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들은 누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온몸에 펄펄
넘치는 힘을 느끼며 "오늘 내가 등판하면 너희들은 죽었다고 복창하라"고 자신감에 찬 날이면 흠씬 얻어터지고, 거꾸로 "오늘은 몸이
찌뿌드드한 게 몇회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하고 몸을 사리는
날이면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야구는 상대적인 경기. 투수가 지나친 자기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정면 승부하다 보면 상대방에게 통타당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고,
반대로 자기확신이 없을 때는(그렇다고 지나치게 위축돼 자신감을
잃으면 안된다) 조심스럽게 피칭하게 되므로 의외의 호투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를 주무른 대투수들. 그들은 프로유니폼을 입을 때부터 주위의 기대가 큰 만큼 뭔가 보여주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고 마운드에 나서지만 그들이 첫선을 보인 데뷔무대는 언제나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특급투수들의 데뷔전을 돌아보자.
우선 박철순은 예외다. 프로원년(82년)의 기린아였던 그는 당시 국내 유일의 특급 선수(연봉 2천4백만원)답게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82년 2월 28일. 박철순은 MBC를 상대로 동대문구장 마운드에 섰다. 그의 마음은 두갈래였다. 하나는 물론 이기겠다는 강한 욕망이었고 또하나는 두려움이었다.
MBC라면 전날 개막전에서 초반 5-1로 뒤지고 있다가 10회 연장
끝에 이종도의 만루홈런으로 11-7로 뒤집었던 뚝심을 보여준 팀이
아니었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아닌게아니라 박철순은 1회말 2사
1,2루의 위기에서 백인천과 대결, 3루 옆을 통과해 레프트선상을
빠지는 선취 1타점 2루타를 두들겨 맞았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배워온 박철순과 일본 프로야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두 거물의 첫
대결이었다. 안쪽으로 평범한 직구를 던지다가 통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1실점이 곧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박철순이 백인천을 두,세번째 타석에서 내야땅볼과 중견수플라이로 잡는 사이 OB타선은 5회초 윤동균의 역전중전적시타와 신경식의 2타점 우월 3루타, 9회초 신경식과 양세종의 프로야구 첫 랑데부홈런 등으로 무려 9점을 뽑아준 덕분에 박철순은 9-2로 첫승을 챙길 수 있었다.
박철순의 진가는 게임 중반부터 완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미국 프로라는 게 어떤 것일까 하고 박철순의 일거수일투족에
잔뜩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는 기민한 수비동작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경기 초반 직구 위주로 피칭하다가 중반부터는 너클볼을
가미하면서 체인지업의 위력을 톡톡히 살려냈다. 요즘에는 투구 스피드의 완급 조절이 매우 일반화된 투구요령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낯선 것이어서 빠른 직구에만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MBC 타자들은 번번이 범퇴당할 수밖에 없었다.
4안타 완투. 데뷔전을 그렇게 장식한 박철순은 4월 4일 MBC에
5-4, 7일 삼성전에서 3-2로 각각 역전패, 1승 2패가 되면서 특급투수로서의 능력에 다소 의심을 사기도 했으나 4월 10일 전주에서 해태에 3-0 구원승을 따내면서부터 9월 18일 롯데전에 이르기까지
무려 22연승 행진을 벌였다.
박철순 못지 않게 관심을 모은 것은 장명부의 데뷔전이었다.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1억8천만원의 대우로 삼미에 입단한 그는 일본 히로시마 카프에서 에이스로 군림했었다는 위력이 과연 어떤 것인지 대단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의 데뷔전을 살피기 위해서는
시범경기부터 살펴보자.
동계훈련 중에도 장명부는 슬렁슬렁 컨트롤 연습만 했기 때문에 그의 직구 스피드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팬들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83년 3월 20일 롯데와의 시범경기에 모습을 드러낸 장명부는 불과 2이닝을 던지면서 11타자를 상대로 4안타 3사사구 4자책점을 기록하고 말았다. 더구나 볼을 던지는 모습에 전혀 진지한 맛이 없어 삼미가 완전히 고물이 된 선수에게 괜히 헛돈만 쓴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주위에서 불안해 하면서 "속지 않았느냐"하는 의견이 하도 많이 나돌자 김진영 감독은 이틀 뒤 MBC와의 시범경기에 장명부를 내보내면서 "이번에는 네가 과연 능력이 있는지 진지하게 게임을 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완투 끝에 9-7로 이기긴 했지만 장명부는 여전히 장난끼섞인 피칭으로 일관했다. 성미급한 사람들은
"뭐 저 따위가 억대투수야"하고 빈정댈 정도였다.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장명부가 한국에서 테스트 무대에 선 것이었지만 실은 장명부의 입장에서는 그가 한국타자들을 테스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스컴은 "장명부, 1억짜리 기대 외상졌다"는 비난투로 바라봤다.
김진영 감독이 다소 불만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자 장명부는 "봉황의
뜻을 뱁새가 어찌 알리오"하는 식으로 대꾸했다.
"제가 상대방을 파악하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내가 가진 무기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게 좋습니까? 걱정 마십시오"하고 싱긋이 웃으면서 거꾸로 감독을 달래더라는 것이다.
이미 '너구리'라는 별명을 갖기 시작한 장명부는 3월초 일본에서 건너오기 전에 일본 후쿠오카켄 후쿠야마시에서 전지훈련중인 삼성
캠프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이충남 조감독을 만난 장명부는 "한국이라고 가게된 데가 삼미라는 밑바닥팀인데 정말 가기 싫다"고 능청을 떨었다. 이충남 조감독은 '혹시 장명부가 삼성으로 오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하고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으려니까
너구리 장명부는 한술 더 떠 "여기서 연습 좀 하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이게 왠 떡이냐... 장명부는 삼성타자들을 상대로 배팅볼도 던져주며 훈련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삼성 타자들을 테스트하며
장단점을 파악하려는 '스파이작전'이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아무튼 장명부는 83년 4월 3일 롯데전을 한국무대 등장의 데뷔전으로 삼았다. 그의 '첫 작품'은 포볼. 정학수를 상대로 스트라이크 하나 던지지 못하고 스트레이트 포볼로 걸렸다. 4번 김용희에게는 중전안타를 맞아 2사 1,2루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장명부는 5번
김용철을 범타로 잡고 간신히 실점을 모면했다. 4,5회말에는 김용희, 박용성 등 선두타자에게 2루타를 내주었으나 역시 실점은 하지
않았다. 입으로 '쉭쉭' 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플레이트 양쪽에 걸치는 절묘한 컨트롤로 타자들의 의표를 찌른 결과였다. 그 게임은 결국 삼미의 10-4 승리로 끝났는데 6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티며 데뷔전을 완봉으로 장식하려던 장명부는 10-0으로 승세가 굳어진 7회말 8번 심재원에게 우전적시타를 맞고 실점하자 30승으로 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데 만족하고 마운드를 김상기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이 장명부의 데뷔전을 무대로 첫선을 보인 또하나의 대투수가 있었다. 1-0으로 뒤지던 롯데 선발 노상수가 4회초 2사 만루의
위기에 몰리더니 기어이 조흥운에게 밀어내기 포볼을 내주자 그가
즉시 구원등판, 뒤처리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박준영에게 2타점 좌전적시타, 정구왕에게 3루앞 내야안타, 이영구에게 또다시 2타점
중전적시타 등 프로무대에 등장하자마자 3연속안타를 맞고 말았다.
그는 6회초 2사후 정구왕에게 홈런까지 얻어맞아 혹을 붙였다.
그는 다름아닌 최동원이다. 롯데와 계약금 7천만원, 연봉 3천만원의 호조건으로 입단 계약. 그러나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이미 81년 9월에 작성한 계약서를 들이밀며 2중계약의 자격시비를
걸어오는 통에 KBO부터 선수계약승인을 받지 못해 시범경기에도
나서지 못하는 등 엉거주춤한 채로 동계훈련기간을 보내야 했던 최동원이었다. KBO는 병역특례법 등을 자료로 첨부, 토론토의 계약이 '원초적 불능계약'이라는 등을 미국 커미셔너 사무국에 보내 양해를 구한 뒤에야 3월 25일 최동원에게 롯데 선수자격을 부여했다.
최동원으로서는 차후 대투수로 뛰어나게 될 채비를 갖추기에는 정신적으로 안정돼 있지 못한 상태였기에 데뷔전을 엉성하게 치르고
말았다.
장명부에게는 득달같이 '너구리'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김일융은
좀더 세월이 흘러서야 그의 특성이 나타나 '밤의 신사' 또는 '황금박쥐'라는 별칭이 주어졌다. 야간경기에 워낙 강한 면모를 보인 덕분이다.
장명부가 어딘지 구질구질하고 넉살스러운 면을 가졌다면 김일융은 우선 용모부터 깔끔했고 게임내용도 산뜻한 정통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데뷔전 모습은 그런 이미지와는 판이했다.
장명부가 83년 롯데를 상대로 완벽한 선발승을 거둔 것처럼 김일융도 삼미에게 개막전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뭇 달랐고
이 경기는 그가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도안 삼성 동료들과의
친소(親疎)관계를 크게 좌우하는 분수령이기도 했다.
84년 시즌은 4월 7일 개막됐다. 전년도 등위에 따라 적지(인천)에서
방문경기를 치러야 했던 삼성은 삼미전에 에이스 김시진을 선발로
내세웠다. 김시진은 전년도 입단하자마자 17승을 올려 국가대표의
명성을 그대로 프로무대로 연결시키며 에이스 자리에 오른 만큼 가장 믿음직한 개막전 선발감이었다. 게임은 순탄하게 풀려갔다. 1회초 공격 시작과 함께 장효조의 적시타로 1점을 선제한 삼성은 5회초에도 좌익선상 3루타로 나간 선두 김근석을 함학수가 중전적시타로 불러들여 2-0으로 리드. 5회까지 2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나가던
김시진은 6회말 정구선에게 좌월 홈런을 허용, 2-1로 쫓겼으나 삼성 타선은 8회초 정현발의 좌월 2점 홈런 등 5개의 사사구와 4안타를 집중시켜 단숨에 5점을 보태 7-2로 완전히 승세를 굳혔다.
그러나 만루의 잔루를 남기고 8회초 공격을 마감한 아쉬움 탓이었을까, 아니면 큰 스코어차에 방심한 탓이었을까, 김시진은 8회말 마운드에 서자마자 무사만루의 위기를 부르더니 양승관에게 큼직한
좌월 만루홈런을 얻어맞아 졸지에 7-5로 쫓기고 말았다. 김영덕 감독은 벌겋게 달아오른 김시진을 빼고 양일환을 구원투입했다. 양일환은 8회를 마감하기까지 2루타를 포함한 2안타와 포볼 2개를 내주고도 추가실점은 모면했다. 1사 1,2루에서 김정수의 우전안타가 터졌을 때 1루주자 권두조가 폭주, 2루주자 금광옥과 3루에서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삼미 공격의 맥이 끊겼기에 망정이지 게임은 졸지에 뒤집힐 뻔했다.
한숨 돌린 삼성은 9회초 내야안타 2개와 포볼로 만든 1사 만루 찬스에서 안전한 길을 택해 오대석의 스퀴즈번트로 1점을 추가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은 8회말 위태로운 피칭을 했던 양일환을 다시
마운드에 올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굳히기 요원으로
택한 것이 김일융. 82년 14승 2패로 압도했던 삼미에게 83년에는
장명부에게 톡톡히 당하면서 5승 15패 1무로 몰렸던 삼성이었던지라 "너희한테 장명부가 있다면 우리에겐 김일융이 있다"며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첫선을 보인 김일융이었지만 국내 무대 첫 상대인 정구선을
5구만에 포볼로 내보내더니 김진우에게는 좌전안타를 허용, 어설프기 짝이 없는 출발을 보였다.
"억대씩이나 주고 데려온 투수가 뭐 저렇노"하는 비난이 나오려는
순간 김일융은 양승관과 김경남을 차례로 삼진으로 낚아 "과연 다르긴 다르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 찬사를 보내기엔 일렀다. 금광옥과 대결하다가 폭투를
범해 주자들을 한 베이스씩 올려보낸 김일융은 그 실수를 덮어버리려는 듯 금광옥에게 좌중월 3점 홈런을 내주고 말았다. 게임은 졸지에 8-8 동점이 됐고 김시진의 승리는 그 홈런에 실려 훨훨 날아가버렸다.
연장전. 거기서 삼성은 10회초 1사 1,2루에서 박정환의 중전적시타로 1점을 추가하고 김일융은 10회말을 잘 막아 9-8로 승리했다. 그래 놓고 보니 김시진이 챙겨야 할 승리를 김일융이 '홈런을 맞은 덕분에' 가로챈 꼴이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김시진과 김일융 사이에는 약간 떨떠름한 감정이 생겨났고 그런 관계는 둘이 한솥밥을 먹는 동안 내내 계속됐다. 하기야 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팀내 1인자로
군림하려는 마당에 또다른 강자가 나타나 왕초 자리경쟁을 벌인다면 달가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남들은 김일융과 김시진을 삼성의 쌍두마차로 꼽았지만 둘 사이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시진의 데뷔전은 과연 어땠는가. 그가 83년 5월 3일 삼미와의 대구경기에 첫모습을 나타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김시진은 돈벌이나 진로에 관한 한 억세게 운이 나쁜 편이었다. 80년 한양대 졸업반이던 그는 8월에 서울서 열린 한미대학선수권대회에 대표로 뽑혀 3차전 선발로 등판했으나 게임에 앞서 1회초 워밍업 투구를 하다 어깨를 삐끗, 선두타자 슈미트를 포볼로 내보내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그것은 심각한 부상으로 악화됐고 진작
포항제철로 정해졌던 진로도 막혀버렸다. '개띠 3총사'로 불리는 동기생 최동원과 김용남은 나름대로 거액의 스카우트비를 받고 롯데,
한국화장품으로 각각 진로를 정했지만 김시진은 어깨부상 때문에
갑자기 주가가 하락, 당초 오가던 흥정마저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김시진은 홧김에 군에 입대해 버렸는데 1년반 뒤인 82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따낸 멤버로 나중에 병역특혜를 받게 된 것을 생각하면 면제받을 수도 있었던 군복무를 한 셈이었다.
하긴 대한민국 남자로서 신성한 병역의무를 마친 것이므로 내놓고
억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 억울한 건 억울한 것이고 군대생활 말년에 '고로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던 것은 더더욱
이가 갈리는 노릇이었다. 83년 4월에 제대 특명을 받아놓은 김시진은 삼성과 83년초에 입단계약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매스컴은 그의 입단에 따른 삼성의 전력변화를 진단하는 기사를 쓰는 것도 얼마든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군대행정이 어디 그런가. "김시진이 프로에 대비해서 훈련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아직 현역군인 신분으로 괘씸한
일"이라고 생각한 윗사람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사실 김시진은
군에 입대할 당시 신병훈련을 면제받는 특전을 받았었다. 경리단(육군)과 상무(공군)의 스카우트 경쟁 속에서 시달리다 보니 고단한
신병훈련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한 육군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밝혀지자 김시진은 병장 계급장을 달고 말년에 신병 훈련소에 들어가 '박박 기어야'했다. "니기미, 안해도 될 군대생활을
괜히 한데다 말년에 이게 무슨 ×같은 꼴이냐"고 단내나는 입으로
투덜댄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삼성은 거물투수 김시진의 입단을 관중동원에 활용할 작정으로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해 롯데와의 대구 홈게임에 데뷔시킨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5월 3일 삼미전이 초반부터 2-0으로 끌려가던 중 8회초
원아웃 때 이충남 감독대행은 느닷없이 김시진을 성낙수에 이어 투입했다. 이틀 후의 선발등판에 대비하라는 뜻이었는지도 몰라도 김시진은 등판하자마자 첫 타자 이광길을 상대로 그가 프로생활을 하는 동안 줄곧 따라다니던 '트레이드마크'를 보여주었다. 즉 포볼로
내보낸 것이다. 뒤이어 정구선에게 우중월 2루타, 김진우에게 좌전안타, 이선웅에게 센터 희생플라이를 맞아 2실점했고 9회초에도 내야실책으로 1점(비자책)을 더 뺏겨 영 떨떠름한 데뷔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게임은 결국 삼성의 5-1 패배로 끝났다.
약속했던 어린이날 롯데를 상대로 처음 선발등판한 김시진은 4회말
대량 6득점을 등에 업고 7회까지 7안타로 버텨 7-3으로 데뷔 첫승을 손아귀에 쥐는 듯했다. 그러나 8회부터 세이브에 나선 성낙수는
한 이닝을 잘 막았으나 9회초 우경하, 김용희에게 각각 2점 홈런을
맞아 리드를 홀랑 까먹더니 7-7 동점에서 연장 10회말 2사후 터진
정현발의 끝내기홈런으로 승리를 물거품으로 돌려놓았다. 김시진이 또한번 '니기미' 소리를 내뱉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스타 선동열의 데뷔전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데뷔는 85년 시즌이 중반으로 치달은 후기리그 초엽에
가서야 이뤄졌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대 졸업 당시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동열은 대학 2학년 때인 1982년 9월 서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일본, 대만 등 난적들을 꺾고 한국을 우승으로 이끄는 수훈을
세워 자신의 주가를 한껏 드높였다. 그러나 대학 시절 무리했던 투수들이 으레 그렇고 특히 고려대 출신들이 그렇듯이 선동열도 졸업을 앞두고는 팔꿈치 고장을 일으켜 그다지 싱싱한 모습이 아니었다.
병역특혜까지 받아놓은 선동열은 대개의 국가대표 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태의 손짓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주가를 최대한 돈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다. 처음 해태와 접촉한 선동열은 계약금 연봉을 합쳐 2억5천만원, 해태는 계약금 7천만원에 연봉 1천2백만원을
각각 요구하고 제시했으니 3배 차이가 나는 마당에 계약이 손쉽게
이뤄질 턱이 없었다. 선동열은 일단 대학원 진학을 줄다리기 싸움의 방패로 삼았다가 낙방하자 한국화장품으로 뛰어들었다. 줄다리기에 아직 본격적인 불이 붙기도 전인 84년 12월 17일 한국화장품에 찾아가 입단확인서와 인사기록카드를 작성, 실업선수임을 '확실하게' 마무리지어 놓았다. 그뿐 아니라 85년 3월 16일 벌어진 아마야구시즌개막 시범경기에도 출전, 한국전력과의 대전에 3회 중간계투로 나서 2이닝동안 9타자를 상대로 2안타 1실점으로 던진 실적까지 남겼다.
그러나 병역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해태측의 입단종용과(85년말 이후에 프로에 입단하면 병역특례자 프로전향 유보기간이 넘어버려 특혜를 상실하고 군에 입대해야 했다) 해태팬들의 성화에
못이긴 선동열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시즌개막을 닷새 앞둔 85년 3월 25일 슬그머니 한국화장품 합숙소를 빠져나와 해태와 입단계약을 맺어버렸다. 조건은 계약금 1억3천8백만원, 연봉 1천2백만원, 합계 1억5천만원.
그러나 아마야구 측이 아무리 힘빠진 신세로 몰락했다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마-프로 협정에 의하면 일단 실업에 진출한 대졸선수는 2년간 프로전향을 못하게 돼 있다. 선동열은 이미 한국화장품 소속으로 선수등록을 마쳤을 뿐 아니라 실업야구 시범경기까지 치른 몸이었다. 그러고도 냉큼 해태와 계약해버렸으니 그동안 그에게 월급주고 훈련시킨 한국화장품이나, 국가대표로 계속 뛰겠다는 뜻을 가상히 여겼던 대한야구협회 측이나 심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강경조치가 선동열의 프로계약무효 가처분신청. 아마-프로 협정에는 위반사항이 나왔을 때의 제재조치는 마련해 놓치 않았기 때문에 야구협회는 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선동열은 프로선수 자격에 제약을 받게 됐고 해태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의 간곡한 중재 덕분에 6월을 넘기고
7월에 가서야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당초 알려지기로는 선동열의 출전제한이 풀리는 것은 후기리그 개막인 6월 29일부터였다. 해태는 그날 광주 홈게임에 선동열이 첫
등판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아마-프로의 막후교섭 결과는 7월부터나 등판할 수 있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 이틀의 유예로 가장 기뻐한 것은 해태와 6월말 대전이 예정돼 있던 MBC의 이광은이었다. 그는 당시 17연속게임 안타행진을 벌이고 있었는데 선동열이 나오면 중단될 게 뻔하다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그의 등판일이 7월로 미뤄진다고 하자, "어휴, 살았다. 그러면 자신있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게아니라 이광은은
선동열이 아닌 강만식을 상대로 1회초 2점 홈런을 터뜨려 18연속게임 안타로 당시 타이기록을 세우고 7월 2일 청보전에서 19게임으로
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이것은 선동열의 등판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이고 어쨌든 그는
7월 2일 대구에서 벌어진 삼성전을 데뷔무대로 삼았다. 입단계약
후 98일만에 이뤄진 등판이었다. 그러나 프로전향 첫걸음을 떼는
선동열이 맞상대하기에는 상대 투수가 너무 강했다. 다름아닌 전기리그 15승이나 올린 김일융이었기 때문이다.
'하룻강아지' 아니 '새끼범' 선동열의 화려한 야구인생에 첫 삼진의
제물이 된 타자는 공교롭게도 2회 장효조였고, 4회말 첫 안타를 뽑아낸 것도 타격의 달인 장효조였다. 어쨌든 선동열은 7회까지 산발
4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 김일융과 팽팽한 0의 행진을 이어갔다.
선동열은 예의 시속 145km의 강속구를 자랑했다. 그러나 워낙 오랜만의 등판인데다 모든 야구인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볼을 많이 던져 7회까지의 투구수가 105구나 됐고 그
피로는 8회말 삼성 공격 때 한꺼번에 노출됐다. 원아웃을 잡은 뒤
허규옥에게 내야안타를 내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련한 이해창과 13구까지 가는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우전안타로 굴복했다.
여기서 선동열의 기를 꺾는 안타를 친 이해창은 "구질과 볼배합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피칭내용이 단조로웠다. 볼의 스피드는 좋았지만 투구폼이 크기 때문에 타이밍을 잡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듣던 것보다는 위력이 떨어진다"고 술회했다. 당시 새끼호랑이였던
선동열은 그런 과소평가에도 할말이 없었다.
1사 1,3루가 되자 선동열은 장효조를 고의4구로 걸리고 김성래와의
대결을 택했으나 김영덕 감독은 박승호를 대타로 투입했다. 그리고
박승호는 2구째를 깨끗이 2타점 중전안타로 연결, 균형을 깨뜨렸다. 선동열에게서 최초로 뽑아낸 타점이었다.
낯선 프로무대에서 냉정을 잃은 선동열은 그후 김용국에게 2타점
좌월 2루타, 정진호에게 1타점 중전적시타를 줄줄이 얻어맞는 등 8회에만 투아웃을 잡을 동안 공 36개를 던져 집중 5안타로 5실점하고 씁쓸하게 모자를 벗고 강판했다. 김일융은 대세가 결정난 다음인 9회에 2점을 선심쓰고 16승째를 챙긴 반면 선동열은 데뷔전에서
1패를 안고 프로생활을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동열은 역시 대가다운 면이 있었다. 게임이 끝난 후 오만가지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의 질문공세에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각종 안부전화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이튿날에는 벌써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 오래간만에 실전 마운드에 서는 낯섦 때문에 컨트롤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프로야구라는 게 어느 수준인지 몰라 겁도 났었는데 비록 지긴 했지만 한 게임을 치르고 나니 해볼만하다는 자신이 생겼다."
그가 8.1이닝동안 9안타 내준 것에 대해 임신근 당시 해태 투수코치(작고)와 박영길 삼성 타격코치의 견해는 이랬다.
"오늘 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틀림없이 좋은 투수가 될 자질을 확인했다. 안타는 9개 맞았지만 4개 빼고는 빗맞았거나 야수들이 잡을 수도 있었던 것들이다. 몸쪽으로 붙여 승부를 하라고 했는데 겁이 났는지 자꾸만 달아나는 피칭을 하다 얻어맞았는데 앞으로 틀림없이 잘할 것이다."(임신근 코치)
"좋은 투수다. 초반 컨트롤이 나빠 볼을 많이 던진 게 후반에 얻어맞은 원인이 됐다. 게임감각이 익으면 최고투수가 될 것이다."(박영길
코치)
과연 전문가들의 전문가다운 예상대로 선동열은 비록 신통치 않은
데뷔전을 치렀으나 그것으로 액땜을 한 셈치고 20세기 안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최고투수의 자리에 올랐다.
박동희의 데뷔전을 보자. 한다 하는 선수들이 다 그랬듯이 박동희도 '해외진출'과 150km대에 달하는 빠른 직구(흔히 '광속구'로 표현한다)를 계약교섭 조건으로 고려대 선배인 선동열보다 2백만원
많은 계약금으로 입단했다. 그는 그만한 대우를 받을만하다고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박동희가 첫선을 보인 것은 90년 4월 11일 대구구장이었다. 선동열이 고배를 마셨던 바로 그 마운드. 2월 3일에 가서야 비로소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바람에 프로기질이 얼마나 몸에 배였는지가 미지수였던 그에게는 싱싱함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과연 그 싱싱함은
단연 돋보였다.
3-1로 리드한 6회부터 김청수를 구원한 박동희는 관중석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몽롱한 시선을 오로지 포수 미트에만 모으고 151km의
강속구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강타자 박승호를 삼진으로 낚아 데뷔
첫 상대를 KO로 산뜻하게 장식한 박동희는 이만수를 내야땅볼, 이현택을 삼진으로 처리하고 6회를 간단히 넘겼다. 그러나 7회말 선두 김종갑에게 솔로홈런을 허용, 3-2로 쫓기며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괜찮아, 내가 던지라는 대로만 던지면 돼."
한문연 포수의 위로에 정신을 가다듬은 박동희는 덜덜 떨리는 무릎에 애써 힘을 주며 더더욱 포수 미트에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류중일 삼진, 이종두 삼진, 강기웅 삼진. 삼성 타자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가운데 박동희는 그렇게 7회를 막았다. 롯데 타선은 '슈퍼 베이비' 박동희의 가슴을 쓰다듬어 주느라 8회초에는 타자일순하며 집중 5안타로 5점을 보태 8-2 스코어를 만들어 주었다.
8회말, 장태수 삼진, 김성래 삼진, 그리고 이만수 삼진. 어느덧 박동희는 롯데의 대선배 최동원이 일찍이 85년에 일궈놓았던 6연속탈삼진 타이기록을 수립하고 있었다. 박동희는 9회에도 삼진 2개를
추가, 4이닝을 던지면서 피안타는 홈런 1개뿐, 무려 10개의 삼진을
빼앗았다. 데뷔전만 놓고 보면 실로 억대 계약금이 아깝지 않은 대투수임에 분명했다.
박동희의 데뷔전에는 중요한 보조출연자 한 명이 있었다. 장명부가
국내무대 첫선을 보일 때 찬조출연했던 최동원이 바로 그다. (그는
왜 이렇게 조연 역할만 해야 했는지.) 삼성 선발로 나온 그는 1회초
김민호에게 2점 홈런을 맞는 등 1.1이닝동안 9타자를 상대로 3안타
2포볼 3실점, 시즌 첫 패배의 멍에를 쓰고 말았다. 열살 차이의 나이를 속이지 못하는 듯 최동원은 이미 전성기의 빠른 직구의 위력을 잃고 상대를 유인하는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하다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아무튼 세이브를 따내며 프로무대에 등장한 박동희는 롯데 대선배였던 최동원이나 많은 야구관계자들에게 세월무상, 후생가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빠른 공만이 억대 계약금을 받는다"는 말을 낳을 정도로 역시
150km대의 강속구로 아마야구를 휘어잡던 정민태(계약금 1억6천만원)도 데뷔전에서는 박동희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 병역기피 사건으로 영어(囹圄) 생활까지 치르는 고통을 당한 뒤 역시 메이저리그 손짓을 배경삼아 역대 최고대우를 경신한 정민태는 1개월여의
옥고로 쇠잔해진 몸을 추스르고 언제 등판하느냐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초 5월 중순에나 등판이 가능하다던 진단은 점차 빨라져 5월초로
앞당겨졌다가 때마침 쾌속항진하는 태평양호를 더욱 가속시키기
위해 4월 22일 쌍방울전으로 일정을 재차 앞당겼다. 이날 정민태가
인천 더블헤더 첫 게임의 선발로 내정된 데에는 "비교적 만만한 상대로 마수걸이를 장식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었는데 종전의 삼미를
연상케 하는 '도깨비 방망이'의 쌍방울을 이끄는 김인식 감독은 그런 설명에 은근히 '빈정이 상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민태는 역시 이름값을 하기 시작했다. 팔꿈치가 제대로
굽혀지지 않아 도리깨질하는 듯한 폼으로 던지면서도 구속은 무려
147km에 달했다. 쌀쌀한 초봄에 몸이 덜 풀린 타자들이 결코 호락호락 쳐낼 수 없는 스피드였다.
선두타자 김호 삼진, 조용호 삼진, 김만후 삼진. 2회초 선두타자 김기태도 삼진. 이렇듯이 데뷔 첫무대에서 4연속타자 삼진을 뽑아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네 타자가 삼진을 당하는 때까지
아무도 그의 공을 배트로 건드려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5번 김만후가 볼카운트 2-3이 된 후 굴린 2루수앞 땅볼이 23구만에 처음
볼과 배트가 부딪힌 것이었다.
마침 태평양은 1회말 정문언의 적시타로 1점을 뽑아줘 정민태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려 했으나 정민태는 6회까지 매회 탈삼진을 곁들이면서도 5회초 2사후 이상대를 포볼로 내보낸 후 박기택에게 우중월 2루타를 허용, 1-1 동점을 내주더니 7회초 김기태 포볼, 김만후에게 역전 좌월 2루타를 얻어맞고 최창호에게 마운드를 넘겨야 했다.
이 게임은 7회말 김동기의 동점홈런 덕분에 2-2 무승부로 끝나 정민태에게 패전기록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 당시는 6.1이닝동안
탈삼진 9개에 2안타 2실점으로 막은 정민태의 성공적인 데뷔전이라는 데에 세상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박동희나 정민철에게는 '배뜨자 순풍'만은 아니었다. 박동희는 "이 정도의 스피드라면 10승은 따놓은 당상이고 15승도 가능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은 하한선으로 들어맞았다. 프로 첫해에 7패를 가미하며 10승에 머물고 말았던 것. 그때만
해도 지나치게 무리한 기용이 그에게 해가 된 탓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었으나 이듬해(91년)에는 아프다는 이유로 강팀과의 대결에는
슬슬 꽁무니를 빼 강병철 감독의 분노를 샀다. 그래도 성적은 14승
9패나 돼 '3세번째' 시즌인 92년에는 드디어 20승투수로 발돋움하리라는 게 그를 아끼는 팬들이나 주변 관계자의 기대였으나 4월중순 의사 장티푸스에 걸려 전반기는 겨우 2게임만 뛰고 1승 1패로
마감하는 등 7승 4패에 머물렀다. 그러나 박동희는 94년 들어 롯데의 세이브요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뒤가 꼬이긴 정민태도 마찬가지였다. 5월 9일까지 4게임에 나섰던
그는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등판을 번번이 거부, 정동진 감독의
질책을 면치 못했다.
던지기만 하면 팔뚝이 퉁퉁 부어오르는 이상이 생기자 미국 스포츠의학 전문가 앤드류 박사에게 진찰을 받은 결과 인대가 일부 끊어진 것으로 밝혀져 수술이 불가피했다. 그가 아프다고 발뺌한 것이나, 팀을 위해 전심전력하지 않는다고 질타한 것이 모두 우스운 꼴이 돼버리고 말았다. 데뷔시즌에서 1승 3패의 성적을 남긴 정민태는 94년부터 옛 명성을 되찾으려는 재기의 길을 조심스레 걷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