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부로 도형의 큰 사진이 고시원 외벽에 걸렸다. 주인은 자기 고시원이 명당자리라고 자랑하고 다녔고, 꼬질꼬질해서 별로 인기가 없던 희망고시원은 소문을 들고 온 고시생들로 번성하여져 갔다.
영석은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1년 만에 고려대, 2년 만에 서울대 법대라..
엉덩이가 가벼웠던 그도 진득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기 시작하였다.
사실 영석도 머리가 나쁜편은 아니었다. 그가 나온 정읍중학교는 3개군에서는 제일 좋은 중학교였다.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를 제법 잘 하였다는 것이다. 중학교부터 공부와 담을 쌓는 바람에 정읍 고등학교 상과에 간신히 진학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들어가라고 하는 부모님들의 성화와, 실제 취업하기에도 부족했던 실력때문에 할 수없이 고시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영석은 무섭게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기초가 전혀없던 그는 영어,수학 다 새판잡이였다. 공부하다 막히면 도형에게 물었고 도형은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었다. 어느새 도형은 희망고시원 재수생들에게는 전설이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있었다.
도형은 서울대에 합격한 후 입학과 더불어 고시원을 떠났고, 영석은 공부에 재미를 붙여 나갔다. 한 참 열공하고 있던 어느 날. 또 하나의 상 농땡이 하나가 또 희망 고시원의 문을 기웃거렸다.
주인 영감은 신이나 자기 고시원을 떠들썩하게 자랑하였다. 늘 그 자랑에는 도형의 이야기가 빠질 순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재수생 모세는 아버지가 목사님이었다.
김 모세. 모세의 아버지는 아예 이름부터 구약성경의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따 이름 지었다.
하나님이 모세같은 아들을 주신다고 음성을 들었다나..
모세의 아버지는 기독교 3대라는 사상에 빠져있는 사람이었다. 즉 3대에 걸쳐 신앙생활을 잘하면 큰 복을 받고, 또 3대에 걸쳐 목사집안이 되면 큰 목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또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에 들어가지 말고 30살 까지는 하고싶은 일을 하다가 30세가 되면 모든것을 중지하고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라고 아들에게 어렸을 때 부터 주입 시켰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때 부터 목사가 되라는 이야기를 귀따갑게 들었던 모세는 인성이 착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늘 모세의 주위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렇게 속절없이 놀다가 중ᆞ고시절을 그냥 보내고 결국 고시원까지 흘러 들어온것이었다.
모세는 영석의 옆방에 들었다. 바로 도형이 있었던 그 방이었다. 식사때마다 자연스럽게 영석을 만나게 되었고, 그 전설같은 자기 방의 전 주인 도형의 이야기를 전 해 들었다.
"모세야, 공부하기 싫지? 형도 마찬가지야. 기초도 안되어 있고, 앞이 막막하다 야. 그런데 말이야. 나는 도형이형이 해준 말이 힘이 되. 그 형이 가정이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이것저것 안해본 것이 없데. 그래서 한 번은 목재소에서 잡일을 하게 됐는데 말야. 나무를 쌓고 정리하는거 였데. 부산에서 나무가 큰 추럭으로 올라와 풀어 놓으면 목재소 마당에 큰 산처럼 쌓여있었데. 그걸 도형이 형 혼자서 정리를 해야했는데 처음엔 엄두가 나질 않더라는 거야. 그 때 개미를 생각했데. 개미가 개미집을 지을 때 모래 하나씩 파서 계속 물어 날리다 보면 어느 덧 큰 지하 몆층의 개미굴이 만들어지듯, 목재를 하나씩, 하나씩 어깨에 메고 나르다 보면 어느새 산더미 같은 나무가 다 정리되어 있더라는 거야. 그 경험 이후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차근차근 조금씩 하다보면 다 되더라는 거지.
영어도 그 형은 매일 단어장을 만들어 가지고 그저 몆개씩 외웠데. 그러다가 교도관이 되어서 재판정에서까지 영어단어를 외우다 검사한테 뺨까지 맞고, 사표낸 후 여기와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간거지, 바로 네 방이다. 207호실. 거기서 공부하여 들어간것 아니냐.
야, 한 번 해보는 거야. 모세야, 우리 한번 해보자 아자!"
"그러니까 개미에게 배웠네요." "그렇지, 개미가 스승이었던거지."
입담이 좋은 영석의 말에 모세는 큰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둘은 그렇게 거기 좁은 고시원의 작고 꾀죄죄한 방에서 늦깍이 인생의 도전을 시작하였다.
어느덧 시간은 또 흘러, 영석도 드디에 일을 내버렸다. 고시원에 들어온지 정확히 2년 만에 대학을 덜컥 합격하여 버린것이다. 한양대 물리학과 였다.
희망고시원에 잔치가 벌어졌다. 영석의 대학 합격 축하파티였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도 왔다. 바로 그들의 우상 도형이었다.
도형은 사법고시 준비중에 바빴지만 특별히 시간을 내어 온 것이다.
희망고시원이 떠들석 했다. 영석 뿐이 아니라 여러 고시원생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다.
원장은 신이 났는지 연방 절뚝거리며, 막걸리와 음식을 권하기도 하고 자기 고시원을 자랑하기 바빴다.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께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도형에게 모두가 한 말씀을 부탁하였다.
"후배 여러분 공부하기 힘들지요.내가 여러분 마음 잘 압니다. 좁은 고시원 방에서 청춘도 잊고 목숨걸고 열공하는 여러분들께 내가 특별히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내가 힘들 때 이겨낸 깨달음을 몆가지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뺨을 재판정에서 후려친 그 검사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 너무나 창피하였고 죽고싶을 정도로 큰 상처를 받았지만, 역으로 그 사건이 사나이 이 가슴에 불을 붙였으니까요. 내, 반드시 판사가 되어 약하고 억울한 자들을 도와주리라.
........
그리고 여러분, 공부는 즐기세요. 공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연구한다고 생각하세요.그러면 즐거워 집니다. 어느 날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참으로 지겹더군요. 그래서 영어 단어를 뚫어지게 노려보는데 갑자기 영어단어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원리들이 보이더군요. 영어의 B가 여자의 유방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얼른 사전에 '가슴, 유방'을 찾아보니 b로 시작하는 거예요. breast ,bosom ,bust. 그러고보니 B는 어떤 저장소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잡동사니를 담는 bag.전기를 담는 battery.공기를 담는 balloon. 돈을 담는 bank. 그 날 이후로 나는 공부가 즐거워졌어요.
어느날 바다의 파도를 보다가 또 깨달았읍니다.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며 파도의 파장을 두 번 잘라보니 영어알파벳 W와 M이 나오고, Wave, Move가 떠오르더군요. W는 파도 모양이고 계속 움직이잖아요.
......"
도형의 재미있고 감동어린 일장연설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들었다.몇몇은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며 빠져들었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인생이 자신의 동기들보다 쳐져있다고 생각하는 열등감을 가진 늦깍이들의 가슴 가슴마다엔 희망의 무지개가 뭉실 뭉실 떠오르고 있었다.
주인 영감은 흥분하여 외쳤다.
"우리 희망고시원은 늦깍이들의 희망공장이다. 여기 들어오면 소망이 생기는 거여.."
영석은 그 후 곧 고시원에서 퇴촌하였다. 한앙대 물리학과에 진학하였다.
모세는 그 날 도형의 감동적인 격려와 연설에 큰 감동을 받았다.
"공부하지 말고, 연구하라. ." "뭐든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얻는다.."
어느 날 주인 영감이 또 절뚝거리며 시끄러웠다. 참말로 희망고시원에 큰 경사가 나 버렸다. 도형이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이었다.
희망고시원 외벽엔 또 다시 축, 사법고시 합격 이도형 이라는 현수막이 크게 걸렸고, 조촐한 축하파티가 열렸다. 도형은 오질 못했지만 그를 잘 알고 있는 고시원의 늦깍이들은 내일 인것 마냥 기뻐하고 축하 하였다.
모세도 심기일전하여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 많던 잠도 줄이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모르는 것은 반복 또 반복하며 어느새 자신의 우상이 되어버린 도형과 영석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던 수년 후 어느 날, 희망고시원은 또 한번의 놀라운 소식으로 들썩거렸다. 김모세가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여 버린것이다. 고시원에 입촌한지 3년만의 일이었다. 모세는 의사가 되어 가난한 자들에게 슈바이처처럼 선교하는 목사겸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고시원은 마치 기차 정거장과 같았다. 들어오고 나가고.. 모세가 고시원에서 퇴촌 하던 날, 모든 희망고시원 가족들이 다 모였다. 떠들썩한 가운데 원장은 변함없이 두 박자로 절뚝거렸고, 파티가 끝나자 모두가 아쉬움반, 축하 반의 심정으로 모세를 송별하였다.
그리고 그 날 도형,영석,모세가 주축이 되어 중요한 결의가 있었다.
/매년 새 해 1월 1일을 "늦깍이의 날"로 정한다. 어디에있던지 가능하면 희망고시원에 모이기로 모두가 약속 한다./ 였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늦깍이들은 대학에 합격하였고, 사회에 진출하여 큰 일꾼들이 되었다.
가끔 선물을 한아름 안고오는 선배들의 훈훈한 격려 방문들도 이어졌다.
판사가 된 도형은 매년 라면을 차로 싣고 왔고, 전자회사에 과장이 된 영석은 삼겹살을 푸짐하게 사와 파티를 벌였다. 모세는 초콜릿을 푸짐하게 사와 공부하다 지친 늦깍이들에게 달콤한 간식을 제공하였다. ........
그 후 작지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희망고시원을 들어서서 오른편 벽 게시판을 보면 빛 바랜 신문 기사가 몇 장 오려져 붙어있었다.
-이도형 부장판사..뇌물받은 국회의원에 법정 최고형 선고..-
-서영석 물리학 박사....40프로 이상 최고의 효율을 내는 태양열 전지 세계최초로 개발. .-
-목사안수 받자마자 아프리카로 선교 떠나는 서울대 의대 외과 전문의 김모세..-
추운 겨울 어느 늦깍이의 날, 노량진에 있는 희망고시원은 모처럼 흩어져 있던 선 후배가 모여 떠들석하였다. 이 때 빛 바랜 청바지를 입고 가방을 어께에 멘, 척 보기에도 재수생같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외벽이 수많은 사진으로 도배가 된 고시원의 문을 열고 들어 온다. 그리고 다짜고짜 주인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