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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 낙산사와
눈덮힌
설악산(오색지구,성국사)..
~~
(낙산사
경내,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주전골)
◈ 서문(序文)
유난히도 날씨가 흐렸던 2004년 2월 8일 일요일, 문득 낙산사의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과 의상대앞 푸르른 바다가
보고싶어 또다시 머나먼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중학교(1992년) 때 수학여행으로 갔었던 낙산사 지역을 둘러보면서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해수관음상을
만나보고
시간이 된다면 설악산의 오색약수(五色藥水)도 오랜만에 찾아가 신비로운 약수의 맛을 맛보고 싶어 그렇게
길을 떠난 것이다. 다행히 부지런히 뛰어다닌 끝에 낙산사와 오색약수, 성국사를 모두 답사하여 마음이 뿌듯하다.
그럼 서문의 내용은 이정도로 끝내고 지금부터 본문의 내용을 천천히 써나가도록 하겠다.
내용이 길어질 수 있는 관계로 상,하 2편으로 나눠서 올림..
* 2004년 6월 19일, 여행 후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상편,하편을 하나로 통합함.
* 인라인 프레임 형태가 아닌 하나의 익스플러어로 편하게 보고자 할 경우
여기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 1. 12년
만에 찾아간 낙산사.
필자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92년 7월초, 학교에서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그 때 낙산사(洛山寺)도 잠깐 들려 주마간산(走馬看山)식 답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홍련암을 제외한 낙산사 경내를
1시간에 걸쳐 둘러보고, 바로 낙산해수욕장으로 뛰어가 1시간 정도 놀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004년 2월 8일 아침,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버린 필자는 그 당시 옛 추억을 찾아 다시 낙산사를
찾아갔다. 물론 낙산사에 있는 의상대(義湘臺)와 홍련암(紅蓮庵), 그 앞에 펼쳐진 푸른 동해바다,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중생들의 희망 해수관음상도 만나볼 생각으로 아침 6시, 차가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집을 나섰다.
여행객들로 혼잡한 동서울터미널(강변역)에서
8:15분에 낙산 경유 속초(束草)로 떠나는 우등형 직행버스(동서울→낙산,
14500원)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는데, 내가 생각한 '서울→양평→홍천→인제→한계령→양양'코스가
아닌 '서울→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대관령→7번국도→양양'코스로
가는 것이다. 은근히 홍천,인제,한계령 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쉽군...
어쨌든 2시간을 달려 장평 부근 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 밖으로 나오니
고산지대(高山地帶) 강원도(江原道)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깨끗한 공기,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산들, 산자락에 쌓여있는 엄청난 눈들... 역시 강원도에
들어온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20분 휴식
후, 몇년 전에 뚫린 대관령 새도로를 지나 7번국도로 진입, 동서울 출발 3시간 15분 만에
낙산(낙산사입구)
에
도착했다.
낙산 정류장에서 낙산사주차장을 지나 언덕을 10분 정도 오르면 성문(城門)을 닮은 낙산사 홍예문(虹霓門)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문을 통해 관음보살의 성역 낙산사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문 안으로 들어갈려면 부근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야되는데, 성인 입장권이 무려 2800원(낙산사관람료+낙산도립공원입장료)이나 한다. 허걱~~ 거의
해인사,
불국사 입장료와 맞먹네..
엄청난 입장료에 온갖 육두문자가 나왔지만 어쩌겠는가.. 2800원의 거금을 들여 입장권을 사들고 홍예문으로 들어
서면서 본격적인 낙산사 관람이 시작된다.
◈ 2. 관세음보살의 성지, 관동 8경의 한 곳인 낙산사..
①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관세음보살의 성지 낙산사의 간략한 내력(來歷)
낙산사(洛山寺)는 낙산도립공원 해변가에
야트막하게 누워있는 오봉산(五峯山)자락에 위치한 천년고찰(古刹)로 산속
깊숙히 들어앉아 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바닷가(정확하게는
바닷가에서 300m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여기서 낙산(洛山)이란 이름은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인도의 보타낙가산(寶唾落痂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벌써 이름부터가 관음보살의 보금자리이자 성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10년인 671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년)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의상대사는 당나라에서 불법공부를 하고 돌아와 이 곳에서 관세음보살의
구원을 받고 지금의 원통보전(圓通寶殿)
자리에 절을 세웠다고 하며 이런 연유로 낙산사는
우리나라 관음신앙(觀音信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이후 화재를 만나 폐허가 되었던 것을 858년에 강릉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한 범일대사(梵日大師)가 중창했다고
전해지며, 1466년(조선 세조 11년), 세조(世祖)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크게 중창되면서 그
이름을 떨쳤으며,
관동 8경의
하나로써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관동 최고의 명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절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1953년 부근에 주둔하던 국군제1군단의 지원으로
재건되었으며 그 이후
계속되는 불사(佛事)
로 지금은 전각 10여동과 홍련암(紅蓮庵)을 거느린
관동 제1의 사찰이
되었다.
현재 낙산사(洛山寺)는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되어있다.
② 낙산사 창건설화와 낙산사 창건 배경 - 믿거나 말거나..
신라(新羅)와 당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맞짱을 뜨던 신라 문무왕 10년(671년) 어느 날..
지금의 의상대(義湘臺) 자리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관음보살을 기다리던 고승 한 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라에
화엄종(華嚴宗)을 전파한 의상대사이다.
그는 지금의 의상대 부근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친견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와 바닷물에
돗자리를 깔고 목욕재계한 다음 돗자리에 올라 앉았다. 그랬더니 바닷 속에서 8마리의 용이 나와 그를 휘감고 바다
동굴로 들어갔다. 그는 동굴로 들어가 그 안에 모셔진 석가여래께 예를 올리니 석가는 그에게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 주었다.
염주를 받은 의상대사가 동굴에서 나오자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바치며 왈 "용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낙산 위에
올라가면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명당자리로 그 곳에 절을 세우면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의상대사는 바로 낙산에 올라가 용이 알려준 자리를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으려니 멀리 동해에서
"대사께서는 너무 성급하게 찾지 마시오. 떄가 되면 찾을 수 있을 것이오"라는
메아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이에 대사는 느낀 것이 있어 그 자리에 앉아 염주를 굴리며 예불을 드리니 바로 앞에 두 줄기의 죽순이 솟아 올라
순식간에 큰 대나무로 자라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사는 이 곳이 그 명당(明堂)임을 깨닫고 법당을 지으니 그 전각이
바로 원통보전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낙산사가 창건되었다는 671년은 신라와 당나라가 치열하게 맞짱을 뜨던 시기로 비록 전쟁은
신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지만, 조그만 신라가 동북아 최강의 당나라와 10년 넘게 힘겹게 싸우면서 국력이
많이 소모되고
<고연무가
중심이 된 고구려 부흥군의 활약, 토번(티벳)의 당나라 공격의 여파로 겨우 버틸 수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도 많이
어려워지는
등 국내사정이 많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신라 백성(신라에 흡수된 백제,고구려,말갈민 포함)들은
신라에게 대항하는
당나라를 욕하며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염원했을 것이고, 의상대사(혹은 다른 사람)가
그들의 소망을
위해
이 곳에 중생들을 잘
챙겨준다는
관세음보살의 터전을 만들어
관음신앙(觀音信仰)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 신앙의 심취된
백성들과 범일국사
등의 여러 고승들을 통해
낙산사가 한국 관음신앙의 중심지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이 외에도 낙산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기록과 전설, 관음산앙에 구체적인 내용을 다룰 필요가
있으나,
내용이 너무
길고, 지루하며, 불교사상 쪽에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는지라 생략한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고 쓰기도
귀찮고..
ㅋㅋㅋ 필자는 나름대로 관음신앙에 대한 자료를
나름대로 수집했는데, 관음신앙이 무엇이냐? 쉽게 말하면
관음보살을 떠받드는 대중적인 신앙이다. ← 이거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
* 낙산사 찾아가기.. (* 2004년 2월 기준)
1. 승용차 :
① 영동고속도로 → 동해고속도로 양양방면 → 현남에서 7번국도로 진입 → 양양 → 낙산사
② 서울,하남
→ 6번국도 직진 → 양평,홍천 → 44번 국도 직진 → 원통 → 한계령
→ 오색,양양 → 속초방면 7번국도 →
낙산사
2. 대중교통 : (* 2004년 3월 기준)
① 동서울터미널에서 낙산 경유 속초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운행, (요금 14500원)
②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서 속초행 고속버스 이용, 양양에서 하차하여 속초행 직행버스나 속초시내버스 9번 이용,
낙산 하차.
③ 부산,대구,울산,포항,강릉,춘천,원주,동해,인제에서 속초행 직행버스
이용, 낙산 하차.
◈ 3.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낙산사 홍예문 - 관음신앙의 성지를 지키는 성문?
①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서 있는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의 정문은 7번국도 쪽에 있는 일주문(一柱門)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문은 이
홍예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아무래도 이 문을 지나야만 비로소 관음보살의 성지로 들어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홍예문(虹霓門)은 절의 정문치고 아주 특이한 성문(城門)형태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 주변에 26개의 큼직한
화강석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문루(門樓)를 세웠다.
이 문은 1467년(세조 12년), 세조(世祖)가 낙산사에 행차했을 때 세워졌으며, 세조의 칙령(勅令)에 따라 강원도에
속한 26개 고을에서 각걱 돌 1개씩을 내어 이 문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낙산사가 강원도의 대표적인 사찰임을 상징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은혜가 강원도 26개 고을의 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세조의 염원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강원도 26개 고을의 염원으로 상징되는 돌로 관음신앙의
성지를 지키는 성문을 만들어 성지를 지키려는 뜻도 있을
것이다.
이 문은 관음성지로 들어서는 정문이며, 악귀(惡鬼)로부터
관음신앙의 성지를 지키는 초소의 역할을 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문을 활짝 열어두어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홍예문은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33호이다.
◀ 낙산사 홍예문 - 절의 문(門)치고는 특이한 성문형태를
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②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사천왕상과 그들의 초소 천왕문
홍예문을 지나면 낙산사의 전각(殿閣)들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보타전과 원통보전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원통보전, 직진하면 보타전과 해수관음상으로 통한다. 필자는 우선 낙산사 경내를
둘러보기 위해 왼쪽 길로 발걸음을 옮기니 무서운 표정으로 지나가는 이들을 노려보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의
거처인
천왕문(天王門)이 나온다.
사천왕상은 원래 인도의 4방(四方)을 지키는 일개 토속신이였으나 영광스럽게도 석가여래의 경호원이 되면서 항상
석가의 뒤를 따르며 특유의 무서운 인상으로 그 분을 호위한다.
사천왕상 밑에는 악의 상징인 마귀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나, 사천왕은 그들을 발로 찍어 누르며 오른손에는
망나니의 칼보다 더 무섭게 생긴 칼을 들고 지나가는 이들을 노려보며 "착하게 안살면 저 마귀처럼 될
것이다"임을
강조하려는 듯한 입모양을 하고 있다. 아 무서워라..
천왕문을 지나면 '洛山寺'라는 현판이 달린 조계문(曺溪門)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무설전, 고향실 등의 전각과
동종(銅鍾)이 자고 있는 종각(鐘閣)이 나오는데, 무설전 앞에 심어진
어린 소나무들은 추운 겨울날씨가 버겨운 듯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 쓰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각(鐘閣)을 지나 이름 없는 문을 들어서면 낙산사의 금당(金堂)인 원통보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4. 낙산사의 금당 원통보전(관음보살을 모신 전각)
낙산사의
법당(法堂=金堂) 원통보전(圓通寶殿)은 청기와로 뒤덮힌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전각으로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3년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전각 불단(佛壇)에는 동양 최고(最古)의 지불(紙佛)인 건칠관음상
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뒤에는 아미타극락회도(阿彌陀極樂繪圖)가
걸려
있고 그 오른쪽에 신중탱화(神衆幀畵)와 의상대사의
진영
(眞影)이
모셔져 있다.
◀ 낙산사 원통보전 - 청기와로 뒤덮힌 낙산사의 금당(金堂)으로
뜰에는 7층석탑(보물 499호)이 관음보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전각으로 불단에 앉아 있는 건칠관음상은 종이로 만들어 금속을 입힌
우리나라에 몇 개 안되는 지불(紙佛)이다. <경주 기림사(祇林寺) 건칠보살상도 종이로 만들었다. (보물
415호)>
이 불상은 조선초기에 만들어졌으며 원래는 양양 진전사터(陳田寺址) 부근에 있는 영혈사(靈穴寺)에 있다가.
한국전쟁
이전에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는 건칠관음보살좌상 - 조선초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8각의 대좌(臺座)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으며, 정면으로 7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에는 신라금관보다도 더
화려한 보관(寶冠)을 썼으며
가슴에는
화려한 구슬 목걸이가 걸려있다. 그 외에
목부분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가 표현되어있다. 불상의 표정을 보면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 살며시 뜬 눈, 오목한 코,
통통해보이는 얼굴,
복스럽게 길게
늘어진 양 귀. 살며시 다문 입술,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 자태에
눈이 부실 정도이다.
불상 앞에는 신도 10여명이 경건한 자세로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이 불상은
보물 1362호.
◀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7층석탑(보물 499호) -
높이가 무려 6.2m에 이르는
날씬한 탑으로 옥개석과 탑신에 세월이 할퀴고 간 약간의 상처가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잘 남아있다. 탑의 상륜부(相輪部)에는 가늘고 긴 철막대인
찰주가 우뚝 솟아 있는데, 찰주가 달린 탑은 우리나라에
동해 삼화사 3층석탑,
충주 미륵리 5층석탑
정도 밖에 없으며, 모두 필자가 직접 만져봤다는 공통점이
있다.
찰주 주변에는 몽고의 라마탑과 비슷한 여러장식들이 보존되어 있어, 이 탑이
몽고풍의 영향을 받은 조선 초기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조성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世祖)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던 1467년에 7층으로 높였다. 그만큼 낙산사의 명성이 3층 수준에서
7층 수준으로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이 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여의주(如意珠)를 탑 속에 넣었다고 한다.
탑신부는 일정한 비율로 층이 높아질수록 줄어들고 있어 안정되어 보이나
별로 잘 생기지 않은 탑의 외모와 곳곳에 남겨진 상처로 인해 좀 부실해
보인다. 아무래도 조선 초기에 억불숭유 정책으로 예전에 화려했던 탑제작
수준이 많이 떨어지면서 이런 탑이 만들어 진 것이리라..
◈ 5. 특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낙산사 담장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긴 담장이 'ㅁ'형태로 둘러쳐져 있다.
이 담장은 조선초기(아마도 1467년경)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3.7m, 담장 길이는
220m이다.
원통보전 주위에 이런 담장을 쌓은 이유는 아무래도 관음보살의 거처인 원통보전을 지키고 성역의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담장 너머는 일반공간, 담장 내부는 관세음보살이 머물고 있는 신성스런 공간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그만큼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의 존재는 석가여래보다 더 높고 크다. 석가여래가 들으면 서운해
하시겠군..
낙산사
담장은 그 모습과 디자인이 아주 특이하고 아름다워 낙산사의 명물로
이름이 높다.
이 담장은 황토색의 벽면에 동그랗게 오린 화강석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하여
다른 담장의 단점인 단순함을 피했으며, 주변에 있는 대나무와 담장 밖 나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마치 시골마을에 있는 황토(黃土) 담장같은 구수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풍긴다.
거기에 일정 간격으로 나열되있는 화강석의 동그랑땡도 담장의 예술적 가치를
높여주며 황토담과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저 동그랑땡이 단순히 담장을 꾸미기 위한 눈요기감으로 배치했을까..
일정 비율로 배치된 것을 보면 무슨 뜻이 숨겨져 있을 듯 싶은데..
배치 순서를 보면 한쪽 줄은 2개씩, 다음 줄은 3개씩. 다시 다음 줄은 2개..
이런 법칙을 유지하며 담장 220m를 이루고 있다. 무슨 뜻이 담겨져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장식용으로 배치했을까.. 얼핏 배열을 바라보니, 문득 북두7성
(北斗七星)이 생각이 나던데, 혹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북두칠성의 실제 배열과는 다르게 표현되있지만..
◀ 낙산사 담장(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34호) -
동그란 원이 2,3,2,3
배열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담장 형태로, 그 모습이
아름답고 정겹다.
◀ 낙산사 담장(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34호) -
담장 안쪽에
청기와로 뒤덮힌 굴뚝이 보인다.
◈ 6. 예종(睿宗)의 효심이 깃들인 낙산사 동종
원통보전 동쪽에는 조그만 넓이의 대나무 밭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약수터가 자리잡고 있다.
이 약수터는 귀엽게 생긴 동자승이 양손으로 잉어 1마리를 꽉 붙잡고 있고, 잉어가 괴로운 듯 입에서 신선한
물을
토해내고 있으며, 관람객들은 조그만 빨간 바가지로 그 물을 받아 마신다. 그런데
물의 양이 적은지라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잉어가 뱉어낸 약수를 마시고 원통보전을 나서면 종각(鐘閣)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 안에
보물 479호로 지정된 동종
(銅鍾)이 걸려 있다.
◀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 - 이 동종은 1469년(조선
예종 원년),
세조의
2째 아들인 예종(睿宗)이 선제(先帝)인 세조를 위해(아마도
부왕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뜻에서)만든 조선 초기 동종으로 높이는
158cm,
입지름은 98cm에 이른다.
이처럼 예종의 애듯한 효심이 깃든 이 종의 윗부분에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을 마주한 채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 몸체 부분에는 두광(頭光)이 선명한 보살(아마도 관음보살일듯) 4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중간에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조성시기와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동종의 특징을 보여준다. 종의 밑 부분에
는 너비 9.5cm의 가로줄이 있어 그 안에
물결무늬를 새겨넣었다.
이 종은 보존상태가 좋고, 디자인이 아름다워 조선시대 대표적인 종으로
손색이 없다. 다만 아쉬운게 있다면 종 주변에 난간과 칸막이를 쳐서
중생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는 것.. 한번 만져보고 싶었는데.. 그냥 난간
사이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종은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어 하루에 2번씩 타종을 하고 있으며.
종 밑에는 중생들이 소원을 빌며 던져놓은 수 백개의 동전들이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한참 경제(經濟)를 위해 동분서주해야 할 동전들이
이렇게 이런데서 썩고있다니,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팔을 난간안에 넣어
봤으나 동전에 닿지를 못해 결국 못집어 왔다는 안타까운 일화가 전해
온다.. ㅋㅋ
종각을 둘러보고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으로 통하는 산책로로 들어선다. 이 길은 보타전으로 통하는 넓은 길과
달리
조그만 오솔길로 사색(思索)에 잠기기 아주 좋은 코스이다. 오솔길 주변에는 대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해풍(海風)을
맞으며 서 있고, 나무에 매달린 잎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여기저기 떨어진다..
오솔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다보면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돌탑들이 나온다.
지나가는 이들은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으며 올해의 소망을 기원드리고, 나 역시 부실하게 돌탑을 쌓으며 올해의
소망을 빌었다.
돌탑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낙산사의 또다른 명물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 7. 수려한 외모의 해수관음상 - 관음성지의 상징이자 동양 최대의 불상
낙산사에 있는 관음보살 가운데 제일 덩치가 크고, 제일 아름답고, 제일 인기가 많은 불상(佛像)으로 1972년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완성되었으며, 관음상을 조성한 석재(石材)는 전북 익산에 있는 호남채석장에서
반입한 것이다.
불상의 높이는 무려 16m, 둘레는 3.3m, 총무게는 750톤에 달하며. 10리 밖 동해바다에서도 보일정도로 그 위용(威容)
이 대단하다.
이 관음상은 낙산사의 5봉(峰) 가운데 하나인 신선봉(神仙峯)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관음상의 모습은 마치 한 사람의 아름다운 여인네를 보는 듯, 매우 아름다우며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불상의 표정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불쌍한 중생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나름대로 아름다운
미소를 띄우고 있으며, 눈은 지긋히 감고 있고, 두 눈썹 사이에 백호가 선명하다,
불상의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며 시무외인(施無畏印)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병 같은 것을
들고 있는지라 처음에는 저게 뭔지 몰라서 혹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약병이 아닌가? 또는 약사여래를 겸임하고
있는건 아닌가 등등 온갖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주변에 불교문화재의 조예(造詣)가 깊은 분들에게 문의를 해보니
바로 관음보살의 전용 컵인 감로수(甘露水)의 정(靜)병(또는 감로수병)이라는 것.
감로수는 말그대로 맛있고 이슬같은 깨끗한 물로 그것을 담은 병을 들고 중생(衆生)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음보살의 감로수 병은 처음 보는군..
◀ 해수관음상 -
관음상의 옷을 보면 옷주름이 'U'자로 구부러져
있는 통견의로 보이는 얇은 옷을 입고 있으며 목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을 달았다.
불상의 발 아래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불상 주변에는
돌난간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앞에 석등(石燈) 2기가 세워져 있다.
이 석등은 어두운 밤에 화사석(火舍石)에 불을 켜 관음보살 주변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불상의 몸매를 가만히 보니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
가고,
전형적인 여자의 몸매를 하고 있더라. 선의 미(美)도
아름답고,
◀ 해수관음상 -
관음상 앞에는 수백 명의 중생들이 관음보살
의
자비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히 예불을 드리고 있거나
또는
그의
아름다운 모습의 넋이 빠진듯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들은 무엇을 기원하고 있을까.. 저들은 평범한
한국
국민으로
고위층의 비리,부정, 백성들을 보살피기는 커녕
더욱
괴롭히고
더 등쳐먹는 위정자들.. 그들에 농간에
평범한
서민들만
죽어나고 그들은 결국 관음보살을 찾아 저들의
고통을
호소하고
관음상은 그들의 괴로운 고통을 듣고
힘내라면서
자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이 정말 서민들이 살기 힘든 나라에서 관음보살의
역할은 미륵보살 만큼 더욱 클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관음보살의 이런 헌신적인 보살행(菩薩行)은 영원할 것이다.
◈ 8. 관음전과 그윽한 풍경(風磬) 소리 -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의 매달린 물고기
해수관음상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멀리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는군..
관음상이 정남(正南)으로 바라보는 쪽, 그러니까 예불장소 남쪽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 아래에
관음전
(觀音殿)이란 전각이 있다. 연못 아래의 전각이라..
관음전은 보타전으로 내려가는 길 못미쳐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되는데, 정작 내려가보니 썰렁하군..
청기와로 뒤덮힌 전각 내에는 아무도 없고, 또한 불상도 없다. 하긴 저 위에 해수관음상이 서 있는데 굳이 따로 모실
필요는 없을 듯..
관음전 앞에는 안전(安全)을 위해 돌난간을 설치했는데, 돌난간에는 앙증맞게
새겨진 앙련(仰蓮)들이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었다.
관음전 처마 아래에는 풍경(風磬, 바람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려 풍경만의 그윽한
방울 소리를
내고 있었고, 방울 아래 매달린 물고기는 바다에 있는 친구를 생각하는 듯 하염없이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친구들(바다 물고기들)이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전날에 업보를 모두 씻고, 다음에는 보다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물고기를 단 이유 중에 하나니까... 또는 잘 때도 눈을 뜨면서
자는
물고기처럼
좀더 수련에 열중하라는 심오한 뜻도 있을 것이다.
◈ 9. 웅장한 규모의 보타전(寶陀殿)과 그 주변 - 관세음보살이 모두 모였다.
관음전을 둘러보고 의상대,보타전 방면으로 내려가니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보타전(寶陀殿)이
나를 맞이한다.
이 전각은 청기와로 뒤덮힌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낙산사에서 제일 큰 전각이다.
◀ 낙산사 보타전 -
이 전각은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백두산의 홍송(紅松)으로 만들었으며 전각 내에는 7관음상,
11면관음상, 32관음응신상, 1500관음상 등이 모셔져 있다.
이 보타전은 말그대로 관세음보살의 모든 것이 담겨진
전각이라 할 수 있다.
보타전 왼쪽에는 해우당(解憂堂)이라 불리는 전각이 있는데
'해우(解憂)'라 하면 보통 절의 화장실이 생각이 난다.
필자 역시 처음에는 이 건물이 화장실인가 싶어서 살펴보니
화장실이 아닌 일반 법당이더라.. 햇갈리지 말것.. ㅋㅋㅋ
보타전 앞에는 웅장한 규모의 석등 1쌍이 세워져 있다.
보타전 정면에는 보타락이라 불리는 2층 누각(樓閣)이 있는데 그 앞에
관음지(觀音池)가 불리는 얼어붙은 연못이
펼쳐져 있다. 이 연못 가운데에 동그란 모양의 조그만 섬이 떠 있는데, 그 섬에는 관음보살이 석사자의 등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고 있더라...
보타락 건너편에는 기념품을 파는 매점이 있고 그 옆에 감로수(甘露水)라 불리는 약수터가
있다. 이 감로수 역시
관음보살과 깊은 관련이 있는 약수(藥水)로 관음보살의 끝없는 자비를 상징하듯 언제나 신선한 물로 가득 넘친다.
지나가는 중생들은 너도나도 이 물을 마시며 메마른 목을 축이고, 나 역시 감로수의 물을 몇 모금 떠마시며 목을
축여본다.
물을 마시며 물로 가득찬 석조(石槽) 내부를 바라보니 석조 밑 바닥에 사람들이 내던진 동전들이 수북히 쌓여있더라..
그 동전들은 나를 보며 구원의 눈빛을 보내는지라 나는 소매를 겆고 석조 안으로 팔을 쑥 집어넣었으나 생각 외로
꽤깊은지라 겨우 500원짜리 하나 구조하는데 그쳤다. ㅋㅋㅋ
감로수(甘露水)를 지나 홍련암 쪽으로 3분 정도 내려가면 푸르른 동해바다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고, 그 바다를
바라보는 벼랑 위에 관동(關東) 최고의 명소 의상대(義湘臺)가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아쉽지만 상편을 종료한다. 하편은 2월 말에 완성 예정..
나무(남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
◈ 10. 동해바다 최고의 해안 절경 - 의상대(義湘臺)
① 하조대, 청간정(淸澗亭)의 버금가는 해안 명소 - 의상대(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48호)
낙산사에서 홍련암으로 가다보면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의상대(義湘臺)를 만날 수
있다.
이 곳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기다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의 정자는 1925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에 정자와 누(樓)를 짓고 자연 속에서 그들의 정신 수양을
쌓으면서, 자연과 동화되고자 했던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런 이유도 한몫 할 것이다.
◀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은 의상대 -
의상대는 6각형
모양의 조그만 정자로, 그 모습은 현북에 있는 하조대
(河趙臺)와 비슷하다. 정자 주변으로 여러 그루의 해송
(海松)들이 의상대를 둘러싸고 있으며, 정자 앞에는
언제나 푸르름을 간직한 넓은 동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의상대
아래에는 약간 가파른 벼랑이 펼쳐져 있고, 바닷가에는
온갖 바위와 기암괴석들이 끊임없이 내리치는 파도를
맞고 있다.
의상대는 사람이 만든 정자(亭子)를 비롯하여 주변의
해송,
바위, 기암괴석, 바다, 파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이 곳을
동해 제일의 절경으로 만들었다.
정자 내(內)에는 단체로 놀러온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절경에 넋을 잃었고, 정자 주변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거나 명상에 잠긴 사람들로 넘쳐난다. 필자 역시 10여분 동안 시원스런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비롯한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과연 여기서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만났을까. 당연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이 전설은 이 곳의 절경이 너무 아름다워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주인공으로, 관음성지의 상징
관음보살을 조연으로 적당하게 집어넣어 이런 이야기를 꾸몄을 것이다.
의상대사는 지금의 낙산사를 만든 분이요, 관음보살은 낙산사에서 받드는 보살로, 이들의 극적인 만남으로 관음성지
낙산사가 탄생했음을 은근히 강조하는 것 같다. 아예 처음부터 낙산사는 선택받은 성지임을 내비친 것으로 생각된다.
② 철조망이 쳐진 해안 길을 따라
홍련암으로..
의상대에서 홍련암 방면으로 내려가면 바다를 오른쪽에 낀 해안길이 나온다. 그러나 해안지대는
철조망이 쳐져 있어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홍련암 뒤쪽에 군부대가 있고, 휴전선과 가깝고, 바다를 이용한 적군의 기습이
용이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동해안은 고성(高城)부터 부산(釜山) 다대포까지 몇몇 관광지와 해수욕장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해안선에 이렇게 철조망이 쳐져 있는 것이다.
철조망을 보니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겨례의 안타까운 현실이 느껴져 왠지 서글퍼지는군..
철조망으로 뒤덮힌 해안 길에도 관세음보살이 정병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더라..
관세음보살을 지나 계단을 몇번 오르락 내리락 하면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의 하나인 홍련암(紅蓮庵)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 11. 바닷가에 자리잡은 관음도량(觀音度量) - 홍련암
낙산사(홍련암 포함)는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이며. 세계 5대 관음도량의 한 곳으로 해안가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이 홍련암(紅蓮庵)은 낙산사의 부속암자로써 676년(신라 문무왕
15년)에 의상대사가 이 곳에서 예불을 드릴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갑자기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긴 의상은 굴 앞에 있던 구농석(具農石)이란
바닷 속에 솟은 반석에 앉아 7일 동안 기도를 드리니, 별안간 바다 위에 붉은 연꽃(紅蓮)이 떠오르고 그 안에
관음보살이
계시는지라 이에 기쁨을 느낀 의상은 이 곳에 암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는 거짓말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그 이후 1619년(조선 광해군 11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69년과 1911년에 중수를 하였고,
1926년에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잠깐 머무른 적이 있으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페허가 된 것을 1975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홍련암은 여수 향일암(向日庵)과 비슷하게 해안가 벼랑에 위치해 있어 부근 절경(絶景)이 매우
아름다우며, 절 뒤에는
대나무밭과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75호로 지정된
공중사리탑이 있으나 관람하지 못했다.
◀
바닷가에 자리잡은 홍련암 -
홍련암은 법당,요사
(寮舍) 2동으로 구성된 아주 조그만 암자로 바닷가
석굴
위에 세워진 법당(法堂)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에는 청기와로 뒤덮여
있다.
법당 마루에는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는데, 이는 의상대사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그의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라고 한다.
요즘은 용(龍)대신 물고기나 조개, 소라 등이 이
구멍을
통해 승려들의 설법을 듣고 있을 것이다.
법당 내에는 화사한 외모를 자랑하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10여명의 신도와 관람객들이 그들의
조그마한 소망을 빌고 있었다.
법당 옆에는 신도와 승려 2명이 불사(佛事)시주를 받고
있는데 불사에 사용될 기와의 가격이 몇만원에서
몇백만원
까지
다양하다. 은근히 계급차별이 보이는
듯하여 좀 씁쓸하더라.. 그까짓 기와 몇만원짜리나
몇백만원짜리나 그게
그거던데, 관음보살은 돈의 액수보다는 중생들의 진심(眞心)스런 마음을 더 원할 것이다.
좁아 터진 홍련암 앞에는 시원스런 동해바다가 한없이 펼쳐져 있어 나의 마음을 확 트이게 해준다. 그리고 바다에는
차가우면서도 선선한 해풍(海風)이 잔잔하게 불어오고, 해안가에는 수많은 바위와 기암괴석들이 파도와 해풍
(海風)을
맞아가며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홍련암 주변은 군작전 지역으로 해안가로의 진입은 금지되어 있다. 아쉽군..
홍련암은 의상대와 함께 낙산사의 제일 가는 해안 절경이나 동해안 최고의 명승지로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4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련암은 면적이 좁은데 비해 관람객과 신도들이 너무 많아 좀 혼잡스럽다. 그래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나오던 도중
해안가 약수터에 잠깐 들려 목을 축이려고 했으나, 물이 모두 얼어있어 마시진 못했다.
이 약수는 의상대사와 친분이 있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설악산 부근
영혈사(靈穴寺)의 약수를 끌어와 만들었다는
거짓말이 전해오고 있으며, 샘 앞에는 봉황(鳳凰) 1마리가 턱과 몸통 사이에 보주(寶珠)로 보이는 물체를 안고
서쪽을
바라보고 있더라.. 이 봉황도 관음보살과 무슨 관련이 있어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군..
◈ 12. 의상기념관 관람
의상대에서 보타전, 낙산사 후문으로 가다보면 넓은 공터 위에
서 있는 2동의 전각을 만날 수 있는데, 그중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은 찻집 겸 기념물 가게, 공터에 세워진 건물은 낙산사의 창립자인 의상대사의 기념관이다.
필자는 처음 시간문제도 있고해서 그냥 지나칠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간다고 했던가, 결국
기념관 내(內)로 들어서고 말았다.
전각 내로 들어서니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그냥 조용한 적막감만 흐르고 있을 뿐..
이 의상기념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여 근래에 세운 기념관이자 조그만
박물관(博物館)으로 기념관 내에는 의상대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유물과 문서,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거의 대부분 모조품(模造品)이다,
전시관 중앙에는 의상대사의 형상(形象)이 모셔져 있는데, 이 상(像)은 왼손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뒤에는
석가와 보살처럼 녹색 바탕의 두광(頭光)이 있더라.. 의상대사도 이제 부처나 보살에 준하는 존제로 승화(昇華)된
모양이다. 오른손에는 동해용왕과 관음보살에게 건네받은 염주를 쥐고 있다.
그의
형상 뒤에는 가사(袈裟)와 법의(法衣)를 입은 그의 영정(影幀)이 걸려있으며,
기념관의 왼편에는 일본 고산사의
승려 명혜(明惠)가 그린 의상대사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
6장이 진열되어 있다.
일본인 승려 명혜는 의상대사를 매우 좋아했던 사람으로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나름대로
연구,정리하여 그의 일대기
를 정리한 화엄연기(華嚴緣起)라는 서화(書畵)를 남겼다.
이 화엄연기는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놀러가는 도중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신
부분,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는 모습, 신라로 돌아갈 때 그를 짝사랑한 선묘(善妙)의
투신장면, 용으로 변한 선묘의 도움으로 부석사(浮石寺)
를 세우는 장면 등이 적절히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실력과 그려진 모습이 좀 어설픈지라 무슨 만화책을
보는
줄 알았음..
전시관 오른편에는 의상과 관련된 문서와 서책들의 모조품과 근래에 저술된 책들이
전시되어 있으나 기억은 도저히
나질 않고.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지라 모두 생략한다.
이렇게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으니 신도와 관람객들이 하나 둘 전시관으로 들어오더니만 나중에는 기념관 내부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기념관 정문 부근에는 컴퓨터가 몇 대 설치되어 있으나 작동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의상기념관을 둘러보고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를 따라 관음성지의 출입구인 낙산사 후문에 이르렀다.
매표소만 달랑있는 낙산사 후문을 끝으로 2시간에 걸친 낙산사 관람을 마무리 지었다.
낙산사에서 본 것은 온통 관세음보살 밖에 없는 것 같다. 여기도 관음보살, 저기도 관음보살, 바닷가에도 관음보살,
연못에도 관음보살, 온통 관음투성이인 그의 영원한 성지.. 낙산사(洛山寺).. 굳이 불교에 관심이 없더라도 아름다운
해안절경과 자연과 어우러진 낙산사와 홍련암의 경치는 동해안 최고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낙산사 경내의 특징이라면 계류(溪流)와 내(川)가 없다는 것. 바닷가에 자리잡은 야트막한 언덕을 적절히
이용하여 마치 관음보살의 품에 안긴 듯, 성지를 조성한 것이 이 곳의 최대 특징 겸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13. 12년 만에 찾아간 눈의 나라 설악산(雪嶽山) - 쏟아지는 함박눈..
낙산사 후문을 나오면 그 유명한 낙산해수욕장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다. 이 곳은 1992년 7월 수학여행 때 1시간
가량
놀았던 추억이 서린 곳.. 아~~ 그 때가 그리워라..
낙산해수욕장은 시간 관계상 통과, 바닷고기의 신선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낙산관광촌을 지나 낙산버스정류장에서
속초시내버스 9번(양양읍↔낙산↔속초시내)을
타고 10분 만인 13시 20분에 양양읍내에 도착.
양양터미널 부근 기사식당에서 5000원하는 순두부백반을 점심으로 먹었는데 그런데로 먹을만 하더군.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타마시는데 간이 영 맞지가 않은지 이상한 맛의 커피가 탄생.. 마시는둥 마는둥
하다가 맛이 이상해서 버리고 양양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필자가 갈 곳은 앞서 언급했던 설악산의 오색약수(五色藥水).. 다행히 시간이 되는지라, 과감히 설악산의
품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군.. 그렇지만 내리는 양이 적은지라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양양터미널에서 오색으로 가려면 1시간 간격으로 있는 양양군내버스나 1시간에 2~3회 정도 다니는 직행버스를
타야
되는데 마침 14시에 오색으로 가는 양양군내버스가 대기하고 있어 쉽게 탈 수가 있었다.
오색까지 요금은 학생은 1220원(직행버스는 1300원), 성인 요금은
모르겠다. 그 이유는 몰라도 되고.. ㅋㅋㅋ
어쨌든 14시보다 2분 이른 13:58분에 승객 6명을 태우고 오색 방면 군내버스(농어촌버스)는
출발한다.
버스는 농어촌의 인구급감을 여실히 보여주듯 타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탄 5명도 절반도 못가서 다 내리고 나와
운전사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필자도 없었더라면 참 허전했을 듯..
오색으로 통하는 44번 국도는 4차선 우회도로가 어느정도 완성되어 있어 통행은 쉽다. 그러나 오가리를 지나서부터
그 편리한 우회도로는 웅장한 설악산에 가로막혀 더 이상 뚫리지 못하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구불구불
2차선
고갯길이 펼쳐진다.
오색초교를 지나서부터 대망의 설악산국립공원(雪嶽山國立公園) 내(內)로 진입.. 이 때쯤 이르니 조금씩 내리던 눈이
돌연 함박눈으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펑펑 쏟아진다. 덕분에 44번 국도와 설악산은 눈으로 뒤덮였으며, 설악산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국립공원 내로 진입한지 얼마안되어 오색약수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면서, 버스는 오색마을로 통하는 길로
좌회전,
마을 못미쳐 주차장에 정차하여 더 이상 올라가려하지 않는다. 거기가 오색 종점이었던
것.. 마을까지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쩝~~ (이때 시간 14:25분)
군내버스 종점인 주차장 주변은 눈만 쌓여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관리소도 있긴한데 사람들이 없더군..
그래서 이정표를 따라 미끄러운 오르막 길을 300m정도 올라가니 오색온천을 중심으로 한 오색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14. 17년 만에 찾아온 오색약수 - 그러나 오색약수는 눈 속에 숨어버리고..
설악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오색(五色) 마을은 오색약수와
오색온천으로 유명한 관광휴양지로 오색마을부터 성국사,
제2오색약수,12폭포,주전폭포까지 이어진 주전골과 오색 마을(온천 포함)을 한데 묶어
오색지구로 부르고 있다.
이 오색마을은 1987년 이후 17년 만에 와보는지라 감회가 새롭군.. 그 때는 싸움과 장난이나 일삼던 초딩시절로 87년
추석연휴 때
가족나들이로 졸래졸래 따라온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오색약수를 마시고 성국사 3층석탑을 보기 위해
홀연히 찾아왔으니.. 참 세월 빠르기도 하여라...
민박촌과 식당, 매점으로 가득한 오색마을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별로 없더라. 갑자기 내린 폭설 때문에 그런가?
식당들도 대부분 썰렁하고.. 눈 때문에 길도 엄청 미끄럽고.. 그래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마을 아래
오색천
(五色川)에 이르니 '오색약수'를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오색천 건너 계곡 암반에 자리잡은 오색약수를 찾아갔으나 어찌된 일인지 보이질 않는군.. 나와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지..? 알고보니 눈 속에 깊숙히 파묻혀있더라.. 약수로 내려가는 계단은 쇠사슬이 쳐져 있어
관람객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계속되는 폭설로 인해 약수터가 눈 속에 깊숙히 숨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약수를 포기하고 집에 가던가 아니면 제2오색약수까지 가던가 양자택일을 해야 된다.
그런데 이렇게 눈이 쌓이고 길이 미끄러워 과연 거기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그래서 우선
성국사
까지는 들어가보기로 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쎃인 주전골(鑄錢谷)로 들어갔다. 그러나 올라가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보이질 않는군..
주전골을 10분 정도 올라가니 별로 반갑지 않은 존재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그 존재는 바로 국립공원
매표소,
이런
날도 입장료를 받다니 쩝.. 이런 날 올라가봤자 얼마나
간다고.
그래서 입장료가 1000원을 넘을 경우 그냥
오색으로
철수하고
그 미만일 경우 들어가기로 하고 입장료를 살펴보니
성인이 1500원.. 쩝.. 그런데 학생
입장료가 600원으로
나와있고, 그 밑에 있는 가로에(대학생,군경...)이 쓰여져 있다.
그래서 대학생 1장 달라고 하니
600원 짜리 입장권을 나에게
건네준다.
◀
눈으로 뒤덮힌 주전골(鑄錢谷) - 주전골은 옛날에 도둑들이
이곳에 숨어 위조 화폐(貨幣)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옛날(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화폐 위조범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설악산 입장권을 사들고 미끄러운 주전골 등산로를 올라가다보면
계곡 가에 있는 조그만 갈대밭을 볼 수 있다. 이 갈대는 비록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폭설과 엄청난 추위를 이겨내며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설악산에서 이런 갈대를 보다니 의외인듯..
갈대밭을 지나 3분 정도 가다보면 높은 축대(築臺) 위에 세워진
조그만 절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절이 바로 오색석사의 옛 터를 지키고
있는 성국사(城國寺)이다.
108계단보다 더 높아 보이는 계단을 올라서면 초라한 규모의 성국사
경내가 나를 반긴다.
◈ 15. 옛 오색석사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성국사 (성국사 3층석탑)
① 간략한 성국사 내력(來歷)
성국사는 옛날 오색석사(五色石寺)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41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시절, 도의선사
(道義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이후 염거선사와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전하며, 터만
남아 있던 것을 근래에 성국사(城國寺)란 절을 세워 옛 오색석사를 계승하고 있다.
현재 성국사는 전각이 달랑 1동(또는 2동) 밖에 없으며, 썰렁한 뜰에는 옛
오색석사의 흔적인 3층석탑과 석사자가
외로이 옛 터를 지키고 있다.
② 성국사 경내 - 성국사 3층석탑(보물
497호)과 석사자, 눈을 맞고 앉아있는 금동불..
경내로 들어서니 왼쪽에 5m의 높이를 자랑하는 3층석탑이 성국사 법당을 바라보며 외로이 서 있다.
◀ 성국사 3층석탑 -
이 탑은 옛 오색석사 시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신라 후기 때 탑으로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1층 탑신에는 사리를 두었던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으며
윗층 기단 옥개석(屋蓋石)의 네 모퉁이에 빗물이 흐를 수
있는 홈을 만들
었으며. 탑신부는 옥개석과 탑신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
되어 있다.
탑의 모습은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이 할퀴고 뜯고 했던
상처가
옥개석 모퉁이의 남아있어 보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절을
파괴한
어느 존재의 심술궂은 장난으로 한 때 처참하게 쓰러져 누워 있던
것을
1971년에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원래 이 탑은 쌍둥이 탑으로 동,서 2개의 탑이 있었으나 동탑은 오래 전에
파괴되어 죽어 있던 것을 근래에 옥개석과 기단부등 그의 잔해 일부를
수습하여 법당 옆에 세워 놓았는데, 대각선으로 서탑을 바라보고 있더라.
쌍탑으로 세워진 것을 보면 탑 앞에 금당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현재는 멀리감치 법당 겸 승방(僧房)으로 쓰이는 전각이 자리잡고
있다. 단짝을 잃은 홀아비 같은 이 탑은 보물 497호.
앉은뱅이기 된 동탑 부근에는 그들과 비슷한 연세로 생각되는 석사자 1마리가 세워져 있는데 그와 관련된 자세한
신상정보는 알지 못한다.
동탑 옆에는 돌로 대충 만들어진 불단(佛壇)이 있고 그 위에 수십 개의 금동불이 일제히 남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이들은 비,눈,바람을 막아줄 집도 없이 그냥 뜰에 설치된 불단 위에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채 앉아 있던데,
참 안쓰럽더군. 원래부터 이런건지. 아니면 법당이 불타서 집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운 날씨에 눈까지 잔뜩
뒤집어쓴 이들을 바라보니 집을 잃은 아이를 보는 듯 나도 모르게 측은(惻隱)함이 든다..
동탑 오른쪽에는 성국사의 법당 겸 승방이 자리하고 있는데,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조용하군..
성국사 경내 뜰에는 관람객으로 보이는 사람 10여명만 3층석탑과
불단을 보고 있었다.
◈ 16. 신비의 샘 오색약수를 마시며 나이 먹음을 한탄하다.
성국사를 둘러보고 제2오색약수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내려가 보니 얼음과 눈으로 뒤덮힌
주전골 등산로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제2약수까지 계곡 옆 암반을 따라 올라가는 환상적인 코스가 펼쳐진다. 그러나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계곡물은 보이지 않으며 빙판길이 되 버린 등산로는 지나가는 이들의 통행을 위협하며 종종 이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아주 못된 장난을 부리고 있으니 조심할 것.
그런 계곡을 따라 여러 굽이 지나치면 계곡 위에 걸린 철교(鐵橋)가 나오고, 그 부근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며
물을 뜨는 모습이 보인다. 거기가 바로 그 유명한 제2오색약수였던 것.
이 약수는 얼어붙은 계곡 암반에 뚫린 동그란 혈(穴)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양이 매우 적다. 그래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며 물을 뜨고 있었던 것. 나는 단지 물을 마시러 왔기 때문에 그들에 양해를 구하며 조그만 구멍에서 힘겹게
나오고 있는 약수를 마셔보았다.
물의 맛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냥 약수일까? 아니다. 그런 약수 같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지.
우리 집 부근 도봉산(道峯山)에도 그런 약수는 많으니까.
이 오색약수는 16세기 무렵 오색석사의 승려가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약수터의 이름이
오색이 되었던 것.
이 약수는 맛이 대개 짜고 이상하며, 탄산사이다와 약간 비슷한 맛을 내고 있다. 그 물에 설탕을 넣어 적당히 저으면
바로 칠성사이다 비슷한 맛이 난다.
그래서 가족들을 따라 오색약수에 온 애들은 맛이 이상하다며 안마시겠다고 때를 쓰고 아까운 물을 버리더라..
저런저런.. 하긴 나도 17년 전에 그랬으니까.. 약수의 맛이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마시고 싶어 안달이
난 20대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 그만큼 세상의 이치와 약수의 맛을 알게 된 나이가 된 것인가. 어찌보면 이제
늙었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이제 슬슬 몸에 좋은 것을 찾아 다닐 때가 된 듯도 싶어, 왠지 서글퍼지는군..
어쨌든 약수 1모금 가득 떠서 입안에 넣었다. 맛은 어린 시절에 느낀 것과 비슷하지만, 그 때와 달리 맛이
좀 있는
것 같더라.. 그래서 금방 1모금을 비우고 다시 한모금 마실까 했으나 길게 줄 선 사람들의 눈치도 있어
바가지를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약수터를 나온다.
◀
바위 암반에서 솟아나는 신비의 약수 제2오색약수 - 이 오색약수는 위장병,
신경통, 빈혈증에 효험이 있으며, 이 물로 밥을 지으면 흰밥이 푸른색으로
변하면서 특이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필자는 이 약수로 만든 푸르른 밥을 먹어본
적이 여러 번 있는지라 그 특이한 맛을 잘안다. 생각해보니 먹어본지가 오래된 것
같네.. 먹어보고 싶어라..
◀ 시원스런 주전골의 모습
약수터를 나와 기암괴석으로 둘러쌓인 주전골을 5분 정도 올라가면 선녀탕
(仙女湯)이라 불리는 명소가 나온다. 선녀탕은 우리나라의 왠만한 산에는
다 갖고 있는 계곡의 명칭으로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서 목욕을 할만큼
아름다운 절경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별명을 얻은 것.
그러나 선녀탕에는 선녀는 온데간데 없고, 온통 눈와 얼음들 뿐..
선녀들도 날씨가 추워 그냥 하늘에 있는 모양이다. ㅋㅋ
선녀탕에 이르니 한없이 쏟아지던 눈이 뚝 그쳤다.
그래서 더 올라갈까 하다가 집에 갈 시간도 염두에 둬야되는 신세인지라.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철수하면서 다시 제2오색약수에 들려 몸에 좋다는 약수 한모금 시원스레
마시고 (마시고 나니까 몸이 더 가뿐하고 좋아진것 같다는 ㅋㅋ) 주전골의
설경
(雪景)을 바라보며 다시 오색마을로 나온다.
이제 슬슬 설악산을 떠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 17. 강원도의 험난한 산하를 넘고 넘어 - 한계령, 양구 광치령, 소양강 상류, 오봉령
오색마을로 나와 시외버스 타는 곳을 문의해보니 3거리까지 나가라고 그런다.. 허걱. 또 1km를 걸어야 된단
말인가..
어쨌든 눈덮힌 알프스의 마을 같은 오색마을을 뒤로 하고 눈으로 얼어붙은 길을 조심조심 내딛이며 주차장
(양양군내버스종점)을 지나 오색입구 3거리로 나오니 길가에
오색시외버스터미널이란 간판을 내건 가게가 나온다.
이게 터미널이야? 정류장이지.. ㅋㅋ (그때 시간 16시)
가게로 들어서서 서울가는 시간표를 물어보니 16:25분?에 서울(상봉)가는 차가 있더군. 상봉까지 운임은 14000원..
그래서 상봉까지 버스표를 사고 눈에 덮힌 몸을 녹이면서 서울까지 몇 시간이나 걸릴까 이리저리 계산을 해보다가
문득 6번국도(남양주 팔당대교-양평 구간 장난아니게 막힘, 양평-양수리
구간(15km)통과하는데 2시간이나 걸린 쓰라린? 경험이 있음)의 악명 높은 휴일정체가 생각이 나는지라 16:05분에 춘천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춘천에서 열차를 타고 갈
계획을 세우고, 춘천 것으로 바꿔달라 그러니 가게주인 왈"서울로 가지 왜 춘천으로 가? 시간도 별로
없는데"
나는 "춘천에서 누구 만나기로 했다"고 답하니 그제서야 춘천행 표와 3600원을
거슬러 준다.
표를 집어들고 인제-양양 44번 국도(國道) 변에서 서울로 가는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면서 남춘천에서
성북으로 가는 통일호 열차 좌석을 가까스로 예약.
16:05분이 되자 춘천으로 가는 강원고속 직행버스가 힙겹게 오르막길을 올라 오색 정류장에
들어선다.
타는 사람은 나 밖에 없더군..
버스는 험준한 한계령(寒溪嶺, 917m)을 이리돌고 저리돌아 겨우 한계령 정상에 이르니 완전 무장을 갖춘 등산객
서너 명이 하차한다. 한계령 그는
누구인가? 태백산맥의 주요 고갯길중 하나로 직선화된 대관령(大關嶺)과 달리
굴곡이
심한 옛 길로 넘어야 되는 험한 고개. 이 고개를 1992년에 넘어본 이래 12년 만에 와보는 군..
한계령을 지나서부터 그동안 쌓인 피로가 밀려오면서 잠이 들고..
잠에서 깨보니 인제읍(麟蹄邑), 여기서 약 10분 정도 정차를 하는데, 터미널 아줌마가 버스에 올라
"이 차 17:50분에
출발합니다" 그러는 것이다. 그 때시간 겨우 17시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서 다시 되물으니
"앗 내가 실수했네
17:05분에 출발해요"라고 말하고 황망히 내리는군..
17:05분이 되자 버스는 인제를 출발, 그런데 홍천 쪽으로 안가고 다시 원통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상하게 여기면서 혹시 양구(楊口)로 해서 가나 생각을 하니, 내 생각대로 원통에서 양구 방면 31번국도로
들어가더라.. 이런 생각도 하지 않던 우리나라 최고의 벽지(僻地) 양구를 거쳐서 간다니..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양구의 산하(山河)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대되더라...
31번 국도로 들어선지 10분 만에 양구의 입구인 광치터널이 양구에 찾아온 사람들을 제일 먼저 반긴다.
이 광치란 고개는 해발 1000m가 넘는 정선(旌善)
비행기재의 버금가는 험준한 고개로 지금은 터널이 뚫려 아주
쉽게 통과할 수 있다.
광치터널을 지나 야촌리에 이르니 헌병들과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檢問所)가 나오고, 그 앞에 버스가 정차하면서
헌병이 버스에 올라 검문을 실시한다. 나야 뭐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그 헌병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 헌병이 민망한 듯 대충 둘러보고 경례를 하고 내린다. 어린 시절에는 버스에 올라 검문을 하던 헌병이 왠지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 헌병들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니 이제는 오히려 만만해진 듯 싶다. ㅋㅋㅋ
야촌리를 지나 양구읍 입구 검문소에서 또 헌병이 버스에 올라 검문을 하는데 결국 별 소득 없이 내리는군..
예전 서울 주변의 주요 검문소(파주 장곡, 양주 주내, 의정부 호원, 양주 송추, 고양
삼송)를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는 꼭
헌병들이 버스에 올라 검문을 했는데, 요즘은 아예 하지도 않는지라 점점 잊혀져
가던 풍경을 양구 땅에서 보게
되다니.. 그만큼 휴전선에 아주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양구읍이 보이는 3거리에서 이상하게도 양구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춘천 방면으로 직진. 굴곡이 심하기로 유명한
소양호 상류 코스가 접어든다. 이 코스는 왼쪽에 말라빠진 소양호의 상류가 펼쳐지고 그 주변이 온통 첩첩산중
(疊疊山中)이며, 도로는 굴곡이 아주 심하여 자칫 멀미하기 쉬운 코스로 악명이 높다.
다행히 멀미는 안했고 대신 추곡리에 이를 무렵 또 다시 잠이...
잠에서 깨보니 오봉령(五峯嶺)을 넘고 있더라.
이 오봉령 역시 한계령, 미시령, 싸리재, 죽령에 버금가는 험준한 고개로 그 난이도는 한계령, 미시령과 비슷..
그날 따라 생각치도 못한 강원도의 주요 악명 높은 고개와 험준한 코스만 골라서 가게 되다니..
덕분에 강원도에 험준하면서도 아름다운 산하(山河)를 오랜만에 잘 구경하였다.
오봉령을 지나 소양강을 건너 3시간 만인 19시에 춘천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했다.
솔직히 춘천은 여행계획에 있지도 않았다.(원래는 인제-홍천-양평-서울 코스로 갈려고
했음) 어떻게 하다보니 강원도의
산하를 가로질러 춘천까지 오게 되었네...
◈ 18. 춘천에서 서울까지 (마무리)
춘천(春川)에 이르니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태..
터미널에서 1.5km 떨어진 남춘천역까지 또 무작정 걸어간다. 날씨도 제법 쌀쌀하고..
아마 이날 걸어간 거리가 족히 20리(대략
11km, 10리는 5.5km 우리나라 전통식)는 넘을 듯 싶다.
남춘천역에 이르러 20:59분에 청량리로 가는 통일호 열차 승차권을 2300원 주고 구입. 저녁을 먹기 위해 역전에
펼쳐진 식당 5군데 중 한 곳에 들어가 춘천의 명물인 막국수를 먹었는데, 맛은 그저 그렇더군..
저녁을 먹고 역사(驛舍)에서 남은 40분의 시간을 '한국의 미(美)특강'이란 책을 꾸역꾸역
졸면서 보고나니 어느덧
개표시간, 서울로 가려는 수 백명의 인파 속에 파묻혀 타는 곳으로 나와 5분 정도 북한강의 매서운 바람을 맞으니
20:59분에 춘천발 청량리행 통일호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유유히 남춘천역으로 들어선다.
열차에 올라 자리(4호차 40석)에 앉은지 얼마안되서 또다시 잠이..
잠에서 깨보니 열차는 중랑천(中浪川)을 건너고 있었고 잠시 뒤인 22:47분에 성북역(城北驛)에 도착..
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23시..
-> 이로써 강원도 나들이는 추억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 상편은 2004년 2월 20일에
완성하여 2월 24일부터 만천하에 공개함
* 하편은 2004년 2월 25일에
완성하여 3월 1일부터 만천하에 공개함
* 2004년 6월 19일, 여행 후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상편,하편을 하나로 통합함.
Copyright (C) 2004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