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61호
지하창고의 비밀
김윤배
*
로맹 가리는 입에 권총을 물고 에밀 아자르를 생각했다
한물간 로맹 가리는 신예작가 에밀 아자르에게 환호하는 평론가들에게 수없이 미친 것들, 눈먼 것들, 귀 막은 것들이라고 경멸했다
*
젊은 날 엉덩이로 살았던 창녀 로자의 늙고 뚱뚱한 삶은 모모의 대책 없는 삶과 서로 삼투한다* 그렇게 서로는 핏줄과 핏줄을 흘러 뜨거운 심장으로 간다
지하창고에서 죽음을 맞는 로자를 모모는 끝까지 지킨다
모모에게 로자는 엄마고 누나고 연인이다
차가워지는 로자의 얼굴에 수없이 키스하고 검게 변하는 얼굴에 화장을 시키고 시취를 없애기 위해 주머니를 털어 여러 병의 향수를 사들이는 모모는 비로소 슬프다
로자가 이스라엘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는 모모의 말은 거짓말이다
로자는 아마도 지하창고에서 자신의 몸이 육탈되고 뼈만 고스란히 남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모모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루에 한 번씩 로자를 보러 올 것이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백했던 말은』(문학세계사, 2023)
***
숙취와 여독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아침입니다.
비몽사몽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시 한 편 띄웁니다.
김윤배 시인의 시집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백했던 말은』에서 골랐습니다.
- 지하창고의 비밀
어떤가요? 이런 시를 만나게 되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지요.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로자, 그리고 모모
시에 인용한 텍스트로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시를 읽는 독자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와 모르는 경우로 나뉠 테지요.
이런 시는 시인이 독자를 처음부터 구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거 있잖습니까? 뱀장수가 뱀을 팔 때, 흔히 하는 말,
"얘들은 가라. 애들은 가!"
그러니까 이 시를 읽으려면 먼저 로맹 가리를 읽고,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오란 얘기입니다.
로맹 가리(1914년~1980)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이지요.
24살 연하의 연인, 진 세버그가 약물 투여로 생을 마감하자 이듬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한 작가에게 한 번만 주어지는 공쿠르상을 2회 수상(로맹 가리로 1회, 에밀 아자르로 1회)한 유일한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그가 여러 가명으로 소설을 발표했다는 사실이지요.
<포스코 시니발디>라는 가명으로 『비둘기를 안은 남자』를 발표했고
<샤탕 보가트>라는 가명으로 『스테파니의 얼굴들』을 발표했고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앞서 얘기한 공쿠르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그러니까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같은 사람이란 얘기입니다.
모모와 로자는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등장인물들이지요.
그러니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로맹 가리의 삶을 알고 그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그럴듯하지만 거짓입니다.
세상에 어떤 시인이 독자를 가려서 쓰겠습니까?
그러니 로맹 가리를 몰라도 에밀 아자르를 몰라도 모모와 로자를 몰라도
이 시를 읽는 데 그다지(?) 문제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강릉을 다녀왔습니다.
김영삼 시인의 신작 시집 『우연은 필연처럼 오지』
이홍섭 시인의 신작 시집 『네루다의 종소리』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
강문바닷가 조용한 횟집에서 김도연 소설가를 비롯해서 몇 사람이 모였더랬습니다.
시인 소설가들이 함께 모이면 거기에 술까지 들어가면
무척이나 시끄럽습니다.
시집 밖의 시인들은 얼마나 시답잖은지 확실히 알게 됩니다.
한물간 로맹 가리가 신예 작가 에밀 아자르에게 환호하는 평론가들에게 비웃듯이
우리는 지하창고 같은 횟집에서
자기(앞의 생)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면서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면서
누구는 모모처럼
누구는 로자처럼
밤새 말의 파도를 탔습니다.
사족. 1970년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노래 <모모>(박철홍 작곡, 김만준 작사/노래)를 기억하실는지요?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이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이 노래의 원전이 바로 『자기 앞의 생』입니다.
2024. 11. 4.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