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e God of the metaphysical age is dead. There is not a personal god out there external to human beings and the material world. We must reckon with a deep crisis in god talk and replace it with talk about whether the universe has meaning and whether human life has purpose.
초자연적인 신은 죽었다. 人間과 天地를 초월해서 따로 존재하는 신은 없다. 그런 신에 대해 얘기하느니, 우주의 의미와 우리 생(生)의 목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2. The doctrine of special creation of the species died with the advent of Darwinism and the new understanding of the age of the earth and magnitude of the physical universe. Special creation goes together with the notion that the earth and human beings are at the center of the galaxy (the galaxy is anthropocentric). The demise of a geocentric universe took the doctrine of special creation with it.
다위니즘의 출현과 함께 창조론은 의미를 잃었다. 天地와 宇宙에 대한 새롭고 정직한 이해만 있을 뿐이다. 창조론은 지구와 인간을 중심에 두는 조야한 우주이해에 불과하다. 지구 중심적 우주가 폐기되었듯 창조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3. The deliteralization of the story of Adam and Eve in Genesis brought an end to the dogma of original sin as something inherited from the first human being. Death is not punishment for sin, but is entirely natural. And sin is not transmitt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y means of male sperm, as suggested by Augustine.
원죄는 없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자연현상인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어거스틴이 말하듯 남자의 생식세포를 통해 조상 대대로 이어지는 그런 죄는 물론 없다.
4. The notion that God interferes with the order of nature from time to time in order to aid or punish is no longer credible, in spite of the fact that most people still believe it. Miracles are an affront to the justice and integrity of God, however understood. Miracles are conceivable only as the inexplicable; otherwise they contradict the regularity of the order of the physical universe.
신이 징계와 은총을 내리려 때때로 자연의 질서에 간섭한다는 주장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고 있지만 말이다. 신의 권위와 정의로움을 생각할 때, 기적이란 신에 대한 모욕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신의 권위와 정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인 냥 이해되고 있다. 기적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그 무엇일 뿐. 자연의 질서와 항상성 속에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5. Prayer is meaningless when understood as requests addressed to an external God for favor or forgiveness and meaningless if God does not interfere with the laws of nature. Prayer as praise is a remnant of the age of kingship in the ancient Near East and is beneath the dignity of deity. Prayer should be understood principally as meditation—as listening rather than talking—and as attention to the needs of neighbor.
기도는 초월적인 신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될 때 무의미해진다. 이런 기도는 신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면, 무의미한 것이 된다. 신을 숭배하는 기도는 고대 근동의 왕에게나 하던 숭배의 잔재에 불과하며, 그래서 오히려 신에 대한 모독이다. 기도는 명상이 되어야 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Christology (그리스도론)
6. We should give Jesus a demotion. It is no longer credible to think of Jesus as divine. Jesus' divinity goes together with the old theistic way of thinking about God.
예수를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예수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은 인격적 신을 떠올리는 구태의연한 유신론에 불과한 것이다.
7. The plot early Christians invented for a divine redeemer figure is as archaic as the mythology in which it is framed. A Jesus who drops down out of heaven, performs some magical act that frees human beings from the power of sin, rises from the dead, and returns to heaven is simply no longer credible. The notion that he will return at the end of time and sit in cosmic judgment is equally incredible. We must find a new plot for a more credible Jesus.
초기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세주는 고대 신화 속에서 빌어 만든 그들의 바람이다. 예수가 신의 아들로 세상에 와서 권능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며 하늘로 되돌아갔다는 것. 세상 끝나는 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다는 것. 다 사실이 아니다. 좀 더 현실적인 ‘살아있는’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
8. The virgin birth of Jesus is an insult to modern intelligence and should be abandoned. In addition, it is a pernicious doctrine that denigrates women.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현대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한 악질적인 무례함이다.
9. The doctrine of the atonement—the claim that God killed his own son in order to satisfy his thirst for satisfaction—is subrational and subethical. This monstrous doctrine is the stepchild of a primitive sacrificial system in which the gods had to be appeased by offering them some special gift, such as a child or an animal.
신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자위적 갈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는 소위 속죄론은 이성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 이 흉물스런 논리는 희생양이라는 원시시대의 사생아에 불과하다. 신을 달래기 위해 어린아이나 동물을 바치는 원시시대의 리바이벌이다.
10. The resurrection of Jesus did not involve the resuscitation of a corpse. Jesus did not rise from the dead, except perhaps in some metaphorical sense.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is that a few of his followers—probably no more than two or three—finally came to understand what he was all about. When the significance of his words and deeds dawned on them, they knew of no other terms in which to express their amazement than to claim that they had seen him alive.
예수의 부활은 시체가 소생했다는 것이 아니다. 혹 그것이 은유적 의미라면 몰라도, 예수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다. 부활의 의미는 그를 따랐던 이들 중 (아마도 두세 명에 불과했을) 누군가가 예수가 말하던 바를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의 말과 행적이 개벽을 주었을 때 그들은 어떤 말로도 그 경악스런 기쁨과 소중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난 살아있는 예수를 보았다, 라는 말밖에는.
11. The expectation that Jesus will return and sit in cosmic judgment is part and parcel of the mythological worldview that is now defunct. Furthermore, it undergirds human lust for the punishment of enemies and evildoers and the corresponding hope for rewards for the pious and righteous. All apocalyptic elements should be expunged from the Christian agenda.
최후의 심판을 위해 예수가 재림하리라는 기대는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신화적 세계관의 소산이다. 권선징악에 대한 욕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든 종말론적 요소는 기독교 교리에서 삭제되어야 마땅하다.
God's Domain according to Jesus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
12. Jesus advocates and practices a trust ethic. The kingdom of God, for Jesus, is characterized by trust in the order of creation and the essential goodness of neighbor.
예수는 신뢰의 윤리를 주창하고 실천하려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웃을 만들어나가고 이웃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13. Jesus urges his followers to celebrate life as though they had just discovered a cache of coins in a field or been invited to a state banquet.
예수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삶의 찬치를 벌이라고 말한다.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된 것 마냥, 상다리 부러지는 잔치에 초대된 것 마냥.
14. For Jesus, God's domain is a realm without social boundaries. In that realm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male nor female, slave nor free, homosexual nor heterosexual, friend nor enemy.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사회적 편견이 없는 공간이다. 유대인과 희랍인, 남성과 여성, 노예와 주인,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친구와 원수 같은 구분은 없다.
15. For Jesus, God's domain has no brokers, no mediators between human beings and divinity. The church has insisted on the necessity of mediators in order to protect its brokerage system.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인간과 신성(神性) 사이에 잡스런 중개인이 없는 세상이다. 교회는, 신과의 독점사업을 위해, 중개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16. For Jesus, the kingdom does not require cultic rituals to mark the rites of passage from outsider to insider, from sinner to righteous, from child to adult, from client to broker.
예수에게, 하느님 왕국은 예배의식이 필요 없는 세상이다. 기득권자가 되기 위해 죄사함을 받기위해,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신과의 독점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개인이 되기 위해 그 어떤 통과 의례도 요구하지 않는 세상이다.
17. In the kingdom, forgiveness is reciprocal: individuals can have it only if they sponsor it.
하느님 왕국은 상호적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용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18. The kingdom is a journey without end: one arrives only by departing. It is therefore a perpetual odyssey. Exile and exodus are the true conditions of authentic existence.
하느님 나라는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다. 오직 출발함으로만 도착할 수 있는, 끊임없는 방랑이다. 배척당하는 것, 집착 없이 홀연히 떠나는 것이야말로 참존재됨을 위한 조건이다.
The canon (성경)
19. The New Testament is a highly uneven and biased record of orthodox attempts to invent Christianity. The canon of scripture adopted by traditional Christianity should be contracted and expanded simultaneously to reflect respect for the old tradition and openness to the new. Only the works of strong poets—those who startle us, amaze us with a glimpse of what lies beyond the rim of present sight—should be considered for inclusion. The canon should be a collection of scriptures without a fixed text and without either inside or outside limits, like the myth of King Arthur and the knights of the roundtable or the myth of the American West.
<신약성경>은 기독교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 소위 정통파라고 자처한 자들이 작성한 일관성 없는 그리고 편견이 가득찬 기록이다. 교회가 채택한 성경들은 전통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또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에서 축소되기도 또 늘려지기도 해야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번뜩이는 깨달음을 주는 시인의 시를 애독하듯, 우리의 삶에 영적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면 성경이 되는 것이다. 경(經)은 편집된 모음집이다. 성경은 고정되어 규격화된 책자가 아니다. 박혁거세나 이티(ET) 같은 신화와 얘기도 포함되는 ‘안과 밖’이 없는 고전(古典)이다.
20. The Bible does not contain fixed, objective standards of behavior that should govern human behavior for all time. This includes the ten commandments as well as the admonitions of Jesus.
성서는 인간이 지켜야할 불변의 덕목을 규정하는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십계명도 그렇고 예수의 교훈도 마찬가지다.
The language of faith (믿음의 언어)
21. In rearticulating the vision of Jesus, we should take care to express ourselves in the same register as he employed in his parables and aphorisms—paradox, hyperbole, exaggeration, and metaphor. Further, our reconstructions of his vision should be provisional, always subject to modification and correction.
예수의 비전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기위해선 당시 예수가 사용했던 우화(寓話)와 격언들이 쓰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예수의 언행에서 보여진 역설, 과장, 허풍, 그리고 비유가 사용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의 비전을 재구성한다는 일은 현재의 우리 상황을 위한 재구성이기에 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그 재구성조차도 변경과 수정의 연속에 있다.
'transmitt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y means of male sperm'-- womb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길래, 그냥 옮겨봤어요. 페미니즘쪽 책을 읽어보면, 가계의 혈통 유지에서 sperm과 womb중 어디에 중요성을 두느냐에 따라 남성, 여성의 지위를 판가름할 수 있다고 해요. 북아프리카 수단인가 에서는 여성이 할례를 하는
데, 겉에서 보기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비추어질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 들여다 보게 되면, 여성들이 womb을 보존하려는 인식의 측면이 있고, 그런 고통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책임있는 위치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고 하네요. 물론 너무 문화 상대성으로만 해석하려는 것도 문제지만, 여태껏 그런 문화를
'저급 문화'라고 하여 (sperm문화가 womb문화를 저급문화라고 규정하며)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세워왔던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로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 것으로 의의는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저 아무래도 '딴지의 여왕'같아여..히히...그냥 수다떨고 싶어서..음..조신하려구 했는데..ㅋㅋ
첫댓글 .... 이미 자유인님이 요약판을 올려주셨네요. (자유인님 미오...)
아~ 미안합니다... 벌레 목사님이 엉뚱한 소리를 해서 증거 가져온답시고...ㅋㅋㅋ... 그런데 그 글을 가져와서 계속 헛소리하네요...ㅋㅋㅋ
'transmitt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y means of male sperm'-- womb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길래, 그냥 옮겨봤어요. 페미니즘쪽 책을 읽어보면, 가계의 혈통 유지에서 sperm과 womb중 어디에 중요성을 두느냐에 따라 남성, 여성의 지위를 판가름할 수 있다고 해요. 북아프리카 수단인가 에서는 여성이 할례를 하는
데, 겉에서 보기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비추어질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 들여다 보게 되면, 여성들이 womb을 보존하려는 인식의 측면이 있고, 그런 고통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책임있는 위치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고 하네요. 물론 너무 문화 상대성으로만 해석하려는 것도 문제지만, 여태껏 그런 문화를
'저급 문화'라고 하여 (sperm문화가 womb문화를 저급문화라고 규정하며)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세워왔던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로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 것으로 의의는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저 아무래도 '딴지의 여왕'같아여..히히...그냥 수다떨고 싶어서..음..조신하려구 했는데..ㅋㅋ
Funk, 그리고 예수세미나 박사님들의 한계는 바이블의 이야기, 특히 예수이야기가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못함입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래도 늪에서 끌고나가야 할 기독중생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자비량? 펑크목사님의 타계에 애도를 표합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