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주를 잡아야 되는데….” 경기 전 기아의 선발오더표를 받아 본 김경문 두산 감독의 경계 섞인 말이었다. 오더표에는 이재주(31)가 4번 지명타자로 올라 있었다. “타격 하나는 정말 무섭다”는 게 김감독의 설명이었다.
김감독의 두려움은 현실로 드러났다. 기아가 4-0으로 앞선 7회말 2사 만루에서 이재주가 타석에 등장했다. 이재주는 볼카운트 1-3에서 두산 투수 이재우의 5구째 가운데 높은 직구(143㎞)를 통타했다. 타구는 좌중월 담장 넘어 무등수영장 굴뚝까지 날아가는 장외홈런이 됐다. 승부의 추를 기아 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하는 쐐기홈런이었다. 경기 후 김익환 기아 사장이 덕아웃까지 찾아와 축하할 만큼 이재주는 이날 경기의 히어로였다.
지난 85년 강릉 노암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에 입문해 19년 만에 터트린 자신의 생애 첫 만루홈런이었다. 홈런은 짧은 머리에서 비롯됐다. 이재주는 이날 오전 미장원을 찾았다. 대구원정에서 포수 김지훈과 김상훈이 삭발을 감행하자 같은 포수로서 동참의식이 생긴 것. 게다가 머리카락을 깎고 경기장에 나오자 선배 이강철은 상품권을 안겨주었다. 이강철의 선물로 팀 분위기가 유난히 좋은 날 통렬한 ‘삭발 그랜드슬램’을 날렸다.
이재주는 “맞는 순간 넘어갈 줄은 몰랐다. 첫 만루홈런을 쳤지만 오히려 스윙이 커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올해는 부상선수들의 공백을 메워주는 노릇에 만족한다. 홈런보다 출루율 높은 선수가 되도록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