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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마 왕국은 대륙의 북동 끝에 위치한 작은 소국으로, 서쪽으로는 대륙 대부분을 차지한 거대한 제국, 남쪽으로는 그 제국과 힘싸움을 겨루어 온 막강한 이베이드 왕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이다.
그러한 드레마 왕국 내륙 중, 북쪽 일부는 우거진 숲으로 뒤덮인 산들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 대부분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지만, 왕국 중앙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수도의 주변만큼은 높고 낮은 수많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덕택에 무력적인 침공에 대해서는 수비가 용의하지만, 동시에 타지와 소통이 불편하다는 단점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 당연스레, 성문이 열리는 새벽이 될 때마다 그 밑에서는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로 긴 행렬이 만들어져 왔다.
성문이 보이는 근처 야산에서 검은 갑옷을 걸친 흑기사는 그러한 긴 행렬들을 멀찌감치서 지켜보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금속판이 마치 파충류의 비늘처럼 작은 틈 없이 견고하게 연결되어 몸에 밀착된 특이한 형태의 갑옷을 걸치고 있는 그는 새벽이 지나 태양이 떠오르고, 그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에 올라 중천이 되었음에도 허수아비처럼 꼼짝도 않은 채, 계속해서 출입하는 무리를 계속해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해가 그의 머리 꼭대기에서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그제서야 피로가 밀려오는지 숲 안쪽으로 돌아가서는 그가 숲 안쪽 공터에 준비해 놓은 야영지로 돌아갔다.
산속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야영지라기에는 너무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그것은, 산속에서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정교한 테이블에 하얀 테이블보까지 깔려 있었고, 그 주변의 몇몇 의자들 역시 고급품인 것은 물론, 푹신한 방석까지 깔려있었다. 거기에 더해 예쁜 문양이 들어간 접시와 포크 등의 식기류는 물론, 조금 떨어진 곳에 불을 지필 모닥불까지... 귀족가의 부부가 나들이라도 나온 것 마냥, 충분하다 못해 호화롭게 차려져 있었다.
그 이상으로 놀랄 만한 건, 흑기사 혼자뿐일 줄 알았던 야영지에는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인물들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흑기사는 그 두 사람과 아는 관계였는지 그들을 보고서도 전혀 놀라는 낌새가 없이, 태연하게 모닥불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검은 쇠장갑을 낀 채로 능숙하게 불을 지피고는 차를 끓일 물을 올렸다.
"여유 피울 때인가?"
두 사람 중 노인으로 보이는 자가 흑기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노인은 해적선장을 연상시킬 만큼 험상궂었고, 딱 벌어진 어깨에 곧게 펴있는 허리를 더해, 젊은이들 이상으로 키가 크고 건장했다. 흰 머리는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단정하게 뒤로 넘기었고, 검은색 일색의 제복에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끈이 달린 긴 나무막대기 같은 것을 매고 있었다. 그 나무막대기는 구멍 뚫린 관 같은 것을 낫 모양으로 꺾은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적어도 지금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기'로, 화약을 다루는 기술이 세밀해지는 몇 세기 후에나 등장할 '구식소총'이라는 무기였다.
"여기 있을 이유가 있으니 있는 거다."
흑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끓이던 자세 그대로 귀찮다는 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두 사람의 오고 간 말은 다소 험악했지만, 그들은 서로의 성격을 잘 알기라도 하는지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일상적인 대화처럼 평온하기만 하였다. 흑기사는 잠시 물이 끓기만을 기다리다 찻통을 열어서는 쇠장갑을 낀 손으로 찻잎을 넣기 시작하였는데, 육중한 갑주를 걸친 상태로 차를 끓이는 모습을 다른 이가 본다면 다소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본인이나 다른 두 사람 누구도 그러한 점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토끼는 달콤한 차가 좋데"
나머지 한 사람이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해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키보다 높은 바위 위에 걸터앉은 칠팔 세 정도의 인형같이 귀여운 소녀로, 화려한 핑크빛에 프릴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기장이 다리는커녕 발까지 덮고도 남을 만큼 길었다. 아이답게 곱고, 윤기가 나는 핑크빛 머리칼은 어깨를 넘을 정도의 길이로, 좌우와 뒷머리 세 군데를 리본 끈으로 묶어 내렸고, 품 안에는 그녀가 한쪽 팔로 안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 토끼인형을 안고 있었다.
소녀는 흑기사가 무대답, 무시선으로 무시하자, 보란 듯이 양팔로 인형을 더욱 높이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토끼는 꿀이 들어간 차를 좋아한대, 나도 꿀이 들어간 게 좋아."
자신이 먹고 싶다는 건지 인형이 먹고 싶다는 건지 헷갈리는 말을 한 소녀는 흑기사가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진득하게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귀여운 강아지 같은 소극적인 눈빛으로, 꿀이 들어간 차가 마시고 싶다고 애원하는 것 같은 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은 그 눈빛을 절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꿀이라면 있을 거다."
흑기사는 역시나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귀찮다는 말투로 그 말만을 내뱉고는, 찰캉찰캉 갑옷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숲 속으로 어디론가 들어갔다. 어디서 꿀을 구해오려는지 모를 그의 행동이지만, 그러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흑기사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꿀이 담긴 통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모닥불로 돌아가 차가 완전히 우러나기만을 잠시 기다리고는 소녀나 쓸 법한 핑크빛 꽃무늬의 귀여운 찻잔에 꿀을 한 스푼 듬뿍 덜은 뒤, 뜨거운 차를 따라서 티스푼으로 적당히 저어, 기다리던 소녀에게 다가가 찻잔과 접시를 내밀었다. 찻잔을 받아든 소녀는 차가 뜨거운지 귀여운 얼굴로 호호 불면서 행복한 얼굴로 조금씩 마셔가기 시작했다.
"토끼가 달콤해서 맛있대."
소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흑기사에게 한 뒤, 품 안의 토끼인형과 무언가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소녀의 그런 괴이한 행동에도 그 두 사람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혼자 인형과 이야기하는 귀여운 소녀, 한여름 대낮에 검은 갑주를 걸친 자, 그리고 몇 세기를 앞선 무기를 가진 노인. 괴이하고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그들은 산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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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뭐가 문제라는 거야?"
이런 짤막한 내용으로 왕자파가 공주파의 세력을 눌렀다는 단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카린은 디자엘 재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기에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물어오는 그 표정은 '의아하다' 라기보다는 눈꼬리가 올라가고 시선을 재상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해오는 게, 재상의 눈에는 여왕이 아침의 일에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입가에서 피어오르려는 웃음을 억지로 미소로 위장시키며 대답했다.
"여기 '왕세자' 라는 부분입니다."
"왕세자? 그게 뭐 어쨌는데? 자기가 자신을 왕세자라 부르던, 세자비라 부르던 상관없잖아?"
재상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번의 카린은 평소처럼 머리가 돌아가 주지를 않았다. 부족했던 잠이 이제서야 피로로 몸을 덮쳐오는 것인지, 아니면 감기라도 걸려 몸이 안 좋은 것인지, 카린의 두 눈에는 오직 재상의 목덜미 뒤편으로 흘러내려 온 주홍빛 머리칼만이 신경쓰일 뿐이었다. 그녀 본인도 자신의 이런 상태가 이상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일하는 중...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건가? 아니면... 꿈 때문인가?'
묘하게 재상이 평소와 달리 신경쓰이긴 했다. 아침의 소동 때문인지 재상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게 그 이유를 그녀 자신도 도저히 짚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재상과 눈을 마주치는 게 왠지 모르게 불편했고, 그의 주홍빛 머리칼을 볼 때마다 목구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게 정신적으로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카린은 그를 보지 않으려고 억지로 시선을 돌릴까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눈은 그녀 스스로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만큼 혼란스러워했다.
"확실히 그들 간에는 어떻게 부르든 그들 간의 사소한 문제이겠습니다만, 국외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재상은 말하며 카린이 이리저리 불안한 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행동을 점차 의아하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힌트를 주었음에도 답을 맞히지 못한 것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잃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점차 그녀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어왔다. 재상은 문제를 내는 건 여기까지... 가능한 한 빨리 회의를 끝내고 그녀를 쉬게 해 주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설명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말을 계속하였다.
"국외에 왕세자라고 밝힘은 곧 자신이 왕위를 이을 것이라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왕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베이드의 정세를 고려하면, 서신에 이렇게 '왕세자' 라고 표기되는 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공식으로 전해질 외교 문서의 글자 하나 차이로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고려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문제입니다."
재상은 설명을 계속 하는 중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그녀가 계속해서 걱정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 말을 멈추고는 그녀가 자신의 설명을 머리에 흡수할 시간을 넉넉하게 주고자 회의장 주위의 모두를 한 번 쭉 돌아보며 뜸을 들였다. 그 두 사람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모두는 당연스레 말을 멈춘 재상에게 시선이 모였고, 재상은 잠시 숨을 돌리는 시늉을 보인 뒤, 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당연히 이런 서신의 '왕세자' 라는 세 글자는 공주파 측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 게 정상입니다만, 그렇지 못했다는 건 최소한, 정치적인 면은 왕자파가 장악했다... 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재상은 자리에 앉아,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설명하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자신과 눈을 피하려 하면서 회의에 집중하지 않는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될 뿐이었다. 재상은 어떻게든 회의를 중단하거나 끝낼 적당한 말을 찾으려 애썼지만, 회의의 진행자지, 중심인물이 아닌 자신에게는 회의를 끝낼만한 적당한 건덕지가 떠오르지 않아 물을 마셨음에도 속은 더욱 타들어 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재상의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카린의 상태를 눈치챈 것인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베르제바브 대공이 벌떡 일어나서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우선은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좀 더 지켜보는 걸로 하지."
대공은 이 말을 던지자마자 회의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회의장 밖으로 지팡이를 따각따각 짚으며 먼저 나가버렸다. 덕분에, 대공의 이 행동으로 회의는 끝날 듯한 분위기로 흘러가 버렸고, 술렁거리며 회의를 계속할지 말지를 가지고 눈치를 보는 이들 사이에서 리프 공작이 대공의 그 행동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일어나서는 뒤따라 회의를 이탈해 나가버렸다. 이로써 회의는 실질적으로 끝나버렸고, 카린 역시 재상을 피할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여기까지 하고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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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은 게 있다."
모닥불의 불을 끄고, 주변을 정리하는 흑기사에게 노인은 갑자기 말을 던졌다. 그런 노인의 말에 흑기사는 여전히 하던 일을 멈추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노인에게 대답했다.
"뭐냐? [속죄]?"
흑기사는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노인을 [속죄]라 부르며 하던 동작은 그대로 취하고 있었지만, 곧, 돌아올 질문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의 손동작은 점차 느려져 갔다. 얼핏 모르는 두 사람이 본다면 사이가 나쁜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막상 [속죄]는 흑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의 총을 한 번 고쳐매고는 심각한 얼굴로 추궁하는 질문을 던졌다.
"왜 [신념]을 데려오지 않은 거냐?"
"본인이 거부했다."
[속죄]의 질문에 흑기사는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신념]이라는 게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품에는 토끼인형을 안은 채, 좌우로 몸을 흔들흔들 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린 소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당연히, 그런 대답만으로 부족한 '속죄'는 추궁이라도 하는 양, 얼굴이 매섭게 변해서는 계속해서 물어갔다.
"그래도 데려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거부한 것은 거부한 거다."
[속죄]는 흑기사와는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다는 게 짜증 나는 것인지,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알면서도 그 역시 그것이 마이페이스인 것인지 여전히 흑기사는 냉랭하기만 할 뿐이었다.
"왜 [신념] 거부했나?"
"그가 리프라는 여자는 매우 훌륭했다. [신념]이 그 여자를 지키려 하는 게 당연하다."
흑기사의 대답에도 '속죄'는 인정할 수 없었는지 고집이 센 노인처럼 계속해서 물었다.
"지키려 했다는 게 말이 되나?"
"내 눈으로 보았다. [신념]은 자신의 의지로 그녀와 함께 있었고, 그녀는 목숨을 구걸하면서까지 지키려 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신념]이 그녀의 신념에 끌리는 게 당연하다."
보기 드물게 길게 말을 한 흑기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창창한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는 너무나 강렬해 대지는 물론 그의 갑주까지 뜨겁게 달구었지만, 그럼에는 흑기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무엇이 그를 지탱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 역시 무언가가 그를 지탱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토끼가 덥데."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누구에게 들으라는 건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올려 하늘의 태양을 보더니 졸린 고양이처럼 귀엽게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더워"
소녀는 고개를 내려서는 품 안의 토끼인형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그녀의 등에서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순식간에 자라났다. 매우 새하얗고 깨끗한 두 날개는 소녀의 작은 몸집은 덮고도 남을 만큼 넓고 순결해 보였다.
그 두 날개는 금세 날아오르기라도 할 듯이 허공에 가볍게 날갯짓을 하고는 소녀의 머리 위로 펼쳐져 태양으로부터 그녀의 작은 몸을 가렸는데, 그 모습은 천사를 연상시킬 만큼... 아니, 천사라고 불러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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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회의 때의 예복 차림 그대로 자신의 침대에 뛰어들어 누웠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카린은 그 이유를 알아내고자 베개를 품에 안고서는 공을 품에 안고 뒹굴거리는 곰탱이 마냥, 이리저리 데굴데굴 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일까?','무엇 때문일까?', '무엇때문...'
"외로워서, 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카린은 이거다 싶은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이게 정답이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누군가가 그리웠다. 자신의 손을 잡고서 그녀의 모든 걱정과 고민을 대신 해결해 줄 어떠한 존재. 친구라도 좋았고 연인이라도 좋았다. 그저 그녀의 여왕으로서 짊어진 무게를 시원하게 날려줄 만한 누군가를 원했다.
"있을 리 없지, 그런 사람."
아마도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재상에게 끌렸으리라, 라고 스스로 판단을 내린 카린은 베개를 머리 위로 던져버리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듯이 이에 맞추어 시녀가 들어왔다.
"베르제바브 대공님께서 청강실로 오시라고 하십니다."
시녀는 정중한 말투로 대공의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카린의 귀에는 가마솥을 팔팔 끓여놓고 신선한 재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마귀의 메시지로 들릴 뿐이었다. 카린은 자신을 구해줄 왕자님 따위는 없는 현실에 낙담하였지만, 스스로의 발로 도망치고자 마음먹었다.
"나 성 밖에 시찰 나갔다고 해"
카린은 전에 그렇게 혼났음에도 정신 못 차렸는지 또다시 도망치고자 대공을 속일 거짓말을 하고는 곧바로 침실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식사 종소리를 듣고 달리는 강아지마냥, 그녀는 침실을 나와 집무실을 지나쳐서는 미끄러지듯 복도를 질주하였고, 그녀는 곧바로 바로 옆의 계단의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왕의 우아함 따위는 날려버리고,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억세게 쥐어 들고서 계단을 몇 칸씩 폴짝폴짝 뛰어내리던 카린의 눈에 계단 바로 밑에서 올라오는 마왕이 보였다. 대공의 벗겨진 상두부에 자라난 검버섯은 흡사 마왕의 머리에 난 혹처럼 무시무시했고,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마왕의 행진곡처럼 들려왔다.
당연히, 카린은 그에게 들킬세라 바로 옆 복도로 살금살금 몸을 낮추어 가다가,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한참을 달리고 달리던 카린은 몸을 숨길만 한 장소를 급히 물색하였고 '재상실' 이라 쓰인 문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열어젖혀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재상, 나 좀 숨겨줘!"
카린은 재상을 부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 방은 재상실로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슈군이라고 불리던 소년의 비서실로, 넓은 방안에는 비서가 쓰는 평범한 책상과 의자가 하나씩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옆에는 알 수 없는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카린은 재상의 비서실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옆문의 재상실 문을 급히 열고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웃옷을 벗어 상반신의 나체가 그대로 드러난 재상과 그런 재상의 등에 찰싹 붙어 있는 미소년이...
"아, 미안."
카린은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을 본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며 문을 닫고 도로 나갔다. 찰나였다고 하지만, 카린의 두 눈에 분명히 새겨진 재상의 반나체의 모습은 지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알맞은 근육이 자리 잡은 것이 의외로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런 재상과 찰싹 붙은 미소년, 두 사람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아름다웠...
'정신이여 돌아와라.'
카린은 속으로 주문 비슷한 무언가를 외치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두들겼다. 하지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카린의 기억 속의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면서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머릿속을 뒤덮어가는 핑크빛에 정신줄을 놓고 망상을 펼치기 시작하던 카린의 정신세계는 곧 재상실에서 그 예쁘장한 소년이 나오자마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음... 누구더라?"
여왕을 보고 몸 둘 도리를 몰라 우물쭈물해 하는 미소년에게 카린은 물어갔다. 그 소년은 카린과 비슷한 아니 약간 작다고도 할 수 있는 키에 단정한 갈색 머리,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둥글고 큰 안경을 쓴 나약한 이미지로, 카린보다 한 살 정도 연상임에도 그녀보다도 어려보이고 연약해 보여 왠지 모르게 보호해주고 싶다는 모성본능이 팍팍 들게 만드는 미소년이었다.
"슈, 라고 합니다 전하."
그 소년의 기어들어가듯이 소극적인 대답에 그제야 카린은 단편적으로나마 그와 스쳐갔었던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 미소년은 재상이 '슈군'이라고 부르는 재상의 비서일을 맡은 소년으로, 간혹 그녀의 눈에 띌 때도 엄청난 양의 책이나 서류를 나르고 다니었기에 얼굴을 보기 힘들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한 것이리라.
'재상은 뭘 기준으로 얘를 비서로 뽑은 걸까?'
카린은 마치 귀한 물건을 감정하듯 진지한 얼굴로 슈의 주변을 돌며 관찰했다. 그런 카린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슈는 수줍은 소녀처럼 당황하며 몸을 움츠리고는 눈을 피하려 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카린에게는 더더욱 귀엽게 보였다.
"재상이 이상한 짓 안 해?"
카린은 원하는 선물을 주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무언가를 바라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슈에게 물었다. 이에 슈는 당황한 건지 겁을 먹은 건지 한참을 머뭇머뭇 거리다가 흘러내리는 안경을 소극적으로 고쳐 쓰며 답했다.
"그, 그런 일은 없, 없습니다. 전하."
'귀여워!'
카린은 속으로 외쳤다. 마구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 카린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뒤에서 악마의 행진곡이 점점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곧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마왕에게 쫓기는 가여운(?) 여왕이라는 현실을 이제서야 자각한 카린은 재상이 있는 방의 문을 열며 뒤에서 우왕좌왕하는 슈에게 말했다.
"대공이 나 찾으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
카린은 그 나약해 보이는 소년이 거짓말을 잘할지 걱정하면서도, 일단 열린 문으로 다급히 들어갔다. 내부의 재상실은 디자엘 재상의 성격을 반영하듯 누구와는 다르게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천장까지 닿는 커다란 선반에 수십 종류의 차가 통에 담겨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두 개의 소파가 낮은 테이블을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긴 책상에 편안해 보이는 의자와 함께 서류가 몇 장(?) 놓여 있었다.(서류의 양이 이렇게 적다는 건 그만큼 재상의 일 처리가 신속하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중앙쯤에는 재상이 상의의 셔츠 단추를 채우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전하, 어서 오십시오."
재상은 미처 채우지 못한 셔츠 사이로 상반신이 훤히 보이는 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재상의 모습에 카린의 정신은 그의 쇄골이나 남자다운 가슴선을 보고 날아가 버렸으나, 곧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전하?"
재상은 카린의 그런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단추를 다 채우다 말고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의 행동에 카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며 물러났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재상이 코앞에까지 다가가자, 그제야 제정신이 든 카린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는 의아한 표정의 재상을 지나, 소파의 뒤쪽으로 족제비처럼 몸을 날려 숨었다. 그녀가 몸을 숨기자마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대공이 벌컥 문을 부수다시피 열어제끼며 들어왔다. 대공은 들어서자마자 제물을 찾는 악마처럼 안광을 부라리며 재상실 이곳저곳을 향해 눈을 훑다가 곧, 눈앞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재상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카린, 그 녀석 여기로 왔나?"
재상은 의아해하면서 카린 쪽을 슬쩍 보았다. 소파 뒤에서 쪼그리고 앉아 몸을 숨기던 카린은 재상이 자신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하자 곧, 두 팔로 가위 모양을 만들고는 맹렬히 고개를 저어 사인을 보냈다.
'없다고 해'
그런 그녀의 사인을 알아들었는지 재상은 싱긋 미소 지으며 대공에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한참 전쯤에 나가셨습니다."
그런 재상의 말에 속아주었는지 대공은 그다지 의심스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그는 뒤돌아 지팡이를 타박타박 짚어가며 재상실을 천천히 걸어나갈 뿐이었다. 카린은 대공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안심이 되어 갔지만,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나가던 대공은 잠깐 멈춰 서서는 재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디자엘 재상,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 아이를 감싸주기만 해서는 안 되네."
전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다르게 말을 마치고 나가는 대공의 뒷모습은 많은 근심을 짊어져 지친 노인처럼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ps. - 위의 내용은 픽션이며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것은 현실의 정치,종교,지역,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뜻 같은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