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각각 54,69위의 히트를 기록했고 앨범 또한 골드를 기록했다. 당시 Out Of Cellar로 3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고 있던 래트(Ratt)의 오프닝밴드로 전미투어를 가진 이들(존은 래트의 보컬 스테픈 피어시와 지낸게 지옥 그 자체라고 말한바 있다. 존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면
"그는 나와 맞지 않았죠, 그건 지옥이었어요"
하지만 후에 둘의 관계는 좋아져서 래트의 90년작 Detonator에 존은 백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은 영국서 열린 Monsters Of Rock에 참여하기도 했고 스콜피온스(Scorpions), 키스(KISS), 주다스프리스트(Judas Priest)등의 오프닝 밴드로 자신들의 이름을 알려나갔다. 그러다가 런던 도미니언(Dominion)에서는 첫 헤드라이너 공연을 가졌는데 공연중 전기 시스템이 나가버렸다. 멤버와 스텝, 관중이 모두 당황하고 있을 때 존이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나와 공연을 계속했다는데 'camp fire session'이라고 알려진 이 공연을 존은 'a great historical night'라고 회상한다.
"그게 더 훌륭한 앨범이었어야 했는데..."라고 존이 후회한 바 있는 2집 이후 이들은 역사적인 인물 둘을 만난다. 하난 데스몬드 차일드(Desmond Child: 키스의 같은 대 히트곡의 작곡자)이고 또하난 3,4집의 프로듀서가 되는 브루스 페어반(Bruce Fairbairn: 러버보이(Loverboy)로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지만 80년대 중후반 본 조비, 에어로스미스, 포이즌등을 프로듀스하며 팝적 센스가 뛰어난 프로듀서로 급부상됨)이다. 그 두명은 본 조비가 현재까지 7500만장의 전세계적 판매고를 올리게 되는데 무엇보다도(멤버 자신들은 빼고...)중요한 존재였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3집 녹음에 들어간 이들.
3집에 수록될 노래들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는 중에 이들은 짬을 내서 작은 공연을 수차례 가졌는데, 그 공연에서 새 앨범에 수록될 곡들인 , , 을 연주해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이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본 조비의 새 앨범에 대한 기대를 한층 높여주게 되었다.(어찌보면 3집이 나오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도 앨범 발매 전에 가졌던 깜짝 공연들이 화제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86년 여름까지 3집 작업을 계속됐고, 본 조비 자문위원회 같은 성격의 Pizza Palor Jury(본 조비의 팬들로 구성된 뉴저지의 동호회 같은거로써 참여는 누구나 자유롭고... 본 조비가 새 노래 몇십곡을 녹음해서 이들에게 들려주어 이들의 호응도를 살펴 앨범 곡 구성에 참고하게끔 한 그룹정도로 알면 될것이다. 그들은 3,4,5집 선곡 작업에 참여했다.)의 심사를 거쳐 86년 8월에 드디어 본 조비 역사에 길이남을 최고히트작 Slippery When Wet을 발매한다.
86년 8월, 명장 브루스 페어반(Bruce Fairbairn)의 지휘로 제작된 3집 Slippery When Wet이 발매된다. (앨범 타이틀에 관한 데이빗 브라이언의 언급을 적어보면... "우리가 앨범 녹음 틈틈이 들렀던 한 스트립쇼 클럽에서 있었던 일이죠. 매력적인 여성들이 비눗물로 몸을 두른채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녀들은 누군가가 나쁜 생각을 품고 그녀들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을만큼 미끄러워 보였죠. 그때 우리중 누군가가 외쳤죠, '물기로 미끄러워!(Slippery When Wet)', 결국 그 말이 우리 3집의 타이틀로 결정난겁니다." 뭐 대충 이렇다. 쬐끔 야하다...)
11월 29일자 빌보드 싱글차트에 3집의 첫 싱글이 싱글차트 1위를 기록(1주간)하며 3집의 신화는 시작된다. 앨범은 발매 4주만에 앨범차트 정상에 등극해 11주간을 머물었고 무려 46주간(거의 1년이다!) Top10 안에 머물었다. '87년 2월 14일엔 두 번째 싱글이자 이들 최고의 히트곡인 (일본에선 이 먼저 발매되기도 했다)가 마돈나의 를 누르고 1위에 올라 4주간 머무르며 또한번의 놀라움을 선사했고, 도 7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1,2집때 최고순위를 기록한게 39위의 임을 볼 때 엄청난 사건이었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이들의 성공을 "Third Generation Quiet Riot"(콰이어트 라이엇 이후 헤비메탈 그룹의 세 번째 놀라운 성공이란 뜻으로 해석됨. 콰이어트 라이엇은 83년에 의 히트로 데뷔앨범을 1위에 랭크시키며 6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던 LA출신 팝메탈 그룹이다. 두번째는 84년에 를 1위에 올려놓은 밴 헤일런(Van Halen))이라고 일컬었으며, 혹자는 "밴 헤일런이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을 만나고 그 둘이 다시 씬 리찌(Thin Lizzy)를 만났다"라고 평했으며, 또 어떤 평론가는 "상투적인 미국의 하드락을 세련된 팝메탈로 표현한게 성공의 요인"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소위 '팝메탈'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정통 헤비메탈 보다는 좀 약하다고 하여 '라이트메탈', 헤어스타일이 사자머리처럼 치렁치렁하다 하여 '헤어메탈', 10대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하여 '아이돌 메탈' 등등 많은 수식어가 따르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선 이때(본 조비 3집의 엄청난 히트)를 기점으로 각종 헤비메탈 공연장에 10대들이 우후죽순 몰려갔다하는데, 특히 이들은 10대에서 20대까지 어우르는 여성팬들을 여느 팝 아티스트 못지않게 공연장으로 불러냈다.(일단은 잘생겼으니까...)
이들은 "The Tour Without End"라고 명명된 월드 투어를 자신들이 발굴해낸 그룹이자 당시 Night Songs라는 데뷔작을 크게 히트시켰던 신데렐라(Cinderella)를 오프닝밴드로 기용하여 치뤘고 4집의 녹음 전까지 무려 130회의 대규모 공연을 가졌다. 결국 당시 음악계를 휩쓸었던 이들의 3집은 86~87년에만 800만장 이상이 팔렸고 빌보드 연말결산 '87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선정되었으며, 현재까지 미국서만 1200만장, 전세계적으론 2000만장 정도가 팔렸다.
한편 87년엔 존과 리치가 인세 관리 회사인 New Jersey Underground Music사를 설립했으며, 스키드 로우와 첫 계약을 맺었다.(후에 인세 배분 문제로 존과 리치, 존과 스키드 로우 사이에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는데 내막은 이렇다... 계약 당시 무명이던 스키드 로우였으니 인세 배분을 회사쪽에 많게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근데 스키드 로우가 데뷔앨범으로 크게 성공하자 스키드 로우의 세바스찬 바하(Sebastian Bach)가 더 많은 인세를 요구했다. 리치는 기꺼이 승낙했는데, 존이 계약은 계약이라며 결사 반대를 외치며 리치와 다툰것이다. 이게 존과 스키드 로우와의 불신이 쌓인 계긴데, 실제로 스키드 로우의 3집의 Special Thanks To엔 리치의 이름은 있고 존의 이름은 없다.)
이들은 3집의 투어가 끝난 직후 곧바로 4집 녹음에 들어간다. 전작과 같은 장소인 밴쿠버, 프로듀서도 브루스 페어반 그대로였다. 또한 훗날 본 조비의 Keep The Faith와 메탈리카의 5,6,7집, 머틀리 크루의 Dr.Feelgood등을 프로듀스하며 크게 뜨게된 밥 록(Bob Rock)이 3집에 이어 4집의 엔지니어링과 믹싱 작업에 참여했다는 점이다.(밥 록은 당시만해도 브루스 페어반의 조수 정도였고 이름은 크게 알려지지 못했었다. 한편, 메탈리카의 라스 울리히(Lars Ulrich)는 본 조비의 4집을 듣고서 자신들의 5집 프로듀서로 밥 록을 낙점했다한다.)
88년 5월~7월사이에 녹음이 이뤄진 4집은 엄청나게 멋진 재킷과 함께 New Jersey란 타이틀로 9월에 발매되기에 이르렀다. 뉴저지는 주지하다시피 이들의 홈타운이다.(또한 필자의 통신 ID) 리치 샘보라는 앨범 타이틀에 대해 "그건 마치 리버풀(Liverpool)같은거죠."라고 언급했다. 비틀즈에게 리버풀이 있었듯 자신들에겐 뉴저지가 있다는 뜻이다. 리치의 말을 전부 인용해 보면 이렇다.
"If you grew up there you have a Liverpool attitude. It colors your life and with this record we're trying to bring the fans closer to us, so they know what we're about... It's an attitude of friendship and camaraderie and it's very 'street'." 음...뭔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미가 있는 말이다(?).
어찌됐든간에... 4집은 앨범에 앞서 미리 발매되었던 첫 싱글 이 앨범 발매 두달 후인 11월 19일자 빌보드 싱글차트에 1위에 오르며(2주간) 또한번의 신화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4집 New Jersey는 발매 2주만에 앨범차트 정상에 올랐고 연속 4주간 머무르며 불티나게 팔려나가 발매 두달여만에 300만장을 돌파했으며, 이후 건즈 앤 로지스, 데프 레파드, U2등과 치열한 앨범차트 1위 다툼을 벌였다. 두 번째 싱글 가 3위에 오른데 이어 89년 5월 13일에는 가 1주간 1위에 올라(웃기는건 가 1위할 때 처럼 이번에도 마돈나의 곡 를 누르고 1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본 조비는 마돈나 킬러?) 본 조비의 네 번째 넘버원 싱글이 되었고, , 이 계속해서 7,9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한편 의 비디오 클립은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아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그래서 89년에 발매된 홈비디오 New Jersey: The Videos에는 대신에 의 라이브가 실리게 되었다.
평론가들은 이 앨범을 두고 "New Jersey Sound"라는 신 조어를 만들기도 했으며 을 '전형적인 party song'이라 칭하기도 했다. 또한 이 앨범이 '전작을 능가하는 곡 구성과 사운드의 완벽함을 갖췄다'는 평가는 두말할 나위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3집의 히트를 두고 10대취향, 아이돌 운운했던 사람들도 중견 그룹으로서의 이미지 변신을 꾀한 이들의 4집을 높이 평가했다. 달콤하고 가벼운 팝메탈이긴 하지만 그 안에 훌륭한 음악성을 겸비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4집은 레코딩 면에 있어서도 이들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다른 팝메탈 그룹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인 '깔끔한 사운드', '라이브 같은 스튜디오 사운드'가 정점에 달했던 앨범이다. 그래서 밥 록이 떴는지 모른다...아까도 얘기했지만...
88년 10월에는 "Jersey Syndicate Tour"라 이름붙인 4집의 월드투어를 시작했는데, 오프닝 밴드로는 존과 데이빗의 오랜 친구이자 데뷔 전 본 조비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데이브 세이보(Dave Sabo, 일명 'Snake')가 만든 스키드 로우(Skid Row)를 기용했다. 90년 초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투어... 전세계 23개국에서 총 237회의 대규모 공연을 가졌으며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정말 대대적인 투어였다.(제목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3집의 투어보다도 배에 해당한다.)
또한 당시 몇 년 간을 통틀어 5만명 이상의 관중 앞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가졌던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투어 중간중간엔 초 유명 뮤지션들을 초청해 잼(jam)을 하기도 했는데 엘튼 존(Elton John), 브라이언 메이(Bryan May:퀸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리타 포드(Lita Ford),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스티븐 타일러(Steven Tyler:보컬)와 조 페리(Joe Perry:기타)등과 호흡을 맞췄으며, 심지어 런던 Hammersmith Odeon에서의 공연엔 레드 제플린 신화의 주인공인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출연해 후배격인 리치 샘보라와 멋진 기타 연주를 선사했다. 본 조비가 '발이 넓다'라는 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실제로도 에어로스미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 알도 노바, 엘튼 존 등의 많은 선배 뮤지션들이 본 조비를 아낀다. 이러한 음악적 교류는 본 조비의 빠른 음악적 성장을 가능케 했다고 본다.)
한편 이 앨범은 소련에서 합법적 절차를 통해 발매된 '최초'의 미국 가수의 앨범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89년 8월엔 Doc McGhee의 기획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Moscow Music Peace Festival에 신데렐라, 스키드 로우, 머틀리 크루, 스콜피온스(그당시 전부 매니저가 Doc McGhee였다.), 오지 오스본등과 참여해(하지만 본 조비가 주인공이었다. 마지막에 나왔고...)소련 팬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였다.
끝으로...4집 New Jersey는 89년말까지 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3집만큼은 못되지만 그래도 엄청 많은 판매고다) 현재까진 700만장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전세계적으론 1400만장 정도가 팔렸다. 참고로 존은 자신이 만든 곡 중 이 앨범에 수록된 를 가장 아낀다고 말한 바 있다.(또 한곡이 있는데 바로 이다)
Jersey Syndicate Tour도중인 89년 4월 28일, 존은 고등학교때부터의 여자친구인 도로시아 헐리(Dorothea Hurley)와 결혼을 한다. 이로써 당시 연예계의 이슈였던 여배우 다이안 레인(Diane Lane)과의 스캔들(?)이 일축되었다. 이게 중요한건 아니고...
투어가 끝나고... 본 조비들은 2년간 쉬기로 결정한다. 공식적 발표에 의하면 "우린 지난 6년동안 앨범-투어-앨범-투어만을 계속해왔다. 끝내 우린 폭발했다."가 그 이유이다.
그러나... 그 2년동안 본 조비들은 쉬기는커녕 자신들의 솔로앨범을 비롯한 독자적 활동에 열을 냈다.
우선 존, 그는 90년 중엽에 들어서 영화 Young Guns II의 주제곡인 를 작곡했고, 그 곡이 포함된 사운드 트랙 겸 솔로앨범(존 자신은 '둘중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묘한(?)말을 했었다)인 Blaze Of Glory(이게 앨범의 공식 명칭이다)를 발표했다.
존 멜런켐프 밴드의 Kenny Aronoff, 저니(Journey)의 Randy Jackson, 엘튼 존, 제프 백, Little Richard, 래트(Ratt)의 Robbin Crosby등의 호화 뮤지션이 참여한 존의 솔로앨범에선 타이틀 곡 가 1주간 싱글차트 1위를 기록했고, 두 번째 싱글인 이 12위에 올랐다. 또, 91년 1월에 열린 American Music Awards에선 가 '팝/록 부문 최우수 싱글'로 지명되기도 했다. 이러한 큰 히트에 힘입어 Blaze Of Glory는 솔로인데도 불구하고 200만장(전세계적으론 600만장)이나 팔렸다.
기타리스트 리치도 91년들어 에릭 클랩턴, 랜디 잭슨, 토니 레빈, 그리고 동료인 데이빗과 티코가 참여한 솔로작 Stranger In This Town을 발표했다. 그당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준 이 앨범은 상업적으론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리치의 앨범에 존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를 놓고 많은 이들이 '둘의 불화 때문이다'라고 떠들었는데 존은 이에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건 본 조비의 레코드가 아니죠, 리치의 목소리가 담긴 그의 앨범입니다. 전 그게 리치의 레코드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또한 혼자만의 작품을 원했죠. 지금 그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답니다." 뭐 대충 이렇다.
데이빗도 솔로앨범 을 냈는데, 영화 'Nether World'의 사운드 트랙으로서 대부분 인스트루멘탈 곡이었고, 몇곡에서 Edgar Winters가 노래를 했다. 뉴욕의 클래식 음악학교인 명문 '줄리어드'출신인 그에겐 더없이 잘 어울 리는 작업이었다. 근데 그는 이후에 병에 시달려 병원신세를 져야했고 92년이 돼서야 회복세를 타기 시작했다.
베이시스트인 알렉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목뼈에 이상이 생겼으며, 다른데에도 휴유증이 생겨 결국 베이스 잡는 법을 새로 배워야 했다한다.
드러머 티코는 리치 앨범의 작업을 도와주고 난 후에 원래 자신이 희곡 작가인데다, 미술실력까지 겸비한 재능을 살려 그런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2년이 흐르고... 그간 난무했던 본 조비의 해체설도 상당히 설득력있게 들릴 시점이었다. 그때 멋지게 나타난 존이 한마디 하는데,
"I wanted to get back to being five guys in a basement."
이로써 본 조비 다섯명은 다시 스튜디오에 모이게 되었다. 장소는 3,4집과 마찬가지로 밴쿠버, 프로듀서는 본 조비가 쉬는 동안 명 프로듀서가 되어있던 밥 록이었다. 6개월간의 제작기간이 흐르고... 드디어 멋진(정말 멋진 등장이었다!)재기작 Keep The Faith를 발매하기에 이르는데..........
4집 New Jersey로부터 4년, 공식적 휴식 시작으로부터 2년이 흐른 '92년. 존은 5집의 레코딩 3주 전부터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오토바이로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존은 이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대곡 에 실은 바 있다)그리고 5월이 되어 밴쿠버에 다들 모일 때쯤 존은 그간의 치렁치렁한 사자 머리를 싹둑 자르고 깔끔한 헤어스타일로 돌아왔다. 게다가 자신들의 오랜 매니저였던 Doc McGhee와의 결별을 하고 독자적인 매니지먼트사인 Bon Jovi Management를 설립했다.
많은 변화를 예감케 하는 대목이었다. 아무튼...다시 밴드로서 모이게된 본 조비들은 3,4집에서 믹싱,엔지니어링을 맡았던 밥 록(이땐 이미 머틀리 크루의 Dr. Feelgood, 메탈리카의 Metallica로서 상당히 유명해진 상태였다)을 프로듀서로 맞이해 밴쿠버에서 5집 녹음에 들어간다. 앨범이 거의 완성되어갈 무렵인 10월에 들어선 첫 싱글 를 앨범에 앞서 발매했다.
본 조비가 4년만에 컴백했다는 소식은 팝계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고 곧 발매될 앨범에 대한 기대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싱글 는 3,4집때의 히트곡들관 달리 29위까지밖에 (솔직히 '밖에'는 아니다. Top 40히트곡 내기도 얼마나 힘든데...)오르지 못했다.(그러나 영국서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11월이 되어 드디어 5집 Keep The Faith가 발매되었는데, 발매 첫주에 앨범차트에 8위로 진입했으며 비록 정상까진 오르지 못했지만 본 조비의 화려한 컴백을 알리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12월 말에는 두 번째 싱글 가 발매되는데 싱글차트 10위에 오르는 (전성기때에 필적할 만한)히트를 기록했다. 이어서 가 27위, 가 97위에 올랐다.
를 빼곤 전성기때완 사뭇 다른 양상을 띄는 모습이었다. 리치는 5집에 대해 "a transition record"라 표현했으며, 데이빗은 "그건 실험적인 앨범이죠, 우린 Slippery When Wet 3탄이나, New Jersey 5탄 따위의 레코드를 원치 않았죠. 음악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는 것이죠."라고 했다. 이들의 성숙됨을 느끼게 해주는 말들이었다. 실제로 5집엔 새로운 리듬이 있다. 특히 타이틀 곡이 그렇다. 그 곡은 이들이 거의 최초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의미있는 곡이었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존이 몇마디 했는데...
"난 그 곡에 팬들이 열광하길 바래요. 하지만 우리가 세인트 루이스에서 그 곡을 처음 연주했을 때 아무도 감흥받는 것 같지 않았답니다. 난 가 공연장에서 얼마나 좋은 곡이 되는질 입증하고 싶습니다."
변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진보적인 앨범은 영국인들의 취향에는 딱이었는지 미국서 29위에 그친 는 영국차트 5위를 기록했으며, 와 가 9위, 가 11위, 가 13위, 미국서 97위라는 치욕(?)을 당했던 가 17위를 기록하는 등 미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성과를 올렸다.(필자의 자료에서 3,4집때의 영국 차트 성적과 비교해 보시길...오히려 영국서는 90의 본 조비가 더 인기다.)
5집에 대해 미국의 어느 보도자료를 인용해보면 "이 앨범은 정말 다양하고, 변화된(낯선) 음악들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여러 싱글이 히트했다. 결국은 Keep The Faith가 승리한 것이다."쯤 되는데, 아무튼, 5집은 미국서 200만장, 그리고 전세계적으론 800만장 이상의 앨범판매골 기록했다. 3,4집때와 비교할 때 상당히 적은 판매고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에대해 드러머 티코가 아주 멋진 말을 했다.
"그땐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폭발했던(잘나가던) 한 때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영원할꺼라곤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답니다."
눈물나오는(?) 말이다. 이젠 여러모로 중견그룹으로서 자리를 굳힌 모습이었다. 한편 92년 12월엔 티코를 제외한 본 조비들이 5집의 홍보차 내한하기도 했다. 공연은 안했지만...
5집 Keep The Faith로 화려하게 컴백했던 본 조비. 5집 발표 후 더욱 성숙해진 음악성으로 팬들을 접했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전세계를 누비며 투어에 투어를 거듭했다. 투어 중인 93년 5월 31일에는 존의 마누라 도로시아(Dorothea Hurley, 아니 결혼했으니 Dorothea Bongiovi)가 첫 딸 Stephanie Rose Bongiovi를 출산해 존을 기쁘게 하기도 했다.
93년 말에는 5집의 투어도 끝나고...
94년에 들어서 데이빗은 두 번째 솔로작을 발표했다. On A Full Moon이라는 타이틀의 앨범인데 클래식을 전공한 키보디스트 다운 멋진 인스트루멘탈 곡들을 실었다. 뭐, 미국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지만 일본에선 어느정도 인기를 모았다.
94년 10월 18일에는 밴드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베스트 앨범인 Cross Road - 14 Classic Grooves (미국 이외의 대다수 나라에선 The Best Of Bon Jovi로 발매됐고, 의 어쿠스틱 버전인 대신에 와 가 추가된 15곡으로 발매되었다)를 발표했는데, 첫 싱글이자 베스트앨범에 담긴 두 신곡 중 하나인 가 싱글차트 4위(영국선 무려 2위!)에 오르는 등의 큰 히트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MBC가 설문 조사한 '1995년 최고의 팝송 베스트 100'에 당당히 1위를 차지했었다!!)
그룹 본 조비로선 처음이며 존 본 조비의 이후론 두 번째로 싱글로선 보기드문 플래티넘을 따낸 의 큰 히트로 이들은 다시 세계 정상에 섰으며, 앨범 Cross Road도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400만장의 미국내 판매고, 1200만장의 전세계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의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이 앨범의 발매 후 베이스의 알렉이 본 조비를 떠나는 안타까운 뉴스가 있었다. '불화가 있었다'라는 말도 많았지만 존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일을 위한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락 밴드'라는게 우리에게 내려진 종신형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멋진 말이다.(존은 말재주도 좋다!) 실제로도 불화는 없었으며(후에 티코의 결혼식에서 확인됨) 이후 알렉은 뉴욕에서 대형 오토바이 가게를 경영한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알렉의 자리를 메울 베이시스트의 영입은 없었다.
"밴드는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들도 가족을 바꿀순 없잖습니까."
라는 존의 인터뷰에 동료들, 매니지먼트, 레코드사 모두가 동의했던 것이다.(주의할점은 Keep The Faith앨범 해설지에 '성우진'씨가 예전에 키보드가 바뀌었다는 얘길 했는데 David Bryan Rashbaum에서 Rashbaum을 빼며 개명한 것 뿐인 동일 인물이다!)
하지만 베이스가 없을 순 없어서 비 공식적으로(정식 밴드 멤버는 아닌)세션맨 휴이 맥도널드(Hugh McDonald:Alice Cooper, Michael Bolton등의 세션맨으로서의 이력이 있다)를 영입했다.
한편, 리치는 94년 12월 15일에 파리에서 토미 리(Tommy Lee: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의 첫 아내였던 여배우 Heather Locklear와 화촉을 맺었으며, 존은 95년 2월 19일에 두 남매의 아빠가 됐다.(저번에 딸에 이어 이번엔 아들...) 90년에 April McLean과 결혼했던 데이빗도 94년 3월에 두 쌍둥이의 아빠가 되었다.
6집이자 베스트앨범인 Cross Road의 발표 후 이들은 약간의 프로모션 투어만을 갖고 곧바로 7집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레코딩계의 교과서적 인물로 평가되는 피터 콜린스(Peter Collins: 퀸스라이크(Queensryche)의 프로듀서로 유명하다)와 존, 리치가 공동 프로듀스한 7집은 These Day란 타이틀로 95년 6월에 발매되기에 이르렀다. 리치 왈
"존과 난 40곡을 썼어요. 우린 음악의 새로운 길을 탐색했죠. 그 많은 곡들은 정치적이진 않지만 현실적인 문제들과 관련이 있어요. 존과 난 나일 먹어가면서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걸 발견했지요."
존도 한마디 했다.
"I go through that every day almost like 'why me?'. Why did all these wonderful things happen to me, when you're walking across a homeless man or see some kid that didn't eat last night. If there's supposed to be this God, what the f***, he doesn't work 57th street?" (대충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아무리 번역해도 완벽한 문장이 안되더군요...제 능력의 한계입니다. 양해를...)
이들은 미국 발매일인 6월 27일보다 앞서 영국에서 가장 먼저 7집을 발매했는데, 7집이 영국 앨범차트 1위에 오른 날이기도 한 6월 25일에는 런던 웸블리(Wembley) 구장에서 7집의 첫 공연을 가졌다.(이 공연은 첫 라이브 홈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7집 월드 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공연이었다.
7집에선 첫 싱글인 이 미국서 14위, 영국서 6위(아까도 언급했는데, 5집 이후부턴 영국에서 더 인기가 있다)를 기록하는 좋은 성적을 거뒀고, 이어서 이 39위(영국선 무려 8위!), 가 88위(영국 8위!)를 기록했다. Kerrang지에선 95년 '최우수 앨범 10'에 이 앨범을 선정하기도 했으며, 이색적인건 '최악의 앨범 10'에도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실로 국내에서도 좋고 나쁨의 평가가 반반이었다. 해외에선 '연륜을 갖추면서 점점 음악성이 향상되었다', '은 리치의 연주가 정점에 달한 곡', '본작의 발라드들은 , 와 맥락을 같이하는 '깊이있는' 발라드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영향력이 진하게 배어있다' 등의 좋은 평이 있었고, '이젠 늙었다', '무엇을 의도하는건지 모르겠다', '이젠 더이상 메탈이 아니다.(이건 그들의 80년대식 사운드가 그리운 사람이 내린 평일 것이다)'라는 혹평도 있었다.
전작들보다는 오래 차트에 머물지 못했던 이 앨범은 미국서는 그들의 이름값으론 다소 부진한 100만장에 족해야 했는데, 그렇다곤 해도 전세계적으론 6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성공적인 작품이었다.(미국의 음악시장이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은 생각도 드는 대목이다.)
95년의 World Music Awards에서 본 조비는 Cross Road와 These Days를 통해 95년 한해 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밴드가 되어 'Best International Group'상을 받았으며, 96년까지 내한공연(우리나라엔 7집 발매 전에 왔다), 일본 전국 투어, 첫 인도 공연 등을 포함한 These Days투어는 계속됐고 이후 멤버들은 또다시 '공식적'휴식기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쉬지는 않고...
95년 말부터 간간히 영화에 출연했던 존은 97년들어 두 번째 솔로앨범인 Destination Anywhere를 발표했다. 유리스믹스(Eurythmics)의 데이브 스튜어트(Dave Stewart)를 비롯한 여러 객원 프로듀서와 존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한이 앨범은 새로운 음악을 시도한 존의 노력이 역력한 작품이었지만 아쉽게도 미국내에선 싱글차트 진입곡이 없었고, 앨범도 31위까지만 오르며 골드도 따내지 못하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나 첫 싱글인 는 영국차트 1위는 물론이고, 스위스,이태리,네덜란드,독일,스페인,스웨덴 등지에서 정상권에 진입했으며 끝내는 통합차트인 Euro Chart에 1위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미국을 제외한 곳에선 크게 히트했다. 그리하여 존은 Euro Music Awards와 British Music Awards에서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존에 이어 98년엔 리치도 두 번째 솔로작 Undiscovered Soul을 발표했는데, 음악 스타일은 그가 언제나 관심을 보여왔던 블루스에 기반한 전통적인 아메리칸 락이었다. 리치의 솔로 1집때처럼 호화 뮤지션들이 참여해줬고, , 등 더욱 성장한 리치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수작이었긴 했지만 역시 골드도 못따내는 비참한(?) 결과만이 있을 뿐이었다.
티코는 96년에 무려 20년 연하(티코가 53년생이니, 그녀는 73년생!)인 모델 Eva Herzigova와 화촉을 맺었으며, 데이빗은 엘튼 존과의 공동 작곡, 리치 앨범에 참여 등으로 바쁜 날을 보냈다. 티코는 결혼 후에 뉴욕에서 자신이 쓴 희곡 공연을 가졌으며 미술 작품전도 가졌다.(그는 드러머이기 전에 극작가,화가이다!)
95년 이후 계속돼온 공백기간이 길어지자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해체설이 공공연히 판을치기도 했는데, 반갑게도 99년 초에 영화 EDTV에 삽입되기도 한 신곡 를 존 본 조비가 아닌 본 조비라는 이름을 달고 싱글로 발매하여 본 조비의 활동 재개가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이후 멤버들은 다시 모여 본격적인 새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초 99년 10월을 목표로 잡았다는 새앨범은 존의 영화출연 등으로 지연되었고, 다시 2000년 초에 발매될 것이라고 했으나 이 역시 지켜지지 못했다.
새 앨범의 녹음이 재차 활기를 띤 것은 존이 영화 U-571의 제작을 마치고 나서부터였다. 2000년 3월에 들어서 드디어 본 조비의 새앨범 소식이 전해졌든데, 첫 싱글 의 뮤직비디오 촬영에 관한 소식과 앨범명이 Crush라는 것, 그리고 발매일 등등... 정말로 본 조비의 신보를 기다렸던 팬들을 반갑게 한 소식들이었다.
그리고 5월 초가 되어서 의 비디오가 전세계에 배포되면서 방송을 타기 시작했으며, 이에 발맞추어 미국과 캐나다에서 가 예정대로 첫싱글로서 발매되었다.
채널 VH-1에서 선정한 '6월의 (가장 주목할) 아티스트'로 선정되기도 한 이들은 곧이어 일본과 유럽에서 를 싱글로 발매했는데, 그 반응은 이들의 전성기때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선 이들 최초로 싱글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6월 1일을 전후로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등지에서 1위,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2위권에 진입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 인기도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5월 17일에 일본에서 가장 먼저 발매된 본 조비의 통산 8번째 앨범 Crush는 일본 해외 앨범 차트에 1위로 데뷔했으며, 프랑스와 더불어 자국의 앨범들이 유난히 강세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국내앨범과의 통합차트에 3위로 데뷔하는 놀라움을 보였다.
5월 29일에는 유럽 등지에서 Crush가 발매되었는데, 영국, 호주, 스위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핀란드 차트에 1위로, 이탈리아, 스웨덴에서 2위로 데뷔하는 등 발매되자마자 정말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는데, 프랑스에서는 6위로 데뷔하며 본 조비 앨범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로 프랑스 차트에 데뷔한 앨범이 되기도 하었다. 또한 유럽 국가들의 통합 차트인 유로 차트에 7주연속 1위를 기록했으며 현재 유럽에서만 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중이다.
이들은 7월부터 본격적인 투어에 돌입했는데, 7월 12일 도쿄돔 공연을 시작으로 다섯차례의 일본 공연을 마친 뒤 유럽으로 건너가 두달동안 그곳에서 공연을 치뤄냈다. 특히 8월 19일 단 한차례로 예정되었던 런던 웸블리 구장에서의 공연은 팬들의 폭발적인 요구에 의해 8월 20일에 추가공연을 갖게되는 전례없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이 공연은 웸블리 구장에서 열리는 마지막 공연이 되었는데 이유인 즉, 웸블리 구장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스타디움이 건설되기 때문이다. 웸블리 구장에서의 마지막 공연이라는 점 때문인지 그날 공연은 세 번의 앵콜을 비롯 크러쉬 투어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될 만한 공연이었다는 후문인데, 그 역사적인 면을 고려해 볼 때 홈비디오로 발매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이들은 미국 뮤지션으로서는 '95년 이후 가장 많은 공연(5번)을 웸블리에서 가진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전작인 These Days와 마찬가지로 빌보드 앨범차트 9위로 데뷔한 Crush앨범은 그 다음주 앨범차트에 29위로 추락하며 아쉬움을 전해주었으나 3주째에 35위까지 떨어진 것을 기점으로 계속 상승곡선을 그리며 발매 11주째인 9월 2일자 차트에서는 22위까지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전작인 These Days가 같은 시기에 이미 50위 밖으로 밀려났던 점을 감안해 볼 때 Crush앨범은 이미 전작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9월에 접어들면서 두 번째 싱글 가 발매되었는데, 영국차트에 10위로 데뷔하며 영국에서의 13번째 Top 10싱글이 되었다. 주목할 점은 그들의 전성기인 '80년대에는 단 한 곡만이 Top 10에 오른데 비해 '90년대 이후엔 무려 12곡이나 영국차트 Top 10에 올랐다는 점인데, 미국인과 영국인들의 음악적 취향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유난히 미국에서만 반응이 처졌던 첫 싱글 는 발매 한달이 훨씬 넘어서야 비로소 빌보드 싱글차트 100위권에 진입했는데, 차트 진입 7주째인 9월 23일자 차트 36위에 랭크되며 17번째 빌보드 Top 40 싱글이 되었으며 9월 30일자 현재는 33위에 랭크된 상태다.
또한 Crush앨범은 우리나라에서 9주째 팝음반 판매 차트 정상을 지키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발매 13주차 까지 약 62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copyright 1999, 2000 by Hong Jo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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