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3번째 편지 - 故 천병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로마의 축제들』, 아폴로도로스의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메난드로스 희극』, 『그리스 로마 에세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플라톤의 『전집 7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시학』 등 60여 권의 서양 고전.
제목을 읽기도 숨이 벅찬 이 서양 고전들을 단 한 분이 번역하셨습니다. 바로 천병희 선생님입니다. 지난주 12월 22일 천병희 선생님께서 83세의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저도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책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서양 고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천병희 선생님을 모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 번역한 책을 읽지 않고는 서양 고전의 숲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지성계는 천병희 선생님에게 큰 신세를 졌습니다. 이 분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는 그리스, 라틴 고전을 접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해 오늘 월요편지를 씁니다.
한 번은 어느 재단에서 선생님께 연구 교수직을 제안했답니다. 연 3,600만 원씩 2년간 7,200만 원의 지원을 받으면서 하고 싶은 연구를 하시라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인문학 분야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으니 그들을 지원하라며 고사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재단에서 행사에 잠시 와서 자리를 좀 빛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이렇게 말끝을 흐리셨다고 합니다.
"거기 다녀올 시간이면 원전을 스무 줄 이상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숙연함이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은 18세 때 플라톤의 <향연>을 그리스어로 읽고 플라톤 책을 번역하겠다고 결심하셨답니다. 번역 작업을 1972년 본격적으로 시작해 작고하실 때까지 놓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상당 기간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 작업을 천병희 선생님 혼자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의 경우 오랜 세월 수많은 학자들이 그리스, 라틴 고전을 번역해 왔습니다. 그 번역 작업 중 Loeb Classical Library라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미국인 은행가 James Loeb이 자금을 대서 1911년부터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34년 그가 사망할 당시까지 300권을 번역하였고 그는 기금 30만 불과 함께 그 프로젝트를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에 기증하였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번역된 책은 특별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왼쪽 면에는 그리스어나 라틴어 원문이 있고 오른쪽 면에는 영어 번역문이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오늘 현재 총 549권을 번역하여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수록된 그리스어 원전 고전은 1,657권, 라틴어 원전 고전은 486권으로 총 2,143권이니 Loeb Classical Library에서 100년간 그리스, 라틴어 고전의 4분의 1 정도를 번역한 셈입니다.
일본에서도 Loeb Classical Library를 참고하여 1997년부터 교토대학교에서 서양 고전총서(西洋古典叢書)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연 5-6권 정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어 고전 121권, 라틴어 고전 36권을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서양 고전 번역사업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기초작업을 천병희 선생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천병희 선생님은 인터뷰에서 고전번역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에 집착하는 이유는 번역도 창작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중국의 구마라습이나 현장법사의 한역(漢譯) 불경들은 동양의 대승불교 사상의 형성과 완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 문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는 물론 서유럽이 빨리 야만을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문화 덕분이었습니다. ‘르네상스’란 그리스 문화의 부활입니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철학자 화이트 헤드의 말이 있는데, 유럽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주석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까요?"
선생님은 고전 읽기의 의미에 대해 이런 답변을 하였습니다.
"고전을 모든 사상의 뿌리라고 하잖아요. 그리스 고전은 서양 사상의 뿌리이죠. 여기에 접근해야 서양 사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평생 하루 6시간 이상 번역에 몰두하셨다는 선생님께 인터뷰에서 <공부>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였더니 이런 답변을 하셨습니다.
"혼자 있으면 두려워질 때도 있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만이 생각이 커지고, 몰려다니면 자기 생활이 없어집니다. 눈을 감는 순간, 가장 후회스러운 것 중 하나는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한 번뿐인 인생을 의미 있는 일에 쓰지 않고 허송세월했다는 느낌이 아닐까요?
그러나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할 것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무엇을 했는가 보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 보라고 한 독일 시인 횔덜린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 사람으로 태어나 평생을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에 바친 천병희 선생님이야말로 의미 있게 한평생을 사신 분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제 선생님은 그리스 사람들이 죽어서 간다는 낙원 엘리시안에서 평생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만나 원 없이 대화하고 토론하실 것입니다.
지난 7년간 같이 서양 고전을 공부하였던 루첼라이 정원의 강신장 교장선생님, 김상근 주임교수님 그리고 30여 명의 도반들과 함께 선생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2.12.26.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