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65호
휴식
- 신재풍의 '삶의 현장'에 부쳐
이향지
구르던 바퀴가 누워있다
일하던 사람들이 앉아있다
앙상하고 까만 남자의 손끝에서
타는 담뱃불
저 물끄럼한 한 때
*
이향지 시인께서 너무나 귀한 책 『금강산』을 보내주셨습니다.
딱히 답할 게 없으니 시편지로 면피하려고 합니다.
20년 전에 쓴,
이향지 시인의 시집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의 서평을 옮깁니다.
무척 긴 글이지만 찬찬히 음미하시면
이향지 시인의 본색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서평이 무척 깁니다.
시간이 없으면,
오늘은 저 위의 시와 사진을 음미하시고,
서평은 천천히 두고 두고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속도를 잃어버린 바퀴 위에
이 사회의 가장 느린 시간을 살고 있는 몸들이 앉아 있습니다.
"저 물끄럼한 한 때"에서 당신은 얼마나 비켜 서 있는지요?
**
비로소 사람인 존재에 대하여
- 이향지 산시집,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이향지 시인의 山詩集,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나남출판, 2001)은 말 그대로 산시(山詩)요 산시(生詩)다. 혹은 몸의 시요, 혹은 영성의 시다.
산사람이면서 시인인 그가 열두 해 동안 써온 117편의 시들이 백두대간을 눈앞에 펼친다. 계곡 숲을 차오르는 멧비둘기, 바람 따라 서걱대는 나뭇잎들, 어느새 숨이 턱턱 차오르면 펼쳐지는 구름바다…. 시인의 시 쓰기가 산행이었듯, 그의 시를 읽는 것 또한 산행이 된다.
“山行이 곧 仙行이라는 말도 있으나, 나에게는 어느 길이나 사람이 가는 길이다. 내 山詩들도 사람살이의 비명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의 말처럼 사람살이의 비명이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의 산행을 따라가보자.
강물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새떼들에게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은 차라리 축복이라 말한다
무수한 길이 가지를 치며 뻗어가도
나에게로 오는 길은 오직 한 갈래 뿐
내가 선택한 길을 껴안고 더 사랑하기로 한다
길이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나리라, 길 안에서의 흔들림
― 「선자령 가는 길」 부분
선자령을 오르면서 시인은 강물을 박차고 오르는 새 떼를 본다. 그리고 그것은 차라리 축복이라 말한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철새들. 그렇다면 시인 자신의 길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이란 뜻이 아닌가. 아니 돌아가지 않을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일 게다. 그 길은 생성의 길이므로. 날개 돋움을 위한 고치의 길임으로. 세상의 모든 길이 그를 유혹해도 그의 길은 단 하나 시의 날개를 얻으러 가는 길뿐이다. 비록 그 길이 끝나기 전에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있을지언정 그는 그 길을 생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온몸으로 지금 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보십시오, 이 방주엔 좌측과 우측을 감싸는 현(舷)이 없습니다. 곰배골은 좌현의 닻, 강선골은 우현의 닻, 저 멧비둘기가 아무리 날아도 이 방주의 돛은 아닙니다.
이 방주엔 바람의 바다를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줄기 여린 풀꽃들이, 기대고 안아주며 얽혀 있습니다. 영아자, 냉초, 톱풀, 구릿대, 산꿩의 다리…
― 「곰배령」 부분
백두대간을 걷던 시인은 때때로 발 묶인 방주를 만난다. 점봉산을 넘던 시인은 곰배령이라는 방주를 만난다. 출항을 위한 돛은 세월에 묻고 땅속 깊이 닻을 내려버린 방주를. 어느새 바람은 바다가 되고 온갖 식물들을 가슴에 품은 방주는 바람의 바다를 건넌다. 어쩌면 시인은 저 산과 같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수천수만의 생명을 품고 키워내는 저 산과 같이.
나 세상 살다 추운 날이면 이 숲으로 돌아오리
생각만이라도 돌아오리
산죽 떼가 발을 걸면 걸려 넘어지리
단풍나무 붙잡고 일어서다 머리 위 구름을 보리
세상의 모든 잎새들 떨어지기 전 한때를 붉게 앓느니
새벽 비에 얼굴 씻고 돌아오는 가을 해를 보리
― 「너른이골 단풍 숲에서」 부분
곰배령을 넘어온 시인은 이제 너른이골에 서 있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 단풍이다. “모든 잎새들 떨어지기 전 한때를 붉게 앓”고 있는 나뭇잎들. 그러고 보니 시인은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시인 자신이야말로 한살이를 마감하기 전 붉게 앓고 있는 것이고, 그 앓음이 산행이요 시행으로 몸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나 세상 살다 추운 날이면” 돌아오겠다는 이 숲이야말로 지금 자기 자신이 만나러 가는 산의 길이요 시의 길이리라.
철의 길은 철의 바퀴로 누르며 가는 것이다
나란한 어깨와 어둠을 덧댄 창문 사이
너 지금 가는 길이 너 지금 꼭 가야하는 길인가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돌아와 해를 덜컥 띄운다
산이 오지 않으므로 내가 가는 날들이
헌신이라는 대답을 밀어보내기로 한다
산이 오지 않으므로 내가 가는 이 길을
가장 깊은 마중으로 안아들이기로 한다
나는 충분히 퍼질러 앉아 왔고 등받이에 기대 왔다
나는 평범에 흔들리면서도 보통에 안주해 왔다
쉬운 길을 택한 자는 넘어지지 않는다. 안다
얼음을 기며 눈을 헤치고 올라야 할 두타산
두타두타두타두타…… 청량리를 벗어난 동해행 통일호는
밤길에 물을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터지게 싣고
나란한 쇠의 길에 오류요 오염 같은 여자를 싣고
어제를 밀고 내일을 끌고 두타두타두타두타두타……
― 「두타행」 전문
읽을수록 두근두근 심장을 뛰게 하는 시다. 두타두타 쇠의 길을 달리는 철마 소리 두타두타 두근두근 두타두근두타두근. “철의 길은 철의 바퀴로 누르며 가는 것”이란다. 나는 자꾸만 이렇게 들린다. “이봐 소통, 시의 길은 시의 바퀴로 누르며 가는 것이야.” 난 그렇게 읽는다. 그러면 나는 내 안의 그 시인에게 동시에 묻는다. ‘이봐, 자네, 지금 가는 길이 자네가 지금 꼭 가야 하는 길인가?’ ‘시가 오지 않으므로 내가 가는 이 길을 가장 깊은 마중으로 안아들여야 한다.’ 그렇다. 시인은 지금 물리적으로는, 그의 발로는 산을 타고 있으되, 그 산은 또한 시의 산이기도 하다. 철의 길 철의 바퀴로 밀고 나가야 하는 길. 김수영의 온몸으로 시를 밀고 나간다는 경구를 여기서 또 만나고 만다. “오류요 오염 같은” 몸이라 말하지만 나는 끝내 그 여자 앞에 무릎을 꿇는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동굴이 열리고 쇠의 길이 놓인다. 들사람얼이 지난다. 두타두타두타두타. 그런데 왜 하필 두타지? 바다에 떠 있는 섬인가?
그의 산행을 따라 그의 시편들을 읽어나갈수록 그에게 있어 산행이 곧 시를 향한 길임이 드러난다. 그는 지금 산을 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론 시를 넘고 있는 것이다.
눈을 짚고 넘어지면 눈을 짚고 일어서라
크게 넘어진 자리에선 넓어진 감옥을 보라
처음 빛을 잃지 말고 처음 자리로 돌아가라
“포기 마라!”
네 무게로 다져진 눈은 네 어깨로 받아지고
네 온기로 녹은 눈은 네 늑골로 감싸안고
雪浴하라! 雪辱하라!
― 「고루포기산」 부분
눈 덮인 산(고루포기산)을 넘으면서 시인이 떠올린 것은(깨달은 것은) “포기 마라” 그리고 “눈을 짚고 넘어지면 눈을 짚고 일어서라” 결국 시인은 “제 무게로 다져진 눈을 제 어깨로 받아지고” 산을 넘고 만다. 보조국사 지눌의 법어 “因地而倒者 因地而起(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가 자연스럽게 시인의 마음에 닿은 모양이다.
포매팅을 갓 끝낸 디스켓처럼
윤전기 앞에 놓여진 백지 다발처럼
설레임도 희망도 모르는 新生으로
그냥 가는 것이다
어둠이 소리 없이 빛에 섞이듯
햇살이 불평 없이 어둠에 섞이듯
무거움도 가벼움도 모르고
가는 것이다
한때는 가장 따뜻한 집이었던 나의 몸이여
고통의 알들을 피부로 낳던 길의 기억이여
비와 허물을 가려주던 인연의 그들이여
나무가 부르는 바람의 노래여
서늘함이여
― 「수렴동詩 - 맨발의 新生을 위하여」 부분
산행을 통해서, 시를 통해서, 시인은 新生의 감각을 회복한다. 산을 한 번 넘을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산이 곧 몸이고 시가 곧 몸이다. 그 몸이 한 봉우리 넘으면 새롭게 태어난다. 그렇게 시인은 산을 넘고 있는 것이다.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맨발의 신생을 위하여.
伏主山 심설도 꺽지 않은 풋 열매로다
지금 저것을 열어도 날개는 없다
눈이든 바람이든 어둠이든 별이든
겪을 만큼 겪어야 날개는 온다
한 몸을 벗고 한 몸을 일으키기가
저다지도 더디고 고독한 것을
누가 날개 다음의 세계를 궁금히 여겨
날개 전의 쓰라림을 밟고 갔는가
― 「雪山의 벌레집 – 복주산에서」 부분
그러나 한편 시인은 또한 그 신생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님을 안다. 복주산 오르다 말고 어느 나무 아래 벌레집을 바라보는 시인은 날개 돋움을 위한 고치의 몸앓음을 노래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시인의 산행은 신생을 향하되 고치의 몸앓이기도 한 것이다. 길고 긴 산행이 끝난 연후에 비로소 시의 날개가 돋으리라.
내가 당신을 향해
“기러기!”
하고 부르면
그 작고 가벼운 것 되어
날아와 주겠습니까
내가 먼 당신을 향해
“강물!”
하고 부르면
그 길고 맑은 것 되어
달려와 주겠습니까
당신은 무거우니 내가 찾아가려고
내게로 온 계절을 잊고
딱딱한 뼈를 버리고
당신은 그리움 모르니 내가
달려가려고
그리우면 그리운 쪽에서
그 작고 가벼운 것 되어
그 길고 맑은 것 되어
― 「지리산 - 배낭을 꾸리며」 전문
산을 오르는 산꾼의 마음이 이런 거구나! 시를 향한 시인의 마음이 이런 거구나! 누군가를 사모한다는 것이 이런 마음이구나! 내 나이 육십 넘으면 이만한 연애시를 쓸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아내에게 이런 시 하나 들려줄 수 있을까?
며느리밥풀꽃!
이 작은 꽃을 보기 위해서도, 나는 앉는다.
바삐 걷거나, 키대로 서서 보면 잘 안 보이는 이 풀꽃들을 더듬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인가 끼니를 맞고, 밥상을 차리고, 주걱을 든다.
나는, 이 보라 보라 웃고 있는 며느리밥풀꽃을 밥처럼 퍼담을 수가 없다.
이 꽃들의 연약한 실뿌리들은, 대대로 쌓여 결삭은 솔잎을 거름으로, 질기게도 땅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갈매빛 솔잎들이 걸러주는 반 그늘 속에서, 꽃빛 진한 며느리밥풀꽃이 꽃빛 진한 며느리밥풀꽃을 낳는다. 보라.
통설이 전설을 낳는다. 보라.
며느리배꼽이나 며느리밑씻개 같은 마디풀과의 꽃들이 낮은 땅에서 창궐하는 동안에도, 며느리밥풀꽃들은 작은 군락을 이루어 산등성이를 기어오른다. 보라.
이 긍지만 높은 작은 꽃의 밀실(蜜室)에 닿기 위하여, 벌은 제 무게로 허공을 파며, 더 자주 날개를 움직여야 한다.
보여도 보이지 않게, 스스로 크기와 색깔을 줄여온, 며느리밥풀꽃의 시간들이, 내 이마에 스치운다.
보라. 보라 보라 웃고 있는 며느리밥풀꽃!
― 「며느리밥풀꽃」 전문
결국 이 시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집을 통해 이향지 시인이 하고 싶었던 모든 것 - 여자의 일생, 여자로서의 삶, 이 땅의, 여전히 진행 중인 약자로서의 삶, 그러나 결국 땅의 주인이며, 생명을 잉태하는 존재인 그런 여자의 역사에 대해. 비로소 사람인 존재에 대해.
2024. 12. 2.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이향지 #금강산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