비록 사람을 통해 전해 받았지만 실은 "하느님에게" 온 계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누구를 통해서 오건, 어떤 경로로 전해지건 그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는 무심하거나 나태할 수 없습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건 명백한 직무유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지식과 지혜, 사랑의 탈렌트를 성심을 다해 가꾸어 열매를 맺은 성인입니다. 젊은 날의 방황을 지나 하느님을 만난 뒤로는 온전히 그 사랑에 집중하여 교회에 생명을 더한 착하고 성실한 종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각자에게 맡겨 주신 탈렌트에 감사하며 더욱 풍요로운 열매로 주님께 되돌려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남이 무슨 탈렌트를 얼마나 받았나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과 우리 각자의 관계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셨으니 비교 자체가 불가하지요.
사랑하고 헌신한 우리가 주님과 누리는 기쁨이 이 세상과 교회를 더욱 밝고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사랑의 에너지로 변하리라 믿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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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sKObRtax-4&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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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마태 25, 21)
우리의 방황도
주님을 만나면
은총이 된다.
소용돌이
시간을
힘겹게 지나온
성 아우구스티노의
비틀거린
목마름의
여정이었다.
우리가
함부로 버려도
소중하게
거두시는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역사에서
만나게되는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죄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찾던 길은
하느님의
사랑에 있었다.
사랑은 은총을
동반한다.
사랑이 깊으면
나눔도 깊어진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서
맑고 깨끗해지는
영혼의 기쁨을
다시 만난다.
우리의 죄도
하느님의
은총을 입으면
하느님을 위한
뜨거운
사랑이 된다.
지난날의
실패와 방황을
하느님과
나누는
고백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주신다.
은총은
끝나지
않았다.
패배한
자리에서
힘껏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 은총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뿐인
하느님 사랑을
받고사는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진실한
고백이 된다.
사랑으로
그 놀라운
은총의 힘을
다시 믿는
우리들 시간이다.
사랑과
은총에
감사드리는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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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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