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0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초라하게 보이고, 볼품없이 보여도
천안 입장이나 대전 판암동이나 충북 영동에는 포도밭이 참 많이 있습니다. 포도밭을 보면 참 신기한 마음이 듭니다. 여름에는 포도밭에 줄을 매어놓은 것에 포도 넝쿨이 가득 차서 밑이 보이지 않고, 밑에서 올려다보면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을이 되면 포도밭 주인은 포도 넝쿨을 전부 전지하여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잘라 줍니다. 그래서 앙상한 몸통과 가지로 겨울을 나고 그 해 봄이 되면 그 몸통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싹을 틔웁니다. 그 새 가지에서 포도가 주저리주저리 달립니다. 그러면 포도밭 주인은 포도가 달린 가지를 잘 보호하고 영양을 골고루 주기 위해서 열매를 맺지 않은 가지는 또 잘라주고 시원찮은 알갱이를 가진 포도송이는 일일이 솎아 냅니다. 그래야 다른 포도 알이 굵고 틈실해 지기 때문에 농부는 일 년 내내 손길이 바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포도나무라고 설명하시는 데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새겨 주십니다. 당신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수족을 모두 잘리시고, 알 몸통만 간직하기도 하시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붙잡고 있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당신의 지체가 모두 잘리는 아픔을 견디시며 새롭게 매달린 열매에 하늘에서 주시는 은총과 땅에서 빨아올린 삶으로 영양분을 만들어 열매에 전부 쏟아 붓습니다. 과감하게 가위와 톱으로 당신을 잘라내시는 아버지께 당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 놓으시고, 아버지의 처분에 언제나 순종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깨끗하게 손질하시도록 당신이 하시는 일을 모두 맡기십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아주 쉽게 말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또 쉽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로 남아 있는지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나 모든 식물에서 참으로 신기한 것은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에 온 영양을 공급하기 때문에 아주 초라해서 볼품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않은 가지는 잎이 싱싱하고 가지도 잘 뻗어 갑니다.
채근담에 "악기음하고 선기양하니(惡忌陰하고 善忌陽하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은 숨어 있기를 싫어하고, 선은 나타나기를 싫어한다."라는 말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주 풍성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아주 실하게 맺는 가지는 참으로 초라합니다.
자식과 남편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은 어머니의 모습은 볼품이 없이 쪼글쪼글합니다. 말없이 묵묵히 일하시는 아버지들은 참으로 초라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외면을 꾸미지 않고 모든 것을 희생하시며 사시는 모습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 위해서 아주 초라하게 사시는 것입니다. 묵묵히 교회 일을 하는 평신도들도 초라하게 보이고 참으로 볼품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겉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열매를 맺는 것 같습니다. 아주 외롭고 처절한 고통을 감수하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은 열매를 탐스럽게 키우기 위해서 아주 초라하게 그렇게 십자가형에 처해지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열매를 탐스럽게 맺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행동 지침을 말씀하십니다.
깨끗하신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정화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 머무르며 열매를 맺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는 이웃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는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항상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잘린 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지고, 불에 던져지는 존재임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훨씬 대담해졌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면 절대로 잘려나가지도 않고, 불에 태워지지도 않는다는 말씀에 희망을 걸고 '어떻게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해답을 주님께서는 이렇게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 좋으신 주님께서 모두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항상 선행을 실천하면서 주님의 구원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한다고 빈말만 하는 저희를 사랑하시는 주님!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당신에게 붙어있는 쓸 만 한 가지가 되게 하여주소서. 청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당신 안에 머무르며 진리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래서 당신의 제자가 되고 아버지께서 가득히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할례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1-6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3 이렇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선 이야기를 해 주어 모든 형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4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 사도들과 원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 몇이 나서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
축일5월 10일 성 요한 (John)
신분 : 신부, 영적 지도자, 교회학자
활동 지역 : 아빌라(Avila)
활동 연도 : 1499-1569년
같은 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Joannes)은 1499년 에스파냐 알모도바르 델 캄포(Almodovar del Campo)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살 때에 법률 공부를 위하여 살라망카(Salamanca)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법을 공부해 출세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과는 달리 공부 대신 수도 생활에 매력을 느껴 은수 생활을 위해 길을 떠났다. 그는 3년 동안 보속과 기도의 생활에 전념한 후 알칼라(Alcala)로 가서 도미니코회 수도승인 도미니코 데 소토(Dominicus de Soto)의 문하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양친이 모두 사망했고, 그는 1526년 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부모가 묻힌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양친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해외 선교에 대한 소명을 느낀 그는 멕시코로 갈 준비를 위해 세비야로 가서 기다리던 중 설교와 교리교육에서 탁월한 능력을 알아본 세비야의 대주교의 요청으로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 선교를 위해 국내에 남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뛰어난 설교가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이슬람교와 유대교에서 개종자가 많이 나오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거룩하고 엄격한 삶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회심하고 개종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거침없이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부자들의 잘못을 꼬집는 설교를 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받아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설교가로서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그는 에스파냐 전역을 순회하며 설교를 계속하는 한편,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2월 14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 10월 10일) 그리고 알칸타라(Alcantara)의 성 베드로(Petrus, 10월 19일)의 영적 지도자로서도 활약하였다. 사람들로부터 ‘안달루시아의 사도’로 불린 그는 1569년 5월 10일 에스파냐 코르도바(Cordoba) 지방의 몬티야(Montilla)에서 선종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시신은 몬티야에 있는 강생의 예수회 성당에 묻혔고, 오늘날 아빌라의 성 요한 성지성당으로서 많은 순례자가 찾고 있다.
그는 1894년 4월 6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2012년 10월 7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제13차 세계 주교시노드 개막미사를 집전하면서 아빌라의 성 요한과 빙겐의 성녀 힐데가르트(Hildegardis, 9월 17일)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2021년 1월 25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교령을 발표해 5월 10일을 아빌라의 성 요한의 기념일로 제정하며 전례력에 추가하였다.♧
축일5월 10일 성 욥 (Job)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연대미상
성 욥은 구약성서의 시서(詩書)에 속하는 욥기의 저자로 흔히 불린다. 욥기의 목적은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이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한 하느님께 대하여 자리 매김하려는 시도에 대한 것이다. 욥기는 크게 산문과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문 부분의 바탕을 이루는 본래의 욥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부터 근동 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일종의 민간 설화로 두루 퍼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기원전 1천 년 이후에 이스라엘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에제 14,14 참조). 바빌론 유배 이후, 곧 6세기 말엽 이후, 그리고 3세기 전반 이전에(집회 49,9 참조) 팔레스티나에 살던 어떤 유대인 저자가, 성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욥 이야기를 자기의 의도에 맞게 각색하고 윤색하여 거기에 독창적인 운문 부분을 지어 붙였다. 그러나 이 문문 부분은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다. 저자가 대화 부분의 욥을 통해서 토로하는 말은,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욥기는 욥이라는 특수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보편성이 이 책의 큰 특징을 이룬다. 욥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선택, 시나이 산 계약, 메시아 사상 등 선택된 민족의 특유한 사항이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아울러 유배 이후에 저술 되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성서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예루살렘 함락 - 성전파괴 - 유배”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공통 현상을 바탕으로 자기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욥기는 출발점에서부터 보편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주인공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그의 거주지도 이스라엘 땅이 아니다. ‘욥’이라는 이름 자체도 당시 여러 나라에서 쓰이던 이름이라고 생각된다(1,1). 욥의 세 친구 역시 모두 외국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다(2,11). 욥은 또한 대화를 시작하는 독백에서부터 이미 자기의 고통을 일반화한다. 고통에 처한 자신을 ‘고생하는 이들, 영혼이 쓰라린 이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을 대변하여 하느님에게 질문을 던진다(3,20-21). 물론 대화 중에 욥은 주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펼쳐 간다. 욥기의 저자는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을 토대로 처음부터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생각을 일반적으로 전개시킨다.
성 욥에 대한 전례적인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인정되었지만, 단순하고 곧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욥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John), 욥 (Job)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