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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자취를 따르고 싶었던 제자의 진실된 모습을 그려보면서 기행문을 쓰는 기본 형식을 익힐 수 있다.
두류 기행록(頭流記行錄)
김종직(金宗直) 1472년 작
아무는 영남(嶺南)에 생장하였으니 두류산(頭流山)은 바로 고장 산이다. 그런데도 남·북으로 벼슬살이하여 티끌 속에 골몰하다보니, 나이는 벌써 40이건만 아직까지 한 번도 구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신묘년 봄에 함양(咸陽) 고을 원이 되니 두류산은 그 경내에 있어 높다랗고 새파래서 고개만 쳐들면 바로 보이는데, 흉년이 들고 또 백성이 일로 사무가 바빠서 자못 두 돌이 되었으나 감히 한 번 구경할 생각을 못했다.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더불어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일찍이 섭섭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금년 여름에 조태허(趙太虛, 조위)가 관동(關東)으로부터 와서 나와 함께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이 되자 장차 부모 슬하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이 산을 구경하자고 청하므로, 나 역시 허약한 증세는 날로 더하고 다리 힘은 갈수록 쇠하매, 금년에 구경을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우며,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중추절이라 습한 기운은 이미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구경하고,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하고,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一擧兩得)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떠나기로 작정하고 이에 유극기를 청하여 조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적혀있는 산행(山行)에 대한 기구를 상고하여 대강 준비를 갖추었다.
14일 무인에 덕봉사(德峯寺) 중 해공(解空)이 와서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한백원(韓百源, 한인효)이 따라 나섰다. 드디어 엄천(嚴川)을 지나서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미행(尾行)하여 왔기로 역로(歷路)를 물은 즉, 자못 소상하여 역시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지장사(地藏寺)에 당도하니,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 내려 짚신을 신고 죽장을 짚고 올라가니, 임학(林壑)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승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 마장 쯤 가니 바위가 있어 환희대(歡喜臺)라 칭하는데, 태허(太虛)와 백원(百源)은 그 마루턱에 오르고,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金臺)·홍연암(紅蓮庵)·백련암(白蓮庵) 등 여러 절이 굽어보였다. 먼저 선열암(先涅庵)을 찾으니, 암자가 높은 벼랑을 지고 있으며 두 샘이 벼랑 밑에 있어 극히 청렬(淸冽)하고 담장 밖에 물이 부스러진 바윗골로부터 물방울이 되어 반석 위로 떨어져, 조금 오목한 곳에는 깨끗한 못처럼 멈춰 있고,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나서 다 몇 치쯤 된다. 곁으로 등로(磴路)가 있어 등 넝쿨 한 가닥을 나무에 매고, 더위잡아 오르내리며 묘정암(妙貞庵)과 지장암(地藏庵)에 내왕한다.
법종이 이르기를,
“한 비구승이 결하(結夏)하여 우란분(盂蘭盆)을 만들고 파한 후에 구름처럼 노닐어 방향을 알 수 없다.”
하는데 채과(菜苽)와 나복(蘿葍)이 돌 위에 심어져 있고 조그마한 절구통이 두어 되 곡식을 찔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신열암(新涅庵)을 찾으니, 중은 없고 역시 치솟은 벼랑을 지고 있으며, 암자 동북에 바위가 있는데, 이들이 독녀암(獨女巖)이며 다섯 가닥으로 나누어 서고 높이는 다 천여 자가 된다.
법종이 이르기를,
“전설에, 한 부인이 바위 사이에 돌을 포개서 집을 만들고 홀로 그 가운데서 살며 도를 닦아 공중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름이 되었다.”
한다.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으며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어 올라가려면 사다리 놓고 그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 등과 배가 모두 뭉개진 연후에야 그 정상(頂上)에 도달한다. 그러나 목숨을 내거는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는데, 따라간 아전, 옥곤(玉崑)·용산(聳山)은 벌써 올라가서 발을 구르고 손을 휘두른다.
나는 일찍이 산기슭에 왕래할 때 바라보니, 이 바위가 뭇 봉우리와 더불어 함께 솟아서 하늘을 고일 듯하였는데, 지금 몸이 이곳에 와 앉았으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점점 서쪽으로 돌아 나가서 고열암(古涅庵)에 당도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의론대(議論臺)가 그 서쪽 멧부리에 있는데, 극기(克己) 등은 뒤에 처지고, 나만 홀로 세 반석에 막대를 짚고서니 향로봉(香爐峯)·미타봉(彌陀峯)이 다 다리 밑에 있어 보인다.
법공이 이르기를,
“단애 아래 석굴(石窟)이 있어, 노숙(老宿)·우타(優陁)가 살았는데 일찍이 세 열승(涅僧)과 더 불어 이 돌에 앉아서 대소승(大小乘)을 논하다가 문득 도를 깨쳤기로 따라서 의론대라는 이 름이 되었다.”
한다.
조금 뒤에 요주(寮主) 중 하랍(荷衲)이 와서 합장하며,
“듣자니 원님이 구경을 왔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법공은 그 중에게 눈짓을 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중은 낯이 붉어지므로 나는 장자(莊子)의 말을 들어 위로하여 이르기를,
“불을 쪼이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툰다는데, 지금 요주 (寮主)가 한 야옹(野翁)을 만난 것이니, 그가 원님이 되는 줄을 어찌 알랴.”
하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날에 나는 처음으로 험한 걸음을 시험하여, 거의 20리를 걸었기로 몹시 노곤하여 실컷 자고 밤중에 깨서 보니,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키락 뱉으락 하고, 구름 기운이 솟아오르므로 나는 묵념을 했다.
기묘일 새벽에는 더욱 음침하였다.
요주(寮主)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이 산에서 오래 살면서 구름의 형상으로 점을 쳐 보았는데, 오늘은 반드시 비 가 오지 않을 것이다.”
하므로, 나는 기뻐하여 짐꾼을 갈라서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즉시로 떠나가니, 푸른 등덩굴과 깊은 대숲 속에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시내 길에 넘어져 있어, 그대로 약작(略彴 다리의 다른 말)이 되고 그 중 절반이나 썩은 것도 가지가 오히려 땅을 막고 있어 말을 탄 것 같았다. 머리를 숙이고 그 아래로 나와서 한 멧부리를 지나니,
법공(法空)이 이르기를,
“여기는 아홉 고개의 첫째 고개라.”
한다.
연달아 서너너덧 고개를 지나서야 하나의 동부(洞府)가 보이는데, 주위가 넓고 깊숙하며 수목이 햇볕을 가리고 다래덩굴이 여기저기 얽히고, 시냇물이 돌에 부딪쳐 구비치는 소리가 들리며 그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과히 험준하지 않고, 그 서쪽에는 지세가 점점 나직한데 20리를 걸어 나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약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이끌고 들어와서 나무를 쳐내고 밭을 개간하여, 서속·기장·삼[麻]·콩 등속을 심으면 저 무릉도원(武陵桃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겠다.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가 극기(克己)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 볼까나.” 하고 바위에 낀 이끼를 갉아 내게 하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서 산등성을 따라 걸어가니, 지나가는 구름이 나직이 삿갓을 스쳐가지 않고, 풀과 나무는 비가 오지 안 했는데도 젖어 있어 비로소 하늘과 거리가 멀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어 마장을 못가서 능선을 타고 남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연기와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청이당(淸伊堂)에 당도하니 판자로써 당을 만들었다.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있는 계석(溪石) 위에 앉아 조금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가기까지는 길이 극히 위급하게 매달려,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만 보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인다.”는 것으로 나무뿌리를 더위잡아야 비로소 능히 오르내릴 수가 있다. 해가 벌써 오정이 지났는데, 비로소 재마루에 오르니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이 가장 높은데 여기 오니 다시 천왕봉이 쳐다보인다. 영랑(永郞)이란 이는 신라 화랑의 두령인데, 삼천 문도를 거느리고 산수가에 노닐며 일찍이 이 봉에 올랐기로 이름이 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벼랑이 만 길이나 되니, 소년이란 것은 혹시 영랑의 문도인가. 나는 석각(石角)을 안고 그 밑을 내려다보니 꼭 떨어질 것만 같아서 종자(從者)를 경계하여 그 곁에 가까이 말게 하였다.
이때에 구름과 안개가 흩어지고 해가 아래로 드리우니 산의 동쪽과 서쪽에는 계곡이 광활한데, 바라보니 잡목(雜木)은 없고 모두 삼(杉)·회(檜)·송(松)·남(枏)의 종류로 말라 죽어 뼈만 섰는 것이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간간이 단풍이 끼어서 정히 그림과 같으며, 그 산 능선에 있는 것은 바람과 안개에 지쳐서, 가지가 모두 왼편으로 쓰러지고 굽어 앙상하여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해송(海松)이 더욱 많으므로 지방민이 매년 가을이면 따서 공물(貢物)의 액수에 충당한다고 하는데, 금년에는 한 나무도 열매를 맺는 것이 없으니, 억지로 그 액수를 채우게 한다면 우리 백성은 어찌하랴. 수령이 마침 보았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서대초(書帶草)와 유사한 풀이 있어 부드럽고 미끄러워 깔고 앉았다 누웠다 할 만하며 곳곳이 다 그러하다. 청이당(淸伊堂) 이하에는 오미자(五味子)가 많아서 밀림(密林)을 이루었는데, 여기 오니 하나도 없고 다만 독활(獨活)과 당귀(當歸)만이 보일 뿐이다.
해유령(蠏踰嶺)을 지나니 곁에 배바위[船巖]가 있다.
법종이 이르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범람할 적에, 배를 이 바위에 매고 방해(螃蠏 게의 일종)가 지나갔기 때문에 이름이 되었다.”
고 하니,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네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인류는 다 하늘을 더위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하였다.
또 일행을 모아가지고 남으로 중봉(中峯)에 오르니 산 중에서 무릇 우뚝이 솟아 봉우리가 된 것은 다 돌인데 유독 이 봉우리는 흙으로 되고 또 단정하고 중후하여 말굽을 돌이킬 만하기로 조금 걷고 말을 쉬게 하는데, 바위에 샘이 있어 맑고 시원하여 가히 마실 만하다. 해가 가물면 사람으로 하여금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며 한 바퀴를 돌게 하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 나는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보내어 시험해 보니, 자못 증험이 된다.
오후에 천왕봉(天王峯)을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산천이 다 어둡고, 중봉(中峯)도 역시 보이지 아니한다. 해공(解空)과 법종(法宗)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나아가 조그마한 부처를 받들어 날이 개게 해 달라고 놀리[弄]기로 나는 처음에 희롱으로 여겨 물으니 이르기를, “속설(俗說)에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갠다.”
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관대(冠帶)를 갖추고 세수하고 돌길을 더듬어 사당에 들어가 술과 과일로써 성묘에게 고하기를,
“모(某)는 일찍이 선니(宣尼 공자(孔子))가 태산에 올라 구경함과, 한자(韓子 퇴지(退之))가 형산(衡山)에 노닐던 뜻을 사모하였으나 직무에 매인 몸이라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는데 금년 8월에 남쪽 경내(境內)에서 벼 곡식을 살펴보고 높은 봉우리를 우러르니, 정성이 막히지 아니하여 드디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유호인(兪好仁)·조위(曺偉) 등으로 더불어 운제(雲梯)를 밟고 와서 사당 아래 나아가니, 병예(屛翳 비를 맡은 귀신 이름)가 마술을 부려 운물(雲物)이 훈김이 오르고 있으니 좋은 때를 저버릴까 저허하여 황황하고 답답합니다. 엎드려 비오니 성모(聖母)께서 이 술을 흠향하시고 신공(神功)을 베풀어서 오늘 저녁으로 하늘이 청명하여 달빛이 대낮과 같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가 툭 트여 산과 바다가 저절로 분간되게 해 주시면 우리들이 좋은 구경을 얻게 될 것이니 감히 큰 은혜를 잊으리까.”
하였다.
제사를 끝마치고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 두어 순배를 나누고 파했다. 사당은 단지 3칸으로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인데, 역시 판자집에 못질을 심히 견고하게 하였다. 이렇게 아니 하면 바람에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 벽에는 두 중이 그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고, 이른바 성모(聖母)는 바로 석상(石像)인데, 미목(眉目)이나 머리구비에 모두 분대(粉貸)를 발랐다.
그 이마에 이지러진 금이 있기로 물으니 말하기를,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인월(引月)에서 승전하시던 해에 왜놈이 이 봉우리에 올라와 칼로 처 버리고 갔는데 뒷사람이 풀로 다시 붙여 놓았다.”
한다.
동편의 오목한 돌무더기에 해공 등이 희롱하던 부처가 있어 이는 국사(國師)를 일컬었는데 속설(俗說)에, “성모의 음부(淫夫)라.” 전한다.
또 묻기를, “성모(聖母)는 세상에서 어떤 신이라 이르느냐.” 하니
대답이,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한다.” 한다.
아, 이럴 수가 있느냐. 서축(西竺)이 동진(東震)과 더불어 천백 세계가 가로막혔는데, 가유국(迦維國)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신이 되겠는가. 나는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하는 주[聖母命詵師註]에 이르기를,
“지금의 것 지이천왕(智異天王)은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 위숙왕후(威肅王后)를 이르는 것이다. 고려 사람이 선도(仙桃) 성모(聖母)의 이야기를 익히 들었기로 그 임금의 계 통을 신성화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하였다.
이승휴가 믿고서 운기(韻紀)에 적어 놓았으나 이도 또한 증빙할 수 없거늘 하물며 승려들의 허무맹랑한 말에 있어서랴. 또 기왕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하면서 국사(國師)로서 더러운 욕을 먹이고 있으니, 그 불경(不敬)이 이보다 심할 수가 있겠는가. 이 일은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풍(陰風)이 몹시 거세어 동서로 마구 불어 마치 지붕을 걷어가고 산악을 우러르는 듯하며 운무가 몰려들어 의관이 다 젖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서 자리를 깔고 누웠는데, 찬 기운이 뼈에 사무쳐서 다시 두꺼운 솜옷으로 갈아입고 종자들은 모두 온몸을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기로 큰 나무 서너 그루를 불 피우게 하여 덥게 만들었다. 밤이 깊은데 달빛이 어렴풋이 비치기로 반가워서 일어나 보니, 문득 구름에 가려진다. 흙벽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니 천지가 아득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 하나의 조그마한 배를 탄 채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하여 장차 파도에 빠지는 것 같으므로 웃고 세 사람에게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지미(知微)의 도술이 없을지라도 다행히 그대들과 더불어 함 께 기모(氣母)를 타고 혼돈(混沌)의 원시(元始)에 떠 노니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냐.”
하였다.
경진일에 풍우 오히려 노호(怒號)하므로 먼저 종자(從者)를 향적사(香積寺)에 보내어 음식을 마련해 놓고 오솔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여 가게 하였다. 오정이 지나서 비가 조금 그쳤는데, 돌길이 몹시 미끄러워 사람으로 하여금 붙잡게 하고 밀치고 궁굴며 두어 마장쯤 내려가니, 철쇠로(鐵鎖路)가 있어 심히 위태로웠다. 그래서 그냥 돌구멍을 뚫고 나가 힘을 다하여 걸어서 향적사에 당도하니 중이 없는 지가 이미 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 틈의 물은 오히려 쪼개진 나무를 타고 좔좔 흘러내리어 나무통에 떨어지고 문창에는 잠겨진 자물쇠와 향반(香槃)에는 불유(佛油)가 모두 완연히 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쓸고 향을 피우고 들어가 앉았었다. 어둘 녘에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어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에 다 흩어지고, 먼 하늘에서 지는 햇빛이 비치기도 하였다. 나는 손을 들어 몹시 기뻐하며 문 앞에 있는 반석에 나가 바라보니 살천(薩川)이 구물거리고 여러 산과 바다 섬이 혹은 전부 드러나고, 혹은 반만 드러나고, 혹은 이마만 드러나서 마치 사람이 장막 속에 있고 그 상투[髻]만 보이는 것 같다.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봉우리 몇 겹으로 쌓여 지난날 길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聖母祠) 근방에서 흰 기가 남쪽을 가리키며 나부끼니 대개 그림 그리던 중이 나에게 그곳을 알게 하자는 것이다. 남ㆍ북의 두 바위를 실컷 보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리는데, 이때에 동쪽이 다 밝지는 못했으니 다시 한기가 나서 지탱할 수 없어서 관솔불[榾柮]을 피워 방안을 말리게 하고서야 잠자리에 나아갔다. 밤중이 되자 별과 달이 환히 밝았다.
신사일 새벽 해가 동쪽에서 올라오니 놀빛이 눈을 부시게 하였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해서 반드시 두 번째 오르지는 못할 것으로 여기는데, 나는 생각하기를 여러 날 동안 음우(陰雨)가 있다가 갑자기 개는 것을 보면 하늘이 나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인데, 지금 지척에 두고 능히 힘써 구경을 못한다면 평생의 막혔든 가슴을 끝내 탕척(蕩滌)할 날이 없을 것이다. 드디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고 지름길로 석문(石門)을 경유하여 올라가는데, 발에 밟히는 풀과 나무가 다 얼음이 맺혔었다.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 다시 잔을 올려 감사를 드리기를, “오늘 천지가 맑게 개여 산천이 통활한 것은 실로 신의 도움으로 힘입은 것이니, 진실로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에 극기(克己)하고 해공(解空)과 더불어 북루(北壘)에 오르니, 태허(太虛)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랐다. 비록 날아가는 홍곡(鴻鵠)이라도 내 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때마침 비가 막 개어 사방에 구름 한 점 없고 다만 창창하고 망망하여 그치는 데를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말하기를, “무릇 멀리 바라보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보는 바와 무엇이 다르랴. 먼저 북 쪽을 바라보고 다음은 동쪽으로, 다음은 남쪽으로, 다음은 서쪽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로 미뤄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니, 해공이 자못 능히 지시한다.
이 산이 북으로부터 달려 남원에 와서 처음으로 솟아나 반야봉(般若峯)이 되고 동으로 몇 백리를 뻗어서 이 봉우리에 와서는 다시 높이 솟아나 북으로 서려서 그쳤다. 그 4면에 곁 봉우리가 시새워 빼어나고 뭇 골짝이 다투어 흘러, 제 아무리 수를 잘 놓는[巧曆] 자라도 능히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이 끌어서 올려놓은 듯한 것은 함양(咸陽)의 성인가, 청황(靑黃)의 빛이 엉겨 붙어서 흰 무지개가 가로 꿴 것은 진주(晉州)의 물인가, 청라(靑螺 물고동)가 점을 찍은 듯이 벌리어 가로 비끼고 곧장 솟은 것은 남해(南海) 거제(巨濟)의 뭇 섬인가. 산음(山陰)·단계(丹豀)·운봉(雲峯)·구례(求禮)·하동(河東) 등 고을은 모두 겹겹 싸인 속에 숨었으니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한다.
산이 북쪽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황석산(黃石山) 안음(安陰)·축암산(鷲巖山) 함양(咸陽) 이요, 먼 것으로는 덕유산(德裕山) 함음(咸陰)·계룡산(鷄龍山) 공주(公州)·주우산(走牛山 ) 금산(錦山)·수도산(修道山) 지례(知禮)·가야산(伽倻山) 성주(星州) 이요, 동·북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황산(皇山) 산음(山陰) 감악산(紺嶽山) 삼가(三嘉)이요, 먼 것으로는 팔공산(八公山) 대구(大邱)·청량산(淸涼山) 안동(安東) 이요, 동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도굴산(闍堀山) 의령(宜寧)·집현산(集賢山) 진주(晉州) 이요, 먼 것으로는 비슬산(毗瑟山) 현풍(玄風)·운문산(雲門山) 청도(淸道)·원적산(圓寂山) 양산(梁山) 이요, 동·남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와룡산(臥龍山) 사천(泗川) 이요, 남쪽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병요산(甁要山) 하동(河東)·백운산(白雲山) 광양(光陽) 이요, 서·남에 있어 먼 것으로는 팔전산(八顚山) 흥양(興陽) 이요, 서쪽에 있어 가까운 것으로는 황산(荒山) 운봉(雲峯) 이요, 먼 것으로는 무등산(無等山) 광주(光州)·변산(邊山) 부안(扶安)·금성산(錦城山) 나주(羅州)·위봉산(威鳳山) 고산(高山)·무악산(毋岳山) 전주(全州)·월출산(月出山) 영암(靈岩) 이요, 서·북에 먼 것으로는 성수산(聖壽山) 장수(長水) 인데, 혹은 배루(培塿)도 같고 혹은 용호(龍虎)도 같고 혹은 정두(飣鋀)도 같고 혹은 검망(劍鋩)도 같으며 오직 동으로 팔공산과 서로 무등산이 여러 산에 비하여 자못 우뚝하다. 계립령(鷄立嶺) 이북에는 푸른 기운이 공중에 가득하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에는 바다 기운이 하늘에 대어 안계(眼界)가 이미 궁극하매 다시 뚜렷이 분별할 수 없으므로 극기(克己)로 하여금 기록할 수 있는 것만은 위와 같이 기록하게 하고 서로 돌아보며 자축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을 오른 자가 있을 터이지만 어찌 우리들의 오늘날같이 상쾌한 것이야 있었 으랴.”
하였다.
봉루(峯壘)를 내려가 석등(石磴)에 걸터앉아 두어 잔 술을 수작하니 해가 벌써 오전이었다. 영신(靈神)의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요원하므로 빠른 걸음으로 석문(石門)을 뚫고 내려가 중봉(中峯)에 오르니, 역시 토산(土山)이다. 이 고을 사람이 엄천(嚴川)으로 말미암아 오르게 되면 북의 제2봉으로 중봉을 삼고, 마천(馬川)으로부터 오르게 되면 증봉(甑峯)이 제1이 되고, 이것이 제2가 되는 고로 역시 중봉이라 부른다. 이로부터는 다 산등성을 타고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십여 개의 기특한 봉우리가 있어 모두 올라 구경할 만하며, 상봉과 더불어 서로 상등할 만한데 명칭이 없다.
극기(克己)는 말하기를,
“증빙이 없어 믿지 않을 것을 어찌하랴.”
하였다.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아서 지팡이를 만들 만하기에 종자로 하여금 미끈하고 곧은 것만 가려서 베어 오게 하니, 잠깐 사이에 한 묶음이 가득하였다. 증봉(甑峯)을 지나서 저여원(沮汝原)에 당도하니, 단풍나무가 길을 막고 있어 구부러진 형상이 장얼(棖闑)과 같으니, 경유하여 나가는 자가 모두 등을 굽히지 아니하며 벌[原]이 산등성에 있는데, 평탄하고 광활하여 5~6리 가량 되는데, 수풀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서 능히 농사지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시내 위에 두어 칸 되는 초막이 보이는데,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흙으로 만든 아궁이가 있으니, 바로 매[鷹]를 잡는 막사다.
나는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강만(岡巒)의 곳곳마다 매 잡는 기구를 설치해 둔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깊은 가을이 아니어서 아직 잡아들이는 자는 없다. 매는 구름 사이로 날아다니는 물건이라 어찌 이처럼 험준한 땅에 기개를 가지고 깊숙이 방에 들어 앉아 노리는 자가 있는 줄로 알리오. 입감을 보고 탐내다가 마침내 그물에 걸려들어 조선(條鏇)의 제압을 받게 되니 또한 이를 들어 사람을 경계할 만하다. 더구나 진상(進上)하는 것은 한두 쌍에 불과한데, 완롱물에 충당하기 위하여 떨어진 옷과 죽만 먹는 나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디어 가면서 천 길의 산봉우리에 엎드려 있게 하니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에 오르니, 높고 험하고 동떨어져서 아래는 밑바닥이 없고 위에는 초목이 없으며 다만 척촉(躑躅) 두어 떨기와 산양(山羊)의 똥이 있을 뿐이다. 두원관(荳原串) 여수관(麗水串)과 섬진(蟾津)의 끝을 바라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 더욱 기절(奇絶)도 하다. 해공(解空)이 뭇 골짜기에 모인 데를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는 신흥사(新興寺) 골짝인데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적(湖南賊) 장영기(張 永己)와 더불어 싸우던 데라.”
한다.
영기는 구서(狗鼠)의 종류인데도 천험(天險)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공(李公)의 지용으로도 능히 그 날뛰는 것을 금단하지 못하고, 마침내 장흥 군수가 잡아 없애게 되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는 청학사(靑鶴寺) 골짝이라.”
한다.
어허, 이는 옛날의 이른바 신선(神仙)의 지역이라는 것인가. 인간과 더불어 서로 과히 멀지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찾다 못 찾았는가. 일을 좋아하는 자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지어 명칭을 붙인 것이 아닌가.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저기는 쌍계사(雙溪寺) 골짝인데,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곳에 노닐면서 돌에 새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다.
최고운은 활달한 인물이다. 기개를 자부한 채 어지러운 세대를 만나니, 중국에서만 불우한 것이 아니라 또한 동방에서도 용납되지 못하여 드디어 물(物)의 밖에 은둔하였기로, 산수의 깊숙하고 고요한 땅은 다 그가 놀다갔으니 세상에 신선이라 칭하는 것이 부끄러울 바 없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다만 중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절의 북쪽 비탈에 가섭(迦葉)의 석상(石像) 하나가 있는데,
“세조대왕 때에 매양 내관을 보내어 향화(香火)를 올렸다.”
고 하며, 그 이마가 이지러졌는데, 그도 또한,
“왜놈이 깎아 버렸다.”
한다.
아, 왜놈이란 참으로 잔인한 도적이라 생명을 남김없이 도살하고, 성모(聖母)와 가섭(迦葉)의 머리까지도 또 베어 끊었으니, 비록 완고한 돌일망정 사람의 형을 새겼대서 어려움을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바른 팔에 반흔(瘢痕)이 있어 불에 탄 것 같은데 역시,
“겁화(劫火)에 타서 그렇게 된 것이니 차츰 더 타면 미륵세부(彌勒世夫)가 된다.”
한다.
석흔(石痕)이 본시 그러한데 무단히 황당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어 내세(來世)의 이익을 구하는 자로 하여금 다투어 전포(錢布)를 시주하게 하니 진실로 가능한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 두 바위가 우뚝이 서 있으니,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다. 그 하나는 아래가 반듯하고 위는 뾰족하여 머리에 모난 돌을 이고 있는데, 넓이는 겨우 한 자쯤 된다. 중들의 말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하는 자가 있으면 효과를 얻는다.”
하니, 종자(從者) 옥곤(玉昆)과 염정(廉丁)이 거리낌 없이 올라가서 절을 하므로 나는 절에서 바라보고 빨리 사람을 보내어 꾸짖어 제지하였다. 이것들이 둔하고 어리석어 거의 숙맥(菽麥)을 구별 못할 정도인데, 능히 스스로 목숨을 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중들이 백성을 속이는 수단은 이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법당에 몽산(蒙山)의 화정(畵幀)이 있고 그 위에 찬이 있는데,
“두타(頭陀) 제일이 바로 두수(抖擻)가 된다. 외형도 이미 티끌과 멀고, 내심도 이미 예를 벗 었도다. 남 먼저 도를 얻고 맨 뒤에 입멸(入滅)하였다. 설의(雪衣) 계산(鷄山)이, 천추에 썩지 않도다.” [頭陀第一 是爲抖擻 外己遠塵 內己離垢 得道居先 入滅於後 雪衣鷄山 千秋不朽] 하였고, 곁에 인장(印章)에는 청지소전(淸之小篆)이라 하였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 시·서·화(詩書畵))이다. 동쪽 섬돌 아래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아주 달아서 그 물로 차를 달여 마시면, 중냉천(中冷泉)·혜산천(惠山泉)도 이보다 낫지 못할 듯하다. 샘의 서쪽에 무너져 가는 절이 우뚝하니 이는 옛날의 영신사(靈神寺)이다. 그 서·북의 단봉(斷峯)에 작은 탑(塔)이 있어 석리(石理)가 가늘고 기름진데 역시 왜놈이 넘어뜨리었다. 뒤에 다시 포개 올리고 철근(鐵筋)으로 그 속을 꿰었는데 두어층이 없어졌다.
임오일에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섬진강(蟾津江)을 바라보니 밀물이 넘실대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바로 안개가 깔려서 그러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절의 서·북쪽으로 나가 잿마루에 쉬면서 반야봉(般若峯)을 바라보니, 약 60리가량 될 듯한데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 빠져서 비록 가보고 싶지만 강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름길로 직지(直旨)를 거쳐 내려가는데, 길이 더욱 매달리고 위태로워 나무뿌리를 더위잡고 석각(石角)을 밟아야 하며, 수십 리가 모두 이런 형태였다. 동으로 얼굴을 돌려 천왕봉(天王峯)을 바라보니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대나무 가지에 혹 열매가 있기도 한데 사람들이 모두 따냈고, 솔의 큰 것은 백 아람이 될듯한데 바위틈에 즐비하게 서 있으니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 험준한 곳을 다 내려오니 두 골짜기에 물이 합치는 곳이라서 그 소리가 굉장하여 야산을 울리고 백 척의 맑은 못에 노는 고기가 구물구물한다. 일행 네 사람이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양치질하고 비탈을 따라서 막대를 끌고 걷는데 몹시도 즐거웠다.
골짝 입구에 야묘(野廟)가 있는데, 마부(馬夫)가 말을 가지고 먼저 와서 등대하고 있으므로 드디어 옷을 바꾸어 입고 말을 타고 실택리(實宅里)에 당도하니 늙은이 여러 사람이 마중 나와 길가에서 절을 하며,
“원님께서 탈 없이 구경하고 오시니 감히 치하하옵니다.”
한다.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나더러 일을 철폐하고 실컷 노니기만 하는 것으로써 허물하지 않는 것을 기뻐했다.
해공(解空)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法宗)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太虛)와 극기(克己)와 백원(百源)은 용유담(龍遊潭)으로 구경가고, 나는 등구(登龜) 재를 넘어 지름길로 군재(郡齋)로 돌아왔다. 나가서 노닌 것이 겨우 5일밖에 되지 않은데, 완전히 가슴속에 개운하고 신관이 맑아진 감각이 든다. 비록 처자나 서리(胥吏)들도 나를 보면 역시 전날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아, 두류산(頭流山)의 숭고하고 웅장한 품은, 중국에 있어도 반드시 숭산(嵩山)·대산(岱山)에 앞서 천자가 올라 봉(封)하여, 금니(金泥) 옥첩(玉牒)의 검(檢 문서(文書))을 옥황상제에게 승중(升中)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岳)에 견주어 한창려(韓昌黎)·주회암(朱晦庵)·채서산(蔡西山) 같은 박아(博雅)와, 손흥공(孫興公)·여동빈(呂洞賓)·백옥섬(白玉蟾) 같은 수련(修煉)이 옷자락을 이어 발치를 맞대어 그 가운데 배회(徘徊)하고 휴식할 것인데, 지금은 유독 용부(庸夫)와 도예(逃隸)의 숨어서 불도(佛道)를 배우는 자들의 덤불이 되었고, 비록 우리들이 오늘에 한 번 등람하는 기회를 얻어 겨우 평소의 숙원을 풀었지만, 공무에 매인 몸이라 감히 청학동(靑鶴洞)을 찾고 오대(五臺)를 거쳐서 그윽하고 기절한 경치를 두루 구경하지 못했으니, 어찌 이 산의 불우한 것만이랴. 길이 두자미(杜子美)의, “방장(方丈)은 삼한의 밖이라.” [方丈三韓外]는 글귀를 읊으며 저도 모르게 혼이 날아간다. 임진 8월 5일 씀.
[주D-001]결하(結夏) : 불가(佛家)의 용어인데 여름에 편안히 들어앉아 쉰다는 뜻이다. 또한 결제(結制)라고도 한다.《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천하의 승니(僧尼)가 4월 15일에 선찰(禪刹)로 나아가 의발(衣鉢)을 벽에 걸고 참선하는 것을 결하(結夏)라고 한다.” 하였음.
[주D-002]우란분(盂蘭盆) : 불가(佛家)의 말인데 또한 오람파라(烏藍婆拏)라고도 함. 의역(義譯)에 이르기를, “거꾸로 매단다는 뜻으로 심한 고통을 비유한 것이다.”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이는 불제자(佛弟子)가 매년 7월 15일에 항상 효도와 자애로써 소생 부모를 생각하여 우란분을 만들어 부처와 및 스님에 시주하여 부모가 자기를 길러준 은혜를 보답한다.” 하였다. 생각건대 7월 15일은 여러 중이 결하(結夏)의 기간을 마지막 채우는 날이다. 구십 일 동안 참여하여 도를 얻은 자가 많은 고로 이날에 공양을 받들면 그 공로가 백배나 더하다. 그래서 부처가 사람을 가리켜 이달에는 우란분을 만들어 부처와 중에게 시주하여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게 한 것이다.
[주D-003]빈도(貧道) : 불가의 말이다. 《석림연어(石林燕語)》에 “진(晉)ㆍ송(宋) 시대에 불교가 처음으로 행세하게 되어 중에 대한 칭호가 없었다. 그래서 도인(道人)이라 하고 자기는 빈도(貧道)라 칭하였다.” 하였음.
[주D-004]장얼(棖闑) : 《예기》 옥조(玉藻)에 “대부(大夫)는 장(棖)과 얼(闑)의 중간에 선다[大夫中棖與闑之間].” 라 하였고, 그 주에 “장(棖)은 문턱이요, 얼(闑)은 문설주다.” 하였음.
[주D-005]조선(條鏇) : 매[鷹]를 장식하는 끈과 방울을 칭함.
[주D-006]두타(頭陀) : 범어(梵語)인데 또는 두다(杜多)라고도 함. 역(譯)에, 두수(抖擻) 수치(修治) 세완(洗浣) 등의 뜻이라 하였음. 세속에서 중이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 고행(苦行)을 닦는 것을 두타(頭陀)라 칭함.
[주D-007]두수(抖擻) : 불가의 용어인데 번뇌를 떨어버린다는 뜻임. 맹교(孟郊)의 시에, “두수진애의(抖擻塵埃衣).” 라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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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두류록(續頭流錄)
김일손(金馹孫) 1489년
선비가 나서 박[匏]이나 외[爪]처럼 한 지방에 매어 있는 것은 운명이다. 이미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장래의 가질 것을 저축하지 못할진대, 제 나라의 산천쯤은 마땅히 두루 탐방(探訪)해야 할 것이나, 오직 사람의 일이란 어김이 많아서 노상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 나는 처음에 진주(晉州)의 학관(學官)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그 뜻인즉 편양(便養)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구루(句漏)의 원이 된 갈치천(葛稚川)의 마음은 또 단사(丹砂)에 있지 않을 수 없다.
두류산(頭流山)은 진주의 경내에 있다. 진주에 도착하여서는 날로 양극(兩屐)을 준비하였으니, 두류산의 연하와 원학(猿鶴)은 모두 나의 단사(丹砂)인 때문이다. 두 해 동안 고비(皐比)에 앉았으나 한갓 배만 불린다는 기롱을 받을 뿐이므로,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물러가서 자유롭게 노니는 몸이 되었지만 족적(足跡)이 일찍이 한 번도 두류산에 이르지 못했으니 어찌 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랴. 그러나 두류산만은 감히 가슴속에 잊은 적이 없었다. 매양 조태허(曹太虛) 선생과 더불어 한번 함께 구경하기로 약속했으나 태허는 벼슬살이에 얽매이고 나는 내왕이 막혔다. 몇 날이 안 가서 태허는 내간상(內艱喪)을 만나 천령(天嶺)으로 떠났다. 천령에 사는 진사(進士) 정백욱(鄭伯勗 여창(汝昌))은 나의 신교(神交 ; 정신적으로 사귐.)였는데, 금년 봄에 도주(道州)에서 녹명(鹿鳴)을 노래하게 되어 마침내 문전을 지나면서 두류산을 구경할 것을 약속했다. 얼마 안 되어 김상국(金相國) 은경(殷卿)이 영남(嶺南)을 안찰하러 나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만날 것을 기약했으나 나가지 못하고 4월 11일 기해에 그 행차를 탐문하여 천령에 가서 뵙게 되었다. 그래서 천령 사람에게 물으니, 백욱이 서울에서 이조부(二鳥賦)를 짓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5일이 되었다고 하므로, 드디어 서로 만나보고 숙원이 어긋나지 않음을 기뻐했다. 김상국이 장차 나를 만집하며 자기를 따라 가자고 하므로, 나는 산행의 약속이 있다고 사양하니 상국은 간청하다 못해 노자를 꾸려 주면서, “공무에 바쁘고 체력조차 약해서 따라가 구경을 못한다.” 하며, 못내 섭섭히 여겼고, 새로 도임한 천령 군수 이잠(李箴) 선생은 바로 내가 성균관(成均館)에서 경서를 문의하던 분이라, 나에게 후한 노자를 주었다. 천령 사람 임정숙(林貞淑)이 또한 따라 가겠다고 하여 세 사람의 행장을 마련하였다.
14일 임인에 드디어 천령 남문으로부터 출발하여 서쪽으로 20리가량을 가서 한 시냇물을 건너 한 주막집에 당도하니 땅 이름은 제한(蹄閑)이다. 제한으로부터 서쪽으로 행하여 멧부리와 언덕에 오르내려 10리쯤 가니 양쪽 산이 대치해 있고, 한 줄기 샘이 가운데서 쏟아져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갔다. 두어 마장을 가서 한 마루에 오르니 종자(從者)의 말이,
“마땅히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한다.”
하므로 나는 절해야 할 이유를 물은즉 대답이,
“천왕(天王)이라.”
하는데, 천왕이 무슨 물건인지 살피지 아니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지나쳐 갔다. 이날에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안개가 산에 가득하여 종자들이 모두 우장 삿갓을 차렸는데, 진흙이 미끄럽고 길이 소삽하여 서로 짝을 잃고 뒤에 처졌다.
신마(信馬)로 등귀사(登龜寺)에 당도하니 산의 형상이 소복하여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 있다하여 이름이 된 것이다. 옛 축대가 동떨어지게 높고, 축대 틈에 깊숙한 구멍이 있어 시냇물이 북으로부터 내려와 그 속으로 쏟는데 소리가 골골한다. 그리고 그 위에 동찰(東刹)·서찰(西刹)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모두 동찰에 들고 종자를 골라서 돌려보냈다. 비가 밤을 새고 아침까지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절에 머물러 각기 낮잠을 자고 있는데,
중이 갑자기 말하기를,
“비가 개어 두류산이 보인다.”
하기로 우리 세 사람은 몰래 일어나 잠든 눈을 부비고 보니 새파란 세 봉이 점잖게 창문에 당하여 흰 구름이 비끼고 푸른 머리구비가 비칠 따름이다.
이윽고 또 비가 내리므로 나는 농담조로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관심을 두는 모양인가. 산악의 형상을 숨기는 것을 시새워하는 바가 있는 듯 하다.”
하니
백욱은 말하기를,
“산신령이 오래도록 시객(詩客)을 가둬놓을 작정인지 뉘 알겠는가.”
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개어 하얀 달이 빛을 발하니 창안(蒼顔 산을 말한 것)이 전부 드러나서 뭍 골짜기에는 선인(仙人)·우객(羽客)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백욱은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나 밤기운이 이 지경에 이르면 도시 찌꺼기라곤 없기 마련이라.”
하였다.
나의 조그마한 몸이 자못 피리를 고를 줄 알기로 그를 시켜 불게 하니 또한 족히 공산의 소리를 전할 만하여 세 사람은 서로 대하고 밤이 으슥해서야 바야흐로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백욱과 더불어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등구암을 떠나 1마장쯤 내려가니 볼만한 폭포가 있다. 십 리쯤 가서 한 외로운 마을이 보이고, 그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험한 고개를 넘어 산 중허리를 타고 바른편으로 굴러서 북으로 향하니 바위 밑에 샘이 있기에 두 손을 모아 물을 떠서 마시고, 따라서 세수도 하고 나와 한걸음으로 금대암(金臺庵)에 당도하니 중 한 사람이 나와 물을 긷는다. 나는 백욱과 더불어 무심코 뜰 앞에 들어서니 몇 그루 모란꽃이 피었다. 그러나 하마 반쯤 시들었는데, 꽃빛은 심히 붉다. 그리고 백결(百結)의 납의(衲衣)를 입은 중 20여명이 바야흐로 가사(袈裟)를 메고 경을 외우며 주선하는 것이 매우 빠르므로 내가 물으니 정진도량(精進道場)이라고 한다.
백욱이 듣고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하여 섞임이 없고, 전진이 있고 후회는 없으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나아가서 부 처의 공덕을 짓자는 것이다.”
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일이 있으면, 그 무리 중의 민첩한 자가 기다란 목판으로 쳐서 깨우쳐 졸지 못하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중노릇하기도 역시 고되겠다. 학자의 성인을 바라보는 공부도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 가 없겠는가.”
하였다.
암자 내에 육환(六環)의 석장(錫杖)이 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날이 정오가 되자 옛길을 경유하여 돌아와 석간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창일하여 호수와 같으므로 멀리서 상무주(上無住) 군자사(君子寺)를 가리키며 가보고 싶었으나 걸어갈 수가 없었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심히 경사져서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없기로 지팡이를 앞에 세우고 미끌려서 내려가니 안마(鞍馬)가 이미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 타고 가는 사람과 걷는 사람이 겨우 한걸음 사이쯤 떨어졌는데, 내가 탄 말은 유독 다리 하나를 절어서 방아를 찌는 것 같으므로
백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는 나귀의 풍경이란 시인은 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였다.
시내를 따라 북쪽 기슭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니, 못의 남북이 유심(幽深)하고 기절하여 진속(塵俗)이 천리나 가로막힌 것 같다. 정숙(貞叔)은 먼저 못가 반석 위에 와서 식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으므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출발하였다. 때마침 비가 개어 물이 양편 기슭에 넘실거리니 못의 기묘한 형상은 얻어 불 수 없었다.
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이 군수로 계실 적에 비를 빌고 재숙(齋宿)하던 곳이라.”
한다.
못가의 돌이 새로 갈아놓은 밭골과 같이 완연히 뻗어간 흔적이 있고, 또 돌이 항아리도 같고, 가마솥도 같은 것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백성들은 이것을 쉽게 사용하는 기명(器皿)이라고만 하며 자못 산골물의 물살이 급해서 물과 돌이 굴러가면서 서로 부딪기를 오래하여 이 모양을 이룬 줄을 알지 못하니, 세민(細民)이 사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허황한 말만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다. 못을 경유하여 동으로 나가니, 길이 몹시 험악하여 아래로 천척(千尺)의 절벽에 다다라 몸이 으슥하며 떨어질 것 같으므로, 인마(人馬)가 숨을 죽이고, 거의 30리를 지나와서 기슭을 앞에 두고 두류산 동록(東麓)을 바라보니 창등(蒼藤) 고목 사이에 선열(先涅)·고열(古涅) 등의 절이 있는데, 그밖에도 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약수(弱水) 하나가 가로막아서 아무리 한걸음을 뛰어서 오르고자 해도 될 수 없었다. 길이 차츰 나직해지자 산도 차츰 평탄하고 물도 차츰 편안히 흐르며, 산이 북쪽에서 우뚝 솟아 세 봉이 피었는데, 그 아래 수십 호의 민가가 있어 마을 이름은 탄촌(炭村)인데, 앞으로 큰 내를 임해 있다.
백욱은,
“여기가 살만한 곳이다.”
하므로,
“나는 문필봉(文筆峯)이 앞에 있어 더욱 좋다.”
하였다.
앞으로 5~6리를 가니 대숲 속에 옛 절이 있는데, 이름은 암천사(巖川寺)이며 토지가 평평하고 광활하여 집짓고 살만하며 절을 경유하여 동으로 1마장을 가니 천 길의 적벽(赤壁)이 있는데, 사람들이 비스듬한 길을 벽 사이로 파 놓고 다닌다. 여기서 1마장쯤 가서 한 작은 고개를 넘어 북으로 가면 정숙의 전장 아래로 나오게 된다. 정숙이 자꾸만 가자고 청하는데 해가 이미 저물었고, 또 비가 더 오면 물이 더욱 창일할까 염려하여 사양해 말하기를,
“왕자유(王子猶)가 대안도(戴安道) 집의 문 앞까지 가서도 만나보지 않고 돌아섰는데, 하물며 지금 정숙과 더불어 여러 날을 함께 노닐고 있으니, 다시금 집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였다.
정숙은
“발병이 나서 끝까지 모시고 다닐 수 없다.”
하므로 작별을 나누었다.
저물녘에 사근역(沙斤驛)에 당도하니 양쪽 다리가 몹시 아려서 다시 한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이튿날에 천령에서 수행을 온 사람과 말을 다 돌려보냈다. 1마장쯤 가니 대천(大川)을 아울러 이남은 모두 엄천(嚴川)의 하류요, 서쪽으로 바라보니 푸른 산이 감싸여 쫑긋쫑긋한데, 모두 두류산의 곁 봉우리가 정오에 산음현(山陰縣)을 당도하여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써 붙인 정기(亭記)를 일람하고 북으로 맑은 강물을 내려다보니, 유유히 흘러가는 감회가 있어 잠깐 비스듬히 누웠다 깼다. 아, 어진 마을을 선택해서 사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요, 궂은 나무를 피해 깃드는 것은 밝은 행동이다. 고을 이름은 산음현이요, 정자 이름은 환아정이니, 이는 회계(會稽)의 산수를 사모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들이 어찌하여 여기서 길이 동진(東晉)의 풍류(風流)를 계승할 수 있게 되랴. 산음현을 경유하여 남으로 단성(丹城)에 당도하니 지나는 곳마다 계산(溪山)이 청수하고 명려(明麗)하여 모두 두류산의 옛 줄거리이다.
신안역(新安驛) 십 리 지점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당도하여 사관을 정하고 나는 단구성(丹丘城)이라 부르며 선경으로 여겼다. 단성 원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히 보내왔다. 화단(花壇) 위에 오죽(烏竹) 백여 개가 있으므로, 지팡이 감이 될 만한 것으로 골라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어 가졌다. 단성으로부터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험준한 고을 지나니, 널찍한 벌이 나오고 맑은 물줄기가 그 벌의 서쪽으로 쏟아진다. 비탈을 타고 북으로 3~4마장을 가니 한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입구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암면(巖面)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획(字劃)이 추경하고 고고(高古)하여 세상에서 최고운(崔孤雲)의 수적이라 전한다. 5리쯤 가니 대울타리 안에 새로 덮은 집들이 있고, 뽕나무는 우거졌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이는 것이 보인다. 시내 하나를 건너 한 마장쯤 나가니 감나무가 겹으로 둘러 있고, 온 산의 나무는 모두 밤나무뿐이요, 장경(藏經)의 판각(板閣)이 높다랗게 담장 안에 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쯤 돌아가면 수림(樹林) 속에 절이 있는데, 편액(扁額)에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 씌였고, 비(碑)가 문전에 섰는데, 바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소작인 대감사(大鑑師)의 명으로 완안(完顔 금국(金國))·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 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
한다.
내가 낮게 여겨 살펴보지 않고 행랑을 따라 걸어서 장옥(長屋) 아래로 행하여 50보를 나가니 누(樓)가 있는데, 제작이 매우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오히려 올라 구경할 만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 이른다. 강 문경공(姜文景公)의 조부 통정공(通亭公)이 젊어서 여기에 와 글을 읽으면서 손수 매화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름이 된 것이라, 그 자손이 대대로 봉식(封植)한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시내 하나를 건너니 묵은 덤불 속에 비가 있는데, 바로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憲貞)의 소작인, 중 신행(神行)의 명으로 당(唐) 나라 원화(元和) 8년에 세운 것이다. 돌의 질이 추악하고, 그 높이도 대감사(大鑑師)에 비해 두어 자나 부족하며, 문자도 읽을 수가 없다. 북쪽 담장 안에 정사(精舍)가 있으니 주지승의 침실이다. 많은 산다수(山茶樹)가 정사를 둘러 있다. 정사의 동편에 허술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한다. 당의 아래 새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극히 높아서 그 밑에다 오장기(五丈旗)를 세울 수 있다. 사승(寺僧)이 이것으로써 편안히 천불(千佛)의 상을 직성(織成)하려는 것이다. 사옥(寺屋)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것이 수백 칸이요, 동쪽 행랑에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오백 구의 석불 하나하나가 각각 그 형상이 달라서 기이한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주지가 거처하는 침실로 돌아와 전의 고사(故事)를 뒤져보니, 세 폭을 연결한 백저지(白楮紙)가 있는데, 정하게 다듬어져 지금의 자문지(諮文紙)와 같다. 그 한 폭에는 국왕(國王) 왕해(王楷)란 서명(署名)이 있으니 곧 인종(仁宗)의 휘(諱)요, 또 한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다. 이는 정조(正朝)에 대감사에게 보낸 문안장(問安狀)이다. 또 한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써 있는데, 한 군데 황통대덕(皇統大德)이라 하였다. 대덕은 몽고(蒙古)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상고하면 맞지 않으니 알 수 없고, 황통(皇統)은 금국(金國) 태종(太宗)의 연호다. 인종·의종 부자가 이미 오랑캐의 정삭을 썼고 또 선불(禪佛)에게 정성을 바친 것이 이와 같은데,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의 액을 면하지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한다 해도 사람의 국가에 유익됨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또 좀 먹다 남은 푸른 김에 쓴 글씨가 있는데, 글 자체가 왕우군(王右軍)과 유사하여 형세가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다. 도저히 날개에 붙을 수가 없으니 기묘하기도 하다. 또 노란 비단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가 있는데, 그 자획(字畫)은 푸른 비단에 쓴 글씨만 못하고 모두 단간(斷簡)이어서 그 글도 역시 알 수가 없다. 또 육부(六部)가 합서(合書) 한 통이 있어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데, 역시 그 절반이 없어졌다. 그러나 또한 옛것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보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서 산에 오르기를 꺼리므로 드디어 하루를 묵는데, 중 해상인(該上人)이란 자가 있어 이야기를 할 만하였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晉州牧使) 경공태소(慶公太素)가 광대 두 사람을 보내어 각기 자기의 기술로써 산행(山行)을 즐겁게 하고, 또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어 필연(筆硯)을 받들게 하였다.
이튿날 여명(黎明)에 가랑비가 살살 내리어 사립(簑笠)을 갖추고 출발하는데, 광대는 피리 젓대를 불며 앞장서고 중 해상인은 길잡이가 되었다. 동구를 벗어나 돌아보니 물을 안아주고, 산은 감싸주고, 집은 깊숙하고, 지세는 막히어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애석하게도 중들의 장소가 되고, 고사(高士)에게 주어지지 아니하였다. 서쪽으로 십 리를 가서 한 큰 내를 건너는데, 바로 살천(薩川)의 하류가 살천을 경유하여 남으로 가다가 비스듬히 돌아 서쪽으로 약 20리를 가는데, 모두 두류산의 나머지 줄거리이다. 들은 넓고 산은 나직하며 맑은 내와 하얀 돌이 모두 심신을 즐겁게 한다. 구부려져 동쪽으로 향하여 계곡 사이로 향하니 물은 맑고 돌은 날카로우며 또 구부러져 북으로 향하여 시내 하나를 아홉 번이나 건넜다. 또 동으로 구부러져서 한 판교(板橋)를 건너니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서 아무리 쳐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길은 점점 높아간다. 6~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 섰는데, 크기는 백 아람이나 되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다. 문을 들어서니 옛 갈석(碣石)이 있는데 그 액(額)에, “오대산 수륙정사 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 써 있기에 그것을 읽어보니 자못 좋은 글임을 알겠다. 읽어보니 바로 고려 권 학사(權學士) 적(適)이 조송(趙宋) 소흥(紹興) 연간에 지은 것이다. 절에 누관(樓觀)이 있어 매우 장엄하고 간가(間架)도 퍽이나 많고 번당(幡幢)도 나열(羅列)해 있다. 고불(古佛)이 있는데,
중의 말이
“고려 인종(仁宗)이 만들어 보낸 것이요, 인종이 가졌던 철여의(鐵如意)도 보관해 있다.”
한다. 해도 저물고 비도 부슬부슬하여 드디어 유숙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사승(寺僧)이 망혜(芒鞋)를 선물로 주었다. 동구를 나와 북으로 가니 바른편에는 산이 있고, 왼편에는 벌이 있어 농사를 지어 먹고 살만하다. 또 십 리를 가니 거주민이 나무를 휘여 농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고, 쇠를 달구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말하기를,
“꽃이 피면 봄인 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을 안다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니,
따라온 중의 말이,
“이러한 외진 땅에 살면 이정(里正 지금의 구장과 같은 것)의 박해가 없으니, 백성이 과중한 부역(賦役)에 고통을 받은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한다.
5리를 나가서 묵계사(黙契寺)에 당도하니 이 절이 두류산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하는데, 친히 와 보니 자못 전에 듣던 말과는 차이가 있다. 다만 절집들이 밝고 아름다워 금으로 써 꾸민 것도 있고 청홍색 비단을 섞어서 부처의 가사도 만들었으며, 거주하는 중 20여 명은 입을 다물고 정진하기를 금대암(金臺菴) 중들처럼 할 따름이다. 잠깐 쉬었다가 말 대신 지팡이를 들고 고죽(苦竹)의 도숲을 헤쳐 나가는데, 희미하여 길을 잃고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당도하니 중은 3~4명밖에 없고, 절 앞에 밤나무는 모두 부근(斧斤)의 해를 입어 넘어져 있었다. 궁금하여 중더러,
“어째서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니
중의 말이,
“밭을 만들고자 하는 백성이 있어서 아무리 금해도 하는 수가 없다.”
하였다.
나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태산(泰山) 장곡(長谷)에도 역시 농토를 개간하니 우리 국가에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마땅히 부유하면 가르쳐 나갈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잠깐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피리 젓대를 불어 답답증을 풀게 하니 떨어진 납의(衲衣)를 입은 중 한 사람이 뜰에서 춤을 추는데, 우쭐우쭐하는 그 기상이 가관이었다. 드디어 함께 앞 고개에 오르니, 나무가 길에 비끼어 있으므로 그 위에 앉아서 앞뒤로 큰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저물어가는 햇볕은 창창한데, 피리 소리가 젓대 소리에 어울려 유량하고 청아하여 산이 울리고, 골짜기가 응하니 정신이 상쾌함을 깨닫겠다. 흥이 다하여 이에 내려가 시냇가 반석에 앉아서 발을 씻었다.
이날도 오히려 음침하여 드디어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유숙하는데, 밤중에 꿈이 깨서 일어나니 별과 달은 맑고도 조촐하고 두견새가 어지러이 울어대는데 정신이 맑아 잠이 오지 아니한다. 나의 서형 김형종(金亨從)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명일에는 천왕봉을 올라 실컷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니 일찌감치 행장을 단속하자.”
하였다.
밝은 아침에 행전에 끈을 달아 다리를 단단히 싸매고 숲 속으로 향하는데, 길이 몹시 경삽할 뿐더러 말라 죽은 푸나무들이 쌓여 다리가 빠지고 그 아래는 모두 고죽(苦竹)이 있어 죽순이 땅을 뚫고 나오는데 마구 밟고 지나며, 큰 뱀이 길에 있고, 저절로 넘어진 나무가 서로 앞에 뒤섞였는데, 모두 경남(梗楠) 예장(豫章)의 재목이다. 혹은 몸을 구부리고 아래로 나가며 혹은 기어서 그 뒤를 향하기도 하며, 따라서 그 장석(匠石)을 만나지 못하여 동량(棟樑)으로 쓰이지 못하고, 공산에서 말라 죽은 것을 생각할 때 조물을 위하여 가석한 일이다. 그러나 역시 제 나이대로 다 마친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건장한 걸음으로 먼저 가서 한 시냇가 돌에서 기다리는데,
백욱은 힘이 빠져서 허리에 줄 하나를 매고 중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앞서서 당기며 가게 하였다.
나는 백욱을 영접하여 말하기를,
“중이 어디서 죄인을 구속해 오는가.”
하니
백욱은 웃으며,
“산신령이 포객(逋客)을 나포한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대개 백욱이 진작 이 산에 노닌 때문으로 농담으로 대답한 것이다. 여기 와서는 몹시 갈증이 심하여 종자(從者)들은 모두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쌀가루를 타서 마셨다. 다시 다른 길이 없고 다만 천 길의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모여 시내 하나를 이루어 산위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은하수가 거꾸로 쏟는 듯하며, 간수(澗水) 가운데 큰 돌이 첩첩이 포개져 다리가 되고, 이끼 흔적이 미끄럽고 윤택하여 밟으면 넘어지기 쉽다. 오고가는 초동(樵童)들이 작은 돌멩이를 그 위에 쌓아올려서 길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나무 그늘이 하늘을 가리어 햇볕이 들지 아니한다. 이와 같이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섯 걸음 만에 한 번 쉬기도 하고, 열 걸음 만에 한 번 쉬기도 하여, 있는 힘을 다 썼다. 시내가 그치자 점점 북으로 향해서 다시 대 숲 속을 헤쳐 가니 산이 모두 돌이다. 칡덩굴을 더위잡고 굴면서 올라가 숨 가쁘게 십여 리를 걸어서 한 높은 고개를 오르니,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으므로, 그 별 경계를 기뻐하여 꽃 하나를 꺾어서 머리에 꽂고 따라오는 일행에게도 말하여 모두 꽂고 가게 하였다. 한 봉우리를 만났는데, 이름은 세존암(世尊巖)이다. 바위가 극히 우람하나 사다리가 있어 오를 수 있기로 올라서 천왕봉을 바라보니 수십 리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뻐서 일행에게 일러주고 힘을 써서 다시 한 걸음 더 나가자고 한다.
여기서 길이 점점 나직하여 5리쯤 가서 법계사(法界寺)에 당도하니 중 한 사람밖에 없고, 나무 잎이 널찍널찍하여 비로소 자라나고 산꽃은 곱게 곱게 바야흐로 피어나니, 바로 저문 봄철이라, 잠깐 쉬고 곧 올라가서 돌이 있는데 배 같기도 하고 문짝도 같다. 그 돌을 경유하여 나가는데, 길이 돌고 구부러지고 오목하고 울툭불툭하며 석각(石角)을 붙들고 나무뿌리를 더위잡고 겨우 봉 꼭대기에 당도하자 곧 안개가 사방에 끼어 지척을 구별할 수 없었다. 향적승(香積僧 식사를 맡은 중)이 냄비를 가지고 와서 한군데 평평한 땅을 찾으니,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샘물을 이루었기로 감히 다시 올라가서 곧 쌀을 씻어 밥을 짓게 하였다. 온 산에 다시 다른 재목은 없고, 있는 나무는 삼회(杉檜)와 비슷한데, 중의 말이 비자목이라고 하며, 이 나무로 밥을 지으면 밥맛이 없어진다고 한다. 시험해 보니 과연 그렇다. 옛사람이 밥을 지어 먹을 나무에 애를 썼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두류산에는 감과 밤과 잣들이 많아서 가을바람이 불면 열매가 떨어져 계곡에 가득 찬다. 그 래서 중들이 주어다 요기를 한다.”
하는데, 이는 허언이다.
다른 초목도 오히려 나서 크지 못하는데, 하물며 과일에 있어서이랴. 매년 관가에서 잣을 독촉하니 거주민이 노상 되려 다른 고을에서 나는 것을 사들여서 공세(貢稅)에 충당한다고 한다. 모든 일에 있어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과 같지 않은 점이 이런 유이다.
저물 적에 봉의 절정에 오르니, 정상에 진루가 있어 겨우 한 칸의 판옥(板屋)을 용납하고 판옥 안에는 여지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다.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리고, 또,
“숭선(嵩善) 김종직(金宗直)·계온(季溫)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하산(夏山) 조위(曺偉) 태허(太虛)가 성화(成化) 임진 중추일(中秋日)에 함께 오르다.”라는 몇 글자가 씌여 있다. 그리고 예전에 구경 온 사람들의 성명을 내리 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 드디어 사우(祠宇)에서 자게 되어 두터운 솜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고 몸을 따뜻이 하는 한편 종자들은 사당 앞에서 불을 피우고 추위를 막았다. 한밤중에 천지가 청명하고 큰 들은 광막하고 흰 구름은 산골에서 자는데, 마치 한바다에서 밀물이 올라온 것 같고, 여러 군데 포구에서는 하얀 물결이 눈을 뿜으며, 노출된 산은 도서(島嶼)와 같이 점을 찍어놓은 듯하다. 진루에 기대어 내리보고 쳐다보니 심신이 으슥하며, 몸은 홍몽(鴻濛) 원시(元始)의 위에 있고, 가슴속은 천지와 더불어 함께 유동하는 것 같았다.
신해(辛亥)일 여명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돋아나는 것을 보니, 청명한 공중이 마경(磨鏡)과 같다. 서성대며 사방을 바라보니, 만 리가 끝이 없고, 대지의 뭇 산은 모두 의봉(蟻封)과 구질(蚯垤) 같아서 묘사하기로 들면, 한퇴지(韓退之)의 남산시(南山詩)를 이해할 수 있고, 마음과 눈은 바로 공부자(孔夫子)의 동산(東山)에 오른 때와 부합된다 하겠다. 온갖 회포를 일으키고, 진세(塵世)를 내려다보니 무한한 감개가 뒤따른다. 이 산의 동·남쪽은 옛날 신라의 구역이요, 서·북쪽은 백제의 땅이라. 하루살이 모기떼가 소란을 피우며, 항아리 속에서 나고 사라지고 하는 격인데, 처음부터 헤아리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여기에 뼈가 묻혔겠는가. 우리들이 오늘에 아무런 탈이 없어 여기 올라 구경하는 것은 역시 위에서 내려주신 은덕이 아니겠느냐. 망망하고 아득한 태평의 연화(煙火) 속에서도 또한 비환(悲歡)과 우락(憂樂)이 만 가지로 틀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드디어 백욱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해서 그대와 함께 악전(偓佺 고대의 신선)의 무리와 짝이 되어 나는데, 홍곡(鴻鵠)을 능가하며, 몸이 팔굉(八紘)의 밖에 노닐고, 눈으로 일원(一元)의 수를 궁리하여 기(氣)가 다하 는 때를 볼 수 있겠는가.”
하니,
백욱은 웃으며,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인하여 종놈들을 시켜 두 그릇에 제물을 갖추게 하여, 사당에 보고를 드리기로 하고 제문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날 선왕(先王)이 상하의 구분을 제정하여 오악(五岳)ㆍ사독(四瀆)에 있어서는 오직 천자(天子)만이 제사할 수 있고, 제후(諸侯)들은 다만 자기 봉지(封地) 안에 있는 산천만을 제사하며, 공경대부들은 각각 처지에 해당한 제사가 있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명산대천으로부터 사묘(祠廟)까지도 무릇 문인(文人) 행객(行客)으로 그 아래를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전제(奠祭)를 드리며 고유(告由)하는 일도 있다. 생각하건대 두류산은 멀리 해국(海國)에 있어 수백여 리를 뻗치어 호남ㆍ영남 두 경계의 진산(鎭山)이 되고, 그 아래 수십 고을을 옹위해 있으니, 반드시 크고 높은 신령이 있어 운우(雲雨)를 일으키고, 정기가 저축되어 영원토록 백성에게 복리를 끼쳐 주어 마지않을 것이다. 나는 진사(進士) 정여창(鄭汝昌)과 더불어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미워하여, 평생에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아니하고, 지나다가 음사(淫祀)를 발견하면 반드시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금년 여름에 마음먹고 산 구경을 나가서 이 산 기슭에 당도하자, 안개와 비가 아득히 내리므로 혹시 이 산의 특이한 경치를 두루 구경하지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어제 비구름이 해소되고 해와 달이 광명하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묵묵히 빌면 형산(衡山)의 신령이 반드시 한유(韓愈)씨에게만 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거주민에게 물으니, 신(神)을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삼는데 이는 거짓말이고, 점필(佔畢) 김공은 우리 나라의 박문다식(博聞多識)한 큰 선비인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고증하여, 신(神)을 고려 태조의 비(妃) 위숙왕후(威肅王后)로 삼았으니 이것이 신필(信筆)이다. 이는 열조(烈祖 태조(太祖))가 삼한을 통일하여, 동인(東人)으로 하여금 분쟁의 고통을 면하게 하였으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길이 백성에게 제향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부친을 여의고, 노모(老母)가 당(堂)에 계신데 서산(西山)의 햇빛이 차츰 다가오니, 애일(愛日)의 정성이 일찍이 한발자국을 옮기는 순간에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주문(周文)이 구령(九齡)이 되매 곽종이 나이를 빈 경험이 있으니, 감히 산행(山行)을 위하여 고하고 감히 노모를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 백반 한 그릇과 명수(明水) 한 잔일망정 조촐하고도 정성이 들었음을 귀히 여긴 것이다. 상향(尙饗).”
이라 하였다.
문이 이뤄지자 술잔을 드리려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방금 마야부인이라 하고 있는데, 그대가 위숙왕후라고 밝혔지만 세상의 의심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이니,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위숙왕후냐, 마야부인이냐를 차치하고라도, 산신령에게 잔을 드릴 수 있지 않느냐.”
하니,
백욱은,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태산(泰山)이 임방(林放)보다 못하단 말이냐.”
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국가가 향화(香火)를 행례할 적에 산신령에게 하지 않고, 매양 성모(聖母)에게나 또는 가섭(迦葉)에게 하는데 그대로서 어찌하랴 한다. 나는 그렇다면 두류산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이다. 산신령은 버리고 음사(淫祀)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이야말로 질종(秩宗 예를 맡은 벼슬)의 과실이다 하고 드디어 중지하였다.
평소에는 다만, 구름이 하늘에 붙은 줄로만 알았고, 그것이 반공에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여기 와서 보니 눈 밑에 펀펀히 깔렸을 따름이다. 펀펀히 깔린 그 아래는 반드시 대낮이 그늘졌을 것이다.
오후가 되니 안개기운이 사방으로 합하기로, 드디어 내려와 석문(石門)을 경유하여 향적사(香積寺)에 도착하니 절의 중이 서로 치하하며 하는 말이,
“늙은 것이 이 절에 머무른 적이 오래이다. 금년 들어 하고 많은 승속(僧俗)이 상봉을 구경하 려 하였으나, 갑자기 풍우(風雨)·운음(雲陰)이 산을 가리우게 되어, 한 사람도 두류산의 전경 을 얻어 본 자가 없었는데, 어제 저녁 나절에 음우(陰雨)의 증세가 있더니, 선비님네가 올라 가자 바로 깨끗이 갰으니,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하므로, 나 역시 수긍하였다.
절 앞에 높은 바위가 동떨어져 있는데 이름은 금강대(金剛臺)이다. 이 바위에 올라보면 눈앞에 기묘한 봉이 수 없이 나열했는데, 흰 구름이 항상 둘려 있다. 법계(法界 절[寺])로부터 상봉에 가고 또 향적사에까지 가는 데는, 모두 층층의 비탈을 돌고 돌았었는데, 비탈의 전면은 전부 돌이 깔리고 산도 모두 첩첩의 돌뿐이라, 낙엽이 돌구멍을 메워 초목의 뿌리가 거기에 의탁하여 살기 때문에, 가지가 짧게 꺾이니 모두 동남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구부러지고 앙상하여 가지와 잎사귀가 제대로 발육되지 못했는데 상봉은 더욱 심하다. 두견화가 비로소 한두 송이밖에 피지 아니하고 벌어지지 않은 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니, 정히 2월 초순의 기후였다. 중이 이르기를,
“산상의 꽃과 잎이 5월에 한창 성하다가 6월이 되면 시들기 시작한다.”
고 한다.
나는 백욱에게 묻기를,
“봉이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마땅히 먼저 태양을 받을 텐데, 도리어 뒤지는 것은 어쩐 까닭 인가.”
하니,
백욱은 말하기를,
“대지(大地)가 하늘과는 8만 리의 거리인데, 우리가 두어 날을 걸어서 상봉에 당도하였으니, 봉의 높이는 땅과 거리가 백 리도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과의 거리는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으니 태양을 먼저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특히 외롭고 놀라서 먼저 바람을 받는 것이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대범 물(物)의 생리가 높은 데를 꺼리는 것인가. 그러나 높은 데는 충우가 모여드는 것을 면 하지 못하지만 나직한 데는 역시 부근(斧斤) 액을 만나는 법이니, 장차 어디를 택하면 되겠는 가.”
하였다.
향적사 곁에 큰 나무 수백 주가 쌓여 있기로 중더러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늙은 것이 호남의 여러 고을을 다니며 구걸하여 배로 섬진강까지 하나하나 실어 와서 이 절 을 새로 지으려고 한 것이 하마 6년이 되었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의 학궁(學宮)에 있어서는 그만 못하다. 석가의 교가 서역(西域)으로부터 비 롯되었는데, 어리석은 남녀들은 신봉하기를 문선왕(文宣王 공자)보다 더하니 백성의 사교(邪 敎)에 탐혹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신봉하는 진실성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하였다.
이 절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기로,
나는 중에게 말하기를,
“천지의 사이에 물이 많고 흙이 적은데, 우리 나라는 산이 맨땅보다 많고, 국가의 인구는 나 날이 불어나서 용납할 곳이 없다. 너는 자비(慈悲)를 좋다하니 중생(衆生)을 위하여 두류산 종래의 근백을 찾아서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흙을 모조리 파내어 남해 바다를 메우고, 만 리의 평야를 만들어 백성의 살 땅을 마련하며, 복전(福田)을 만든다면 도리어 정위(精衛 옛날 에 돌을 물어다 바다를 메운 새 이름)보다 낫지 않겠느냐.”
하니,
중은,
“감히 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높은 언덕도 골짝이 되고, 한 바다도 상전(桑田)이 되는 것이니, 운산(雲山) 석실(石室)에서 금단(金丹)을 수련(修煉)해서 너의 열반(涅槃)의 도를 버리고, 그의 장생(長生)의 술을 배워서 두류산이 골짝이 되고, 남해 바다가 상전이 되도록 함께 수명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 느냐.”
하니
중은,
“인연을 맺기 원이라.”
하여 드디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다.
14일 임자에 영신사(靈神寺)에서 유숙하였다. 이 절의 앞에는 창불대(唱佛臺)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座高臺)가 있어 천 길이 솟아 올라가면 먼데를 바라 볼 수 있고,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어 쪼개 놓은 흠대 안으로 쏟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중의 말이 매[鷹]가 마시는 물이라고 한다. 북쪽에는 가섭(迦葉)의 적상이 있고, 당(堂)에는 가섭의 화상이 있는데, 비해당(匪懈堂)이 그리고, 짓고, 쓰고, 한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녹았기로 이러한 기보(奇寶)가 공산 속에서 버림을 받는 것이 너무도 애석해서 빼앗아 가지려고 했는데, 백욱의 말이,
“한 사람의 집에 사장(私藏)하는 것이 어찌 명산에 공장(公藏)하여 구안자(具眼者)의 감상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므로, 드디어 빼앗지 아니하였다.
백성들이 재물을 시주하며 가섭에게 복을 비는 것이 천왕(天王)과 더불어 대등하다. 밤에 법당에서 자는데 침침한 안개와 거센 바람이 창문을 들이친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들면 몹시 해로우니 도저히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5일 계축에 산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가는데 능선 북쪽은 함양(咸陽) 땅이요, 능선 남쪽은 진주(晉州) 땅이다. 한 가닥 나무꾼의 길이 함양과 진주를 가운데로 나눠 놓은 셈이다. 방황하여 오래도록 조망하다가 다시 나무 그늘 속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토산(土山)이요, 길이 있어 찾아갈 만하다. 매를 잡는 자가 많아서 길이 이뤄져 상원사(上元寺)나 법계사(法界寺)의 길처럼 심하지는 않다. 산마루로부터 급히 내려가서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당도하니 절이 평지에 있고, 절벽에는 김언신(金彦辛)·김미(金楣)의 이름이 씌어져 있다. 거주승(居住僧) 30여 명이 역시 정진(精進)하고 있으며, 대밭과 감나무 밭이 있으며, 채소를 심어서 밥을 먹으니 비로소 인간의 세상임을 깨닫겠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청산을 바라볼 때, 벌써 연하(煙霞)를 이별하고 원학(猿鶴)에게 사과하는 회포를 달게 된다. 요주(寮主) 법해(法海)는 무던한 중이었다. 잠깐 쉬고 드디어 떠나는데 높은 데를 오르기 싫어서 이에 시냇물 따라 흰 돌을 밟고 내려가니, 동부(洞府)가 맑고 깊숙하여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혹은 지팡이 꽂아 놓고 노는 고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신흥사(新興寺)에 당도하니 절 앞에 맑은 못과 반석이 있어 오래 소일만 하고 절집은 시내에 다다라 있어 여러 절에 비해 가장 좋으니, 구경꾼이 족히 돌아갈 줄을 모를 만하다. 어둘 녘에 절 안에 들어서니 여기는 작법(作法)하는 도량으로 종고(鐘鼓) 소리가 시끄럽고, 인물이 번잡하다하여 적이 실망을 했다. 이날에 험악한 산길을 약 10리 가량 걸었는데, 중들은 모두 잘 걷는 걸음이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에 우동(郵童)·주졸(走卒)이 걸어서 닫는 말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자심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는데, 요즈음 산행(山行)을 해보니 처음에는 걸음이 무거운 것 같았는데, 날이 갈수록 두 다리가 점점 가볍게 놀려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모든 일이 습관들이기에 매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매일 쌍지팡이를 짚고 다녔었는데 26일에야 비로소 지팡이를 버리고 말을 탔다. 운중흥(雲中興)·요장로(了長老) 두 중이 서로 전송하여 동구에 나와 한 외나무다리에 당도하자
요장로가 말하기를,
“근세에 퇴은(退隱)이란 스님이 있어 신흥사에서 거주하는데, 하루는 그 문도에게 말하기를, 손님이 올 것이니 마땅히 깨끗이 소재하고 기다리라.”
하였는데,
이윽고 어떤 사람이 흰 망아지를 타고 등덩굴로 꼬리를 만들어 쥐고 빨리 행하여 외나무다리를 밟기를 평지와 같이 하니, 뭍사람이라 놀랬다. 그가 절에 당도하자 영접하여 실내로 들어가 밤새도록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들어서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떠나가는데 강(姜)씨의 집 창두(蒼頭)가 절에서 올을 배우다가 그를 보고 이인(異人)인가 의심하여 고삐를 잡고 따라 붙으니 그 사람이 채찍으로써 뿌리치고 가다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떨어뜨렸다. 창두(蒼頭)는 급히 가져가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잘못하다 속세의 노예에게 보이게 되었으니 보배롭게 간직하고, 행여 세상에 보이지는 말 라 하고 급히 행하여 다시 외나무다리를 경유해 갔다. 강창두(姜蒼頭)란 자는 지금 백두(白 頭)로 아직도 진주 지경에 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 자가 그 책을 구경하자고 청했으나 주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 사람은 최고운(崔孤雲)인데, 죽지 아니하고 청학동(靑鶴洞)에 있다.”
한다.
그 말이 비록 황당하나 역시 기록할 만하다. 나는 백욱과 더불어 시험 삼아 그 다리를 건너는데, 겨우 두어 걸음 내딛자 정신이 황홀하여 떨어질 것만 같으므로, 도로 나와 시내의 하류에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건넜다. 걸어서 골짝을 벗어나니 산에는 운당(篔簹 전 죽(箭竹))이 많고, 물은 동구 아래로 비껴 흐르는데, 점점 촌락이 보인다. 서산의 기슭에 옛 성루가 있는데 옛날의 화개현(花開縣)이라고 한다. 5리를 가니 시냇물이 어지러이 흐르고, 돌은 쫑긋쫑긋하다. 동으로 1마장쯤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고, 두 돌이 대립하여 쌍계석문(雙磎石門)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제암문(廣濟巖門)이란 글자와 맞추어 보면 더욱 커서 말만큼씩 하나, 글자체가 서로 비교되지 아니하여 아동들의 습자(習字)와 같다. 석문을 경유하여 1마장을 가니 귀룡(龜龍)의 옛 비가 있는데, 그 액(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란 아홉 자가 있고, 방서(傍書)에는, 전 서국도순관승무랑시어 사내 공봉사 자금어대신 최치원 봉교찬(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이라 했다.
바로 광계(光啓) 3년에 세운 것인데, 광계는 당(唐) 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다. 햇수는 지금으로 6백여 년 전이니 역시 고물이다. 인물의 존망(存亡)과 대운(大運)의 흥폐가 언제까지라도 서로 잇따른 법인데, 유독 완연한 이 돌만이 홀로 서서 썩지 아니하니 한번 탄식을 일으킬 만하다. 구경한 비갈(碑碣)이 많다.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의 비는 원화(元和) 연간에 세웠으니, 광계(光啓)보다 앞섰고, 오대산(五臺山) 수정사(水精寺) 기(記)를 새긴 갈(碣)은 거의가 권적(權適)의 소작이니 역시 한 세상의 문사(文士)다.
그런데 유독 이 비에 대하여 자꾸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것은, 고운의 수택(手澤)이 아직도 남아 있을 뿐더러, 고운이 산수 사이에 소요하던 그 금회가 백 대의 뒤에 계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내가 고운의 세상에 났다면, 마땅히 그 지팡이와 신발을 받들고 시종하여 고운으로 하여금 외롭게 되어 부처를 배우는 무리와 더불어 짝이 되게 하지 않을 것이요, 고운으로 하여금 오늘날을 당했을지라도 또한 반드시 중요한 자리에 있어 나라를 빛나는 문장으로써 태평의 정치를 꾸며내게 하고, 나도 또한 문하에서 필연(筆硯)을 시봉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석면(石面)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감개(憾慨)를 금하지 못했으나, 그 글을 읽어보니 병려(騈儷)로 되었을 뿐더러 선불(禪佛)을 위하여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니 어쩐 일인가. 아마도 만당(晩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 누습(陋習)을 변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초연히 쇠한 세상을 방관하여 때와 더불어 오르내리며 선불에 의탁하여 스스로 숨이 지내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비의 북쪽에 수십 보 거리에 백 아람이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어 뿌리가 시냇물을 걸앉았는데, 역시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중이 정원에서 불을 놓다가 잘못되어 회화나무에 불이 붙어 용호(龍虎)가 거꾸러진 나머지, 그루터기의 썩어 있는 것이 길이 넘고, 중들은 아직도 뿌리 위를 밟고 왕래하며, 이름을 금교(金橋)라 부른다. 아, 식물(植物)이란 역시 생기(生氣)를 지닌 것이라. 돌처럼 수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절 북쪽에 고운이 올라 노닐던 팔영루(八詠樓)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중 의공(義空)이 재목을 모아 누를 다시 세우기로 한다고 한다.
의공과 더불어 잠깐 앉아 쉬는 사이에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기로 물으니, 관에서 은어를 잡는데, 물이 많아서 그물을 칠 수 없고, 천초(川椒) 껍질이나 잎으로 고기를 잡아야 되겠다하며, 절중에서 독촉하여 얻어오라는 것이다.
중의 말이,
“살생(殺生)하는 물건을 가져오라니 어쩌자는 것인가.”
했고, 나 역시 한참동안 빈축하였다.
오대산(五臺山)의 백성이 이미 이장[里正]의 포학을 면하지 못했는데, 쌍계사 중이 또한 장차 고기를 잡는 물건을 제공하게 되었으니, 산중도 역시 불안한 곳이다.
이튿날 을묘일에 비로 인하여 출발을 중지하였다. 28일 병진에 쌍계의 동쪽을 타서 다시 지팡이를 짚고 석등(石磴)을 더위잡고 위잔(危棧)을 곁하여 두어 마장을 가니, 하나의 동부(洞府)가 나오는데 자못 너그럽고 평평하여 경작(耕作)을 할만하다. 세상이 여기를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눌러 생각해보니 우리가 여기를 올 수 있는데, 이미수(李眉守)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미수가 여기를 오고도 기억을 못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과연 청학동이란 것은 없는데, 세상에서 서로 전하기만 하는 것인가. 앞으로 수십 보를 걸어 나가 동떨어진 골짝을 내려다보며 잔도(棧道)를 지나니 암자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불일암(佛日庵)이다. 절벽 위에 있어 앞을 내려다보면 땅이 없고, 사방의 산이 기묘하게 솟아서 상쾌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동서쪽에 향로봉(香爐峯)이 있어 좌우로 마주 대하고, 아래는 용추(龍湫)와 학연(鶴淵)이 있는데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암자 중이 말하기를,
“매년 6월이면 몸뚱이는 파랗고, 이마는 붉고, 다리는 긴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였다가 날 아 내려와 못물 마시고 바로 간다.”
한다.
여기 사는 중들이 자꾸 보는데, 이것이 청학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잡아다가 거문고와 함께 짝을 만들 수 있으랴. 암자 동편에 비천(飛泉)이 있어 눈을 뿌리며, 천 길을 내리 떨어져 학연(鶴淵)으로 들어가는데 이거야 말로 경치 좋은 곳이다. 등구(登龜)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후 16일이 걸렸는데, 곳마다 천암(千巖)이 다투어 뻗쳐나고 만 골짝의 물이 어울려 흘러 기쁘기도 했고, 놀라기도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하나였다. 또 학의 이야기를 듣고 이미수가 찾던 곳이 거기가 아닌가 의심했으나 골짝이 워낙 높고 동떨어져서 원숭이가 아니면 갈 수가 없으니, 처자(妻子)와 우독(牛犢)이 용납할 곳이 없다. 엄천(嚴川)이나 단속(斷俗)은 모두 불자(佛者) 장소가 되어버리고 청학동마저 끝내 찾지 못하니 어찌 하랴.
백욱이 말하기를,
“솔과 대가 둘 다 아름답지만 차군(此君 대의 이칭)만 같지 못하고, 바람과 달이 둘 다 맑지 만 중천(中天)에 온 달 그림자를 대하는 기경(奇景)만 같지 못하고, 산과 물이 모두 인자(仁 者)·지자(智者)의 즐기는 것이지만, 공자께서 칭찬하신 「물이여 물이여.」만 같지 못하니, 명일 에는 장차 그대와 더불어 악양성(岳陽城)을 나가서 대호(大湖)의 물결을 구경하도록 하자.” 하므로
나도
“그렇게 하자.”
하였다.
[주D-001]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 녹명편(鹿鳴篇)〉를 말한 것인데, 아름다운 손님을 잔치하는 시다.
[주D-002]이조부(二鳥賦) :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젊었을 적에 서울에 갔다 실의(失意)에 차서 국문(國門)을 나와 동으로 가는 길에서 어떤 사자(使者)가 귀한 새 백오(白烏)ㆍ 백구욕(白鸜鵒) 두 마리를 가지고 천자에게 진상 가는 것을 보고 느껴서 이조(二鳥)를 두고 부(賦)를 지었음. 대의(大意)를 들면 무지한 새는 오직 깃과 터럭이 이상하다 해서, 천자의 빛을 보게 되는데, 사람은 지모와 도덕을 지니고도 새만 못하다는 뜻임.
[주D-003]단구성(丹丘城) : 옛날 신선이 살던 곳으로 단대(丹臺)라고 칭함. 이백(李白) 시집(詩集)에 서악(西岳) 운대(雲臺)에서 단구자(丹丘子)를 보내는 노래와 원단구(元丹丘)를 보내는 노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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