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방향 우회전하여 터미널 진행
호산교
다리 건너 뚝방길 좌회전
소방서 앞
옥원방향 좌회전
상수도 취수장
우측진행 전봇대 2개째 우회전
정수장
입구에서 우회전
수릉교
다리 건너서 직진 후 수릉 도로따라 좌회전 후
직진하다 우회전(옛7번 국도)
원래의 코스를 버리고 임도를 선택
사실은 살면서 다녀본 코스라고
소공대비 올라가는 임도로 무조건 선택한 길잡이의 실수
그래도 일행님들의
자전거 라이딩 코스 사전 답사는 실행?했네요
소공대비 올라가는 임도 입구
뒤 돌아본 호산 방향
소공대에서 본 임원항
소공대비
삼척 노곡리 마을 옛 국도변에 서 있는 비로, ‘소공대’위에 놓여 있다.
조선 세종 5년(1423) 이곳 일대에는 대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거의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구하고자 황희 선생을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하였고,
이곳으로 부임해 온 황희는 정성을 다해 이들을 도와 마침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시 황희가 가끔 쉬곤 하던 와현(瓦峴)이라는 고개에
돌을 모아 단을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후 중종 11년(1516) 그의 증손인 황맹헌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둘러본 뒤 보수를 하고 비를 세워두었는데,
비바람에 쓰러져 부러지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선조 때 삼척부사로 부임해온 그의 6대손 황정식이
옛 비를 치우고 그 터에 다시 세워놓은 것이다.
비는 낮고 널찍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윗면 양쪽이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소공대비’라는 비의 명칭이 가로로 적혀 있다.
선조 11년(1578)에 세운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곤이 비문을 짓고,
려원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관동별곡★
1580년(선조 13) 정월 작자가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내 ·외 ·해금강(內外海金剛)과 관동팔경(關東八景) 등의 절승(絶勝)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道程)과 산수 ·풍경 ·고사(故事) ·풍속 및 자신의 소감 등을 읊은 노래로,
조선시대 가사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한 백미편(白眉篇)이다.
음률이 주로 3 ·4조로 이루어진 이 가사의 용어는 비교적 순수한 우리말이 많고,
비록 한문어휘라 하더라도 대개 우리말화한 것들이다.
또한 이 가사는 파란이 심하였던 작자의 관직생활에서 비교적 득의(得意)에 찼던
시절의 작품인 만큼 전체의 분위기가 웅장하고 명쾌하여 화려체의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대구법(對句法)의 묘를 살리면서 감탄사를 적절하게 첩용(疊用)하고
생략법을 알맞게 구사하는 등 능란한 수법은 송강의 빼어난 문장의
경지를 남김 없이 보여 주는 대목이다.
전편(全篇)을 크게 4단(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단은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된 감격과 임지로 부임하는 모습을 엮은 서곡(序曲)이고,
제2단은 내금강의 절경을 읊은 노래이며,
제3단은 외금강 ·해금강과 관동팔경의 절경을 읊은 노래이며,
제4단은 작자의 풍류를 꿈 속에서 신선이 되어 달빛 아래 노니는 데 비유한 결구(結句)이다.
《송강가사》에 있는 가사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죽림(竹林)의 누엇더니,
관동(關東) 팔백리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慶會南門) 바라보며,
하직(下直)고 물너나니 옥절(玉節)이 압패 셧다.
평구역(平邱驛) 말을 가라 흑수(黑水)로 도라드니,
섬강(蟾江)은 어듸메오 치악(雉岳)이 여긔로다.
소양강(昭陽江)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말고,
고신거국(孤臣去國)에 백발(白髮)도 하도할샤"
[출처] 관동별곡 | 두산백과
소공대
소공대비를 지나면서 나타나는 갈림길
우측진행하여 직진
여기서 길을 잃다
직진하면 멧되지 농장인데 길이 없네요
세심하지 못 했네요
하지만 좌측 임도로
약 5~6km는 긴 느낌이네요
도보 계산상
청명한 날씨에 응봉산, 백병산도
시야에 들어 오내
임도 삼거리
좌측 이천리,우측 임원3리(자연 휴양림)
우측진행
점심 만찬
멋는 즐거움이 무엇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