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가시 정 수 연 영화 ‘연가시’는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연가시는 이기심이 강한 수생생물이다. 뻐꾸기처럼 종족보존을 위해서는 다른 개체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영화는 이런 특성을 이용해 변종 연가시를 만들었다. 변종 연가시에 감염이 되면 물을 찾아 자살하게 된다. 제약회사는 그 절박한 사람들에게 구충제를 팔아 엄청난 이익을 챙기겠다는 욕심으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다. 나는 실제로 연가시를 본 적이 있다. 욱수골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물이 맑고 깨끗해 보여 개울가에서 손을 씻었다. 무심코 바라본 물속에서 약 십 센티미터 가량의 가느다란 녹슨 철사 줄이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섬뜩했다. TV에서 본 수생생물의 생태가 생각나서다. 연가시는 산간 일급수 물에 녹슨 철사 줄 모양으로 살아간다. 메뚜기나 귀뚜라미 같은 곤충의 중간 숙주 과정을 거쳐야 번식하는 생리를 갖고 있다. 잠자리나 귀뚜라미가 물을 먹을 때 연가시의 알을 들이키게 된다. 연가시의 알을 먹은 귀뚜라미와 잠자리는 다시 여치나 사마귀에게 먹힌다. 유충은 이렇게 사마귀나 여치의 몸속에서 자라다가 성충이 되면 숙주 곤충의 중추신경을 지배하여 물가로 유인해 자살하게 만든다. 물에 빠져 죽은 사마귀나 여치의 몸을 뚫고 나와 유유히 헤엄쳐 가는 연가시의 생태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곤충 세계의 먹이사슬이라 해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교활하게 상대를 희생시키는 행위는 사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가시에 감염되어 물을 찾아 생을 마감하는 사마귀나 여치처럼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정신세계에도 연가시는 존재한다. 삶의 스트레스와 좌절, 정서적 불안과 우울증,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저항 같은 것이 연가시의 요소들이다. 뇌는 영혼의 하드웨어라 할 수 있다. 1.4kg의 조그만 뇌에서 보내는 신호와 지시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현대문명의 이면에는 상대적 결핍과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와 소외감으로 그늘져 있다. 연가시의 요소들로 자살 유혹을 받은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고통을 잊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같다. 자살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을 마감하는 그들을 애석해한다. 반면에 비겁하고 책임감이 없는, 이기적인 자로 보는 시선도 없지 않다. 하지만 살아서 겪는 고통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그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삶의 연가시에 감염되어 심리적 파국으로 치달아 죽음 이외의 어떤 것도 생각 못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의미 추구》를 쓴 피터 프랭클린은 나치 수용소의 생지옥 같은 환경에서도 이년 칠 개월을 살아낸 생존자다. 그는 서너 달 정도면 대부분 죽어 나가는 혹독한 환경에서도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살아남는다는 로고 테라피 (의미 요법)로 새로운 심리학의 이론을 제기했다. 누구나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달라진다고 한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와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지옥보다 더한 환경에서도 생존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이고 존재의 이유인 것을…’ 고비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눈물 없는 인생 또한 없지 않을까. 바람에 물결이 일듯이 내 인생 여정에도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은 적도 많았다. 믿었던 사람에게 속아 경제적인 손실로 생활고에 시달릴 때였다. 그 와중에 집안일로도 힘들었다. 하루하루를 맨 정신으로 버티기가 너무 힘들어서 막걸리에다 설탕을 타서 먹고 멍한 상태로 취해있었다. 살아갈 의욕도 없었다. 극단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평온히 잠든 아이들을 보면 이 무슨 망발인가 싶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 암울했던 고난의 시기를 견딜 수 있게 나를 곧추세워 주었던 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었던 것 같다. 밤이 아무리 어둡고 길어도 새벽은 오는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이 세상 모든 일은 먹구름처럼 잠시 지나간다고 하였다.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이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이었다는 사실을 아릿한 마음으로 되짚어 본다. 생이란 견디는 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삶이 우리를 모질게도 아프게 할 때 당신은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이것은 고난이다. 불운이라며 좌절하지 말고 훌륭하게 견디어내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라고 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되새기며 위안을 삼았다. 생을 포기한다는 건 어떤 이유든 밀려나는 일이다. 삶에서는 죽음이 선택일 수도 있지만, 죽음에서는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 삶이다. 죽음으로 현실에 처한 모든 문제를 끝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은 절실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기 암 환자들은 살려는 의지 하나로 눈물겨운 사투를 벌인다. 아무리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라도 숨이 멈추는 순간 그저 치워야 할 오물일 뿐이다. 그리고 금방 잊힌다. 당연히 지금까지의 삶도 쓸모없이 버려지고 남겨진 가족에게 평생 고통의 짐을 지운다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했으면 싶다.
영화는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들에게 구충제 한 알로 생지옥 같던 상황을 거짓말처럼 멀쩡히 치료를 한다. 우리들 인생에도 연가시의 요소로 자살의 충동이 일어날 때, 인연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야 할 이유와 생의 의미를 찾는다면 고난을 견뎌 줄 지지대가 되어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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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옥고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가시라는 영화가 시사하는 점이 참 많군요!
감동적인 글, 이제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