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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도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탈세를 일삼았으며 이권을 거머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 부호들은 불법의 장리 빚을 주어 치부를 일삼았다. 공전이 축소되어 나라의 창고는 텅텅 비었으며 백성들은 유리걸식했다.
외부의 침입은 더욱 나라를 어지럽게 했다. 당시 중국 남쪽에서는 주원장이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으며 백련교도들은 황하에 동원된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이 홍건적(紅巾賊)이었다.
공민왕은 자주의식이 투철했으며 실리외교를 추구했다. 당시 원나라는 누란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공민왕은 먼저 국내에서 온갖 횡포를 부리는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원의 조종으로 인사권에 개입하는 기구(정방)를 폐지했다. 이어 중국 남쪽 세력과도 외교관계를 트고 미래의 사태를 대비했다. 하지만 홍건적의 복속 권고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하여 홍건적은 1361년에는 개경을 점령하기도 했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파천했을 때 한 중을 만나 회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중이 바로 변조(遍照·훗날 신돈으로 이름을 바꿈)였다. 공민왕은 훗날 변조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설법을 듣기도 하고 국정을 자문하기도 했다. 공민왕은 내부의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외부의 환난에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공민왕은 권문세가와 신진 관료, 유생들을 믿지 않았다. 모두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 또는 영합하는 부류로 보았다. 그는 마침내 변조에게 모든 개혁의 짐을 맡겼다. 이에 대해 안정복은 “이 세 부류를 모두 쓸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속세에 물들지 않은 사람을 얻어 인습으로 굳어진 폐단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 즈음에 신돈을 보고 나서 그는 도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출신인 데다가 일가 친척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눈치를 살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은 부처님과 하늘에 맹세하는 결의를 다졌다. 변조는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들인 권문세가, 고위 벼슬아치와 유생 출신 관료들을 몰아냈다. 군사권을 거머쥐기 위해 명망 있는 무장 최영도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가 조정에 나올 때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사람들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불렀다. 이름도 신돈으로 바꾸었다.
1366년 신돈은 마침내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 뒤에 辨正都監으로 고침)을 설치했다. 이것의 초점은 농장에 부당하게 탈취 당한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부정한 방법으로 농장에 소속된 일꾼을 양인으로 환원하여 국가의 부역을 지우겠다는 것이다. 또 사전(私田)의 탈세를 막고 고리대를 제한하며 양민을 농노로 예속하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신돈은 시행령을 반포하고,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을 기한으로 정해 자진신고하도록 한 뒤 선포했다.
“잘못을 스스로 고치는 자는 불문에 부칠 것이며 기일을 어겨 발각되면 법으로 엄중히 다스릴 것이다. 망령되이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반역의 죄를 적용할 것이다.”
이리하여 농장주들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고, 강제로 농노가 되었던 양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찾았다. 신돈이 거처하는 집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많은 천민과 노비들이 신돈에게 직접 찾아와 양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신돈은 이들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노비들이 낮은 무관의 자리에 진출하기도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부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성 연복사에서 법회를 열 때의 일이다. 신돈은 설법을 하다가 부녀자들이 전 바깥에 서서 설법을 듣는 모습을 새삼스레 주목했다.
그는 공민왕에게 “부녀자들에게 전으로 올라와 설법을 듣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오랜 의례를 깨는 요청이었다.
신돈은 부녀자들에게 떡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부녀자들은 “첨의(僉議·신돈의 직책)께서는 문수보살의 후신이십니다”라고 외쳤다. 노비들과 양인들도 몰려다니며 “성인이 나타났다”고 소리쳤다.
신돈은 공민왕의 반원정책에도 동조했다.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원의 조정은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을 갖가지로 방해했다.
신돈은 유교세력의 동조를 얻기 위해 신진의 유학자를 발탁하는 데에도 힘썼다. 곧 이색·정몽주·이숭인 등이었다.
그러면서 종래 파벌을 조성하는 유생출신의 관료들을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라고 배척했다. 또 과거제의 특혜를 없애고 오직 정식 과거를 통해서만 벼슬길에 나오게 했다. 과거제 개정은 기득권 세력의 팔다리를 자른 조치였다. 관리의 승진에는 순자법(循資法)을 쓰게 했다. 오래 근무한 벼슬아치에게 연공을 인정해주고 시험을 보게 하여 먼저 승진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이다.
이제도를 도입해 종래 어진 이를 요직에 맡긴다는 명분으로 순서를 뛰어넘어 승진시켜 온 관례를 막았다. 기득권 세력은 이 제도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동료나 자제들을 끌어주었던 것이다. 훼방꾼들은 “옥과 돌이 섞이고 향기와 구린내의 분별이 사라졌다”고 비난했다. 6년에 걸친 개혁작업은 참으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의 비리를 공격하는 탄핵 상소가 잇달았다.
그러나 공민왕의 강력한 비호로 번번이 무마되었다. 그를 비난하는 글은 토지 노비와 과거제 등 개혁조치는 별로 언급치 않고 개인의 비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민중의 인기가 수그러들지 않았지만 조정내 기반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공민왕은 어느 신하에게 일을 맡겨 추진하다가 그의 세력이 커지면 제거하고 다시 친정체제로 돌아가는 수법을 곧잘 써먹었다. 신돈을 제거하는 구실은 아이를 낳았다는 것, 뇌물을 받아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는 것, 역적 모의를 했다는 것 따위였다. 공민왕은 신돈을 처음에는 수원으로 유배를 보냈다가 역모를 구실 삼아 그의 세력 20여명과 함께 처형했다.
그가 잡힌 지 4일 만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아 조작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렇게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모든 개혁조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공민왕은 신돈이 죽은 뒤에도 개혁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헛발질에 지나지 않았다. 공민왕은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치고 나서 남색을 탐하는 등 타락의 생활을 하다가 남색패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의 비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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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영원한 정인(情人)인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은 뒤 여자를 멀리했다. 왕비를 새로 들였으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후궁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아들을 두지 못했다.
신돈은 자신의 시종이자 어여쁜 반야를 ‘씨받이’로 선택하여 공민왕의 잠자리를 돌보게 했다. 반야는 아들을 낳았다. 공민왕은 아들 이름을 ‘모니노’라 하면서 애지중지했다.
신돈이 처형됐는데도 공민왕은 모니노를 원자로 공표했다. 이때까지도 별탈을 잡히지 않았다. 어느날 김흥경이라는 자가 임금에게 말했다. 높은 벼슬아치의 자제들 가운데 미소년들을 뽑아 궁중에서 살게 하라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자제위(子弟衛)라는 기구를 만들어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했다. 임금은 날마다 미소년들과 남색(동성애)을 즐겼으며, 임금의 침실에서 집단 간음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은 폭음하고 때때로 미소년들을 두들겨팼다. 또 마음 내키는 대로 상과 벌을 내렸다. 규정에 정해진 휴가도 보내주지 않았다. 미소년들은 서로 사랑싸움을 벌이면서 질투했으며 폭행을 당하고 휴가를 얻지 못해 불만도 쌓였다.
공민왕은 어느날 술에 취해 침실에 누워 있었다. 자제위 소속 청년 예닐곱 명이 들어와 공민왕을 칼로 난자했다. 공민왕은 개혁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도 45세의 장년으로 죽었다. 남색에 빠진 것도 마음의 공허를 메우려는 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그의 사후는 더욱 비참했다.
그의 아들 모니노는 열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우왕(禑王)이 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최영·정몽주 등을 몰아내고 공민왕의 사업을 모조리 뒤집는 역사왜곡 작업을 벌였다.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조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신돈이 반야를 간통하여 자식을 낳고 공민왕의 아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왕을 왕씨가 아닌 신우(辛禑)라고 부르면서 마침내 쫓아냈다. 이어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이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이때에도 신씨 혈통이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명망 있는 이색·조민수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창왕도 재위 9년 만에 쫓겨났다. 그러면 궁중 사정을 환하게 알고 있는 이색과 조민수는 창왕이 신씨라는 사실을 모르고 새 임금으로 추대했을까? 이처럼 공민왕은 철저하게 이미지 조작의 이용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공민왕은 영원한 정인(情人)인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은 뒤 여자를 멀리했다. 왕비를 새로 들였으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후궁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아들을 두지 못했다.
신돈은 자신의 시종이자 어여쁜 반야를 ‘씨받이’로 선택하여 공민왕의 잠자리를 돌보게 했다. 반야는 아들을 낳았다. 공민왕은 아들 이름을 ‘모니노’라 하면서 애지중지했다.
신돈이 처형됐는데도 공민왕은 모니노를 원자로 공표했다. 이때까지도 별탈을 잡히지 않았다. 어느날 김흥경이라는 자가 임금에게 말했다. 높은 벼슬아치의 자제들 가운데 미소년들을 뽑아 궁중에서 살게 하라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자제위(子弟衛)라는 기구를 만들어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했다. 임금은 날마다 미소년들과 남색(동성애)을 즐겼으며, 임금의 침실에서 집단 간음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은 폭음하고 때때로 미소년들을 두들겨팼다. 또 마음 내키는 대로 상과 벌을 내렸다. 규정에 정해진 휴가도 보내주지 않았다. 미소년들은 서로 사랑싸움을 벌이면서 질투했으며 폭행을 당하고 휴가를 얻지 못해 불만도 쌓였다.
공민왕은 어느날 술에 취해 침실에 누워 있었다. 자제위 소속 청년 예닐곱 명이 들어와 공민왕을 칼로 난자했다. 공민왕은 개혁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도 45세의 장년으로 죽었다. 남색에 빠진 것도 마음의 공허를 메우려는 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그의 사후는 더욱 비참했다.
그의 아들 모니노는 열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우왕(禑王)이 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최영·정몽주 등을 몰아내고 공민왕의 사업을 모조리 뒤집는 역사왜곡 작업을 벌였다.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조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신돈이 반야를 간통하여 자식을 낳고 공민왕의 아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왕을 왕씨가 아닌 신우(辛禑)라고 부르면서 마침내 쫓아냈다. 이어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이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이때에도 신씨 혈통이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명망 있는 이색·조민수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창왕도 재위 9년 만에 쫓겨났다. 그러면 궁중 사정을 환하게 알고 있는 이색과 조민수는 창왕이 신씨라는 사실을 모르고 새 임금으로 추대했을까? 이처럼 공민왕은 철저하게 이미지 조작의 이용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공민왕은 원나라의 노국공주를 비로 맞았는데 왕이 된 공민왕은 반원성향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그 예로 변발호복 등 몽고풍속을 폐지하고,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를 복구했다. 또한 내정을 간섭하던 원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하고, 원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세도가 일파를 숙청했으며, 100년 동안 존속되어 오던 원의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원에 대항하여 자주회복과 왕권의 강화를 꽤했다. 그런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죽음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를 설치했는데 소속 홍륜이 공민왕의 셋째부인 익비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그 무리들을 죽이려다가 최만생의 밀고로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여기서 자제위는 나이가 젊고 잘 생긴 미남자들을 골라서 시중을 들게 하는 것으로 동성애를 즐기는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이 자제위에 소속된 인물들을 보면 고려의 정치 경제면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던 권문세족의 손자내지 공민왕대의 현직고관이다. 더욱이 공민왕에게 손자뻘 되는 터수도 있어 이들을 선택하여 변태성욕을 즐겼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과연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나고 자주성향이 강한 공민왕이 이런 목적으로 자제위를 설치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