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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있는 풍경」화왕산
화왕산(火旺山) 정상에 오른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과 고암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본래「불의 뫼」란 뜻을 품고 있다. 가야시대에 축조하였다는 성곽을 깔끔하게 복원한 모습에 물웅덩이도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화왕산은 화산이 폭발하여 형성된 산이다. 분화구였던 곳에는 아직도 3개의 연못이 남아있다. 새롭게 정비해 놓은 연못이 바로 분화구의 하나라는 이야기다. 또한 분지를 이루며 억새풀로 가득 들어차서 장관을 이룬다. 동쪽 사면을 제외한 대부분이 급경사를 이루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물은 옥천저수지로 흘러든다. 사방으로 뻗은 능선은 가을에는 잡나무 하나 없는 억새가 일품이라면 봄에는 진달래가 절경인 명품으로 등장한다.
6만평에 가까운 구릉지가 온통 억새밭으로 풋풋한 냄새가 풍겨난다. 저쪽에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배바위가 있다. 2009년인가 정월대보름날 달집태우기의 이벤트로 화왕산 억새태우기 행사과정에서 그만 큰불이 번졌다. 볼거리에 몰려들었던 관광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불길이 내뿜는 독한 연기에 질식할 것 같아 밀리고 밀리다가 가파른 배바위 인근에서 7명이 소중한 생명을 빼앗기고 81명에게는 잊지 못할 크나큰 흠집을 남겼다. 곳곳에 불탄 흔적과 오래도록 아물지 못할 쓰라린 상처로 남아서 마음 아프게 한다. 하지만 야속한 것이 세월이라고 그날의 악몽 같은 아수라장은 슬그머니 자취 감추듯 잊혀가고 억새만 더 길길이 자라 숲을 이루었다.
살아가면서 아파보거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잘 참고 견디며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뿐만 아니라 자연의 세계도 이런저런 크고 작은 온갖 수난을 겪으며 초목들이 피고 지고 자라나는 것이리라. 다만 사람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마음 내키는 곳을 찾아서 이사를 할 수 있지만 자연의 세계는 스스로는 떠날 수 없어 태어나는 그 순간에서부터 죽는 그날까지 좋으나 싫으나 한 곳만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억새가 여름은 초록물결에서 가을이면 은빛물결 겨울에는 대궁이 금빛물결로 장관을 이루며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설레게 한다. 이곳 화왕산에는 진달래와 억새가 번갈아 축제를 벌려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 모은다.
화왕산은 본래 불의 뫼로 화산이 폭발한 산 달집 태운다 불장난으로 번진 불 수많은 인명사상 참사에 질긴 목숨 살아남은 억새는 더 번성하여 살풀이 춤이라도 추는가 애잔하면서 화려한 은빛물결 허준의 삼적사 너와집, 굴피집, 움막집도 널너리기와집 부럽잖은 보금자리 한센병 환자 의인과 억새꽃 웃음 짓고 있네. - 화왕산 억새
억새 숲을 가로질러 산성 동문 쪽으로 간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홍의 곽재우 장군과 의병 천여 명이 분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문과 동문 쪽은 산성이 잘 복원되어 있으며 성문을 나서면 허준 영화세트장이 있다. 생각과 달리 얼핏 들여다보기에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다. 버림받은 사람들이 숨어살던 곳이니 오죽하랴. 그러나 그들에게는 삼적사의 너와집, 굴피집, 움막집이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더 없는 보금자리다. 400년 전 광해군 때 양반상놈에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며 가장 밑바닥 인생으로 천민들 중에서도 섬뜩섬뜩 꺼리며 멀리하던 나병환자를 모아 의사로서 인간애를 실천하며 살신성인한 의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허준은 한센병 환자들이지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며 살아야한다는 데 힘을 실어주었다. 남들이 기피하고 꺼려해도 진솔한 마음으로 도와주며 헌신하였다. 그들은 한 시대의 의인이며 선지자를 만나는 행운을 잡았다. 중국은 명대(明代)에 이시진의 본초강목이 있다면 조선은 허준의「동의보감」이 있다.「동의보감」은 중세 동아시아의학을 집대성하여 현재까지 동양의학 발전에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도 꺼려하고 기피하여 한센병 환자는 산속으로 음지로 피해 다녔다. 산상의 억새보다도 아주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로 어렵게 한 곳에 정착하여 살아가며 모처럼 기를 폈다. 억새의 세상을 만들었다.
억새는 결코 외롭지 않다. 그네끼리 서로 몸을 부비며 서로 노래하며 산다. 이웃을 원망도 시기도 부러워도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길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함께 어울려 숲을 만들고 어려움을 견뎌내며 춤판을 만든다. 하지만 억새는 누군가에게 잘 보여주기 위해 치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미끈미끈하게 자라났다. 강한 집념으로 내공을 쌓듯이 자신을 채찍질하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남모를 세월 보내며 수많은 눈물을 삼켰는지 모른다. 억새가 강렬한 햇살에 비바람을 맞으며 자신을 이겨낸 수도승 같은 역경을 수없이 겪어냈을 것이다.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가을 한 철이 되어서야 야단법석에 신기한 눈초리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환호성을 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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