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종일 오락가락이다. 모처럼 부산으로 나들이 가는 길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탔다.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 앉으면서 “빈 좌석이 맞지요?” 예의상 옆 좌석 손님에게 동의를 구하고는 털썩 앉았다. 열심히 폰을 들여다 보다 고개를 끄떡이는 것을 보니 나시티에 청바지, 잠자리 선글라스까지 시원한 여름패션으로 무장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먼저 앉아있었다. 물봉선화를 닮았다고나 할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에 오뚝한 코,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 나이는 30대 초반 쯤 됐을까. 옅은 화장에 눈이 매혹적으로 생겨 청순한 이미지가 풍겼다. 신문을 펼쳐들었지만 옆에서 풍기는 은은한 화장냄새와 더불어 왼쪽 팔에 부딪혀오는 체중감 때문에 신문 읽기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차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고 나서 창밖의 스쳐지나 가는 풍광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늦여름이 느릿느릿 바람처럼 일렁거렸다. ‘초면의 젊은 여자와의 동행이라 무어라고 한마디 말을 붙여 보고 싶기는 한데..., 처음 서두를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되나.’ 그런데 그녀가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다가 앞좌석 등받이 주머니에 끼워둔 신문을 꺼내면서 슬쩍 쳐다보곤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신문 좀 봐도 돼죠”
“보세요, 그런데 볼거리가 별로 없네요”
“신문이 볼거리가 없다면 세상이 조용하다는 거 아니에요?”
손으로 입을 막고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럽게 두런두런해서 조곤조곤으로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제법 대화상대가 되었다. 그녀는 동해안 작은 포구인 평해읍의 중학교 교사인데 늦은 방학을 맞아 부산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속으로 ‘어! 나도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인데...’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버스는 벌써 구서동 터미널에 다다랐다. 마음속으로는 ‘한 시간이란 게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다니...,이럴 때 쯤 저 멀리 네 시간 이상 걸리는 서울행 고속버스 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달려 갈 수만 있다면..., 드디어 차가 정차했다. 그녀는 지하철 가는 통로를 걸어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곤 순진한 미소를 띠면서 “잘 다녀가세요! ” 면서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아쉽지만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삼류 소설이나 막장 드라마처럼 무슨 인연의 끈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착각은 자유요, 현실은 현실일 뿐 내가 갑자기 왜 이러나?
남포동행 지하철 1호선에 앉아 멍한히 생각에 잠겼다.
기나긴 장마 덕에 태풍도 반갑지 않았는데 바비간 뭔가도 천만 다행으로 우리 지방은 아무 탈 없이 지나갔지. 참깨도 타작하여 갈무리 해놨고, 고추도 세 번 째 따서 건조기에 말리고 있으니 농사걱정은 잠시 잊고 해방이다. 고추팔고 참깨 팔아서 한번 다녀올 심사였는데 아침부터 비가 오려고 해서 내친 김에 부산으로 하루휴가 가는 중이다. 봄부터 여름 내내 밭농사 짓는다고 땀 흘려 고생했으니 더군다나 지갑 속에는 자다가 생긴, 한 푼도 쓰지 않은 재난지원금이 고스란히 있지 않는가! 남들은 벌써 소고기 다 사묵고 똥이 된지 오래되었다던데 본인은 쓸 시간이 없었지. 일단 부산에 왔으니 ‘자갈치 시장에 가서 꼼장어 한 사라 하면서 뱃고동 소리 들으며 추억에 젖어 보나? 아니면 광안리 바닷가 회타운에 가서 광안대교 바라보며 도다리 생선회에 대선 소주나 한 잔 카아∼하고? 그것도 아니면 간만에 영화 한 프로 땡긴다. 그래도 시간 남으면 국제시장가서 평소 사고 싶었던 전동 목공기계 좀 사고 이제 돈이 남으면 뭐하지∼‘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는데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부산에 왔으니 새로 생긴 전망 좋은 장소인 오륙도가 눈 아래 보이는 해운대 엘씨티 101층 전망대 그릴을 꼭 봐야 된다며 30분 내로 달려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엘씨티 건물, 물어물어 찾아가서 쳐다보니 고개가 아플 정도의 초고층 빌딩이었다. 빌딩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잠깐만요!” 젊은 여자가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니! 아까 시외버스를 같이 타고 온 물봉선화 닮은 그녀가 아닌가? 단둘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 만나다니 참 묘한 인연이네∼ “아니 웬일이요? 몇 층 가시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참 묘한 그녀도 눈웃음 지으면서 ”어머머 여기서 선생님을 또 만나네요∼“ 시원스런 이마 머리곁을 뒤로 넘기면서 알 듯 말 듯 미소를 보냈다.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배인 그녀가 예뻤다. 천천히 올라가길 바랐지만 초고속으로 달려가는 그놈의 기계가 얄미웠다. 꼭대기 층이 다 됐을 때 쯤 그녀가 갑자기 배를 움켜잡으면서 주저앉았다. “아야! 선생님, 빨리 119 좀 불러...,”라며 의식을 잃었다. 깜짝 놀라서 ‘아니 어디가 아파요’ 손으로 등을 쳐 주었지만 축 늘어졌다. 비상이다. 비상. 떨리는 손으로 119를 호출했다. 호텔 관리담당 이사가 달려오고 그 다음엔 뭐가 어떻게 된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최전방에서 군대생활 3년 한 덕분에 그래도 대충 응급조치는 했다. 곧이어 앰뷸런스가 도착하여 보호자도 같이 타란다. ‘삐용∼삐용∼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을 거쳐 수술실까지 왔다. 환자의 병명은 급성 장파열, 보호자가 싸인 하란다. 간호사 표현대로 말하자면 ‘......, 환자는 창자가 꼬였는데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 했어예’ 라고 했다. 수납과에서 수술비는 선불이라면서 나를 쳐다봤다. ‘글쎄 촌놈이 무신 돈이 그리 많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수술비를 지불하라고..., 참 미치겠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이왕 이래된 거 사람이라도 살려 놔야 안되겠나. 시원하게 재난지원금카드를 긁었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 수술 중 잘못 되더라도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에 싸인도 했다. 이것도 일종의 재난은 재난이지, 문정부가 현명도 하네. 이런데 쓰라고 촌놈에게 몇 백 만원의 거금인 지원금을 쓰도록 하니..., 여자 소울백을 뒤졌다. 혹시 환자의 집이나 부모 등에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싶어서였다. 최신 폰이라 비밀번호가 걸려있어서 도통 열 수가 없었다.
어깨걸이 구찌 명품백을 부여잡고 수술실 앞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면서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였는지 생각해보니 원인은 그놈의 문자가 문제였다. 얼마 전 나라에서 보낸 이런 문자를 받았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재난지원금은 8월 중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전부 환수 되니 빨리 쓰시오’라는 바람에 사람이 앞뒤 분간도 없이 공짜 돈을 써 볼라고 한 것이 원인이었다. 산골 촌농부가 졸지에 생면부지의 수술중인 환자 보호자가 되다니..., 초조와 불안에 떨기를 몇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주치의가 본 보잔다. “보호자 되시죠. 아! 글쎄 의사생활 30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 보는데 환자의 창자 속에 이런 것이 들어 있다니, 어디 한번 보시오”하면서 이물질이 묻어있는 하얀 종이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쪽지를 펴보니 예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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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찐∼찐∼찐이 아니고요 전부 뻥!뻥!뻥 입니데 ∼ 』
천둥 번개 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보니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