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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일요일이 제 아버지의 고희 입니다. 회갑 때도 잔치를 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를 온 가족이 설득해 여행으로 잔치를 대신했었기에 이번에는 저희 3자매가 친척 어른들과 아버지 지인들을 모시고 고희를 축하하는 조촐한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고희 잔치 초청장을 제가 맡아서 제작을 의뢰했는데 초청장에 언제, 어디서 잔치를 하니 와 주십시오 라는 초청문안만을 넣고 만들자니 왠지 허전하고 너무 통상적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초청장 위에 그림을 하나 따로 인쇄하여 붙여놓았습니다. 아마 옛 그림을 아시는 분들에게는 친숙한 그림이고 잘 알려진 그림이라 그림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만한 그림입니다. 바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입니다.
고희 초청장인데 회갑이라고 인쇄되어 저의 속을 다 태운 <초청장>
이 그림은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제가 회사에서 사용중인 컴퓨터에 바탕화면으로 설정하여 매일 수십 번씩을 억지로(?) 보는 그림입니다.
2005년 봄에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단원 대전 때 처음으로 직접 보았었는데 그때 참 인상 깊었던 그림이었습니다. [모구양자도]와 같이 옆에 나란히 전시되었었는데 과연 김홍도구나 하는 생각으로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았던 그림입니다.
아시다시피 단원은 풍속화로 아주 유명한 화가입니다. 하지만 단원은 산수, 영묘, 불화, 고사인물, 궁중기록화,사군자 등 전 영역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전해지는 그 어떤 그림에서도 실패가 없는 불세출의 화가입니다. 그 중 [황묘농접도]는 영묘화(새나 짐승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를 대표하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묘농접도] 종이에 채색 30.1×46.1cm, 간송미술관 소장
왼쪽에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색깔이 주홍 색이 선명한 패랭이 꽃이 피어있으며 고양이가 고개를 거의 180도 돌려 나비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나비 옆에 제사와 단원의 인장이 찍혀 있으며 화면 밑에는 제비꽃이 피어있습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노란 고양이를 아주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렸고 나비를 쳐다보는 눈이 조그맣게 그려져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제목은 ‘고양이가 나비를 희롱하다’ 인데 나비가 고양이를 희롱하듯이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비는 날개꼬리가 긴 것으로 보아 제비나비이며 원래 크기보다 매우 크게 그린 이유는 오른쪽의 공간의 허전함 때문에 의도적으로 크게 그린 것 같고 그래도 바위 때문에 구도가 왼쪽으로 치우친 것 같아서 나비 오른쪽 위에 “벼슬은 현감이고 단원이라 자호하며 다른 호는 취화사 이다” 라고 제사를 써놓고 ‘홍도’ 라는 주문방형 인장과 ‘사능’ 이라는 백문방형 인장을 찍어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꽃의 형태는 윤곽선을 그린 후 색채를 입히는 쌍구법(구륵법)으로 그렸으며 잡풀까지 아주 세세하게 정성을 드려 그린 작품임이 틀림없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화사한 어느 봄날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안한 광경이며 연풍 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46, 47세 때 여유 있는 생활 속에서 그린 그림이라서인지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 안정된 삼각구도로 보는 사람에게 따뜻함과 편안함을 주는 그림입니다.
그림의 뜻도 아주 알기 쉽습니다. 동양화에서 바위나 돌의 그림은 거의 변하는 않는 모습 때문에 장수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왼편의 크고 작은 돌은 두말할 것 없이 장수의 상징입니다. 오랜 세월을 지내왔던 모습을 상징하듯 표면에 푸르스름한 이끼까지 그려내었습니다.
그 옆에 있는 패랭이꽃은 카네이션의 토종꽃인데 석죽화(石竹花)라고도 부르는데 죽(竹)은 축하한다는 축(祝) 자와 통하니 역시 '돌처럼 장수하시기를 빈다'는 뜻입니다. 이 꽃은 분 단장한 듯 고운 까닭에 '청춘'을 뜻하기도 합니다. 청춘의 기상을 나타내듯 꼿꼿이 그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밑에 있는 꽃은 이른 봄에 피는 제비꽃인데 제비꽃은 꽃자루 끝이 굽어 꼭 물음표(?) 머리같이 생겼는데 그 생김새가 가려운 등을 긁을 때 쓰던 도구, 즉 여의(如意)와 닮아서 여의 초(如意 草)라고도 부릅니다. 여의란 내 맘대로 어디든 척척 긁을 수 있다는 뜻으로 "만사가 생각대로 된다"는 상징을 갖습니다.
고양이와 나비가 같이 그려진 그림을 ‘모질도’ 라고 하는데 고양이와 나비의 뜻은 고양이 묘(猫)가 칠십 노인 모(耄)가 중국어로 ‘마오’ 라고 같이 발음되고, 나비 접(蝶)은 팔십 노인 질(耊) 자와 ‘디에’ 라고 발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각기 칠, 팔십 세의 노인을 상징합니다.
그 뜻들을 전부 합쳐보면 “청춘의 기상으로 70세, 80세까지 하시는 일 마음먹은 데로 잘 되시고 건강하시게 오래오래 사세요.” 라는 일종의 장수도(長壽圖)인 것입니다. 아마 누군가의 생일잔치 때 축하의 의미로 그렸을 것입니다. 근데 저는 고양이가 나비를 바라보는 표현에서 70세 노인이 80세까지 잘 사시라고 축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마 그냥 생일이 아니라 고희 잔치에 선물용으로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두보의 곡강시 중 “ 예로부터 사람이 70세를 산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人生七十古來稀)” 라고 말할 정도로 평균수명이 매우 낮았던 옛날에 고희는 정말 경하할 일이었던 경사입니다. 자식들도 아주 뿌듯하고 기쁜 날입니다. 이렇게 기쁜 자신의 고희 생일날 조선 최고의 화가인 단원이 그려준 그림을 받고 그 주인공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아마 절로 어깨춤이 덩실덩실 추었을 것입니다.
생일날 축하의 그림을 그려주던 풍유와 아취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외국 음식인 케이크, 외국의 생일축하노래, 현금이나 상품권 등을 선물로 대신하는 지금의 생일 풍속과 비교하면 참 운치가 있는 생일 선물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제가 어느 사이트에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소개했더니 어느 분이 김홍도의 그림이 아니라고 반박을 하였습니다. 세상에~~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관에서 단원의 그림으로 인정했고(간송미술관은 현재 한국민족미술연구회에서 연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엄연히 단원의 호가 찍혀 있는데 단원의 그림이 아니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 말입니까?
그 분이 단원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한 근거는 패랭이꽃의 색채감과 기법이 단 한번도 다른 단원의 그림에서 볼 수 없는 감각이며 여성적 표현이고, 낙관도 그 당시 가난한 화가들이 단원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단원이 그림에다가 자기의 낙관을 찍어주어 도와주는 경우도 있었기에 어느 여성화가가 그린 그림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림의 화풍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게 아닙니다. 새로운 변화는 항상 이전 작품속에 잉태되어 있고 변화의 폭과 이유가 대부분 증명됩니다. 그런데 패랭이 꽃의 화풍은 청나라 화원풍으로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 풍인 단원의 화풍으로 볼 때 좀 생뚱 맞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고양이의 표현이 [송하맹호도]의 호랑이 표현과 동일하며, 고양이가 고개를 돌려 나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마상청앵도]에서 꾀꼬리를 쳐다보는 선비의 모습과 동일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 단원의 그림이 확실하다고 반박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사와 낙관이 분명 단원의 것이 분명하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송하맹호도] [마상청앵도]
사실 그렇게 주장했지만 제가 보기에도 패랭이 꽃은 단원 풍이 아니라서 항상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보통 생일잔치 때 선물용 그림을 그리면 한 사람이 전부 그리는 경우도 있지만 나누어 그리기도 하고 글씨나 문장이 뛰어난 사람은 시를 적어 놓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그렇다면 패랭이 꽃은 다른 사람이 그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생일선물용 그림을 나누어 같이 그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당시 화가들의 열린자세가 왠지 저를 더욱 흐믓하게 했습니다. 아마 그림 뒤에는 여러 명의 축하의 글들이 뒤따라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접힌 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서 생일 첩을 만들 때 분리해서 만들다 보니 그림만 남은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김홍도의 5대조는 守門將을 지냈고 고조부는 종6품의 벼슬 , 증조부가 종4품의 萬戶를 지낸 중인 가문의 출신으로 1745년(영조 21년)태어나, 정조 재위 24년을 거쳐 순조 6년 1806년경까지 62년을 살았습니다. 일곱 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 강세황에게서 화법을 배웠는데 당시 화업은 가문으로 계승 되는 게 일반적이었던 상황으로 보면 하급무관 집안 출신이라 그림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도 강세황 문하로 들어가 그림공부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대해 천재성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행적은 도화서 화원이 되어 1765년 그의 나이 21살 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경현당수작도>를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화원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정조 원년인 1777년(33살)때부터 국왕으로부터 발군의 실력을 인정 받습니다.
우리나라 문예 르네상스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는 정조시대에 학문이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칠 만큼 깊었으며,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직접 도서(圖書, 도장)까지도 새겨 쓰는 취미가 있었던 까다로운 예인군주(藝人君主)의 눈에 최고의 화원으로 인정 받았으니 그는 겸재 정선이 열어놓은 진경시대를 더욱 수려한 기법으로 진경시대를 완성시킨 조선의 대표적 화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백석미남으로 풍채가 마치 신선 같았다고 하며 키가 훤칠한 헌헌장부였으며 술과 해학을 무척 즐겼고 그의 편지를 살펴보면 그의 성격이 무던하면서도 붙임성이 있고 또 정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던 듯싶습니다. 단원은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대단히 잘 썼으며 문학 면에서 역시 앉은 자리에서 운(韻)을 맞추어 한시를 척척 지을 만큼 도도했고 더욱이 대금이며 생황, 거문고를 잘하여 음악가로도 이름이 났었습니다. 당시 양반들의 고급 문화 전반에 대해 수준급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표암 강세황 밑에서 조선 성리학에 대해 충분히 섭렵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인들의 지위가 새롭게 부각되는 시기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이 중인 출신이라서 그런 것이지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그의 풍속화에서 그려진 목수, 대장간, 농부, 엿장수, 무당, 악사 등 서민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서민적 풍모는 만약 그가 그림으로 돈을 벌고자 했으면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 텐데도 정조 사후 말년에 자식의 학비조차도 대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지는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단원이 사랑했던 서민, 바로 그 모습이 저의 아버지 모습입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어릴 적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셨던 아버지. 6.25와 유신 등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삶의 역사로 가지고 계시고, 너무나 검소하고 안쓰러울 정도로 소박하시면서도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아이들 먹을 거리 사 주는데 한번도 인색 해 본적이 없는 아버지.
기타와 하모니카도 능숙하셨고 작년부터는 새로 아코디언을 배우실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시는 낭만적인 경향, 책을 좋아했고 영화 보는 것은 아주 좋아하는 아버지. 그런 문화에 대한 갈망이 저의 어딘가에 깊게 남겨 있을 것 입니다.
항상 저와 가치관이나 생각이 너무 차이가 나 단 한번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했고, 무뚝뚝한 것은 닮아 서로 애정표현도 해 본적이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이만큼 자랐으며 앞으로도 그 그늘이 계속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아버지와 조금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 많이 하겠습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공부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