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64호
사라지다
황정산
없어진 한 짝 양말에 관한 말은 아닌
꿈속에서도 마주칠 수 없는
모래 냄새가 나는 말이긴 하나
제 꼬리를 삼키며 숨는
뱀의 이름 같기도 한
그러나 모든 구멍들을 채울 수 없을 때
하는 말이기도 한
연을 날리다 하늘을 본 사람들은 아는 말이지만
알을 낳는 새에 대한 말은 아닌
둔중한 것들이 용적을 비우고
차지하는 것들이 바람에 실리고
불리웠던 것들이 이름을 감추고
사라진다
그렇게 살아진다
- 『거푸집의 국적』(상상인, 2024)
***
황정산의 첫 시집 『거푸집의 국적』을 지난 주 틈틈이 읽었습니다.
문학평론가 그러니까 말을 분해하는 황정산보다 시인 그러니까 말을 조립하는 황정산을 읽는 즐거움이 훨씬 크더군요.
"모든 말은 원래 동사였다/ 움직이는 것들이 굳어 명사가 된다/ 아직 굳지 못한 기억/ 동사로 남아 꿈틀댄다"(「시인의 말」)
이렇게 시작한 시집은
"1부. 블랙/ 2부. 시인 시점/ 3부. 어처구니의 행방/ 4부. 불량한 시/ 5부. 동사들"
이렇게 다섯 개의 틀(거푸집)로 조립됩니다.
그리고 오늘 띄우는 시는 당연히(?) <5부. 동사들>에 들어 있겠지요.
- 사라지다
"사라지다"라는 동사가
슬그머니 혹은 어처구니없이
"살아진다"라는 동사로
부지불식간에 바뀌는 마술을 보여줍니다.
"사라진다 그렇게 살아진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일생을 시인은 단 한 줄로 요약합니다.
기가 막힌 말의 조립입니다.
그가 말하길,
모든 "사물들"이 본래 "동사들"이랍니다.
곰곰 생각하면 맞습니다.
고정불변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사였던 사물을 명사로 만든 건
어쩌면 인간의 편의에 따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시집은 말을 조립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당분간 곁에 두고 틈틈이 그의 레시피들을 분해해봐야겠습니다.
2024. 11. 25.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황정산 #거푸집의국적 #상상인
카페 게시글
시사랑
사라지다 / 황정산
박제영
추천 1
조회 53
24.11.25 09:1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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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라도 찿아 보리라
인사가 예을 벗어나지 않을 시간에 -
부디 교수님 겅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