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민 정 음 서문
백성 가르치시는 바른 소리이라.
나라 말씀이 중국에 달라 글자를 서로 통하지 아니할 새,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말하고자 함이 있어도,마치매 제 뜻을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내 이를 위하여,어여삐 여겨,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들었으니,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종을 통해 주신 한글을 세계복음화에 써 주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세종대왕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영세 영세
영~ 영~ 세!!!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치란의 자취를 살펴 보아야 한다.
지나간 치란의 자취를 살피기 위해서는 역사를 상고하는 것이 최선이다."
- 세 종 대 왕 -
<수평적 경영마인드가 이뤄낸 위대한 성취>
세 종
세종의 통치술은 통치자의 권위에 수평적인 CEO 경영마인드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형태였다.그는 준엄한 카리스마로 리더십을 발휘하였으면서도
온화한 성품과 넓은 포용력으로 민주적 의사 결정 구도를 확립해나갔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의 구현. 찬란한 문화 부흥,위대한 편찬사업과 훈민정음의 창제,과학기술의 발전, 법제의 정리 등 그가 이뤄낸
많은 업적은 그의 통치술이 빚어낸 자연스런 결과였다.
성왕 세종,불멸의 치적과 고뇌
1.양위의 절차와 명분
1418년,세자 충녕대군은 아버님 태종의 되를 이어 조선왕조의 네 번째
임금으로 왕위를 이었다.춘추 22세,아직 약관의 애티를 벗지 못했으나
학덕은 '제왕학'에 가장 접근해 있었던 왕재였다.
성왕 세종이 이룩한 그의 황금시대는 동양적인 개념의 제왕학이
21세기 CEO 경영마인드의 원형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왕 세종은 새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민심(여론)의 향배를 조사하여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였고,집현전과 같은 기구를 운영하면서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였다.또 한글을 반포할 때는 훈구대신들의 살인적인
반대를 강력한 추진력으로 극복하였다.
그의 빛나는 업적은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
며,없는 듯하면서도 준엄했던 카리스마는 그의 리더십을 돋보이게 하였다
장영실과 같은 미천한 인재를 등용하여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으로 위대한
과학자로 탄생하게 하였던 성왕 세종은 그의 인품이 곧 CEO 마인드였다.
세종의 등극은 드라마틱하였다.살아 있는 임금이 왕위를 물려주는 이른바
양위의 과정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물러나려는 임금이 양위를 빙자하여
신료들의 충섬심을 시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세종실록]은 그 위험
한 과정을 아주 소상하게 적어놓고 있다.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의 휘는 이도요,자는 원정이니,
태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다.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다.
태조 6년(1397)4월 10일,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였다.어려서부터
영명강과하고,침의중후하며,관후인자공검하고,또 효도하고 우애함이
지극하였다.
태종 8년에 충녕군으로 봉해졌고,우부대언 심온의 딸과 결혼하였다.
13년 5월에 충녕대군으로 올려 봉하고,18년 6월 태종이 개성에 머
물 때,문무백관들이 세자 양녕에게 잘못이 많다 하여 폐하기를 청하
니,처음 태종은 폐세자의 맏아들로써 계승하게 하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전하께오서 세자를 교양하심이 극진하셨는데도 오히려 이러하니,
이젠 어린 손자를 세운다면 어찌 앞날이 무사할 것을 보장하오리까?
하물며 어버지를 폐하고 아들을 세움이 의리에 어떠하올지.청컨대 그
중 어진 이를 골라서 세우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태종이 말하기를,
"그러면 경들이 마땅히 어진 이를 가리어 아뢰라."
하니,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
"아들이나 신하를 알기는 아버지나 임금과 같은 이가 없사오니,가
가리는 것이 성심에 달렸사옵니다."
이 대답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자고로 신하가 드음 대의 임금을 거론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잘못 고하게 되면 현재의 임금에게는 불충이 되
고,새로운 임금에게는 아첨이 된다.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아첨과 불충은
정반대의 재앙이 되어 묵숨까지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그러므로
역대의 임금들은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세자에게 선위하겠노라!"
고 선언하면서 조정의 분위기를 살피기도 하고,자신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가늠하기도 한다.
신하들이 태종에게 몸소 지명해줄 것을 청한 것은 그런 위험에서 벗어
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사심이 없었던 태종 또한 그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대답하였다.
"충녕대군이 천성이 총민하고,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세워 글을 읽고, 또 정치에 대한 대체를 알아,매양
국가에 큰일이 생겼을 때는 의견을 내되,모두 범상한 소견이 의외로
뛰어나며,또 아들 중에 장차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가 있으니,
내 이제 충녕으로 세자를 삼고자 하노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
"신들의 이른바 어진 이를 골라야 한다는 말씀도 역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이옵니다."
조정의 공론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곧 그를 세워 왕세자를 삼았고,
백관들로 하여금 하례를 올리게 하였다.
이어 세자 책봉 교서를 중외에 내려 죄인을 석방하게 하였다.
1404년(태종 4)에 세자에게 궁을 주고 교지로 부인 경숙옹주를 경빈으로
봉하였다.태종이 몸소 정전에 나와 세자를 책봉하고 책문을 내렸다.
"세자를 세움은 인심에 관계되는 것이며,실로 큰 전칙이 되는 것이다.
원량을 가리어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으려 한다면,오직 지공하여야 할
것이다.이제 이 명과 위의 높음을 바르게 하여 책봉의 예식을 거행하노니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하고 효제.겸공하여,사랑과 공경으로써
어버이를 섬기되,아무 때에라도 조심조심하며,총명한 자질에 배움을
즐겨하여,날마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나라 일을 부탁함에 합당하고,
신하와 백성이 우러러 소망을 두기에,이러므로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를
삼노라.
아아,하늘이 밝은 덕을 돌보시고 귀신이 그 정성을 흠향하니,제사
맡아 계통을 잇되 늘 책임이 어렵고도 큼을 생각하여,깊은 못에 다
다른 듯이,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야 길이 복록을 누리리라."
또 세자비 경빈에게도 책문을 내렸다.
"공의를 따라 원량을 세우니,세자의 자리가 곧 정해졌고,배필을 신중히
하여 종사를 받드니,위호를 마땅히 높여야 할 것이다.이에 아름다운
칭호로써 떳떳한 법전을 따르노니,아아,너 심씨는 곧고 아름다운 성품과
단저한 몸가짐으로 늘 공경함과 두려운 마음을 지녔고,일찍이 근검한
덕이 현저하여 능히 부도에 두터웠으니 한집안 식구됨에 합당한지라.
이에 좋은 날을 가리어 대례의 절차를 갖추어 신하 아무를 보내어 경빈에
책봉하노니,정숙하고 화기롭게 힘쓸지니 정성은 남편이 정치에 근면하기
를 권고하고 돕기에 간절히 하여,힘써 서로 받들 것이며,자손이 번창하여
상서로움이 더욱 클지어다."
얼마나 당당한 논리인가.오늘날의 대기업에서 다음 대의 CEO를 정하고
기업을 상속할 때 이만한 논리적 근거를 문서로 적어서 남길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 후,개성에서 서울로 돌아온 태종은 8월 초 8일에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지신사(도승지) 이명덕 등을 불러 양위할 것을 선언했다.
"내 왕위에 있은 지 이제 이미 18년이 되었는데,밤낮으로 늘 송구
스러운 마음에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이 나타났으며,또 묵은 병이 있어 요즈음 더욱
심하므로,이제 이 자리를 세자에게 전위하고자 하노라."
하니,명덕 등이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힘써 아뢰었으나,태종이
듣지 아니하고 보평전에 나아가서 내신으로 하여금 새 임금을
부르되,두세 번 재촉하고는 상서사에 명하여 옥새를 드리게
하였다. 이에 정부 '육조'공신 '삼군총재'여섯 대인들이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와서,하늘을 불러 통곡하며,옥새를 함께 잡아당기어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태종이 소리를 높여 명덕에게 질책하기를,
"임금의 명령이 있음에,신하가 좇지 아니함이 도리에 옳으냐!"
하므로,명덕이 부득이 옥새를 바치었다.
임금(세종)이 그 부르는 뜻을 알지 못하고,황급히 달려가 탑전에 이
르렀다.태종이 곧 옥새를 주었어도 임금이 엎드려 일어나지 않으니,
태종이 몸소 임금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고 옥새를 주고 곧 안으로 들어
갔다.
임금이 황급히 옥새를 상 위에 올려놓고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지성껏 사양하였고,여러 신하들도 역시 통곡함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환관 최한을 시켜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내 이미 국왕으로 더불어 서로 대해 앉았으니,경 등은 다시
청하지 말라!"
하면서,임금에게 명하여 옥새를 받아 궁에 머물게 하고,따라서 붉은
양산을 주고 연화방에 옛 세자의 전으로 옮겨가니,백관이 뒤를
따라 뜰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전과 같이 하기를 청하고,임금도 옥새를
받들고 친히 내정에 나아가 굳이 사양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태종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나의 뜻을 말한 것이 이미 두세 차례에 이르렀거늘,어찌 나에게
효도할 것을 생각지 않고 이다지 요란하게 구느냐?"
하고,손을 맞잡아 북두를 항하여 변하지 않을 뜻을 맹세하였다.임금
이 황송하여 명덕으로 하여금 옥새를 받들고 나가 경복궁으로 돌아가
라고 하였다.
초 9일,문무백관이 다시 글을 올려 굳이 청하고,성균관 학생이 또
글을 올려 극진히 말하였으나,태종이 모두 보지 않았다.
여러 신하가 임금 앞에 나아가 면대해서 진정하고자 청하였으나,태종이
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통곡하니,그 곡성이
궁정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최한을 시켜 어려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내 이미 황천과 종묘에 서고하였으니,고칠 수 없다."
하고,드디어 대언등으로 하여금 경복궁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초 10일,태종이 최한을 시켜 승여와 의장을 보내고,
또 시위 군사에게 명하여 임금을 맞이해 오도록 하였다.임금이 오장
과 천양산으로 나아가려 하였더니,태종이 내신을 시켜 그 거동을 보아
오게 하고 노하여 말하기를,
"내 명을 따르지 않으려거든 오지 말라."
하였다.임금이 부득이 주장에 홍양산으로 나아가 전을 올려 굳이 사양하
기를,
"신은 성품과 자질이 어리석고 둔하며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
하여 위정의 방도에 대하여 어리둥절하여 깨달음이 없사온데,
외람되이 세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오
히려 그 자리에 합당치 못할까 두렵사옵거늘,어찌 오늘 맡겨주신다는
하명이 있을 줄을 헤아렸겠습니까? 뜻밖의 일을 당하오매 정신
이 아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삼가 생각하옵건대,주상 전하
께옵서는 춘추가 왕성하시옵고,성덕이 바야흐로 융성하시온데,갑자기
정사에 고달프다 하시고 종묘사직의 막중한 책임을 어리석은 이 몸에
맡기려고 하시니,어찌 오직 신자의 마음이 더욱 두렵고 황송할 뿐이겠습
니까? 진실로 두렵사옵기에 조종의 신령께서도 놀라실까 하옵니다.
또한 나라를 전하는 일은 참으로 국가의 큰일이온데 갑자기 이렇게
하오시면 내외의 신민들이 놀라지 않을 이 없사오며,거듭 생각하옵건
대 전하께옵서 신을 세워 후사를 삼으실 적에도 오히려 감히 마음대로
하시지 못하고 천자에게 아뢰어 결정하셨는데,하물려 군국의 막중한
것을 마음대로 신에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사대의 예에 또한
어긋남이 있을까 걱정이옵니다.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신의 지극한 사정을 살피시고 국가의 대계를 염려
하시와,종묘사직과 신민의 기대를 위로하여 주오소서."
하였으나,태종이 그래도 윤허하지 아니하므로,여러 신하들이 또 궁궐
안뜰로 달려가 호곡하니,그 소리가 어좌에까지 들렸다.
태종이 효녕대군 이보로 하여금 명을 전하여 이르기를,
"내가 다른 성에게 위를 전한다면,경들의 청이 당연하지만,
내가 세자에게 위를 전하는데,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느냐!"
하면서,곧 익선관을 친히 임금의 머리에 씌우고,드디어 임금
으로 하여금 국왕의 의장을 갖추어 경복궁에 가서 즉위하게 하였다.
임금이 부득이 명을 받고 나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내가 국가의 대사를 감당하게 어려워 지성
껏 사양하였으나,마침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도다."
하였다.여러 신하들이,임금이 익선관을 머리에 쓰고 있음을 보고 모
우 땅에 엎드렸다.임금이 경복궁으로 가서,태종이 최한에게 명하여
정부 대신들에게 하교사기를,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는 내가 친히 청단 할 것이고,
또한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육조로 하여금 함께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할 것이며,나도 또한
함께 의논하리라."
태종은 자신이 할 일과 세종이 할 일을 구분하였다.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신료들은 태종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박은 등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오서 전위하려 하심을 신들은 편안히 쉬시려는 것으로 생각
하였사온데,이제야 임금의 뜻을 알았사옵니다.청컨대 교서를 내리시
어 전위하시는 뜻을 밝히고 타이르시어 신민의 심정을 편안하게
하여 주오소서."
곧 예조판서 변계량에게 명하여 전위하는 교서를 짓게 하였다.
또 여러 대언하게 명하기를,
"병조 당상은 모두 나에게 시종하고,대언들은 주상전에 시종하라."
태종은 자신이 관장할 일을 명백히 하고서야 교서를 반포하였다.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태조의 크나큰 사업을 이어받아,아
침저녁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힘써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고자
도모하기를 이미 이에 18년이 되었다.그러나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
지 못하고 재변이 자주 일어났으며,또한 몸에 오래 묵은 병이
있어 근일에 와서는 심하여지니,청정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세자 도는 영명하고 공손 검박하여,너그럽고 어질어 대위에 오르기에
합당한지라.이미 영락 16년 무술 8월 초 8일에 대보를 주어,세자로
하여금 나라의 기무를 오로지 맡아하게 하고,
오직 군국의 중대사만은 내가 친히 청단하기로 하였으니,저희
중외 대소신료들은 모두 나의 지극한 회포를 몸받아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도와서 유신들의 경사를 맞이하도록 하라."
또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경복궁에 나아가 신왕의 즉위를 진하하게
하였다.경시에 종실과 문무백관이 조복 차림으로 경복궁 뜰에
서 반열과 서차대로 늘어섰다.
임금이 원유관에 강사포로 근정전에 나아오니,여러 신하들이 전을 올려
하례를 올리고,성균관 학생과 회회노인(아라비아 사람들)과 승도들도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이 하례받기를 마치고 상왕을 높이어 태상왕으로,부왕은 상왕으
로,모후를 대비로 하고,경빈을 봉하여 비로 삼았다.
처음에 상왕이 잠저에 있을 적에 원경왕후(태종비)의 꿈에
태종이 임금을 안고 햇바퀴 가운데 앉아 있어 보이더니,얼마 안 있어
태종이 왕위에 올랐고,이에 이르러 임금이 또 왕위를 계승하
였다.
아무리 왕조실록의 요약이라 해도 인용이 길어지면 읽기가
힘들어진다.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대소신료들의 피를 말리는
고통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읽는 쪽이 편할 수밖에 없다.
임금이 통치권을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날 때는 비록 친아
들에게 전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절차가 얼마나 까다롭게 진행되는
것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겨우 22세,세자 시절에 외삼촌 네 사람이 사약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았고,아버지와 어머니가 불목하는 것도 보았으
며,장인이 스스로 비상을 마시면서 죽어가는데도 사랑하는 왕
비에게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던 세자가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왕위를 물려받았으나,폐세자가 되어 쫓겨난 친형님이 도
성 밖에 살아 있고,아버지를 경원하는 어머님 또한 같은 궐 안
에 있다면 아무리 임금이라도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세종의 앞길을 가로막는 악재는 그런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또 다른 불행이 그야말로 첩첩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