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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제21강 鄕黨篇 1
제10장 향당편(鄕黨篇)
제1절
公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공자어향당, 순순여야, 사불능언자, 기재종묘조정, 편편언, 유근이
ㅇ 公子於鄕黨, 鄕黨, 주나라에서는 지방구획으로 오백호를 黨이라 했고, 이십오 당을 鄕이라 했음. 여기서는 선생께서 거주하며 사적 생활을 하는 지역 동리라는 뜻으로 보았음. 선생께서는 이미 위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같은 고향 사람 앞에 나와도 恂恂, 공손하시고 성실하셨으며, 似不能言者, 마치 말할 줄 모르는 사람 같으셨다.
ㅇ 그러나 일단 종묘나 조정에서는 군주를 도울 때나 정사에 관하여 논의를 할 때는 명석한 태도로 말씀을 잘 하시되 어디까지나 신중하셨다.
제2절
朝, 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 君在, 踧踖如也, 與與如也.
조, 여하대부언, 간간여야, 여상대부언, 은은여야. 군재, 축적여야, 여여여야.
ㅇ 조정에 있을 때의 선생님의 언어동작을 단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선생께서 조정에서는 하대부와 더불어 이야기할 때 侃侃, ‘간간’ 즐거운 듯 화락하며, 상대부와 이야기할 때는 誾誾, ‘은은’ 엄정 정숙하더니 君在, 임금이 계시면 踧踖, ‘축적’ 경건 신중하고 與與, 위의를 세워 또한 온화로왔다.
제3절
君召使擯, 色勃如也, 足躩如也. 揖所與立, 左右手, 衣前後, 襜如也. 趨進, 翼如也.
군소사빈, 색발여야, 족곽여야. 읍소여립, 좌우수, 의전후, 첨여야. 추진, 익여야.
賓退, 必復命曰, 賓不顧矣.
빈퇴, 필복명왈, 빈불고의.
ㅇ 선생님이 생존 시에는 소위 춘추열국의 시대이며 제후국의 여러 군주가 각지에 봉해져 있었는데, 군주들이 서로 우의를 맺으려고 군주 자신 또는 대리사신이 타국을 방문하여 서로 안부를 묻는 의례를 가졌는데, 이것이 聘禮(빙례)이다. 君召. 임금이 공자님을 불러 擯, 외국의 빈객을 군주를 대신해서 접대하는 役을 이름. 使擯, 빈객의 접대를 맡기면, 色勃, 얼굴빛을 엄숙하게 고치시고, 足躩, 발걸음을 빨리 하신다. 揖所與立, 같이 서있는 빈객에게 읍할 때는 左右手, 손을 좌우로 했다가 또 우로 돌려 절하시거나 衣前後, 그 때도 옷자락은 앞뒤로, 襜如也. 가지런히 출렁일 뿐이시다. 趨進, 총총걸음으로 나가실 때도 翼如也. 몸차림이 단정하신 대로였다.
ㅇ 賓退, 내빈이 물러가면 必復命曰, 賓不顧矣. 반드시 손님은 안심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잘 갔습니다 하고 복명하셨다.
제4절
入公門, 鞠躬如也, 如不容. 立不中門, 行不履閾. 過位, 色勃如也, 足躩如也,
입공문, 국궁여야, 여불용. 입불중문, 행불이역. 과위, 색발여야, 족곽여야,
其言似不足者. 攝齊升堂, 鞠躬如也, 屛氣似不息者. 出, 降一等, 정顔色, 怡怡如也.
기언사부족자. 섭제승당, 국궁여야, 병기사불식자. 출, 강일등, 정안색, 이이여야.
沒階, 趨進, 翼如也. 復其位, 踧踖如也.
몰계, 추진, 익여야. 복기위, 축적여야.
ㅇ 선생님께서 궁중에서 몸소 禮를 실천해 보이는 것으로, 그의 몸가짐이 근엄하고 신중했으며 겸손하고 아름다웠음을 말하고 있다. 入公門, 대궐 문에 들어갈 때에는 鞠躬如也, 몸을 굽혀 절하는 듯 송구스러워하는 품이 如不容. 마치 문이 좁아서 몸이 들지 못하는 듯하시다. 立不中門, 서는 경우에는 문의 중앙을 피하셨고, 行不履閾. 履(밟을 이), 閾(문지방 역)이니까 들어갈 때에는 문지방을 밟지 않으셨다.
ㅇ 過位, 임금이 나와서는 자리를 지나갈 때에는 色勃如也, 안색을 신중하게 고쳐 足躩如也, 빠른 걸음으로 지났으며, 其言似不足者. 말이 모자라는 듯 과묵하셨다.
ㅇ 攝齊升堂, 옷자락을 잡고 층계를 밟고 당에 오를 때도 鞠躬如也, 절하는 듯 송구스러운 품으로 屛氣似不息者. 숨을 죽여 호흡을 하지 않는 듯하셨다. 出, 당에서 내려올 때는 降一等, 층계를 하나만 내디뎌도 정顔色, 怡怡如也. 안색을 펴 화락한 낯을 지으셨고, 沒階, 趨進, 층계를 다 내려와 총총걸음으로 나가신 때의 품은 翼如也. 단정하고 아름다우셨다. 復其位, 踧踖如也.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태도는 신중하고 경건하셨다.
제5절
執圭, 鞠躬如也, 如不勝. 上如揖, 下如授.
집규, 국궁여야, 여불승. 상여읍, 하여수.
勃如戰色, 足蹜蹜如有循. 享禮, 有容色. 私覿, 愉愉如也.
발여전색, 족축축여유순. 향례, 유용색. 사적, 유유여야.
ㅇ 執圭, 圭는 玉으로 만든 牌 같은 것으로 諸侯 또는 代理人들이 다른 나라를 禮訪했을 때 지니고 信認과 존경을 표시하는 뜻으로 상대방에게 주었던 것으로, 執圭는 聘禮 即 禮訪儀式의 핵심인 圭를 상대방에게 贈授하고자 圭를 손에 받드는 뜻이다. 圭를 들어 바치실 때는 몸을 굽히고 송구스러워하는 품이 마치 무거워 못 견디는 듯하시며, 上如揖, 下如授. 규를 위로 올릴 때는 읍하는 듯, 아래로 내릴 때는 물건을 넘겨줄 때 정도로 정중히 하시고,
ㅇ 勃如戰色, 안색이나 표정은 삼엄한 듯 신중하시고, 足蹜蹜如有循, 발을 땅에 끄는 듯 좁게 옮겨 걸으신다. 享禮, 有容色. 그 후 예물을 진상하실 때는 부드러운 낯을 지으시며, 私覿, ‘적’은 뵈올 적, 개인적으로 예물을 진상하는 회견에서는 愉愉如也. 몹시 즐거운 표정을 지으셨다.
제6절
君子不以紺緅飾, 紅紫不以爲亵服. 當署, 袗絺綌, 必表而出之.
군자불이감추식, 홍자불이위설복. 당서, 진치격, 필표이출지.
緇衣, 羔裘, 素衣, 麑裘, 黃衣孤裘. 亵裘長, 短右메. 必有寢衣, 長一身有半.
치의, 고구, 소의, 예구, 황의고구. 설구장, 단우메. 필유침의, 장일신유반.
孤貈之厚以居. 去喪, 無所不佩. 非帷裳, 必殺之. 羔裘玄冠不以弔.
고학지후이거. 거상, 무소불패. 비유상, 필살지. 고구현관불이조.
吉月, 必朝服而朝.
길월, 필조복이조.
ㅇ 의복에 관한 강령으로 공자님의 옷차림에 대해서 기술 되었다.
ㅇ 君子. 군자는 孔子님을 가리킴. 不以紺緅飾, ‘감’ 영보라빛 감, ‘추’ 아청빛 추, ‘식’꾸밀 식, 감은 제사시의 대례복 상의 빛깔이고 추는 그 치마의 빛깔과 비슷하므로 평복에는 피한다는 설이 있음. 공자께서는 곤색과 아청빛으로 옷깃을 달지 않으셨고, 紅紫不以爲亵服. ‘설’ 사복 설, 설복(褻服)은 평복을 의미함. 또 붉은 빛이나 자주색으로는 평복을 만들지 않으셨다. 當署, 여름철에는. 袗絺綌, ‘진’ 고운 옷 진, ‘치’ 가는 갈포 치, ‘격’ 가는 침 베 격, 가는 갈포나 굵은 갈포의 홀 옷을 입으셨으나, 必表而出之. 외출 하실 때는 반드시 다른 옷을 겉에 입어 속이 보이지 않게 하셨다.
ㅇ 緇衣, 羔裘, 素衣, 麑裘, ‘치’ 검을 치, ‘고’ 양새끼 고, ‘구’ 갖옷 구, ‘예’ 사슴 새끼 예. 검정 옷에는 어린 검은 양의 가죽 옷을 받쳐 입으셨고, 黃衣孤裘. 누런 옷에는 여우의 가죽 옷을 받쳐 입으셨다. 亵裘長, 短右메. ‘설구’ 평복을 의미, ‘메’ 소매 메. 평복은 길게 했으나, 바른쪽 소매는 짧게 하셨다. 必有寢衣, 반드시 자리 옷을 쓰시고, 長一身有半. 길이는 키의 한 배 반이나 되게 하셨다.
ㅇ 孤貈之厚以居. ‘고’ 여우 고, ‘학’ 단비 학. 바닥에는 여우와 담비의 두꺼운 털가죽을 깔고, 앉으셨다. 去喪, 복상을 지내는 이외에는 無所不佩. 언제나 온갖 패물을 다 찼으며 非帷裳, 必殺之. 예복이나 제복의 통바지가 아니면 보통은 약식으로 주름 대신 천을 갈라 꿰매셨다. 羔裘玄冠不以弔. 검은 어린 양의 가죽 옷이나 검은 비단 관을 쓰고는 조상 가는 일이 없으셨고, 吉月, 매월 초하루 必朝服而朝. 반드시 정장인 조복을 입으시고 조회에 나가셨다.
제7절
齊必有明衣, 布. 齊必變食, 居必遷坐.
제필유명의, 포. 제필변식, 거필천좌.
ㅇ 齊, 목욕재계(沐浴齋戒). 明衣. 깨끗한 옷. 목욕재계(沐浴齋戒) 할 때는 반드시 깨끗한 옷을 입으시며, 布, 麻布, 삼베. 그 옷은 삼베로 만든 옷이었다. 齊는 조상이나 기타 제사 준비로 몸을 깨끗이 하여 정성을 드리는 것이며, 목욕한 뒤에 입는 옷을 明衣라고 한다. 朱子의 설에 의하면 前節(제6절)의 必有寢衣長一身有半은 본래 齊必有明衣布의 다음에 들어가는 句이며 따라서 齋戒時의 규칙을 말한 것인데 윗 句 속에 잘못 들어가게 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ㅇ 齊必變食, 齋戒하실 때는 평시와 다르게 식사를 하시며 別室에 거처하셨다.
齋戒를 할 때에는 반드시 禁酒하고 香草를 禁하는 등 飮食을 바꾼다 居處하는 자리도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긴다. 환경을 바꾸어서 몸과 마음을 새롭고 깨끗하게 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孔子님의 禮法과 청결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제8절
食不厭精, 膾不厭細. 食饐而餲, 魚餒而肉敗, 不食. 色惡, 不食. 臭惡, 不食.
사불염정, 회불염세. 사에이애, 어뇌이육패, 불사. 색악, 불사. 취악, 불사.
失飪, 不食. 不時, 不食. 割不正, 不食. 不得其醬, 不食. 肉雖多, 不使勝食氣.
실임, 불사. 불시, 불사. 할부정, 불사. 부득기장, 불사. 육수다, 불사승사기.
唯酒無量, 不及亂. 沽酒市脯不食. 不撤薑食, 不多食. 祭於公, 不宿肉.
유주무량, 불급란. 고주시포불사. 불철강사, 불다사. 제어공, 불숙육.
祭肉, 不出三日. 出三日, 不食之矣. 食不語, 寢不言.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제육, 불출삼일. 출삼일, 불사지의. 사불어, 침불언. 수소사채갱, 과제, 필제여야.
ㅇ 本節은 孔子님의 까다로운 식생활에 대한 기록이며 섬세한 공자님의 식취미를 접해보니 2500년 전의 생활기록 같지가 않다. 이미 2500년 전 공자시대에 중국 상류계급의 문화생활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음이 확실한데 여기 기록된 것이 지나치게 자세하므로, 齋戒時의 특별한 주의사항이라고 말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朱子는 평소의 식생활의 기록이라고 전한다.
ㅇ 食不厭精, 食은 식으로 읽지 않고 ‘사’라고 읽어서, 밥을 말한다. ‘식’이라고 읽으면 일반 식사를 뜻하는 것이다. 精은 精하게 찧은 白米, 一石을 찧어서 8斗가 됨을 이름. 밥은 정미된 흰 쌀밥을 좋아하셨으며, 膾不厭細. 膾(회)는 육회나 魚회나 가늘게 썬 것을 좋아하셨다. 食饐而餲, 饐(에)는 밥이 덥고 습하여 상한 것을 말하고 餲(애)는 맛이 변한 것이니 쉰 밥을 말한다. 魚餒而肉敗, 생선이 상하면 餒라 하고 고기가 썩는 것을 敗라 한다. 밥이 쉬어 변한 것과 고기가 뭉크러져 살이 썩은 것을 먹지 아니하였다.
ㅇ 色惡, 不食. 빛깔이 나쁘면 먹지 아니하며, 臭惡, 不食. 냄새가 나쁘면 먹지 아니하며, 失飪, 不食. 알맞게 익지 아니하면 먹지 아니하며, 不時, 不食. 간식을 안 한다는 설과 제철에 나는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설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덜 익은 과일도 먹지 아니하였다 로 정리했습니다.
ㅇ 중국요리법은 고대부터 발달하여 동물의 여러 부분을, 혀, 심장, 간 못 먹는 것이 없었는데, 부분에 따라서 베는 법이 있었다. 방법에 따라서 베지 않은 것은 위생에 해가 있으므로 먹지 않는다고 했다. 割不正, 不食. 바르게 자르지 않은 고기는 먹지 아니하며, 不得其醬, 不食. 음식에 따라서 醬의 종류도 달라서 소오스, 간장, 마요네즈 따위가 음식에 없으면 맛이 덜 좋을 뿐만 아니라, 갖추지 못한 것이 불쾌하고 해로운 까닭으로, 음식에 간과 양념이 맞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였다. 肉雖多, 不使勝食氣. 곡식의 기운과 고기의 기운이 서로 和해야 養生에 좋으므로 고기가 많을 때는 곡식의 기운에 이기지 않도록 식욕을 넘지 아니하게 했다. 唯酒無量, 不及亂. 오직 술은 定量 하지 아니하되, 亂飮치 아니하였다. 沽酒市脯不食. 저자에서 사온 술과 脯(포)를 먹지 아니하며, 不撤薑食, 생강은 끼니마다 먹으며, 不多食. 과식을 삼갔다.
ㅇ 祭於公, 不宿肉. 宗廟에서 내린 祭肉은 밤재우지 않고 먹으며, 祭肉, 不出三日. 出三日, 不食之矣. 祀祭에 쓴 고기는 3일을 묵히지 아니하시더니, 3일을 넘기면 먹지 않으셨다. 祭於公은 군주의 조상 제사를 신하가 거들고, 제사가 끝나면 제물인 소, 양, 돼지를 통째로 군 것을 신하에게 분배하였는데, 이것을 얻어오면 그날 안으로 나누어 먹는다. 제육은 자기집 제사에서 쓰던 고기는 3일 안에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ㅇ 食不語, 語. 남의 말에 회답하는 것을 말함. 식사 전에 남과 이야기하지 아니하며, 寢不言. 言. 자기의 말을 말한다. 잠잘 때 먼저 말하지 아니하였다.
ㅇ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비록 간소한 밥(疏食), 야채 국(菜羹), 오이(瓜)라 할지라도 반드시 엄숙한 태도로 고수레를 하였다. 여기서 祭라 함은 음식을 먹을 때 조금씩 집어서 그릇 밖에 덜어 놓고, 그 옛날 처음 음식 먹는 것을 창안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고수레라 칭했다.
제9절
席不正, 不坐.
석부정, 불좌.
ㅇ 席不正, 不坐. 선생께서는 좌석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 중국인들이 의자를 사용한 것은 당대부터 시작한 풍습이며, 그 전에는 앉는 자리에만 방석을 깔아서 앉았는데, 앉는 장소를 옮기게 되면 옮기는 대로 방석도 옮겨서 깔았다. 이것이 席이다. 좌석이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아니하다라는 것은 방석의 위치가 똑바르면 앉고, 바르지 않으면 화를 내고 그냥 떠나버리는 것처럼 읽혀지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앉기 전에 방석의 위치를 바르게 하여 앉는 것이 그 당시의 예의였으므로, 바르지 않으면 그냥 앉지 않고 바르게 고쳐놓고 앉았다는 말이다.
제10절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 鄕人儺, 朝服而立於조階.
향인음주, 장자출, 사출의. 향인나, 조복이립어조계.
ㅇ 선생께서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노인들이 먼저 나간 다음에야 나가시었다. 鄕人이 疫神을 쫓는 놀이를 할 땐 반드시 朝服하여 동편 섬돌에 서계셨다.
ㅇ 鄕은 12,500戶를 단위로 하는 지방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이 본 뜻이지만, 여기서는 촌락공동체를 뜻한다. 鄕人飮酒, 마을 사람들이 날을 받아서 公廳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잔치를 향인의 음주라 하였다. 잔치의 목적은 유능한 젊은이를 발견하는 것이라 하고 또 경로회의 뜻도 있었다고 한다. 杖者出, 斯出矣. 잔치가 끝나서 해가 질 무렵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나가면 공자도 그 뒤를 따라서 나감으로써 노인에 대해서 경의를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ㅇ 중국의 지팡이는 오늘의 스틱처럼 짧지 않고, 杜甫나 唐詩에 자주 나오는 지팡이처럼 길었다. “禮記”의 王制篇에 50에는 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60에 鄕里에서 짚고, 70에 나라에서 짚고, 80에 朝廷에서도 짚는다 하여 노인을 존경하는 동방에서는 나이 80이 되면 宮中에서도 지팡이를 짚게 하였다.
ㅇ 鄕人儺, 朝服而立於조階. 儺(나) 유순할 나, 疫神을 쫓는 놀이. 마을 사람들이 疫神을 쫓는 푸닥거리를 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朝服而立於조階. ‘조’ 동편 섬돌 조, 선생께서는 궁중에 들어갈 때 입는 공식예복을 입고, 선조를 모시는 廟堂(묘당은 고대의 습관으로 남쪽을 향하였음) 남쪽 툇마루의 동서편에 뜰에서 당상에 오르는 계단이 있었는데, 동쪽계단을 조계라 하여 선생께서는 이 조계에 서서 푸닥거리하며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을 맞으면서, 선조의 귀신들이 놀라지 않도록 하였다고 註를 달아놓기도 했다. 새롭게는 푸닥거리는 일종의 장난 삼아 하는 부락의 미신이지만 선생님은 지식인으로서 그것을 경멸하지 않고 예복을 입고 묘당 앞에 나와서 마을사람들과 협력하였다는 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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