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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 충숙공 이예의 공적비 건립
가. 공적비 건립 개요
울산 출신으로 조선 전기 대일외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충숙공 이예(李藝. 1373 - 1445)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공적비가 일본 쓰시마(對馬)도에 세워졌다.
충숙공 이예 선양회(회장 이두철)는 2005.11.21일 쓰시마 원통사에서 선양회 관계자와 학성 이씨 문중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예 선생 공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선양회는 2004년 12월 이예 선생이 문화관광부의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뒤 공적비를 건립키로 하고 수차례 쓰시마를 방문해 건립부지와 공적비의 규모 등을 일본측과 협의했다.
원통사는 쓰시마 미네쪼(峰町)에 위치한 사찰로 1408년 이예 선생의 대일외교 주요 협력자였던 당시 쓰시마도주가 지었으며, 이후 대일외교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원통사 정문 화단 10여평 부지에 세워진 공적비는 주비 1개와 부비 2개가 붙어 있는 형태로, 3개 비석의 가로는 5m, 주비는 높이 3m50㎝, 부비는 높이 3m 규모다.
충숙공 이예 선양회 측은 "600년 전 울산 출신으로 대일외교를 이끌었던 이예 선생 공적비가 일본 현지에 세워졌다"며 "현지 주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로 가능했던 이번 공적비 건립이 한일 민간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일본 쓰시마(對馬)에는 우리나라 선조의 유적과 한국과 관련된 장소가 적지 않아 쓰시마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에게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우선 역사서를 통해 잘 알려진 신라 충신 박제상의 순국비가 쓰시마 북부 상미 미나토에 위치하고 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왕제 미사흔을 구해 신라로 돌아가게 한 뒤 자신은 일본에서 순국했고, 남편 박제상을 기다리던 부인이 망부석이 된 이야기로 유명하다.
쓰시마내 박제상 순국비가 있는데 이는 1988년 8월 한국의 황수영, 정영호씨가 일본 측 인사 등과 힘을 합해 세운 것으로 쓰시마내 선조의 유적으로 많은 한국 관광객이 최근 찾고 있다는 것.
또 충숙공 이예 선생의 공적비가 지난해 이예 선생 후손들에 의해 쓰시마의 미네쪼에 있는 원통사라는 절에 세워져있다. 울산의 학성 이씨인 이예 선생은 1373년 태어나 일생을 외교사절로 쓰시마 등지를 다녔다.
이예 선생은 당시 쓰시마에 억류된 조선인을 수차례 송환하고 조선통신사로서도 쓰시마에 방문했고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쓰시마를 정벌할 때도 쓰시마를 잘 아는 선생이 앞장서는 등 일본 외교사절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또 쓰시마 이즈하라항내 위치한 수선사라는 절은 백제 시대 우리나라 비구니가 지은 사찰이 있는데 이곳에 학자이자 항일의병장으로 유명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면암 선생이 항일의병운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혀 쓰시마로 끌려가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단식하면서 순국, 이 곳 수선사에서 장례를 치렀고 부산으로 이송되기 전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내 일본인들의 무덤 옆에 위치한 면암 선생의 순국비는 1986년 8월3일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한국전망대라는 곳은 쓰시마내에서 부산이 보이는 곳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고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휴대폰으로 한국에서 쓰는 것처럼 똑같이 한국과 통화할 수도 있다.
옛날 일제 강점기 때 쓰시마에 잡혀온 한국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설이나 추석명절이 되면 이곳에 올라와 한국 땅을 바라보며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기도 했다고 한다.
전망대 옆에는 108명의 조선사절단인 조선역관 일행이 쓰시마에 입항하기 전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에 휘말려 모두 죽었는데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추모비가 한일 공동으로 1991년 세워졌다.
이국전망대라는 곳도 있는데 이국인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여서 이국전망대라고 한다.
쓰시마 이즈하라 시내에는 서산사라는 사찰도 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통신사들이 쓰시마에 들릴 때 항상 머물던 곳이라고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을 탐색하기 위해 떠났던 황윤길과 김성일도 여기서 머물렀고 1580년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쓰시마 영주와 함께 국서를 위조했던 일본의 유명한 승 겐소도 이 사찰에 머물렀고 그의 목상이 있기도 하다.
이 밖에 1912년 한일합방이라는 굴욕의 세월 속에 고종이 환갑 때 낳은 덕혜옹주와 관련된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도 이즈하라 시내에 있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의해 14살 때 강제로 일본으로 가게 되고 19살에 쓰시마 도주의 아들과 강압결혼한 뒤 결혼생활이 오래지 않아 정신병을 얻어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 왔지만 정신을 찾지 못하고 결국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 불과 25년 전에 죽었는데 결혼 당시 쓰시마에 살았던 조선인이 축하하는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나. 통신사 이예 공적비 건립 경과
1) 공적비 건립의 발의
충숙공이예선양회 공적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지금까지 공적비 건립을 위한 준비를 해 왔습니다. 이제 공적비가 이렇게 웅장한 모습으로 건립되어 제막식에 임하게 되니 참으로 깊은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충숙공 이예 선생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2005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문화인물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공적비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로부터 9개월에 걸친 준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간략하게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2) 협의 및 계약의 과정
한국 측에서 6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 측에서 1회 한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협의 및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측에서는 주로 정영호 선생, 이수봉 선생, 이수원 선생, 이명훈 선생, 그리고 제가 주로 참여했으며, 일본 측에서는 나가도메 선생, 후지가미 선생, 다찌바나 선생께서 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 과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제1차 대마도 방문
일정: 2005년 2월 26~28일
활동: 선생이 왜구에 잡혀 와서 억류되어 있었던 화전포, 그리고 선생이 조문사절로 방문했던 원통사 등 유적지를 방문하여 공적비를 세울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리고 기존 한국선현 관련비를 둘러보았습니다.
B. 제2차 대마도 방문
일정: 2005년 4월 2~4일
활동: 공적비를 원통사 화단에 건립하기로 하고, 主碑 및 副碑의 石材와 크기를 정하였습니다. 碑文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음각하기로 하고, 공적비의 설계는 다찌바나 선생께 부탁드리기로 했습니다.
C. 제3차 대마도 방문
일정: 2005년 5월 21~22일
활동: 主碑 및 副碑에 새길 문자의 내용과 크기를 결정하고, 일본어 비문은 나가도메 선생이, 한국어 비문은 이명훈 교수의 책임하에 작성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D. 제4차 대마도 방문
일정: 2005년 6월 25~27일
활동: 가마다 석재점을 방문하여 主碑 및 副碑의 돌을 최종 선정했습니다.
E. 일본 측의 한국 방문
일정: 2005년 7월 7~9일
활동: 공적비 건립의 소요예산을 심의하고 확정하였으며, 主碑는 통신사이예공적비의 8자로 구성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F. 제5차 대마도 방문
일정: 2005년 10월 8~9일
활동: 가마다석재점을 방문하여 공적비 건립에 관한 계약을 맺었습니다.
G. 제6차 대마도 방문
일정: 2005년 11월 9~10일
활동: 主碑의 휘호와 副碑의 비문을 가마다 석재점에 전달하였습니다. 主碑의 휘호는 한국서예협회 부이사장인 서예가 학정 조사형 선생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원통사 주지와 단가총대를 방문하여 제막식 관련 부탁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막식의 식순 및 제반사항에 대해 광범위하게 협의하였습니다.
3) 공적비문 음각 및 건립의 과정
2005년 11월 10일에 가마다 석재점에서 비문의 음각이 시작되었으며, 11월 18일에는 원통사 화단 전면에 공적비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1월 21일 오늘 역사적인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충숙공이예선생은 1396년 공의 나이 24세 때 울산군 기관으로 있을 당시 왜적 비구로고 등이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울산 앞바다에 와서는 투항하겠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마침내 이은군수를 잡아 돌아가려하였다. 기관 이예는 이은군수를 따라가서 대마도 화전포에 억류생활을 한 것이 대마도와의 첫 인연이다. 마지막으로 대마도를 방문한 1443년 까지 대마도를 주목적지로 또는 왜구문제와 일본 국왕을 방문하기 위한 일본 방문의 중간 기착지로서 40여 차례 대마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대마도에 공적비 건립을 사업목표 1순위에 올렸다. 공적비 건립은 간단치가 않았다. 제일먼저 장소를 물색하고 토지 소유주로부터 동의를 받는 문제와 관계 당국과의 허가 문제, 비를 제작하는 것과 비용 문제 등 수없이 많은 절차를 거쳐야만하였다. 2005년 1월 26일 단국대 정영호 박사를 비롯한 이부열, 이수봉, 이명훈 등 4명이 1차 답사를 시작으로 동년 11월 9일 6차 답사를 거치면서 서예가 학정(鶴丁) 조사형(趙思衡)선생께서 쓰신 주비의 비문을 조각하고 오석 부비에 비문을 새겨서 11월 18일에 원통사 화단 전면에 설치하고 드디어 11월 21일에 ‘通信使李藝功績碑’를 제막하게 되었다.
朝鮮前期 通信使 忠肅公 李 藝 一三七三~一四四五
이예(李藝)는 학성이씨(鶴城李氏)의 시조로 벼슬이 종이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 使行은 조선전기의 十八回와 후기의 十二回를 합쳐 모두 三十回였다.
公은 그 중 六回의 使行에 正使 또는 副使로 참여하였으니, 조선역사상 일본에 가장 많이 왕래한 조선 제일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公은 태종‧世宗 代에 일본‧유구‧대마도에 四十여회 파견되어 六六七명의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였으며, 일본인의 조선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朝日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업적을 남겼다. 또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수력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는 등, 朝日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公은 외교업무로 대마도에 자주 왕래하였으며, 島主 宗貞茂의 사망 시에는 왕명으로 원통사(圓通寺)를 찾아 조문하였다. 公의 업적이 한일 양국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二00五年 二月에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온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니, 한일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는 오늘 公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현창하고자 이 碑를 세운다.
대마도에 우뚝 선 <통신사 이예 공적비> - 유 종 현 씀 (1)
대마도에는 통산사와 관련되는 역사 문화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명소가 마련되었으니 이것이 곧 원통사(圓通寺)에 우뚝선 ‘통신사 이예 공적비’이다. 2005년 11월 21일, 대마도 미네쵸(峰町)의 원통사에는 통신사 이예(李藝)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제막식에는 한국에서 이예 선생의 후손인 학성이씨(鶴城李氏)를 중심으로 조직된 충숙공이예선양회(忠肅公李藝宣揚會, 회장 李斗哲) 회원 80여명과 정영호 단국대 명예교수, 전북대학의 한종문 교수 등 관계학자들이, 일본 측에서는 대마시 의회 의장, 후치가미 기요시(淵上 淸) 전 이즈하라 정장과 다치바나 아츠지(橘 厚志) 전 부정장, 그리고 대마한국선현현창회장 나가도메 히사에(永留 久惠)선생과 현지 주민 다수가 참석하였다. 이날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제막식에 앞서 9시부터 충숙공이예선양회 주최로 유교식 제사를 올렸다. 이어 제막식에서는 선양회 이두철회장의 인사말, 일본 측을 대표하여 나가도메 선생의 축사, 그리고 여러 내빈과 현지 마을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제막식은 공적비 건조에 협조한 한일 양측 인사들에게 감사패와 기념품 증정을 끝으로 정오경 막을 내렸다. 공적비문은 일본 측과 한국 측 학자가 각각 기초하였는데, 일본 측 나가도메 선생의 기록을 소개한다. 조선전기 통신사 충숙공 이예 (1373-1445) “조선왕조 전기, 일본 무로마치(室町)시대 국왕 사절로서 40여회 일본에 파견된 이예는 일본 왕복의 도상인 대마도에 기착했을 뿐 아니라, 대마도까지 정사(正使)로 여러 차례 내방하였다. 이예의 공적은 조선 피로인의 송환과 아시카가(足利)장군 등에 기증한 대장경(大藏經)의 전달 등 양국 간 문화교류에 많은 기여를 한 사실을 들 수 있지만, 대마도의 입장에서 본 최대의 공적은 대마도와 조선국간의 ‘통교무역(通交貿易)’에 관한 조약체결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이로 인해 왜구가 진정되고 대마도에 밝은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당시의 대마도주는 소오가(宗家) 7대 사다시게(貞茂), 8대 사다모리(貞盛) 시대였으며, 이곳(원통사 경내)에 국부(國府=대마도 정청, 그 후 근세에 들어 국부는 이즈하라로 이전)가 있었으며, 사다시게가 사망함에 조문사절로 파견된 이예는 ‘원통사에 이르러 향전(香典)을 베풀고 제를 올렸다’다고 조선국왕에게 보고한 기록이 있다. 이예가 송환한 피로인의 수는 667명에 달하였으나, 자신이 어릴 적에 왜구에 의하여 납치 되어 간 모친과는 결국 재회할 수 없었다는 사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예의 경이적인 행동은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간 해적과도 접촉하여, 원념(怨念)을 초월하여 정의(情誼)를 피력하고 크게 공헌한 것을 생각할 때, 그 인품과 한없이 넓은 도량에 감동하고 경의를 표하며 공적을 현창코자 한다.” 사실 오늘 날 조선시대의 통신사라하면 임진왜란 이후 에도시대에 12회에 걸쳐 파견된 사절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조선초기에도 이예 선생과 같이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즉 외교사절이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우리나라에서나 일본에서도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작해야 신숙주, 송희경 등 당대 저명한 조정신료나 선비정도이지만, 이예 선생과 같이 큰 공적에도 불구하고 저명인사의 그림자에 가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훌륭한 분들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 공적비 제막식을 계기로 또 한 번 깨닫게 하였다. 외교관 출신인 나 자신도 이예 선생과 같이 다대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 역사적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알고 보니 그의 외교활동은 실로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다. 이예 선생은 1373년(고려 공민왕 22) 울산에서 학성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어머니가 왜구에게 잡혀가는 슬픔사연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어쩌면 그는 평생 잃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멀리 바닷길을 헤치고 왜구와 싸우며 그들과 타협하여 많은 피로인을 구출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1396년(태조 5) 그가 25세 때의 일이다. 울산 기관(記官)으로 근무하면서 울산군수 이은이 대마도로 잡혀갈 때 자진하여 함께 갔다가 이듬해 이은과 함께 풀려나서 귀환하여 관직을 얻게 된다. 이때도 대마도에 감금되어 있을 지도 모를 어머니를 찾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예는 그 이후 1400년(태종 즉위)인 28세 때부터 10년간 5회에 걸쳐, 회례사를 수행하거나, 자신이 회례관, 통신사 부사 또는 회례사 정사로 파견되어 대마도, 일기도 등지에 끌려간 피로인 약5백 명을 구출해 왔다. 그 동안 관직도 종 5품에서 정4품으로 승격되었다. 44세 때는 통신관으로 유큐국에 파견되어 왜구에게 잡혀간 우리백성 44명을 송환하였고, 46세 때는 대마도에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화통과 완구를 동철로 제조하는 기술을 도입하였다. 이어 50세와 52세 때는 회례사 부사로 일본 국왕에게 파견되어 우리의 대장경을 사급하였으며, 1428년과 1430년(세종 10-12) 56세 때와 58세 때는 다시 통신사 부사로 다녀와서 우리나라에 일본식 자전 물레방아의 도입, 화폐의 광범위한 유통,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을 추진하였고, 또한 ‘단단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빠른 선박’의 제조기술 도입을 세종에게 건의하였다. 1432년(세종 14) 그가 60세가 되던 해에는 회례사 정사로 일본 국왕에게 파견되어 대장경을 사급하였으며, 1438년(세종 20) 66세 때 첨지중추원사(정3품)로 승진하여 대마도에 파견되고 1443년(세종 25) 때는 자진하여 대마도체찰사로 파견되어 피로인7명을 구출하는 한편 왜적 15명을 생포해왔다. 이 공으로 동지중추원사(종2품)로 승진하였으며, 대마도에서 발급하는 입국허가제를 중요골자로 한 계해약조(癸亥約條) 체결을 주도하였다.
(2)
이예 선생은 1445년(세종 27)에 향년 7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왜구에게 잡혀간 수많은 인명을 구출하는 당대 보기 드문 인도주의자였으며, 일본에 우리의 선진문화의 표징인 대장경의 사급과 일본에서 앞선 자전 물레방아와 일본의 화폐제도, 상가제도의 우수성을 연구 도입코자했으며, 사탕수수의 재배, 조선기술의 도입, 민간인 광물채취 자유화 등 당시 조일간의 문화 교류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훌륭한 외교관이었다. 그가 펼친 외교활동은 임무수행 과정에서 비교해 볼 때, 교통이 발달된 오늘 날의 외교활동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때로는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위험도, 때로는 해적을 만나 싸워야 했던 모험도 스스로가 몸소 극복해야 했던 실로 목숨 건 투쟁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우리나라 근해에서 일어났던 왜구의 해적행위와 조일간의 분규 등 긴장 때문에 일어났던 군사충돌,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교섭 등 국제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은 조선조에 앞선 고려시대부터 일본과 한반도간에는 국가 간의 외교교섭이 있었다. 그 원인은 ‘왜구(倭寇)’의 활동이었다. 일본의 카마쿠라(鎌倉)시대(1192-1337) 후반, 특히 ‘원구(元寇)’라고 불리었던「분에이·코안노에키(文永·弘安の役)」 이래, 서일본의 몰락한 중소 영주와 해민(海民) 즉 왜구가 한반도 연해에 출몰하여 식량, 재산 심지어는 사람까지 약탈하는 해적행위를 거듭했다. 이와 같은 해적은 그 후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도 확대되어, 동아시아의 해상과 연해는 한때 각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해민들의 자유왕래지역을 형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고려조는 서 일본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왜구’의 근절을 요청하기 위해 빈번히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예를 들면 1367년(고려 공민왕 16, 조치=貞治 6, 쇼해이=正平 22) 김일(金逸)을 정사(正使)로 하는 30여 명의 일행이 이즈모(出雲)를 거쳐 교토에 들어갔던 것도 이에 준한 임무를 띤 외교사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수단인 외교 교섭으로 왜구의 해적행위가 근절되지 아니하자,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대마도 정벌이 감행되었다. 무력으로 왜구의 본거지 또는 중개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를 막자는 의도였다. 1419년(세종 1) 이종무 장군이 인솔하는 정벌군이 대마도를 침공한 것을 두고 우리 역사 기록에는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하고, 일본은 이를 오오에이노 가이코(応永外寇)라고 한다. 조선조정에 신뢰가 두터웠던 대마도주 소오 사다시게가 1418년 4월에 별세한 후, 조선조정은 왜구재발을 염려하고 있던 차, 그 이듬해 5월 왜선 50여척이 두음(豆音)에 침입하고 이어 왜선 38척이 해주의 연평을 습격하였다. 이에 태종은 대마 출병을 결심하고 병선 227척에 병사 17,285명을 태워, 65일분의 군량을 싣고 6월 19일 거제도를 출항하였다. 대마도 공격은 10여일간 계속되었다. 전과로서 왜선 대소 129척을 나포하고 민가 1939호를 불태웠으며, 104명의 왜병의 수급과 함께 수많은 왜군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의 역사기록서인 ‘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는 당시 일본인 사망자를 123명, 조선 측 희생자를 2,500여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희박하다. 조선군은 7월 3일 거재도로 귀환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 무로마치 막부는 수년 전에 있었던 여몽 연합선단의 대마도 내습과 더불어 이번 조선군의 대마공격의 진상 조사를 목적으로 조선에 사절을 보냈다. 이에 답례로서 1420년(세종 2)에 소위 회례사라는 이름으로 송희경(宋希璟)을 일본으로 파견하게 된다. 회례사 송희경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그 후 조일 관계는 수복되고, 다시 국교가 개시되었다. 대마도에 관하여는 1443년(세종 25, 카키츠=嘉吉 3)에「계해약조(癸亥約條)」가 양국 간에 체결되어 그 전후부터 무역과 통교의 규칙이 정비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과정에서 이예 선생은 1428년에 박서생(朴瑞生) 정사와 함께 부사로 파견되면서부터 이 계해약조 체결의 주역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요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도주 소오씨(島主宗氏)의 세견선(歲遣船)은 매년 50선(船) - 조선국왕으로부터의 세사미두(歲賜米豆)는 매년 200석 - 조선으로의 도항선(渡航船)은 다이묘의 배(大名船)라도 대마도 도주가 발행하는 문 인(文引=도항허가증)을 필요로 한다. - 대마도내의 호족에게도 도항선을 인정한다. 이와 같이 조선은 여러 가지 특수권익을 대마도에게 부여하여 대마도를 조선의 대외정책의 협력자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상의 특권부여뿐 아니라 조선왕조의 관직도 부여했다. 그들을 조선 측에서는 수직인(受職人), 수도서인(受図書人)이라고 불렀다. 이 수직인, 수도서인의 특권은 머지않아 대마도뿐 아니라 규슈 북부나 서일본의 여러 호족에게 급부되었으며, 이들 호족도 또한 조선으로 교역선을 보내는 것이 인정되었다. 즉 대마도와 그 도주는 일본국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한편 조선국왕에 대해서도 신종관계였다는 이중구조가 이 시기에 생겨났다. 이 이중구조는 근대국가의 성립시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측으로서는 대마를 특별 취급하여 후대함으로써, 국가적 위신을 높일 뿐 아니라 대마도주가 해적행위를 단속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포섭정책’ 또는 ‘길들이기’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예 선생의 외교업적은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의 타고난 재능, 학식, 효성, 그리고 강인한 정신력과 민족애는 우리겨레의 앞날에도 영원한 귀감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