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믿음 [최주연]
얇은 천 가방 깊숙이 넣어둔 열쇠가
허벅지에 맞닿아 느껴질 때면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갈 그곳에는 작은 식물이 있고 또 검은 고양이가 있다는 게 좋아서 가방이 흔들릴 만큼의 걸
음걸이를 당분간은 유지하며 걷기로 한다 정해놓은 목적지는 없지만
모르는 나무와 아는 나무 파란 대문과 긴 창문을 지도 삼아 고개를 바짝 들고 앞으로만 걷다 보니 나에게도
마트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생겼고
나는 나와 같이 가자고 했다
길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어도
있다고 믿으면 어디든 도착하고 말 테니까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있으면
비가 오지 않는데도 우산을 따라 펼쳐야 할 것 같은
우리가 함께 발맞춰 걸으면 멀리서는
확신만 가득한 발자국처럼 보일 테니까
열쇠고리에 엮인 열쇠들처럼 함께 걷는다
눈앞이 캄캄해질 때면 서로의 팔목을 살짝 맞댄 채
계속해서 걷는다
걷다 보면 장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고 그 사람을 따라서 걷다 보면 마트에 도착하고 그럴 때
면 가볍게 달랑거리는 마음
나는 함께 걸은 사람과 반씩 나눠 가진
체리와 토마토를 들고 돌아간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쳐
노란 불빛 벽돌집으로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날 때면 뛰쳐나와 반갑다고
내 허벅지를 긁는 검은 고양이의 앞발은 여전히 아프고 그 탓에
체리와 토마토가 전부 뒤섞였지만 그래도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