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오늘은 아주 기분이 더러운 날이다. 간밤 꿈자리가 사납더니만, 결국 알코올 중독으로 인생이 엉망진창 된 친구 녀석이 사망하였다는 연락이 와서 문상을 다녀오는 길이다. 장례식장의 공기는 아주 무거웠고 몇몇은 말없이 소주만 들이켰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녀석은 미혼이라 마누라와 뿌려놓은 씨가 없어 남겨진 자들의 울고불고하는 사회적인 슬픔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을 공유했던 동료로서 그의 죽음을 통해 실존의 치명적인 약점과 잊을만하면 뒤통수를 쳐대는 삶의 비애를 누구나 체감했으리라. 그 모두들의 굳은 표정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거기에 대처할 능력조차 없는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탄식하는 게 역력히 보였다.
나 역시 소주를 꽤나 마신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뭐...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니고, 입을 열어봐야 상투적인 잡소리만 새어나오니 그럴 바에는 침묵이 최고였다. 그러니 소주만 입에 털어 넣을 수밖에.
녀석의 죽음에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가엾은 마음이 들다가도 녀석의 영혼이 더 이상 우스꽝스러워지기 전에 끝장을 내버리는 게 차라리 녀석한테는 잘된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모호한 감정이 교차하는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기분이 더럽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4시간 동안 소주만 들이키다 자리를 떴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정신은 그지없이 명민하게 깨어있었다. 고통을 살이 저미도록 자각하라는 신의 잔혹한 배려인가? 이럴 땐 팽팽히 곤두선 감각을 술기운으로써 희석시켜 흐리멍덩해지길 바라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치달아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난 음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의 시동키를 돌렸고, 어둠의 아가리 속으로 핸들을 틀어 빨려 들어가듯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냥 털어 버렸다.
동부간선도로를 잠시 질주하다 나의 집 쪽으로 가기 위해 정릉 방면 나들목으로 빠져 나왔다. 차들이 주춤주춤 정체되기 시작했다. 교통사고가 났나? 목을 빼어 자세히 바라보니 그제야 저 앞 어둠 속에서 붉은 봉 몇 개가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경찰봉이었다. 아마 음주단속을 하는 것 같았다. 아차! 장례식장에서 소주를 꽤나 마셨는데? 음주측정기에다 불면 면허취소에 해당되는 수치가 나올걸? 어떡하나? 이번에 걸리면 세 번째여서 삼진아웃으로 구속감인데...
난 잠시 머뭇거리다 뒤차의 경적소리에 흠칫 놀라 자동차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움직이자 그 경적소리가 갑자기 불쾌해졌고 난 흥분이 되었다. 나의 모든 근육이 팽창되면서 몸 깊숙한 곳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들끓어 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흡사 잠자고 있던 어둠의 악령이 깨어나 내 몸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았다. 난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꺾어 중앙선을 넘어 차를 돌렸다. 가로수 뒤에 숨어있던 경관 한 명이 용수철 튀듯 뛰쳐나와 온몸으로 내 차를 가로막았다. 저렇게 무모하게 뛰어들다니. 너무 급작스런 상황이라 브레이크를 밟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 경찰관은 내 자동차 범퍼에 부딪혀 퉁겨져 허공을 맴돌다 아스팔트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제기랄, 뇌진탕으로 즉사한 건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난 일순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걸 떨치려는 듯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급가속으로 인한 바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자동차는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고무 타는 냄새가 역하게 났다. 룸미러를 흘끔 쳐다보았다.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 순찰차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푸르고 붉은 경광등을 번쩍이며 쫓아오는 게 마치 입가에 피 맛을 다시며 달려드는 악귀의 얼굴 같았다.
마침 밤 깊은 시간이라 도로에 차량이 많지가 않아서 속도를 올리기에는 그지없이 좋았다. 간간이 느긋하게 주행하는 차량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헤집으며 기세 좋게 추월했다. 그 얼마 만에 맛보는 쾌감인가? 정말로 짜릿했다. 자동차의 속도계가 오르는 것처럼 나의 감각도 오르가즘을 향해 질주했다. 심장은 거세게 두방망이질하고 피가 온몸으로 빠르게 흐르다 못해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살아있음의 징표인가? 꼭 이렇게 자극을 주어야만 감각이 되살아난단 말인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이 펄떡이는 감각의 나라. 오! 무정부주의자의 자유로움이여 영원 하라! 그러나 그렇게 길지는 않으리라. 섹스 후의 허탈한 담배 연기처럼 언제나 쾌락의 말로는 좋지 않다는 게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난 곧 불안감에 휩싸여 룸미러를 다시 쳐다보았다. 뒤편 저 멀리 경찰 순찰차가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난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한 마음으로 차창 밖의 지형을 주시하며 액셀레이터를 더 깊숙이 밟았다. 어느덧 내 차는 도봉대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틀림없이 저 순찰차에서 도주하는 내 차 방향의 구역을 순찰하고 있는 다른 경찰 차에게 수배 무전을 쳤으리라. 그러나 어찌하랴? 길 뚫린 대로 무작정 달릴 수밖엔...
한참을 달리자 아니나 다를까 두 대의 경찰 순찰차가 길목에서 바리케이드처럼 가로막고 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급히 브레이크를 잡으며 자동차를 중앙선 너머로 잡아 돌렸다. 하지만 워낙 속도가 빨라서인지 탄력을 이기지 못해 자동차가 크게 스핀을 하며 가로수에 부딪혔다. 우측 앞 문짝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크게 찌그러졌다. 나의 오른쪽 다리에서 격심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기하고 있던 경관이 권총을 겨누며 내 차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난 무의식적으로 시동키를 돌려 재출발을 시도했다. 그러자 고막을 찢는 소리가 들리며 앞뒤 유리창이 박살났다. 아마 총알이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난 주춤하며 차를 멈췄다. 경관 한 명이 내 차로 다가와 열린 창문 사이로 권총을 정조준하며 내리라고 명령을 했다. 시커먼 권총이 창문 안쪽까지 파고 들어와 내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었다. 난 죽어도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어느 누구도 날 가둘 수는 없어. 그 누구에게도 내 운명을 맡길 순 없지. 암! 내 운명은 내가 다스린다. 아직 내 차의 시동은 살아있었고 1단 기어가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난 재빨리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자동차의 창틀이 권총을 쥐고 있던 경관의 손목을 치며 앞으로 나갔다. 그 충격 때문에 권총이 차창 안으로 퉁겨져 들어왔다. 그 경관은 손목이 얼얼한지 얼굴을 찌푸리며 황급하게 순찰차에 올라타는 것이 백미러를 통해 생생하게 비쳐졌다.
잠시 후 두 대의 경찰 차가 사이렌을 합창하며 따라붙었다. 바리케이드를 쳤던 차량들이었다. 난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신없이 달렸다. 그러나 최초의 현장에서부터 계속 추격해오던 경찰 차량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순찰차는 나의 차량을 막으려는 의도로 내 차량의 정면을 향하여 돌진해 왔었다. 나 역시 주저함 없이 그 차량의 정면으로 내달렸다. 이젠 누가 먼저 기세가 꺾이는가의 싸움이었다. 정면충돌 직전에 그쪽에서 먼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틀었다. 하지만 조금 타이밍이 늦었다. 내 차의 앞 범퍼가 그 차의 뒤쪽 몸통을 치고 나갔다. 그 차는 충격 지점에서 한바퀴 팽그르르 돌다가 가로등에 처박혔다. 내차도 순간적으로 비틀거렸지만 곧 균형을 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측에 제법 넓은 골목길 진입로가 눈에 들어왔다. 난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려 주택가 간이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는 미로와 같은 주택가 골목길을 요리조리 헤치며 마구 달렸다. 경찰 차량들이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줄기차게 뒤따라왔다. 언뜻 보기에도 차량이 늘어 4대 이상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아마 무전을 받은 순찰차들이 내 차량의 통과지점을 향해 하나 둘 모여드는 모양이었다. 난 골목길을 빠져 나와 원래대로 내가 가고자 하는 도봉산 방향의 큰길로 접어들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의정부 쪽으로 빠지는 길목엔 검문소가 하나 있지. 거긴 이미 차단이 되었을 꺼야. 그렇다면 도망갈 곳은 도봉산 유원지 방향뿐이로군. 난 적색 신호등을 무시하고 무서운 속도로 내뺐다. 뒤에 붙었던 경찰 차량들이 조금은 멀어진 것 같았다. 도로의 커브 구간에서 경찰의 시야가 가리는 순간을 이용해 난 재차 주택가 골목길로 내 차를 급히 틀어 숨어들었다. 사이렌 소리가 조금씩 멀어짐을 알 수 있었다.
채 일 분이 흐르기도 전에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그리곤 다시 멀어졌다가 또 가까이 들리곤 해서 경찰 차량들이 우왕좌왕 날 찾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골목길만을 이용해 도봉산 쪽으로 천천히 접근을 했다. 나는 거의 도봉산 기슭에 도달하여 권총만을 챙기고 차를 버린 채 텃밭을 가로질러 산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아까 자동차가 가로수에 부딪힐 때 크게 다친 모양이었다. 내려다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난 다리를 쩔뚝거리며 계속 뛰었다. 도봉산이야 평소에 등산을 많이 다녀 지형지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도망치기에는 아주 유리할 것 같았다.
한편, 노원경찰서 형사과 강력반에서는...
"아니, 반장님! 이거 단순 음주 뺑소니 사건인데, 교통계에서 처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뭐야? 김 형사는 왜 이리 정보가 늦어? 강력반에 배당되었으면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냐? 공무집행을 하는 경관을 치어 중상을 입히고 권총까지 탈취하여 도주했는데 그게 간단한 사건인가? 그 경관이 뇌진탕으로 죽으면 문제는 상해치사냐, 살인이냐 인데 우리가 어떡하든 고의성이 다분한 쪽으로 몰아붙여 똘똘 엮어야지. 그러면 살인죄까지 추가해서 기소할 수 있지 않겠어? 거기다가 경찰차량 1대 파손, 그 차량에 탑승한 경관 2명이 부상... 아이고, 잡히면 한 20년 썩겠구먼. 괘씸한 놈! 감히 공권력에 도전해? 어이, 안 형사! 차량번호는 조회해봤어?"
"예, 반장님... 차량 소유자의 신원을 조회해봤더니 이번이 음주운전 삼진아웃 째인데요? 교통사고 전과도 하나 있고..."
"그렇겠지. 꼭 사고치는 놈이 계속 사고를 친다니까... 잘 길들여진 양들의 무리 속에 웬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이렇게 평지풍파를 일으킨단 말인가? 그런 놈은 이 사회에서 영원히 제거를 해버려야 돼! 순진무구한 어린양들이 놈의 행동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전에 빨리 지워버려야 해! 가끔 튀는 놈들이 자칭 자유라는 이름으로 뿌려대는 방종이라는 사탕을 우리의 양들이 빨기 전에 그것을 차단하는 게 우리의 의무지. 암! 그렇고 말고... 어쨌든 도봉산으로 튀었다니까 도봉경찰서에 공조수사 의뢰를 하고 병력을 풀어 도봉산 전역을 샅샅이 수색해! 특히 용의자는 권총을 지녔으니까 조심들 하라고 일러두는 거 잊지 말도록."
이윽고 경찰서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버스와 트럭은 무장 병력을 가득 채우고 도봉산을 향해 박진감 있게 매연을 뿜어대며 속속 떠나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절며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하여 어느새 산중턱에 올라왔다. 지치기도 했었지만 호흡을 고르기 위해 조금 쉬기로 했다. 일단은 도망자의 급박한 템포는 한풀 꺾인 것 같았다. 산중의 가을밤 날씨는 제법 한기가 있건만 내 몸은 아직 땀으로 범벅이었다. 난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라이터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손으로 가려 조심스레 불을 붙였다. 담배 맛이 이렇게 구수하긴 처음이었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자신들의 다가오는 시련과 겨울의 운명을 예견이나 하는 듯 구슬프게 울어댔다.
도봉산의 동쪽으로 떨어지는 산마루 능선들이 어둠 속에서 도봉대로의 가로등을 향해 용트림을 하며 내달렸다.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새벽 3시 아니면 새벽 4시쯤 되었을 게다. 두 세 시간만 더 버티면 동이 트겠지. 이 야심한 밤에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렇군! 난 범죄를 저질러서 쫓기고 있는 중이지. 완전히 그 무엇에 홀려버린 것 같았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었다. 그 순간에 난 왜 그렇게 행동했었을까? 단지 뒤차의 클랙슨 소리가 불쾌해서? 권태에 짓눌린 내면의 폭탄이 드디어 사소한 불씨로 인해 터지고 만 것인가? 나 역시 별수 없었단 말인가? 어쨌든 간에 무엇엔가 돌아버려 일을 저지르고 말았지만 그게 권태의 칼날에 베이어서 광분이 촉발되었는지, 그러한 상황에서 일탈하기 위해 피묻은 벽을 깨부수고 뛰쳐나오다 생겨난 결과인지 아직은 판단이 모호하다. 그러나 나의 행위가 통념적인 윤리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비난과 사회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책임진다. 다만 난 타인들에게 내 운명을 맡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단죄의 문제에 관한 것은 차후에 다시 논의하자. 우선은 아침이 될 때까지 아무런 간섭이 없는 나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로 생각하기 위해 그들의 영향권 밖으로 도망가는 게 급선무다.
난 도봉산 정상 능선 라인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능선의 윤곽이 또렷하게 그어져 있었다. 자운봉 정상으로 올라가서 남쪽을 향한 우이능선을 탈것인가, 북쪽 포대능선으로 빠질 것인가? 다친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능선에 올라서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기로 하자.
저 멀리 산자락 아래에서 일사불란하게 손전등 불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짐작컨대 경찰 수색대 병력들이 나를 체포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것이리라. 이쯤 되면 나도 슬슬 자리를 떠야겠군.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주머니 속에서 권총의 무게가 느껴졌다. 난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권총의 감촉을 확인하였다. 남들은 차갑고 비정한 이미지를 매만졌다던데 난 오히려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 권총이 나에게 구원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기대감... 아니 차라리 설렘이라고 해야할까? 살상 무기인 그 권총에서 이런 역설적인 느낌이 오는 것은 왜일까?
너무너무 수고가 많다. 바쁜 가운데 장문을 쓰고 상상하고 깊은 생각도 하고 담배도 피우면서 떠오르는 잠념들을 망각하고 쓴다고 하니 대단한 열정이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여러가지로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서 대단히 감사한다. 그렇다고 건강까지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해라. 늘 건강하게 지내도록 당부드린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