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아주 작고 예쁜 겨자씨라는 사람이,
그냥 한 알갱이로 살다가 죽기로 결심했다.
더이상 알갱이로 남지 않고,
싹으로 지면에 나와서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 죽음을 택한것이다.
한 알갱이로 살다가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다가 그 알갱이 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씨가 죽음을 선택한것은 없어지고, 사라지기 위함 이었을까?
전혀 아니다,
오직 씨앗이 죽을 때 한 그루 나무가 되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씨가 죽은것이 아니라 그 싹, 그 나무 안으로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 죽은 씨앗이 이제는 나무 전체에 영향을 주며 존재한다.나무는 한 알의 씨앗으로부터 자라나서,그 씨앗이 나무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그 나무를 보여지게 나타나서, 그 씨앗을 볼 수 도 찾을 순 없다.
그렇다면 나무를 볼때 나무가 살았다로 볼것인가, 아니면 그 씨가 살았다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그 씨로말미암아 나무가 살았다고 보아야 할까?
바울의 논리는 "나" 라는 나무가 산것이 아니라, 이 나무 안에 그 씨, 그리스도가 살았다고 자기를 인식하며 단언한다.
예수께서는 아들로, 영원한 생명이 담겨진 씨로 와서 많은 영생의 열매를 맺기 위해 죽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예슈아는 보이지 않고 발견할 수 없다.그가 죽었기 때문에 "나"라는 나무에 전체에 녹아 들어있다. 그의 형상(DNA) 으로 감싸고 있는것이다.
그는 죽었기 때문에 온 우주에 그의 흔적이 스며 들어있다.그 씨는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스며들어 와 있으며, 내게 영향력을 끼치며
그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며 그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려고 실재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로 작정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코스모스 속에서, 지금 실재하는 것 속에서 죽어서, 우주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었음을 이런 방법으로 표현 한 것이다. 이것이 토라( 말씀), 선지자, 사도들을 통해 그 비밀을 드러내려고 그렇게 순교하면서, 죽음에 넘기어 지는것도 기쁘게 여기면서 열심을 내었던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