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나들에 부용대’는 하회마을에서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해가 뜰 때나 질 때 먼저 밝아오고 또 먼저 어두워지는 곳으로 ‘뱃나들에’란 명칭은 빛과 배와 벼(쌀가마)가 드나드는 나루터라는 뜻으로 빛, 배, 벼를 합성하여 ‘뱃나들에’라 불렀다고 한다.
유청하 시인은 고향의 정서를 기초로 하여 그 추억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으며 훈훈한 고향말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정의 목소리를 찾아내어 도시적 삶의 비정함을 회복하려는 한 방편을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 이 시집 제목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특히 뱃나들에 강변에는 하얀 분가루처럼 미세한 모래 위에 고송古松 수만 그루가 휘돌아드는 강을 따라 마을을 둘러싼 만송정과 부용대 서쪽 기슭, 능파대와 능을대를 이어주는 친길의 미담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선유船遊줄불놀이’와 ‘화전花煎놀이’등 많은 놀이문화를 통하여 풍류의 멋과 인간의 정을 나누는 정서, 이처럼 하회마을은 풍부한 언어와 오랜 충효사상으로 뿌리내린 관습을 기본정신에 두고 있으며, 족친 간에 서로 도와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마을 전체가 함께 번영을 이루어냄으로써 아름다운 경관과 옛 전통문화가 잘 전승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유청하 시인에게서 고향은 돌아가 온전히 뼈를 묻어야할 근원의 대지이며 부단한 노력으로 새롭게 구축해 나가야할 내일의 길인 동시에 이 시집의 시적 원류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의 육성에서 느낄 수 있다
미망속에서 헤매다 손을 놓아버리고 나니 허망감과 함께
한 가닥 후련함이 다가오는 것은 왜 였을까.
......... (중략) ......
옛 시절 마디 하 나 하 나 짚어 보다 자성 속에
기억되는 편린의 그림자들을 엮어 첫 시집으로 묶어 보았다.
조심스럽게 내 밀어 보는 것이니 한 인간이 노력하며 살려고
하는구나 하는 따뜻한 시선으로 보아주었으면 한다.
-「시집을 내면서」부분
사람은 누구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살아간다. 시인은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자신의 삶 하나 하나 되짚어보는 각성의 시선으로 사노라고 잃어버린 꿈의 거처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는 진정한 용기이며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겠는가,「하회시편. 1 : 강」에서는 이러한 정신의 깊이가 ‘그래요/우리는 흐름이지요’ 라는 시어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로 제 구성하여 ‘부대낌 퍼렇게 멍도 들지만.../..우리모두 이겨내고 흘러왔지요’라고 표현함으로써 살아온 날들을 수용하는 순응적 세계관과 처해있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흐름의 시작과 끝이 한결같이 고향정서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재종조부, 기다란 장죽 사용하였네.
담뱃진 노랗게 쌈지 열어 꾹꾹
불 붙히라 하시네....
- 「하회시편. 4 : 할배」부분
어멤! 이제 들어가이소.
오냐! 내 어예 말리겠노.
대구가만 너거 작은어매한테 이 핀지 디리라.
...(중략)...
-「하회시편. 5 : 할매」부분
새아지매! 깨는 요쪽 안쪽에 넣어놓았니더.
내릴 때 잊지 말고 갖고 내리이소!
...(중략)...
-「하회시편. 7 : 대구행 버스」부분
... 하나 더 도-오 한 마리 얻어먹고
또 조금 있다
큰어매 하나 더 도-오 또 얻어먹고
...(중략)...
손가락보다 훨씬 큰 누에 되어
큰어매 하나 도-오 큰어매 하나 더......
-「하회시편. 8 : 큰어매」부분
저녁 어스름 하동영감 소 몰아 돌아온다.
...(중략)...
사랑 가마솥 쇠여물 끓이는 일
...(중략)...
엄마젖 코 박고 대갈받이하는 송아지
그 순한 눈
-「하회시편. 15 : 암소」부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물신주의가 판을 치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기계적인 도시, 인간의 정신이 삭막해 질수록 시인이 자꾸만 옛 사람들의 인성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곳은 ‘제종부 길다란 장죽’이 있으며 ‘담뱃진 노랗게 쌈지 열어 꾹꾹
불 붙히’는 곳이며 또한 그곳에는 ‘오냐! 내 어예 말리겠노/... 대구 가만 너거 작은어매한테 이 핀지 디리라’ 글썽이는 할매와 ‘새아지매! 깨는 요쪽 안쪽에 넣어놓았니더/내릴 때 잊지 말고 갖고 내리이소’ 두런두런 배웅하는 친척들의 정겨운 목소리가 있는 곳이다.
‘하나 더 도-오 한 마리 얻어먹고/...손가락보다 훨씬 큰 누에 되어/ 큰어매 하나 도-오 큰어매 하나 더’ 이렇듯 대 가족이 모여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던 삶의 터전, 다시 말하면 ‘저녁 어스름 하동영감 소 몰아 돌아’오는 곳이며 ‘사랑 가마솥 쇠여물 끓이는 일’과 ‘엄마젖 코 박고 대갈받이 하는 송아지/그 순한 눈’을 볼 수 있는 푸근하고 느슨한 곳, 이곳으로 시인은 자꾸만 상상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는 삶의 모순 속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의지이며, 인정이 무엇이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일깨우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리라, 하여 시인의 시가 이처럼 시인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아부지예ㅡ! - 새참 왔심더ㅡ ’
...(중략)...
도시간 아들놈 공부 잘 한다는 소식 목젓터지게 마시고
이마에 맺힌 땀 농주사발로 씻으며
‘ 기집아가 공부는 무신ㅡ
살림이나 배우고 시집가 시부모 잘 모시면 되제! ’
빈 광주리 주렁주렁 논두렁 밭두렁 이고가며
점점 작아지는
누나.
-「하회시편. 5 :새참」부분
‘ 가을하늘, 우예 저래 높노! ’
자랄 때나 시집갈 때나 섭섭하기만 하던 친정이었다
...(중략)...
‘ 환갑 넘어 한 참인데 음복상도 못 받다니! ’
‘ 남자들 틈에 끼어 앉아 묵지 그랬노! 언니가 뭐 그래
대단타꼬 대접받을라 카노! ’
...(중략)...
-「하회시편. 25 이화촌 가는 길」부분
유풍이 강한 안동지방의 방언 속에 가부장적 생활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시인은 이러한 시를 통해서 한 가정의 희생양이 되었던 누나 ‘빈 광주리 주렁주렁 논두렁 밭두렁 이고 가며/점점 작아지는’ 그 시대 누나들에게 사과하듯, 그녀들의 일생을 시화함으로써 전통적 삶의 정체성과 여인의 한을 조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시인이 어떤 말들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정신, 즉 시혼의 처소를 짐작하게 되며 그 언어의 상징성이 시세계의 문을 열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시인의 그리움은 지난날에 있으며 그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그 되돌아감의 의미를 시정신의 마디로 삼고있음을 알 수 있다.
해거름 외 딴 초가 집 저녁 연기
훈훈한 삶이 보인다
두런두런 다가오는 저 다정한 목소리...
끼니 거르지 않을 것이다, 아랫목
따스할 것이다
해는 서편마루 걸리고
길게 땅 그림자 드는 정겨운 그림
반갑게 아랫목 자리 내어 줄 것 같다
-「하회시편 65: 풍경」부분
이 詩는 보편적인 시골풍경을 통해 시인이 경험한 추억의 삶과 점점 사라져 가는 인정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정서는 저녁연기, 햇살, 아랫목 등 모든 사물과의 관련성을 통해서 나타난다.
시인이 관련된 사물과 경험의 범주가 ‘해거름 외딴 초가집 저녁 연기’ 속에서 ‘ 끼니 거르지 않을.../아랫목 따스할...’ 추억의 집이라면 ‘반갑게 아랫목 자리 내어 줄 것’ 같은 인정의 아름다움을 구사한 시인의 언어가 불을 지피듯 읽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것이다.
시를 읽는 느낌은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시를 통해 세상과 화해할 수 있고 서로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며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할 수 있다면 한 시인이 구축해낸 영혼의 불꽃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척박한 각자의 삶을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 긴 유배지
곳곳의 상처 다 날개가 되었구나
...(중략)...
알바트로스-
알 낳기 위해 밟아보는 고향의 땅
-「하회시 편. 27: 回鄕」부분
...(중략)...
서리발 기와장 두드리며
내 몸을 건너가는 바람소리
쫑
쫑
쫑
쫑
쫑
쫑
희미하게 들려오는 쏙독새 소리
-「하회시 편. 28: 세월」부분
...(중략)...
이 밤 내내 나는 꿈 속으로 길을 내어
훨훨 날아간다
그대여
- 「하회시 편. 29: 秋想」부분
시는 대상과의 동일성을 이루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며 석공이 돌을 다듬듯 각고의 노력으로 연마된 언어의 예술이다.
이런 맥락에서 절제된 언어로 쓰여진 ‘하회시 편. 27: 回鄕’를 살펴보면 시인이 선택한 새‘알바트로스’는 날개길이가 10m이며 한번 공중에 오르면 3년간 허공을 날으는 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3년 간격으로 알을 낳는데 알을 낳을 때만 땅에 내려오기 때문에 착륙할 때는 거의 목숨을 건다고 한다.
새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 위기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인식으로 시인이 ‘알바트로스’가 선회하는 허공을 ‘저 긴 유배지’라고 표현했을 것이며 ‘곳곳의 상처 다 날개가’ 되어 날아가 도달하고 싶은 곳, 즉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많큼 분명한 대상을 ‘알 낳기 위해 밟아보는 고향의 땅’ 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고향만이 자신의 존제를 확인할 수 있으며 삶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이라는 신념 때문이며 여기에는 시인의 인생관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이 ‘서리발 기와장 두드리며/ 내 몸을 건너가는 바람소리’ 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쏙독새 소리’ 속에서 건져내는 소리들은 한결같이 고향 사람들의 그리운 목소리인 것이다.
이는「하회시 편. 29: 秋想」에서 ‘이 밤 내내 나는 꿈속으로 길을 내어/ 훨훨 날아간다/ 그대여’ 라는 시 구절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그리움의 대상이 더욱 뚜렸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그 방향이 전부 강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 보아도 골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 하회의 길은 미로라고 부르며 강을 따라 많은 놀이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시인이 소개한 ‘화전花煎놀이’연작 시편은 ‘花川 건너 건너 남산중턱/친길 기슭따라 /처녀들 댕기풀어/검은머리 손수건 찔끈 묶고/소중히 챙겨 둔 봄 한복 차려입은/딸네, 며눌네, 媤母들 모두 화전놀이 간다’는 구절들이 화천을 나룻배로 건너 남산 중턱 팔선대 앞 너른 바위에서 화전을 지져먹고 가사를 짓고 읊으며 규중에서 익혔던 규방가사로 자신의 소회를 푸는 부녀들의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하회시편. 34’의 ‘화유가’를 보면 그 문장력으로 봐서 여성들의 실력만은 아닌 것 같다. 이는 이 놀이문화를 위한 남성들의 애정어린 협조와 적극적인 배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인정과 풍류가 살아있는 하회정서의 바탕임을 알 수 있다.
건곤(乾坤)이 조판(肇判)후에 절서(節序)를 분별(分別)하니
아마도 좋은승경(勝景) 춘하갱명(春夏更明) 가절(佳節)이라
자전흥수(自展興垂) 각춘호(覺春好)는 서충이원(瑞充梨園) 時節이 요
向陽花木 이위춘(易爲春)은 공후적사(公侯墑士) 호흥(豪興)이라
고금(古今)을 헤아리니 허다춘풍(許多春風) 가소(可笑)롭다
우리동류(同類) 몇몇여자(女子) 규중(閨中)에 깊이 숨어
처신언행(處身言行) 조심(操心)하고 침선방직(針繕紡織) 힘쓰다가
심중(心中)에 울화(鬱火)나서 사창(紗窓)을 반개(半開)하고
애광(靄光)에 앉았으니 난데없는 일점 동풍(一點東風)
은근(慇懃)히 불어와서 호응(呼應)을 일으키니
적울지회(積鬱之懷)갱발(更發)하야 일장화유(一場花遊)상반(相伴) 하니
그 뉘 아니 응낙(應諾)하리 녹의홍상(錄衣紅裳) 떨처입고
삼삼오오(三三五五) 작반(作伴)하여 연보(蓮步)를 곱게옮겨
만송정(萬松亭) 당도하니 심신(心身)이 상쾌(爽快)하다
청산은 빛을 띄고 녹수는 반기 난 듯 北天에 뜬 기러기
가노라 하직하고 강남서 나온 제비 왔노라 인사한다
半空中의 노고지리 비비배배 노래하고 강 언덕 잔디 풀은
푸릇푸릇 돋아나고 이산 저산 붉은 꽃은 一年一到 다시 피어
이화(梨花)는 작작(灼灼)하고 도화(桃花)는 요요(姚姚)한데
화간(花間)에 범나비는 꽃을보고 춤을추고 細柳間에 꾀꼬리는
벗을 불러 노래한다 玉手를 서로잡고 차례(次例)로 登船하여
범범중류(泛泛中流) 떠나갈 제 부용대(芙蓉臺) 광(光)난 빛은 古色을 띄워있고 雲松臺 갈모 암은 如花如石 경개(景槪)로다
겸암옥연(謙嵓玉淵) 양선정(兩先亭)은 도덕유촉(道德遺躅) 壯할시 고
상봉(翔鳳)에 맑은 기운 백운예(白雲霓) 서려있고
울림(鬱林)에 미한 기상 초연(超然)히 어리었다
능파대(凌波臺) 맑은 물에 어룡(魚龍)이 잠기었고
차아(嵯峨)한 강산수봉(江山秀峰) 외내일성(外內一城) 불어줄듯
인사(人事)는 변천(變遷)하되 강산(江山)은 예와 같다
계선암(繫船岩)에 배를 매고 일제(一齊)히 같이 내려
부용대(芙蓉臺) 치쳐 올라 좌우산천(左右山川) 둘러보니
이런 경치(景致) 또 있을까 맑고 맑은 낙동강(洛東江)은
주야장천(晝夜長川) 흘러가니 영웅(英雄)의 기상(氣象)이요
높고 높은 저 화산(花山)은 만고(萬古)에 불변(不變)함이
군자(君子)의 절개(節槪)로다 중천(中天)에 우뚝 솟은
웅장(雄壯)한 부용대(芙蓉臺)는 차고 찬 북풍한설(北風寒雪)
용맹(勇猛)하게 막아있고 운간(雲間)에 높이 솟은
화려(華麗)한 저 남산(南山)은 화창(和暢)한 봄소식을
흔연(欣然)히 전(傳)해주네 반공중(半空中)의 마늘봉은
白雲이 서려있고 아름다운 遠志山은 아미(蛾眉)를 그렸도다
원지정(遠志亭) 빈연정(賓淵亭)은 문장도덕(文章道德) 빛이 나고
화수당(花樹堂) 종(鍾)소리는 소슬한풍(蕭瑟寒風) 가이없다
강상(江上)에 떠난 배는 順風에 돛을 달아 萬頃蒼波 넓은 물에
봄을 즐겨 왕래(往來)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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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절절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서 중에서 가장 절절한 것은 사랑이며 특히 이루지 못한 사랑일수록 그리움을 간직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별 후에 서로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나타난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해서 그리움으로 시화된 수없이 많은 연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유청하의 사랑은 어떤가, ‘戀歌. 1 : 몽유(夢遊)’에서는 ‘서럽게 울다, 울다’ 깨어버린 꿈으로 사랑의 부재를 노래하고 있으며 ‘戀歌. 2 : 바람’은 ‘불씨 하나 품고 차갑게 눈을 뜨는/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 모듣 상태를 ‘사랑이었지요./차가운 마음 덥혀주고/ 더운 가슴 식혀 주는/노래’ 즉 순수하게 사랑했던 순간의 마음 ‘마셔도 마셔도 비어있는 가슴’을 노래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인의 정신이 ‘戀歌. 5: 나는’에 와서는 더욱 겸허해 지고 있다.
오색꽃잎 깔아 양탄자 되어 드리지요
바람으로 이마 닦아 드리지요
옹달샘되어 입술 축여 드리지요
바라보는 물안개 연꽃 가득 채워 드리지요
그대 강가에 서면 구름꽃 두둥실 띄워 드리지요
어두움 길목마다 반딧-불 날려 드리지요
산마루 넘어가는 모습 가만히 손등으로 닦아보지요
- 戀 歌. 5 : 나는 전문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꽃과 바람과 샘물이 되어 사랑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다가가고 싶은 일관된 지향성, 하여 시인은 잠시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다는 소망으로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는 상태의 구채성을 ‘바람으로 이마 닦아 드리지요/ 옹달샘되어 입술 축여 드리지요’ 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모두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표피적이라고 하는 시대를 살면서도 이처럼 순수한 사랑, 즉 이별의 순간에서까지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섬세함으로 ‘산마루 넘어가는 모습 가만히 손등으로 닦아’볼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진술하고 있어 그 모습, 모습들이 애잔함을 자아낸다.
꽃구름 가득하네
그대 들판
나 갈 수 있다네
길 없는 길
소나무 밑
오솔 길
들풀들 바람에 비켜
길을 여네
야생화 고개 숙이네.
꽃바구니
속으로
들어가는
무당벌레
그대 마음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네
- 미술교실. 3 : 모습 전문
유청하 시인은 그림을 그리고 있으므로 ‘미술교실. 3 : 모습’ 에서는 시와 그림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시인이 사업가로서 생활했던 오랜 세월을 청산하고 늦은 나이에 詩와 그림에 전념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집안 내력 탓인지도 모른다.
1987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가수, 데비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히트시키며 각광을 받던 싱어송라이터 유재하가 유청하 시인의 동생이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했던가, 동생의 죽음과 함께 사업실패로 인한 인간적, 경제적 몰락을 경험한 시인으로서는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노력의 일환으로 詩와 그림에 몰두함으로써 스스로를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 시인은 ‘길없는 길’을 찾아 ‘..그대 마음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는’ 스스로의 행보를 마련하여 제 2의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미술공부 연작에서 나타나듯 이 모든 상황을 ‘가야만 하는 길’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시인이 ‘휘돌아 가는 그 끝’ 어딘가에 ‘살고있을 따스한 가슴들’을 만나려고 하는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지향성의 과정에서 시인은 ‘누구도 가 본적’ 없는 ‘미지의 세계’를 보게되었을 것이며 ‘힘차게 머리 받으며 생명줄’ 같이 이어지는 현실과 ‘갈매기 울음소리 속으로 떨어지는/ 햇덩이’ 같은 정신을 통하여 구축된 자신의 작품세계를 꾸준히 연마해나갈 뿐만 아니라 일생 일대의 화선지에 ‘저녁 어스름 유년의 여울소리/ 봄 아지랑이 향내, 여름 매미소리, 가을 단풍, 낙엽그림자,/ 겨울 눈 덮힌 산하....’ 등 그 많은 추억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옮겨 놓음으로써 사노라고 격는 온갖 일들을 위로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몽오리 미세한 털
나에게
시 한 수 가르처 주려나
- 「봄의 서곡」부분
자연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하여 꽃대를 밀어 올리고 최선을 다하여 잎을 떨어뜨리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시인은 바로 자연의 반복성과 더불어 공존하고 있으며 이는 과거를 기억하고 반추함으로써 현재나 닥쳐올 미래까지 극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일부가 됨으로써 삶에서 오는 괴리감을 근원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구성과 관련되어 있다.
즉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만 모든 생존이 온전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버들강아지를 바라보며 ‘몽오리 미세한 털’이 가르쳐주는 ‘시 한수’ 라고 표현한 시인의 사유가 유년의 골목길 ‘찰칵 찰칵 사라져가는 엿장수 가위소리’를 기억하며 ‘폴짝! 새끼업은’ 메뚜기와 ‘숫잠자리 푸르르ㅡ/ 꼬리 말며 앙탈부리다 끌려가는’ 잠자리 두 마리가 있는 풍경으로 시점을 이동함으로써 시인이 수용한 인식의 단계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증기기관차 맨 뒷칸
객실바닥 앉아가다,
뒷문 열고 나가 쇠난간 잡고 바람 쐬다,
멀어저 가는
산의 행렬 끝에 닿아
먼 하늘 바라보다
사홉들이 소주 병나발 불다
목청껏 노래 부르다
기적소리 속으로 뭉클 뭉클 풀려나가는
나여
- 「완행열차. 1」전문
앞서 유청하 시인의 시편들이 고향정서나 인간의 비극적 삶을 꽃이나 강, 또는 추억 속의 길을 통하여 보여준 외적 자아였다면 이 ‘완행열차’는 시인이 자신의 내부로 시점을 옮기는 자아성찰의 한 단계임을 알 수 있다.
‘멀어저 가는/산의 행렬 끝에 닿아/먼 하늘’ 바라보던 시인의 시각이 ‘기적소리 속으로 뭉클 뭉클 풀려나가는/나’에게로 돌아오고 있으며. ‘장죽 든 흰 수염 노인에게 빼앗긴 내 자리 속으로/ 덜커덩 덜커덩’ 달려가는 열차를 표현함으로써 내부지향성의 시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유청하의 시선은 때로는 자연과 환경의 발원지로, 때로는 인간과 삶의 현장 속으로, 또한 내적 자아를 찾아 옮겨다니며 성찰의 목소리를 다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인간과 생명의 미학
인간 그 실체는 무엇일까, 유청하 시인의 詩에는 인간 존재에 대하여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탐구정신과 자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詩 ‘반한다는 것’을 보면 ‘파란 청자 공들여 닦아 낸/ 서늘함’으로 그 상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 혹여 그대 떠난다 해도’라는 표현을 통하여 속기가 전혀 없는 바보 같은 인간의 한 유형을 진술하고 있다.
또한 ‘겨울 한 복판/ 갈라터진 시멘트 벽 틈새’에서 ‘서슴없이 뻗어 나온’ 풀꽃을 보고 ‘바람에 날려 온 비닐천 한 조각/ 꽃대궁을 감싸고 있는’ 것을 발견해 냄으로써 시화한 ‘생명’은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끈질기게 연명하는 인간의 삶을 비닐 조각에 기대어 피워낸 꽃 한 송이와 대비하여 생존의 강인함을 자연의 모습에서 터득하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자연과 생명, 그 정체성에 대한 시인의 탐구정신이 금개구리 비명을 통하여 ‘못 안 가득한 부들, 개구리밥 물풀’을 ‘우거진 도심 속/ 살아 있는 못/ ... 부들 숲’을 발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사라져 가는 생명에 대한 애정어린 시인의 시선을 강화시키고 있으며 이런 정신의 맥락으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용수골 박쥐’를 시화하였으리라.
‘어둠도 아니였어 빛도 아니였어/...어디에도 길은 없었어/...두려움 쿵 쿵 못 박으며 일어서는/ 노을빛 붉은/ 십자가’ 라는 언표에서 알 수 있듯 시인은 ‘용수골 박쥐’를 통하여 오히려 물신주위에 편승하여 정신적 위기감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의 두려움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두려움의 시각이 ‘부모 자식간, 부부, 형제, 친인척간, 친구/같은지역, 학교, 사회, 계급, 문화, 국가,/모두가 묶여있는 끈’으로 서로에게 ‘인질’이 되어 나타나는 구조적인 모순성을 직시하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세상’에서는 ‘회색인간이라ㅡ/그러면 그게 나쁜사람이란 뜻이구나/그런데,/흑백논리를 펴지말라 한다/그럼 어떻게 하라는 얘기지?/ 올커니!/..고개를 갸우뚱하고 다니면 되겠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다소 아이러니한 귀결로 가치관이 허물어진 현대인들의 혼란스러움을 지적을 하면서도 그 시선이 대단히 낙관적이다.
이는 긍정과 부정을 함께 수용하며 주어진 삶의 어려움을 어떻게든 대처해나가려는 시인의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되도록 세상을 긍적적으로 보려는 화해정신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시인의 작품은 개인의 독창적인 창작물이지만 사회현상, 혹은 시대적 분위기 에 따른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나 상호 유기체계를 갖추고 창조의 본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L.A리처즈는 ‘시인의 임무는 경험의 집단 속에 질서와 통일과 자유를 부어넣는 일’이라고 했으며 D.E시트웰은 ‘시인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은폐해온, 그리고 잃어버렸던 생활을 되찿아 주며 또한 시인은 마음과 눈을 고상하게 만들며 마음과 눈이 스며있는 만큼의 의미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하물며 공자는 ‘시를 모르는 사람과는 논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한 ‘시는 대중과 더불어 화락하게 하며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 시인의 첫 시집을 통독하면서 화자의 가슴에 가득한 노래,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응축된 언어들이 집요할 많금 전부 고향 하회마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서 고향을 떠나면 고향이 더 잘 보인다고 했던가, 유청하의 詩는 박토를 일구어 뿌리를 내리고 가문을 수호한 조상들의 정신과 풍류의 멋으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고향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푸근하고 넉넉한 가슴과 따듯한 인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끝으로 시인의 詩 한편 선하며 다음시집을 기대해 본다.
바둑판이였다.
직사각형, 정사각형, 세모꼴, 타원형
잘 못 그어진 바둑줄은 아니였다.
미꾸라지, 우렁이, 방게, 거머리, 게아제비
모두 떠들썩 잔치판이였다.
‘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적막한 눈물 한웅큼 햇빛에 반짝인다.
땅속에 숨었던 개구리 한 마리
풍덩!
이내 풀섶으로 기어오르는
몹시 힘에 겨운듯한 모습.
햇볕 가리던 개구리풀 자취도 없고
경운기 덜커덩 지나가고 난 뒤
텅빈 길섶, 바람만 남아있는
첫댓글 수술후 순조로운 회복세를 보이고 계신 유청하시인의 모습을 뵐 수 있기를 고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