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비유적 표현이 많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나의 요새, 나의 산성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러한 멋있는 비유적 표현은 시편에 자주 나온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비유적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신 것을 본다. 씨 뿌리는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천국에 대한 비유 등 비유적 이야기가 아주 많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 중에서 3분의 1 이상이 비유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곡해하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비유 이야기의 의미를 잘 몰라서 예수님께 설명해 달라고 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의 비유적 이야기를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달리 엉뚱하게 해석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문학을 멀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것을 기록한 계시록은 비유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요한의 비유적 표현을 잘 못 해석하면 이단으로 빠진다. 1. 문학의 비유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는 “당신은 한 송이 붉은 장미.”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아름다운 장미와 상대를 동일시하는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상대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때 장미를 동원하지 않고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 아름다운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 표현은 애매하고 추상적이다. 이렇게 비유를 사용하면 우리가 묘사하려는 상대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로 시편의 시인은 여호와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를 목자에 비유함으로써 간단한 이 말로 여호와는 나를 지켜주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을 때면 내가 안전하다는 것 등을 말해 준다. 목축을 업으로 삼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 목자가 어떤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목자와 여호와를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이 눈으로 본 일이 없는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구체적 경험과 결부시켜서 생생하게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면 여러 말을 하지 않고도 우리가 어느 대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거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문학자들은 이 효과적인 표현 수단을 좋아한다. 특별히 성경의 기록자들은 여호와나 천국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대상을 묘사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비유적 표현이나 비유적 이야기를 빌었다.
2. 예수님의 비유적 이야기
예수님이 즐겨 사용한 비유적 이야기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 같은 단순한 비유적 표현과는 그 유가 다르다. 그러나 일반적인 비유적 표현과 비유적 이야기의 효과는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당시의 청중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 등 당신이 설명하려는 것을 결부시켰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가서 그 양을 찾을 때 기뻐하는 목자의 이야기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결부시켰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길 잃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쉽게 그리고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천국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그분의 이야기는 신학강의 같은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강의는 추상적인 단어나 복잡한 논리로 인해서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지루했을 것이다. 어려운 철학 강의나 신학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이 하품을 하거나 졸게 마련인데, 예수님이 어렵고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면, 학점의 부담이 없는 당시의 청중들이 4천 명씩, 5천 명씩 모여들었겠는가? 거기에 모인 청중들 가운데 남자들도 대부분 문맹이었을 것이고 더구나 여자들과 아이들은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을 텐데, 무식한 그 사람들은 어려운 신학 강의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탕진한 아들을 걱정하다가 그가 돌아오자 기뻐하면서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을 재미있고 실감나게 가르쳐 주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인기 있는 설교자였다. 그분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수천 명씩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밥을 먹을 생각도 잊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의 점심식사를 걱정해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오빠 부대를 끌고 다니는 인기 연예인 같았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좋아했을까?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런 면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천국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비유가 아니면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로 비유를 좋아한 비유적 이야기의 천재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가리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분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된 것은 비유적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분의 문학적 재능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학생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는 주일하교 교사들이나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적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루하게 신학적 내용을 열거하면 어린 학생들이나 교인들이 졸게 마련이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설교 중에 졸면, 자기의 설교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교인들의 신앙을 탓한다. 꿀 송이 같이 달고 오며한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교인들을 탓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설교 비법을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한다.
목회자들은 어려운 신학적 내용이나 교리를 어려운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그러한 내용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교인들의 경험의 코드를 울릴 수 있는 예화나 비유적 이야기를 동원하면 좋을 것이다. 설교의 예화를 세상 이야기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경험과 맞닿는 적절한 예화는 예수님의 비유적 이야기와 같은 효과를 거둔다. 우리는 설교 내용과 잘 어울리지 않는 예화를 드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썰렁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분의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특히 목회자들은 비유적 이야기를 통해서 청중에게 감동을 주셨던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문학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있다.
3. 알레고리적 해석의 함정
교부시대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이 성행했다.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비유 이야기 전체에서 드러나는 비교의 요점을 보려 하지 않고 그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인물이나 사물에서 상징적 혹은 영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3세기에 살았던 오리겐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세부사항에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은 아담, 그의 목적지 예루살렘은 낙원, 여리고는 세상, 강도들은 인간의 원수와 적대세력, 상처는 불손종이나 죄, 제사장은 율법, 레위인은 선지자,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 여관은 교회, 두 데나리온은 성부와 성자에 대한 지식, 여관주인은 교회를 지키는 천사들, 사마리아인이 돌아온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렇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이 비유적 이야기 안에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수난, 그리고 재림에 이르는 거대한 신학적 체계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세기의 암브로스, 5세기의 어거스틴도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하게 비유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사건들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을 영적 해석이라고 했다. 실상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러한 사람이 네 이웃이라고 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알레고리적으로 그 비유적 이야기를 해석하면, 그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전하려고 했던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에 대한 답과는 너무나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종교 개혁자들이 알레고리적 해석의 문제점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비유적 이야기에 대한 바른 해석방법이 확립된 것은 1888년에 율리커가 『예수의 비유 연구』를 낸 이후였다. 율리커는 하나의 비유적 이야기 안에 별개의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상징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예수님의 비유에는 하나의 중심적인 비교만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루살렘이나 여리고라는 지명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울이나 대전으로 대치되어도 상관없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아니고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해도 좋다. 사마리아인이 돌아오지 않고 우편환으로 혹은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 약속한 치료비를 보냈어도 이 비유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조차 외면하는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인이 돌보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오리겐, 암브로스, 어거스틴 같이 유명한 신학자들을 포함해서 19세기 중반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잘못 해석해 왔다는 사실이다. 신학자들이 그러한 오류를 범한 것은 그들이 문학을 외면한 결과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의 진수를 몰랐기 때문이다. 2세기의 터튤리언은 세속의 도시 아테네와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신자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했다. 4세기의 제롬 역시 로마의 문인 호라티우스와 시편작가가 동행할 수 없고, 세속적인 시인 버질의 글과 복음서는 어울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문학을 외면했다. 4세기의 어거스틴 역시 연극은 죄악을 가르치는 것이니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중반에 청교도혁명이 일어났을 때 청교도들은 우선적으로 극장을 폐쇄했다. 그들의 후예인 미국의 청교도들은 선배들의 문학경시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문학을 경시하던 교회가 근래에 와서는 문학을 옹호하게 되었다. 이것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라고 말할 만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책 『왜 그리스도인에게 문학적 소양이 필요한가?』를 참조할 것.) 문학을 모르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신학계의 상식이다.
4. 요한계시록의 비유
요한이 환상 중에 본 것을 기록한 계시록을 해석할 때 아주 조심해야 한다. 계시록에 나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울어지는 불가마를 북한의 공산세력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부흥강사들이 있었다.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일본이 한국을 침탈할 때는 방향이 달라서 그 구절을 적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임의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성경구절을 적용하는 데에는 위험이 있다.
환상 가운데 본 것은 실제적 이야기가 아니고 비유적 이야기이다. 계시록은 백마를 탄 왕자가 나타나서 악한 용을 제압하여 믿는 자들을 구하는 일종의 우화적인 이야기이다. 거기에 나오는 인물, 사건, 숫자까지도 신앙적 우화의 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계시록에 나오는 천 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용이 천 년 동안 결박된다거나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할 때, 그 천 년이라는 말은 긴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지 문자적으로 꼭 천 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긴 세월을 말할 때 ‘어느 천 년에 그것을 다 해내겠느냐?’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절에 가면 ‘천 불상’이 있는데, 그것은 불상이 천 개라는 말이지만, 여기서 ‘천’이라는 말은 많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불상이 오백뿐인 절에서도 천 불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13장에 나오는 ‘666’은 당시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네로를 가리켰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온갖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때 666 숫자를 컴퓨터에 적용시켜서 문명의 이기를 기독교의 적대세력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너무 멀리 나간 것이 분명하다. 다미선교회에서 휴거의 날짜를 정했다가 낭패를 본 것은 성경에 나오는 숫자를 문자적으로, 다시 말해서 실제적인 숫자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환상 가운데 본 것을 기록한 계시록에서는 숫자마저도 문자적인 것이 아니고 상징적이라는 점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이라는 숫자도 정확한 사람 수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제한된 사람 수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어느 교회에서는 14만 4천 명이 차면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으니 그 수가 다 차기 전에 서둘러 들어오라고 한단다. 요한 계시록에서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12지파를 언급하는 데서이고(7:4), 다음번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를 언급하는 데서이다(14:3). 14만 4천은 12지파, 12 사도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아하는 12를 제곱하고 거기에 천을 곱한 숫자이다.
14장 4절에서 구원 받을 자들은 여자에게 더럽혀지지 않은 정결한 자들이다. 여기서 14만 4천 명에는 분명히 여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혼 남성도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고 기혼남성들도 많으니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는 14만 4천의 갑절을 훨씬 넘어야 한다. 구원받을 사람의 수를 남녀를 합하여 14만 4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선 문맥과도 맞지 않는다. 성경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숫자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5. 문학공부의 필요성
성경을 읽는 데는 우선적으로 문학적 소양이 요구된다. 비유를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성경을 무조건 여러 번 읽기만 하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할 구절을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엉뚱한 해석이 나온다. 이러한 성경의 오독에서 이단적 생각이 나오기도 한다. 성경에서 비유적인 표현과 문자적 표현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의 성경연구 외에도 문학적 수련의 결과로 얻어진다. 필자가 전에 지적한 ‘우리말 성경 번역’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도 문학적 소양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일반 신자들보다도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문학적 소양과 재능이 요구된다. 그런데 한국의 신학대학에서 문학공부를 등한히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목회자들은 예수님의 설교비법도 전수받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감동적인 설교는 논리적으로 머리에 호소하는 설교가 아니고 청중의 경험의 코드를 울리는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처럼 문학에 정통해야 한다. 최재석 최재석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를, 호주의 Queensland University에서 영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대전 월펑동산교회 장로이다. 그리고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왜 그리스도인에게 문학적 소양이 필요한가?"와 "예수님과 통하라"를 펴냈다. 당당뉴스에서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