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 발명국
코리아의 증거 <직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청주 고인쇄전문박물관 2
미국 유명잡지 ‘라이프’의 밀레니엄 특집호에서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대 사건 중 수많은 각계각층의 학자들이 뽑아낸 결론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제 1위로 선정됐다.
글/사진 신정미 사진제공 고인쇄전문박물관
세계역사를 바꾼 <직지> 한 권
유럽 인쇄술과 관련해 구텐베르크의 역할에 대한 해답은 동·서양의 서로 다른 재료와 문화적 전통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목판 인쇄는 8세기에 중국에서 시작됐고, 활자 인쇄는 1040년경 중국 필승에 의해 원리가 밝혀졌으며, 금속활자 인쇄는 14세기 조선에서 실용화에 성공했다. 15세기 중반에 활자 인쇄를 시작한 구텐베르크는 보편화에 기여했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패트릭스와 매트릭스를 이용한 활자 주조기 개발과 인쇄기 발명을 들 수 있다. 활자를 주조하는 몰드의 경우 동양에서는 거푸집을 1번 사용해 여러 자를 주조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매트릭스를 핸드 몰드에 반복적으로 사용해 활자를 주조할 수 있었다. 이는 문자가 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알파벳의 경우 26자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단어를 조합하면 되지만, 조선시대 한자로 된 활자의 경우 20~30만자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지에 실린 금속활자 관련 기사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가 하지 않았던 일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쇄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인쇄는 8세기 중국에서 여러 개의 글자를 한 장의 목판에 파는 기법으로 시작됐다. 그는 활자(새로운 페이지마다 글자를 다시 조판할 수 있는)를 발명하지는 않았다. 1040년경 중국의 인쇄공 필승(畢昇)이 발명한 것이다. 더구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14세기에 한국인이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목판인쇄물의 문서가 유럽에 알려진 것은 1400년 초기였고 유럽에서는 아무도 아시아의 더욱 발전한 기술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상 글을 쓰는데 10,000개 이상의 글자를 사용하는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활자는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았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게 된 이유는 종이와 장정(제본)을 들 수 있다. 동양의 경우 한지는 얇아서 손으로 문질러 인쇄가 가능하나 서양에서는 양피지와 넝마로 만든 종이를 사용했는데, 이는 두꺼워서 손으로 문질러 인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실을 이용해 중간을 꿰매는 형태(양장)의 유럽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본하기 위해서는 양면 인쇄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인쇄를 위해서 일정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장치는 지중해 지역에서 예전부터 와인이나 기름을 짤 때 흔히 사용했던 것을 응용해 인쇄에 도입한 것이다. 이때부터 ‘Press’가 인쇄라는 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로부터 시작된 활자 인쇄술은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으며, 서적 인쇄가 기계화되면서 보편적인 방법으로 성장하게 됐다. 그 배경은 당시 유럽에서 르네상스와 맞물려 고전번역과 출판사업이 전개됐고, 대학들이 생겨나면서 서적의 수요와 창출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적의 대량생산과 보급으로 인해 종교개혁, 시민혁명, 과학혁명, 산업혁명, 자본주의,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직지> 표지 원제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이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초록한 것으로 부처가 한 말 중 가장 중요한 것인 직지에 대한 뜻풀이를 고승들의 책에서 가져와 편집했다는 뜻이다.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직지는 직역하면 ‘정확하게 가르침’, ‘정직한 마음’, ‘바로 다스린다’ 등 다른 뜻으로도 풀이된다.
책의 내용은 불교의 가르침을 수집한 것이고, 구성은 145가(家) 즉, 과거 7불(佛)과 인도 28조사(祖師), 중국 110선사(先師)가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게·송·찬·가·명·서·법어 등의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상권에는 과거칠불, 인도 28조사, 중국 6조사, 중국 5가 7종 기연상편이 수록돼있고, 하권에는 좌선명, 5가 7종 기연 하편, 설법, 가송, 경론, 서장, 경훈 등이 수록돼 있다.
<직지> 편저자는 선종의 대가였던 백운화상(호는 백운, 법명은 경한)이고 출판한 사람은 그의 제자 석찬과 달잠이다. 1377년에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해 상·하권으로 출판했다. 현재까지 하권 한 권만 발견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왜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2위)보다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를 1위로 선정했을까? 이에 대해 고인쇄박물관 황정하 연구실장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시발점이 바로 구텐베르크부터 시작된다고 봤고, 지난 천 년 동안에 금속활자 인쇄로 우리가 발전해오고 있
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보다도 더 위대한 금속활자를 수단으로 책을 만들고 책속에 담겨있는 지식·정보 전달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느끼고 발명한 곳은 대한민국이다. 그 금속활자는 지식정보를 실어나르는 스마트폰처럼 대한민국이 금속활자를 발명한 유전자를 갖고 기술적인 노하우가 축적돼 오늘날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밑받침이 됐다. 또한, 지식정보를 실어나르는 도구 차원에서 본다면 금속활자의 발명이 갖는 의미가 비록 <직지> 한 권이지만 이것이 세계역사를 바꿨고, 우리가 세계에 어깨를 당당히 겨룰 수 있게 하는 역사적 문화적인 자료가 됐다. 금속활자본 <직지>가 사실 최초는 아니지만 금속활자를 발명한 증거물이자 금속활자 발명국 코리아의 증거자료가 된다. 결국 구텐베르크는 우리가 발명한 금속활자를 보편화시켰고, 대한민국은 4차 전자미디어시대에 인쇄, 전자미디어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며 보편화시키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과 뜻을 기리기 위해 금속활자로 간행
‘직지’의 뜻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온 말로,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는 참선하여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고 간략 서명은 ‘불
조직지심체’이다. 판심제(版心題)는 ‘직지’ 또는 ‘심요(心要)’이며, 영어권에도 ‘Jikji’로 알려져 있다.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한국 관련 고서를 담당했던 고 박병선 박사에 의하면 원제목이 너무 길어서 백지에 쓰여있는 ‘직지심경(直指心經)’을 부제로 여겨 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적절치 못한 서명이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데, 현재 국내 학계에서는 판심제를 따서 <직지> 등으로 통용되고 있다.
<직지> 편저자인 경한스님(1298~1374)의 호는 백운으로 전라도 고부(현재 전북 정읍시) 사람이다. 태고 보우국사, 혜근 나옹화상과 함께 고려말 3대 선사이다. 어려서 출가해 불법을 익히고 중국 석옥청공화상(석옥화상)과 인도 지공화상에게 직접 법을 물어 도를 깨달았다. 1351년(충정왕 3)
5월 17일 백운화상 경한은 원나라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서 석옥화상과 선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동안에 백운화상이 불도에 깊이 들었음을 알고 석옥화상은 자신이 손수 쓴 <불조직지심체요절>을 한 권 주어 그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자 했다. 1372년(공민왕 21) 백운화상은 성불산(成佛山)에서 석옥화상의 책이 너무 간략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145가의 법어등을 가려 뽑아서 <직지> 상·하 두 권으로 나눠 편저했다. 그 배경은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직지에 손수 쓴 발문이 수록돼 있다.
<직지> 가장 대표적인 내용 석가모니불 “방하착하라”
흑씨 범지가 신통력으로 좌우 양손에 오동나무 꽃 두 그루를 들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하는데, 부처님이 선인을 부르니 범지가 “예”라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려놓아라” 범지가 왼쪽 손에 들고 있던 꽃 한 그루를 내려놓았다. 부처님이 또 다시 선인을 불러서 “내려놓아라” 하였다. 범지가 또다시 오른손에 있는 꽃 한 그루마저 내려놓았다. 부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선인이여 내려놓아라.”
범지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양손에 들고 있던 꽃을 모두 내려놓았는데, 무엇을 더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로 하여금 두 손에 들고 있는 꽃을 내려놓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지금 마땅히 밖으로는 6진과 안으로는 6근과 그 중간으로는 6식을 일시에 다 내려놓고 더는 버릴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이것이 그대의 생사를 벗어나는 경지이니라.”
범지가 그 말씀에 깨달았다.
이 선문답은 부처님께서 지금 들고 있는 꽃을 내려놓으라는 뜻이 아니고 그대 삶의 일체를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사람들의 삶의 일체란 나라는 주관과 남이라는 객관이다. 그 주관은 6근(안, 이, 비, 설, 신, 의)으로 세분하고, 객관은 6진(색, 성, 향, 미, 촉, 법)으로 세분한다. 그 주객 사이에서 우리의 인식작용이 저절로 생기게 되는데, 그것이 6식이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 내려놓으면 거기에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생사를 벗어나는 경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은 “자신을 다 내려놓고 낮아지라”는 말이다.
법린 선인이 정성을 다하여 말을 구하며 나를 깨우쳐 도와주어서 부득이 노안을 비벼가며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초록하여 두 권을 집록하였다. 책이 다 만들어져 법린이 왔기에 정성껏 당부하기를 천생의 석가니 자연의 미륵은 없는 것이니, 요컨대 빨리 핵심을 잘 붙잡고 말 밖의 뜻을 살펴보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임자년 9월 성불산에 사는 늙은 비구 경한 백운이 일흔 다섯에 손수 쓰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백운화상이 75세인 1372년 9월에 법린의 도움을 받아 손수 2권으로 편저했음을 알 수 있다. 백운화상은 제자들에게 선법을 가르치기 위해 75세의 노안을 무릅쓰고 <선문염송집> 등의 문헌을 섭렵해 과거 일곱 부처로부터 선종의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았던 순간을 노래하고, 그 깨달은 깊은 뜻을 전하는 글들을 모아 편저했다. 그리고 77세에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한 후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스승의 가르침과 뜻을 기리기 위해 1377년(우왕 3) 7월에 충청북도 청주 흥덕사에서 비구니 묘덕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아 금속활자본으로 <직지>를 간행했다. 경기도 여주 취암사에서는 제자 법린, 자명, 혜전 등이 1378년 6월에 목판본으로도 간행했다.
취암사본 <직지>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보물 제1132호), 영광 불갑사(1998년 명부전에서 복장유물로 발견)에 소장돼 있다. <직지>의 내용은 편저자인 백운화상의 말씀은 들어 있지 않다. 부처님과 역대 여러 불조사들이 마음의 본체를 똑바로 가르친 설법 중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중요한 절목만을 초록한 것으로 팔만대장경과 수많은 조사 어록의 요점을 집약한 선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꼴랭 드 쁠랑시 Collin De Plancy
<직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경위
금속활자본 <직지>는 1886년 5월 3일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부임한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 1853~1922)에 의해 수집된 도서로 상권은 없고 하권 1책만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필사본부(프랑스 국립도서관 도서번호 COREEN 109)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하권은 귀중본으로 분류해 단독금고에 넣어 보관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쉽게 볼 수 없다. 표지를 제외하고 39장인데 현재 첫째 장은 사라지고 매 장 11줄씩 각 줄마다 18~20자씩 인쇄돼 있다. 한지로 된 책에는 나무의 진이 묻어 얼룩져 있으나 표지는 깨끗한 편이다. 표지를 다시 만들면서 아예 아래·위를 잘라내어 크기가 줄어들었으며 흐린 글씨는 붓으로 덧칠한 흔적도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는 1886년 5월 3일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부임한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 1853~1922)에 의해 수집된 도서로 상권은 없고 하권 1책만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필사본부(프랑스 국립도서관 도서번호 COREEN 109)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하권은 귀중본으로 분류해 단독금고에 넣어 보관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쉽게 볼 수 없다. 표지를 제외하고 39장인데 현재 첫째 장은 사라지고 매 장 11줄씩 각 줄마다 18~20자씩 인쇄돼 있다. 한지로 된 책에는 나무의 진이 묻어 얼룩져 있으나 표지는 깨끗한 편이다. 표지를 다시 만들면서 아예 아래·위를 잘라내어 크기가 줄어들었으며 흐린 글씨는 붓으로 덧칠한 흔적도 있다.
쁠랑시는 한국과 프랑스가 국교를 맺은 후 2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13여 년을 외교관으로 머물면서 확고한 감식력과 폭넓은 교양으로 한국의 도자기와 고서 등을 수집했다. 그중에서 뛰어난 수집품은 <직지> 하권이다. 그런데 당시에 <직지>를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수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의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추측이 가능하다. 이 책은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박람회 때 아주 중요한 책으로 한국관에 전시됐고, 1901년 모리스 꾸랑에 의해 발행된 <한국서지>보유편에도 자세히 소개됐다.
이후 1911년 쁠랑시의 물품 경매 때 <직지>는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Hennri Vever 1854~1942)가 180프랑에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가 1943년 그의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손자 마탱(Francois Mautin)이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기증번호: 9832).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의 간지 상단 오른쪽에는 ‘Collection H. VEVER’의 장서표가 있으며 후에 파란 펜으로 ‘Paris 1911~1943’이라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베베르가 소장했던 기간은 1911년부터 1943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외교통상부 정상천 박사가 외교채널을 통해 프랑스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파리 시립 고문서실에 보관된 쁠랑시 경매기록부에 <직지>는 현재 금액(1프랑 3555원)으로 환산해 64만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쁠랑시는 <직지>를 수집해 책 표지와 속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표지: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책. 연대=1377년”
간지: “불교 교리 내용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인쇄본”
프랑스 국립도서관(프랑스어: Bibliothèue nationale de France, BnF) 프랑스 파리시 소재, 프랑스 문화부가 직접 관할하며 도서 관리는 물론 프랑스에서 출판된 모든 서적과 작품을 보관하고(법적으로 국가 의무사항임), 서적과 자료를 수집해 일반에 공개하는 데까지 이른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필사본부에는 현재 대한민국의 고서인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
고 박병선 박사(1923~2011)와 저서 고려시대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사실과 조선시대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어람용 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당사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1972년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 한국학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중 금속활자본 <직지> 흑백사진을 한국에 제공했으며, 또 국내에서 영인본을 발간할 수 있도록 교두보를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한자 이름인 갈림덕의 ‘갈’자를 가운데 두고 그 밑에 반원형으로 ‘EX LIBRIS COLLIN DE PLANCY’라는 장서표를 인쇄해 속지 안쪽 면 중앙 위쪽에 붙였다. 또한 ‘갈’자 위에는 연필로 “한국 활자본으로 가장 오래된 책, 1377년”이라 적혀있고, 또한 1911년 드루오 경매장에서 경매한 no 711의 경매번호가 적혀있다. 아랫부분에는 연필로 B.C. no 3738이라고 꾸랑이 지은 <한국서지> 번호가 적혀있다(p59).
오늘날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카탈로그를 보면 “1377년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책”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직지>, 소장하고 있지 않으면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유일한 예청주시에서 <직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추진했던 사업중 하나가 1995년부터 세계적인 금속활자로 알려진 독일 구텐베르크박물관과 학술회의를 하면서 2000년 자매결연을 맺었던 일이다. 그 과정에서 유네스코에 문을 두드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독일 유네스코 위원회와 같이 활동하면서 유네스코에 문화유산관리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 당초에는 유네스코도 문화유산(부동산문화재)만 관리했는데, 1993년부터 부동산문화재가 자꾸 훼손되다 보니 동산문화재나 기록문화재를 1995년부터 격년제로 지정하
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고 박물관 측에서는 1998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같이 <직지>를 1999년에 기록문화재로 상정해달라고 신청했다.
고인쇄박물관 황정하 연구실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소장국인 프랑스에서 신청해야지, 소장하고 있지도 않는 나라에서 왜 신청하느냐?” 해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편지한 결과 프랑스는 ‘<직지>를 등재시킬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답변해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박물관 직원들은 세계기록유산 심사위원들에게 <직지>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1999년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리는 국제자문회의장에 가서 2001년 국제자문회의를 청주로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2001년에 있을 유네스코 자문회의 개최준비 과정에서 유네스코 규정에는 꼭 소장자만이 신청해야 한다는 법이 없고,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황 실장은 “꼭 소장처에서만 신청해야 한다면 이것은 기록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 뜻이 있지, 소장자가 안 한다고 하면 그냥 없어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않느냐는 설득에 ‘소장하고 있지 않아도 신청하면 받아주자’는 결정이 나서 국제자문회의 2개월을 남겨놓고 부랴부랴 신청했다”며 “처음에는 소장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래도 프랑스 도서관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 않느냐는 제의에 프랑스 도서관 측의 관여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은 후 신청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직지>는 한국뿐만 아니라 인류의 금속활자 발명의 시원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니 반드시 등재돼야 한다는 구텐베르크박물관장의 추천서까지 받아서 제출했고, 2001년 국제자문회의를 청주에서 개최하던 당시 9월 4일 등재가 확정됐다. 소장하고 있지 않으면서 등재된 유일한 예가 <직지>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직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지난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2004년 유네스코에서는 국제기록유산 분야에서 세계 최초의 시상제도인 <직지상>을 제정,2년에 한 번씩 시상식을 한다. 이것은 유네스코가 심사하고 주는 상이지만 예산은 청주시가 부담하며 우리의 전통방법으로 제작된 상장을 수여한다. 현재 5회까지 수상식을 거행했다.
조상들의 창의정신을 절실히 느끼고 자긍심 가져야
청주시에서는 고인쇄박물관을 만들었던 초창기(1993년)에 ‘직지반환’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후 유네스코와 함께 일하면서 규정도 찾아보고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원본을 2번씩 열람해가며 여러 차례 확인해본 결과 약탈됐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반환요청의 명분이 없음을 알게 됐다. 그후 1997년부터는 방향을 바꿨다. 직지를 여러 권 간행했다면 국내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을 가지고 ‘직지찾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직 직지를 찾지 못했지만, 많은 자료 제보를 통해 고서 소장자들에게 우리 고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관심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고 있다. 지금도 <직지>와 관련해 제보가 오면 언제든지 찾아간다. 확인결과 직지가 아니더라도 그 책에 대한 가치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이 <직지>에 관심을 갖고 계승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황 실장은 “금속활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많은 문명의 이기 중에 정신적인 면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당시 농기구로 사용되던 쇠붙이를 이용해 활자를 만들 생각을 하고, 활자를 이용해 책을 만들었던 조상들의 창의정신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며 “책 만드는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로 했던 대한민국이 지금까지도 교육열이 높은 나라이며, 그 필요성을 토대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사실에 대해 글로벌 사회 어디를 가든 우리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출처: 역사,문화잡지 '글마루' 발췌 http://www.geulmaru.co.kr/bbs/board.php?bo_table=museum&wr_id=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