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 감옥, 그 생지옥에서 만난 하나님
♣ 시인, 감옥에서 노래하다
예닐곱 살에 이미 문학적인 재능을 드러냈고 "고목가"로 우리 문학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이승만은 감옥에서 빼어난 한시들을 남겼다. 그가 남긴 시들은 모두 200여 편인데 그중에 143편이 한성 감옥에서 쓰여졌다.
몸은 매였지만 마음은 시의 세계를 자유로이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옥중 동지 유성준은 시를 짓는 정황을 멋스럽게 들려준다. "교교한 달빛이 철창으로 들이치는 밤이면, 등불을 치우고 입으로 시를 지어 들려주었다."
"죄수복을 입고 옥살이를 하며" 는 푸를 빛깔의 죄수복을 입고 노역에 동원되는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묘사, 그럼에도 굽히지 않는 지사(志士)다운 절개를 표현했다.
선비가 궁해지면 독서를 후회하니
벼슬이 빚어낸 삼년간의 감옥살이
쇠줄에 묶여 다니며 새롭게 정들지만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기구)를 쓰고 보니 옛 친구도 낯설구나
예부터 영웅은 옷 속에라도 이가 있다는데
지금은 고기 없이 밥 먹는 나그네 신세
때가 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니
죽을지언정 장부의 마음 변함이 있으랴
고기 없이 밥을 먹는 나그네 신세인데, 그나마 식사마저도 형편없었다. 이승만의 작품 중에는 감옥의 부실한 식사를 꼬집은 '관식(官食)'이란 시도 있다.
우거지국 맑기가 비 갠 연못 같은데
이 방 저 방 골고루 나누어 주네
밥상이 아니라도 배부르고 자리도 항상 젖고
반 사발밥이라 씀바귀도 달기만 하네
나물은 싱거워 소금이 생각나고
깨물리는 모래알 옥같이 희네
얼굴 가득한 부황기로 사람마다 하는 말이
이거나마 하루 세 때 먹어봤으면
"병들어 죽은 죄수를 슬퍼함"이란 애절한 노래도 있다. 콜레라가 창궐하던 당시 눕혀진 시체가 어물전의 물고기 같았다는 김형섭의 증언이 떠오르게 하는 시이다. 유물이라곤 집에서 온 편지 뿐, 종이 한 장 손에 쥔 채로, 죄수로 죽어야하는 인생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
홀로 은혜가 못 미친 말라빠진 물고기
땅 속에 눕는 것이 차라리 감옥보다 나으리
죽어 황천에서는 쉬이 친구를 만나겠지만
살아있어 오히려 명부(冥府)의 친척들 보지 못할 터
죽은 뒤 옛 이름은 기록으로 남고
손 안의 유물은 집의 편지 뿐
올해에는 나라의 경사로 특사가 많았는데
아, 그대는 마침내 죄를 지은 채 돌아갔네.
한성 감옥에는 수준급 한시 작가들이 몇몇 있었다. 이승만은 그들과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기도 했다. "이유형의 팔조시에 화답함"에는 감옥에서 성숙된 이승만의 정치 의식을 보여준다. 정치의 급선무는 외교이며 국가가 고립되면 위태롭다는 시구에서, 이승만의 외교 중시 노선이 이미 한성 감옥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의 급무는 외교에 있고
일일랑 마땅히 전문가에게 물어봐야지
고립되면 나라의 존립이 위태로우니
자유로서 백성을 인도합시다
그릇된 옛법은 선뜻 고치고
신식도 좋으면 받아들이소
오늘엔 교육이 가장 중요해
양병(養兵)은 전쟁을 막을 뿐이고
♣ 한성 감옥, 우리 민족의 골고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승만은 한성 감옥에서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기독교인이 되었고 엄청난 독서량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전도왕이 되었다. 탁월한 영어 실력을 쌓았고 학교를 개설하고 도서관을 설치했으며 「독립정신」을 비롯한 수많은 걸작을 저술했다.
다른 사람이 평생 한 가지도 이루기 어려운 일들을 모두 이루어낸 곳은 감옥이었다. 감옥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감옥에서 이승만은 누구를, 무엇을 만났을까?
첫째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있었다. 허문도는 이승만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맹자가 설파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큰 지도자를 있게 하기 위해 하늘이 과한다는 연마 과정에 이승만의 일생은 너무도 들어맞는다는 느낌을 준다.
맹자는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대임(大任)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고뇌하게 하고, 그 살과 뼈를 고달프게 하며, 그의 배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곤궁하게 하며, 또한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뒤틀어지게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타고난 성정(性情)을 강인하게 만들며, 그의 부족한 점을 키워주는 것이다."
감옥에는 큰 인물을 만들기 위한 큰 고난이 있었다.
둘째로 감옥에도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이승만을 만나주셨다. 고난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장이었던 것이다. 이승만도 그 점을 깨달았다. 1903년 9월 <신학월보>에 실린 "두 가지 편벽됨"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감사히 여기는 중에 한 가지 가장 간절히 감사하게 여기는 바는 다만 하나님의 교가 이 세상에 제일 가난하고 하찮고 괴롭고 악하고 우환(憂患) 고초(苦楚)가 있는 곳마다 특별한 효험이 되는 일이라.
나는 이것을 가장 감사히 여기며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아듣는 것은 다 지극히 좋고 지극히 간절한 줄로 믿되, 그 중에 더욱 간절히 감동되는 것은 세상에 환자가 있는 고로 의원(醫員)이 쓸 데가 있느니라 하심이라. 이것은 다 사람의 개인의 뜻으로는 나올 수 없는 말씀으로 믿을지라.
이러므로 사람의 극히 어려운 지경은 곧 하나님이 감화시킬 기회라 하나니, 예컨대 논에 물이 마르고 뜨거워 고기가 살 수 없게 된 후에야 스스로 새 물길을 얻어 강과 바다를 찾아갈지라 ... 대한 사람들의 새 물줄기는 예수교라."
셋째로 민족을 향한 희망이 있었다. 고난 속에서 이승만을 만나주신 하나님은 동일하게 고난당하는 우리 민족을 만나주실 수 있다. 고난이 있어서 이승만이 하나님을 찾았던 것처럼, 민족의 고난이 하나님을 찾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이승만은 믿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 이승만은 민족의 고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전개했다. 1908년 6월 15일 피츠버그 기독교 대회에서 행한 연설의 기록이 남아있다.
"자기들의 나라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어둠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자기들을 들어 올려 줄 어떤 위대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갑자기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무슨 힘도 그들을 들어 올려 줄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썩어빠진 정부는 정화되어야 하고, 그들의 마음과 힘을 갱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자나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한국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만이 참다운 구원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기회를 주셔서 한국 사람들이 민족적 오만과 조상 숭배와 전래의 미신을 버리고 빈 마음과 겸손한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감옥 생활은 이승만에게 큰 인물이 되도록 연단 받는 큰 기회였다. 마찬가지로 나라를 잃어버리는 고난이 하나님이 주신 큰 기회가 되어, 민족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넷째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함께 고난 받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다. 훗날 정치가, 외교가, 교육자로 다양하게 활동했던 이승만은 감옥에서 평생의 동지들을 만났다.
미국 유학을 떠날 때 감옥의 부서장 이중진이 여비를 대주었다. 하와이를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삼도록 박용만이 충고했다.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하여 훗날 임시 정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을 놓아준 이는 이상재였다. 그들은 모두 한성 감옥에서 만난 '복당 동지'들이었다.
이는 성서의 요셉을 연상케 한다.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파라오의 고관을 통해서 훗날 총리가 될 기회를 잡는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 지혜로운 정책을 펼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7년 대기근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승만 역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유학, 하와이 정착, 임시 정부 대통령 취임을 도와주었다. 그들이 독립 운동의 동료가 되었고 건국의 동지가 되었다. 이승만이 최고 지도자가 되어 공산 세력으로부터 수많은 생명을 구출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인맥이 한성 감옥에서 맺어졌다. 그들은 진정 "복당동지(福堂同志)"들이었다.
다섯째로 그곳에 '국민'(國民)이 있었다.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윤치호는 이런 글을 남겼다. " ...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었다니,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임금이 그렇듯이 국민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이 노예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윤치호만의 의견은 아니었다. 멸망해가는 나라의 백성들의 무능과 못남을 지적하는 글들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승만은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품었다. 그가 감옥에서 쓴 글이다.
"저 순한 인민이 다 죄가 있어 멸망에 들어감이 어찌 어지신 하나님의 슬피 여기심이 아니리요. 이에 구원할 길을 열어주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천도(天道)의 오묘한 이치를 드러내고 ...
필경은 세상 인민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사 천만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돌아와서 죄를 자복하고 다시는 악에 빠지지 말아서 용서를 받고 복을 받게 하셨나니 순전히 사랑함이 아니면 어찌 남을 위하여 몸을 버리기에 이르리요."
이 글은 이승만의 애민(愛民) 정신이 기독교 신앙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손가락질했던 바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다.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슬퍼하셔서 백성들에게 하늘의 이치를 보여주셨고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렇다면 그 백성들의 무능과 무지를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노예로 사는 것을 당연시해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고난을 통해서 백성들을 살려내야 한다. 이것이 이승만이 일생을 쏟아 부으며 추구한 복음적 애민 정신이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우매한 백성'을 일깨워 '교화된 국민'이 되게 한 것이다. 그 비전은 한성 감옥에서 주어졌다.
여섯째로 내일을 위한 준비가 있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노트에 쓴 글 중에 "세계의 유명 인사록"이 있다. 그 글에는 1900년 전후 일본 정치가들의 이름이 다수 등장한다. 나중에 그가 국제 무대에서 직접 상대하게 되는 미국의 헤이 국무장관이나 태프트 대통령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미국의 대통령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이미 감옥에서부터 연구한 주제였다.
그것은 기약 없고 허황된 행위였다.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의 비참한 감옥에 중죄수로 갇혀버린 청춘이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에 대해서 연구를 한들 어디에 쓸 것인가.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판국에,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유명 인사들의 활동 상황을 받아 적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비전이었다. 감옥으로도 쇠사슬로도 묶을 수 없는 열망이었다. 훗날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이승만은 미국의 고위 관료들이 인정했듯이, 세계 정세에 누구보다도 정통한 인물이었다. 세계를 주무르는 강대국의 지도자들도 이승만 앞에서는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성 감옥에서부터의 치열한 준비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감옥에서 그는 세계 최강의 지도자들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수들의 눈을 피해가며 세계적인 리더들의 이름, 프로필, 업적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면서, 이승만은 그들과 어깨를 견줄 리더로 부상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리더로 부르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 부름받는 장면은 하나같이 성실하고 치열한 현장이었다. 엘리사는 밭을 갈다가,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다가, 마태는 세관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소명(召命)을 받았다. 성실은 소명의 출발이요 애국의 시작이다.
일곱째로 한성 감옥은 우리 민족의 골고다얐다. 그곳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한성 감옥에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났다. 하나님은 권력자 헤롯의 화려한 왕궁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지 않으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고고한 학당을 통해서 복음을 베풀지 않으셨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은 활동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그곳은 가장 처참하고 가장 비참하며 가장 참혹한 곳이었다. 십자가에는 억울함과 고통과 잔인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야만적인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 구원이라는 가장 찬란한 대업(大業)을 이루셨다.
한성 감옥은 기울어가던 조선의 야만적인 밑바닥이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다. 이 나라를 이끌어갈 애국자들은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고난을 받았다.
그들 중의 한 사람 이승만에게 성령의 불꽃이 임했다. 그것은 불씨가 되어 감옥으로 번졌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민족 복음화와 기독교 입국의 꿈을 담은 이들은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들이 훗날 조선 팔도로, 하와이와 미국으로, 만주와 시베리아와 일본으로, 우리 민족이 사는 곳 어디에나 번져간 신앙과 애국의 불길이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 생활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나는 6년 동안의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서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이승만과 옥중 동료는 한성 감옥을 복당(福堂)이라고 불렀다. 그곳은 그들만이 아닌, 우리 민족 모두의 골고다였고 축복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