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말에 ‘찐 스승’이니 ‘찐 친’이니 하는 말이 유행입니다.
순우리말로 바꾸면 참 스승이나 진실한 친구라는 뜻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은 위선자라고 야단치시는데
이들은 ‘찐 지도자’들이 아닌 거짓 지도자들이라는 뜻일 겁니다.
이에 비해 오늘 독서의 복음 선포자들 곧 바오로와 동료들은
자기들이 ‘찐 종교 지도자’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을 듣는 우리에게
이들의 얘기가 결코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고 진실하게 들립니다.
사실 많은 경우 속으로는 자기를 자랑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겉으론 겸손을 떨지요.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자기를 자랑할 마음이 전혀 없기에 겸손을 떨 필요도 없고
자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기에 자기 진실을 정말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바오로 사도는 자기들이 ‘찐 복음 선포자’라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 자기들이 ‘찐 복음 선포자’라고 얘기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자기들은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손수 일하여 먹고 사는 것, 다시 말해서 놀고먹지 않는 것,
이것이 프란치스코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가 당당하게 살고,
당당하게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는 힘 또는 근거였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것을 열심히 선포하는 것도
사실은 놀고먹는 것이 아니기에 신자들에게 생계를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신자들과 똑같이 일할 때 더 당당하게 복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전 막노동할 때 저는 처음으로 부끄러움이나 죄송함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고생하는데 그들의 봉헌으로
나는 호의호식하고 있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같이 일하고 고생하니 신자들과 제가 같다는,
동질감이랄지 동료 의식이랄지 그런 것을 더 느꼈고
저의 복음 선포가 신자들의 현실과 겉돌지 않는다는 느낌,
신자들의 삶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도매 복음 선포와 소매 복음 선포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신자들을 도매금으로 그러니까 한 묶음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하나 소매금으로 대하며 복음을 선포하였다고 얘기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천 명, 만 명을 상대로 말로 하는 대중 복음 선포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인격적인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하나하나 이름으로 부르며 불러낸다고 하셨고,
다른 양들을 놔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맨다고도 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모두 다 사랑하시면서도
나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정말로 나만 사랑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내가 도매금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것이지요.
이렇게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동시에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라고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니 신자들은
그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바오로와 신자들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럽지만
바오로 사도 같은 ‘찐 복음 선포자’가 없더라도 여러분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제 말과
다른 사제들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찐 신자’입니다.
첫댓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주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