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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정월에 재신과(번역문에는 '재신자'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과로 수정함) 추신들이, 우의 광태가 날로 심하여 사람 같지 아니하므로, 혜명전(惠明殿)과 현릉(玄陵)에 제사하여 이를 기도하였다.
재신宰臣은 문하부(중서문하성)의 재상들을, 추신樞臣은 밀직사(추밀원)의 고관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고관들이 지금 왕이 재정신이 아니니 재정신으로 돌려달라고 정초부터 선왕께(혜명전은 왕륜사에 조성된 공민왕의 영전, 현릉은 공민왕의 무덤)에 제사지낼 지경이었답니다.-_-;; 그럼 고관들이 뭘 보고 우왕이 재정신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냐면...
○ 우가 어린놈들에게 후원에 구덩이를 파게 해 놓고, 지신사 이존성(李存性)을 속여 빠지게 하였다. 날마다 이런 놀이로 오락을 삼았다.
이존성은 우왕에게 자주 간언하는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못된 장난으로 갚아주었습니다.-_-;;
○ 우가 골목에 나가 놀면서 개를 쏘았다. 이로부터 날마다 닭과 개를 쏘는 짓을 일삼으니, 성 안의 닭과 개가 거의 다 없어졌다.
슬슬 끼가 보이죠?
○ 우가 임치 등을 거느리고 골목에 나가 작대기로 참새를 잡아서 담 밑에서 구워 먹었다.
암만 봐도 왕이 할 행동은 아니죠?
○ 우가 여러 기생들을 궁중에 모아 놓고 밤새도록 놀이를 하였는데, 이로부터 안 노는 날이 없었다.
참고로 바로 앞에서는 최영이 울며 간하자 "그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 우가 정비의 대궐에 갔다. 이 뒤로부터 왕래가 매우 잦았는데, 어떤 때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갈 적마다 희롱하기를, “나의 궁녀들은 어쩐지 어머니의 인물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제는 폐륜끼까지 다분하네요.-_-;;
○ 2월에 우가 호곶(壺串)에서 사냥하는데 백관이 시종하니, 명령하여 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교외에 나가 사냥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우가 또 내시들을 거느리고 동쪽 못에서 말을 씻기며, 그들과 함께 말을 달리고 돌아다니다가, 김원길(金元吉)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 저녁이 되어 우가 손수 피리를 불며 환관들에게 잡된 놀이를 시킬 적에, 원길로 하여금 당인(唐人) 놀이를 하게 하였는데, 원길이 다리를 다쳐 못한다고 사양하니, 우가 노하여 죽도록 때리고, 그래도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석방시켰다.
선왕께 올린 기도도 효험이 없었나 봅니다.-_-;;
○ 우가 미행(微行)하여 동쪽 교외에서 놀다가 귀법사 남쪽 개천에 이르러 궁녀와 함께 목욕하며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였다.
○ 우가 이인임의 집에 갔다. 이전에 조영길(趙英吉)이 인임의 계집종의 남편이 되어 봉가이(鳳加伊)라는 딸을 낳았는데, 인임이 우에게 바쳤더니 이날 우가 봉가이를 인임의 집에 데리고 가서 행음하였다. 그리고 영길에게 전농부정(典農副正)을 제수하였다.
○ 우가 교외에서 사냥하고 밤에 돌아오면서, 피리 불고 노래하며, 북치고 춤추며 무당놀이를 하면서 탄식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이 초로 같도다."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또 봉가이를 데리고 성 북문으로 나가 동쪽 교외의 개천에 이르러, 나무 사닥다리를 띄워 배를 만들고, 자기가 끌면서 장난을 쳤다. 밤이 되어 돌아왔다가, 곧이어 다시 교외로 가려 하니, 좌우 사람들이 아뢰기를, “밤이 이미 깊고 또 비가 많이 오는데, 어디를 가려 하십니까."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 “매를 부르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남쪽 교외에 나가 놀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가 또 동쪽 교외에서 사냥하는데, 손에는 화각(畫角 악기의 이름)을 쥐고 봉가이ㆍ수정ㆍ초생 등은 남장을 하고 활을 메고 화살을 차고 따랐다. 달려서 신경(新京)에 이르러 드디어 해풍군(海豐郡)에 가서 온갖 장난을 치다가, 마침내 여러 총애하는 궁녀와 대낮에 야합하였다. 이때에 우가 빠지는 날 없이 나가 놀아서, 내구에 있는 말이 모두 야위고 없어졌으므로, 지나는 곳마다 남의 말을 빼앗아 궁녀와 환관을 태우니, 사람들이 다투어 피하고 숨어서 길에 사람이 없었다.
○ 우가 이인임의 처 박씨와 인임의 별장에 가서 마음껏 즐겼다. 우가 일찍이 인임을 '아비'라고 하였으므로, 박씨도 존대하여 '어미'라고 불렀다. 이때 우가 봉가이를 총애하여 항상 인임의 집에서 잤기 때문에 인임은 별장에 나가 있었다.
술에 취해 어머니를 희롱하는데 백주대낮에 ***쯤이야...
○ 봄 정월에 우는 전 판삼사사 강인유(姜仁裕)가 사위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 기한에 앞서 그 집으로 달려가 그 딸을 빼앗아 돌아와 정비(定妃)의 궁에 두고 아침 늦도록 일어나지 않아, 인일(人日 정월 7일)의 조하를 정지했다. 이때에 딸을 가진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혼례를 갖추지 않고 몰래 사위를 얻었다.
○ 환관 김실이 도망갔다. 과거에 실이 아내를 버리고 다시 사족의 딸에게 장가들려 하니, 우가 말하기를, “그 여자를 내게 보인 연후에야 장가들 수 있다."고 하였다. 실이 용덕을 통하여 그러지 말기를 청하니, 우가 허락하였다. 그래서 실이 그 여자를 우에게 보이지 않고 장가들었는데, 우가 감정을 품고 다른 일로 칭탁하여 실을 순군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므로, 실이 도망갔다. 우는 영을 내려 크게 수색하며 당직했던 천호 유극서(柳克恕)를 옥에 가두었다.
○ 2월에 우가 왕흥(王興)의 집에 가서 그 딸을 바치게 하고 이때부터 그 집에서 잤다. 처음에 흥이 그 딸을 변안열(邊安烈)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우가 말하기를, “내 명령을 기다려서 시집보내라." 하고 드디어 사람을 시켜 그 딸을 보게 하였다. 흥이 말하기를, “신의 딸이 어리고 미련하며, 또 그 어미가 병으로 앓고 있으니, 무슨 정신으로 사위를 맞겠습니까." 하니, 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조그만 놈이 나를 속이려 드느냐. 네가 명령을 좇지 않으면, 죄가 처자에게 미칠 것이다." 하였다. 시중 조민수 등이 우에게 말하기를, “안열은 나라의 명장으로서 그 공이 매우 큰데, 지금 그 며느리를 빼앗으면 장수와 신하 중에 누가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성혼을 허락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흥의 집으로 갔으나, 흥은 이미 집을 비우고 피하였다. 우가 크게 노하니, 흥은 할 수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이제는 궁녀, 기생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남의 새색시를 훔치네요.-_-;;
○ 우가 서해도에서 15일간 사냥하였는데, 경성에서 해상에 이르기까지 공급하는 수레가 백 리에 이어졌다. 환관과 내수가 총애를 믿고 멋대로 횡포한 짓을 하여 안렴사와 수령을 누르고 능욕하니, 서해도의 아전과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흩어져 달아났는데, 안렴사 이수(李須)는 말을 잃고 진흙 속을 걸어갔다. 온 도 사람들이 탄식하고 원망하는데, 우는 즐거워하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연안부에 이르러는, 비가 많이 내려 호종하는 자들이 들판에서 떨고, 길에는 죽은 소와 말이 즐비하였다. 돌아오다 백주(白州)에 이르러 연안부 큰 못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려 하자, 최영이 간하기를, “신의 휘하 군사가 수천 명이며, 지금 죽은 말이 많고, 더욱이 여러 가지 물자가 마련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협소한 고을에 행차하시면 민폐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우가 이에 그쳤다.
백성들이 등골이 부러지거나 말거나, 호종하는 사람들이 노숙을 하거나 말거나 사냥에 열중.
○ 우가 이인임의 집에 가서 인임의 처 박씨를 데리고 다야점(多也岾) 별장에 가려 하였는데, 박씨가 말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우가 길가는 사람의 말을 빼앗아 마침내 함께 가서 여러 기생들을 거느리고 음란하게 즐겼다. 인임이 우의 총애하는 기생 개성(改成)에게 곡식 20곡(斛)을 주고, 여러 기생과 내수(內豎)에게는 2곡씩을 주었다. 이때에 인임이 우를 데릴사위같이 접대하여, 나라에는 열흘 동안 쓸 저축이 없는데도, 전원(田園)과 노비가 중앙과 지방에 널려 있고, 장군과 대신이 모두 그 집안에서 나왔다.
전하, 술값은 신이 결재할테니 마음껏 노시옵소서.(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대사가 있더군요.)
○ 우가 기생을 데리고 귀법사(歸法寺)의 개천에 이르러 기생과 함께 목욕하고 밤에 돌아와 전 개성 윤 오충좌의 집에 이르렀다. 충좌의 아내는 본시 단양대군(丹陽大君) 유(珛)의 집 여종인데, 적몰당하여 의순고(義順庫)에 들어가서 딸 셋을 낳았다. 충좌가 천역을 면하기 위하여 사사로이 환관을 섬기어 그 가운데 딸을 바쳤다. 이때부터 여러 번 그 집에 갔다.
술취해 어머니도 희롱했는데 대낮에 절 옆에서 남녀혼욕쯤이야.
○ 강씨를 봉하여 안비(安妃)로 삼고, 봉가이를 숙녕옹주(肅寧翁主)로 삼으며, 기생 칠점선(七點仙)을 영선옹주(寧善翁主)로 삼았다. 사가의 종과 관가의 종을 옹주로 봉한 것은 예로부터 없던 일이므로, 국인들이 놀라고 해괴하게 여겼다.
파티 상대녀에게 옹주 작위를!
○ 봄 정월 초하루 무오일에 우가 이인임의 집에 있었다. 인임의 아내가 큰 술잔을 올리며 아뢰기를, “오늘은 삼원(三元)이니, 삼가 수(壽)를 올립니다." 하였다. 우가 잔을 다 마시고 희롱하기를, “내가 한편으로는 손자요, 한편으로는 계집종의 서방인데, 지금 마주 앉아서 마시는 것이 실례가 아닐까." 하고, 처용(處容)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여 그를 기쁘게 하였다.
정초부터 이러고 놀았답니다.-_-;;
○ 우가 동강에 있는 인임의 별장에서 여러 기생을 10여 기에 태워 거느리고 나팔을 불며 연쌍비(鷰雙飛)와 함께 나란히 말을 몰아 서울로 들어오는데, 길에서 사람의 삿갓을 빼앗아 과녁을 만들고 말을 달려 이것을 쏘았다. 우가 연쌍비와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다야점(多也岾)에 가는 것을 매일같이 하였는데, 연쌍비의 의관이 우의 의관과 다르지 않아 길가는 사람들이 바라보고 구별을 못하였다.
연쌍비는 기생인데 나중에 명순옹주에 봉해집니다.
이인임을 귀양보내고 임견미, 염흥방 일파를 숙청하기 전까지의 행적을 대충 추려보면 이렇습니다. 물론 이인임, 염견미, 염흥방이 사라져도 우왕의 난행은 그칠줄을 몰랐습니다.
우왕 11년(1385) 을축년 정월
○ 환관 김실이 처를 버리고 다시 사족(士族)의 딸과 혼인하려 하면서 혼례날 휴가를 청하자 우왕이, “여자를 나에게 보이고 난 뒤에 혼인하라.”고 말했다. 김실이 숙비(淑妃)에게 부탁해 간신히 왕의 허락을 얻어 혼인할 수 있었으나 왕이 늘 언짢게 생각하고 있다가 딴 일을 핑계로 그를 순군옥(巡軍獄)에 수감한 후 장차 죽이려 했다. 눈치를 챈 김실이 도주하자 대대적으로 수색하면서 그때 당직(當直)을 섰던 천호(千戶) 유극서(柳克恕)를 하옥시켰다
○ 우왕이 순군(巡軍)에 들이닥쳐 유극서를 보고,
“네가 만일 김실을 다시 잡아들이지 못하면 그 놈의 죄를 내가 대신 져야한다.”
고 협박한 후 놀이도구를 꺼내 나가버렸다.
○ 우왕이 마암(馬巖)에서 무예 연습을 지켜보고는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다고 트집을 잡아 무예도감사(武藝都監使) 성중용(成仲庸)과 이빈(李斌)3)을 채찍으로 때렸다. 당시 모든 부대가 집결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전투 훈련을 하느라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연초부터 이렇습니다.-_-;;
같은해 2월
경술일. 우왕이 호곶(壺串)에서 사냥판을 벌인 후 밤에 돌아오다가 순군옥(巡軍獄)에 이르러 죄수에게 직접 칼을 씌웠다.
도대체 죄수는 왜 괴롭히나 모르겠는데 하여간 술이 좀 과하셨나 봅니다.-_-;;
같은해 3월
○ 우왕이 해주로 가서 총애하는 여자들과 어울려 작천(鵲川)에서 놀이판을 벌이고는 옛 신평현(新平縣)으로 가서 사슴을 활로 쏘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당시 개경으로부터 해안지역에 왕 일행에 물자를 공급하는 수레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시인(寺人)과 내수(內竪)들은 왕의 총애를 믿고 함부로 횡포를 부려 안렴(按廉)과 수령(守令)을 욕보였다. 서해도의 이민(吏民)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모두 흩어져 달아났는데도 우왕은 그저 놀이를 즐기노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왕이 연안부(延安府)에 도착하자 마침 큰 비가 쏟아져 호종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비를 맞았으며 쓰러져 죽은 마소가 도로에 깔렸다.
기묘일. 우왕이 저자거리에서 닭과 개를 활로 쏘아 죽인 후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으며 밤에는 왕흥의 집으로 돌아왔다.
○ 강인유가 처와 함께 송악(松嶽)에 제사를 지내자 우왕이 친히 피리를 불고 풍악을 잡히면서 상춘정(賞春亭)에서 영접한 후 만취한 상태로 밤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마주친 전 낭장(郞將) 전성길(全成吉)을 때려죽였다. 예의좌랑(禮儀佐郞) 김한로(金漢老)의 말을 빼앗아 궁녀에게 타게 했으며 돌아와서 왕흥의 집에서 묵었다.
이제는 만취해서 사람도 마구 죽이네요.-_-;;
그리고 같은달 갑신일.
우왕이 정비궁에 가다가 길에서 사동(私僮)을 만나자 그의 말을 빼앗고 직접 그를 포박해 순군옥(巡軍獄)에 수감시켰다.
○ 우왕이 최천검의 집에 갔다가 화통도감(火桶都監)으로 가서 화약 심지에 불을 붙여 보았다. 밤에 왕흥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후덕부(厚德府) 행수(行首) 이부윤(李富潤)이 왕을 불량배로 생각해 피하지 않자 우왕이 화가 나서 그를 하옥시키고 태형을 가했다
술에 취했는지 아닌지는 언급이 없어 모르겠지만 화약에 불붙일 생각을 했다니 맨정신은 아니었나 봅니다.-_-;;
그해 4월에는...
○ 우왕이 정몽주의 집에 갔는데 정몽주가 원로들을 위해 잔치를 열고 있기에 우왕이 마구 술을 들이키고는 잔을 잡고 꿇어앉아 이색(李穡)에게 올리면서, “사부(師傅)께서도 기생가무를 좋아하십니까?”라고 비꼰 후 그 자리의 기생을 데리고 나와 길에서 남의 말을 빼앗아 태우고 돌아갔다.
남의 기생은 내거, 남의 말도 내거.
5월에는...
○ 우왕이 저자거리로 나가서 쏘다니다가 저물어서야 화원(花園)에 돌아와 기생 및 내수(內竪)들과 함께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장난질을 하였다. 물통에 담은 물을 기생들의 옷에 뿌려 목욕한 것처럼 만들자 기생들이 모두 깔깔거렸는데 한 기생만 웃지 않자 왕이 그 여자를 매질했다.
술집의 흔한 진상손님(...)
6월에는...
○ 우왕이 이인임의 집에 가서 이인임의 처 박씨(朴氏)와 함께 다야참(多也站)에 있는 별서(別墅)에 가려 했는데 박씨가 말이 없다고 사양하자 우왕이 행인의 말을 빼앗아 준 다음 함께 가서 데리고 간 기생들과 온갖 음란한 짓을 하며 즐겼다. 이인임이 또 개성에게 곡식 20곡(斛)을 주고 기생들과 내수(內竪)들에게 각각 2곡씩을 주었다
노는 건 내가, 계산은 이인임이...(그나저나 박씨는 왜 데려간걸까요?)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지(李至) 등이 소를 올려 사냥을 중지할 것을 간언하자 우왕이 지신사(知申事) 염정수(廉廷秀)17)를 시켜 그 글의 뜻을 풀이하게 하고는 갑자기 대노해,
“시국이 한창 위태롭고 어지러운데 이 자들이 나더러 말 타기도 익히지 말라니 이보다 더한 불충이 있겠는가? 엄하게 징계해야 마땅하다.”
라고 말함으로써 간언을 끊어버리니 재상들이 서로 보기만 할 뿐 한 마디 말도 못했다. 뒤에 우왕이 간관(諫官)의 이름을 모두 써서 보관해 두고는 “이런 자들을 시켜 왜적을 막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니, 이 때문에 많은 간관들이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내게 간언하는 자들은 모두 전장으로 보내버릴 것이다!
우왕 12년(1386) 병인년 정원에는...
○ 우왕이 숙녕옹주(肅寧翁主)에게 주옥장(珠玉粧)을 주려고 보원고(寶源庫)3)의 별감 황보(黃補)를 불러 주옥이 몇 개나 있는가하고 물었다. 황보가 없다고 대답하자 우왕은 대노해 그를 바로 순군옥에 수감하고, 또 제조 박천상(朴天常)·서균형(徐鈞衡)4)·이환검(李還儉)의 가노 10명도 수감시켰다
뭬야? 보석이 없다고? 너 하옥!그전에 국고가 달랑달랑 할텐데... 숙녕옹주는 원래 이인임의 여종의 딸인 봉가이로 나중에는 덕비에 책봉됩니다. 여담인데 우왕은 노비나 기생 출신을 셋이나 옹주에 봉한 바 있습니다.
그해 2월에는...
무술일. 우왕이 서해도에서 사냥판을 벌였는데, 숙녕옹주와 궁녀들이 모두 남자 복장을 하고 따라갔다. 왕과 숙녕옹주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들판을 달리다가 내시 한부(韓富)와 갑자기 산모퉁이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한부가 미처 말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숙녕옹주의 말이 지나쳐 버렸는데, 숙녕옹주는 자신이 본래 미천한 신분이므로 한부가 자기를 업신여겼다고 생각하고서 참소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이 사냥길에 왕은 몸소 피리를 불고 부시(婦寺)들은 노래를 부르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으며 비용도 크게 들어 서해도의 고을들이 온통 소란하였다.
서해도의 고생타임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있던 마지막 해인 우왕 14년 2월에는...
○ 우왕이 호곶(壺串)에 가서 하루 종일 뱃놀이를 즐기다가 한밤중에 술이 취하자 칼을 뽑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찌르려고 하니 사람들이 다들 흩어져 버렸다. 왕이 배에 남아 있던 뱃사공[蒿工] 두 명을 찌르려다가 마침 칼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 이튿날 환궁하는 길에 왕이 소라를 불며 앞장서고 스무 명이 넘는 기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암만봐도 제정신은 아니지요?
같은해 3월에는,
초하루 을해일. 우왕이 호곶(壺串)에서 기린선(麒麟船)과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내키는 대로 온갖 놀이판을 벌이다가 측근신하들을 물리친 채 칼을 꼬나쥐고서 혼자 배에 앉아 꼬박 밤을 새우면서,
“부왕께서 밤에 주무시다가 시해를 당했으니 내가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했다
○ 상의국(尙衣局)에서 어의(御衣)를 늦게 바쳤다고 트집을 잡아 별감(別監)과 후덕부 소윤(厚德府小尹) 원윤해(元允海) 및 판서(判書) 강의(康義)를 참형에 처했다.
○ 우왕이 사냥을 나가려고 기생들을 죄다 불렀는데 한 기생이 제 때 오지 못하자 성을 내며 그 여자를 죽여 버렸다.
어째 점점 심해지네요.
그해 5월에 요둥 정벌군은 보내고 난 다음에는,
○ 우왕이 자기 뜻을 조금 거슬렸다는 이유로 환관 김강(金剛)을 참형에 처하게 했다. 또 영비(寧妃)와 함께 부벽루에 가서 활쏘기와 격구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마부를 죽이려하자 최영이 말렸다. 왕이,
“장인께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면서 왜 나는 못하게 하는 거요?”
라고 대들자 최영은,
“제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일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왕은 측근들에게 눈짓해 결국 그 마부를 죽이고야 말았다
경진일. 좌군과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탈영병이 길을 메우자 왕이 해당 지휘관에게 즉각 참형에 처하도록 지시했으나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 우왕이 풍월루(風月樓)에 갔다가 환관인 대호군(大護軍) 김길상(金吉祥)과 호군(護軍) 김길봉(金吉逢)을 죽였으나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평소에도 불안해보이던게 요동정벌 이후 극도로 심해진듯 한데 이쯤되면 폐위되지 않았더라도 정무를 보는게 힘들 지경일듯 합니다.
출전 : 국역 고려사, 2008.8.30, 경인문화사(네이버 지식백과 수록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