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66호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 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대설주의보』(민음사, 1983)
*
참담합니다.
1980년 오월의 참담함이 재현될 줄 누군들 알았을까요.
초현실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요.
최승호 시인의 시, 「대설주의보」가 더욱 선명해지는 참담한 아침입니다.
어제는 최승호 시인의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을 다시 꺼내 몇 편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저 무도한 대통령과 그 무리들을 꿰뚫고 있는 글들이 눈에 띄더군요.
차오르는 울분과 욕을 차마 쏟아낼 수는 없어서, 최승호 시인의 우화 몇 편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원숭이 나라에 몽구스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 있는데 원숭이의 왕이 백성들에게 한 약속과 다른 말을 할 때마다 혀가 갈라지는 형벌을 내리곤 했다. 그리하여 약속을 얼마나 안 지켰는지 왕에 오른 지 채 일 년도 못 되어서 원숭이의 왕이 연설을 할 때마다 갈래갈래 찢어진 혓바닥이 입에서 나와 턱 밑으로 늘어졌고 백성들은 불길한 징조로 여기며 그 혀가 꿈틀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그 너절하게 갈라진 혀의 모양이 낙지 발과 흡사하여 원숭이의 왕에게 낙지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되었다.
- 「혀」 전문
조회 시간이었다. 새장을 뒤집어쓴 앵무새 학생들이 운동장에 줄을 맞춰 모여 있었다. 단상에 대머리 앵무새 교장이 올라와서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오늘 할 말은 어제 한 말과 같다. 알겠는가. 이상이다.”
그러고는 앵무새 학생들의 인사를 받고 단상에서 내려갔다. 단상에는 교장이 싼 똥이 있었다.
- 「앵무새 학교」 전문
그는 평생을 기회주의자로 살았다. 이해득실로 얽힌 세상에서 손해보다는 이익을 취하면서 살다 보니 주위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노년은 쓸쓸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사과 궤짝에 담아 쌓아놓은 돈뿐이었다.
어느 날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마지막 기회처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득이 될 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쩐다? 궁리 끝에 그는 금으로 만든 관 속에서 죽기로 했다.
그는 금관 속에서 죽었다.
어느 날 금을 탐낸 도굴꾼들에 의해 그의 시체는 금관 밖으로 버려졌다. 그것이 굶주린 쥐들에겐 기회였다. 배가 터지도록 쥐들은 그의 살을 먹어댈 수 있었으니까.
- 「어느 기회주의자의 죽음」 전문
아직 세상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박용하 시인의 우화집 『감정 많은 사람』 중에서도 한 편 소개할까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뻔뻔한지 그들 중 누구도 암 걸려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그들이 얼마나 철면피인지 “얘네들은 안 되겠다!”며 암도 피해 다녔다는 후문이다.
뻔뻔한 놈들이 세계사를 지 맘대로 주무르게 한 일말의 책임은 일개 개인인 P에게도 있다.
- 「뻔뻔한 놈들의 세계사」 전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뻔뻔하지" "그들이 얼마나 철면피인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024. 12. 9.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