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소름 끼치도록 시린 달이 빛나던 날, 소년은 한 소녀를 조용히 끌어안고 있었다.
소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소년에게 안겨 있었고, 그런 소녀를 소년은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럽게 품에 안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흔들어 놓을 때까지 두 사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소녀를 안고 있던 한 손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원래는 얼룩 하나 없는 흰색이었을것 같은 백색의 장갑에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마치… 달빛에 비친 소녀의 짙은 붉은색 머리칼과 같은 색의… 얼룩.
“……알고 계셨… 습니까…?”
무언가에 지쳐 조금은 쉰 목소리. 그러나 소년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당신을 제 품에 안을 수 있다는 건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말이예요…”
소년의 힘껏 쥔 주먹이 조금씩 떨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당신을 안아도…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소년은 품에 안겨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진한 보랏빛 머리카락이 소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생기 없는 얼굴… 소녀는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소년의 품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이 원한 소녀의 모습은 아니었다.
소년은 다시 소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소녀에게서 퍼져 나오던, 소년에게는 없는 그 파장이 전달되지 않았다.
소년과 소녀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던 것.
그 박동이 들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떨림이 점점 심해졌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의 가슴에 얼굴을 대보았다.
언제나 눈부신 소녀의 생명의 원동력은 더 이상 소녀를 위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언제나 소년을 똑바로 응시하던 루비빛 눈동자도.
언제나 소년의 이름을 부르던 그 입술도.
언제나 소년을 돌아볼때마다 눈부신 미소와 함께 허공에 수를 놓았던 생기 있는 붉은빛의 머리칼도.
너무나도 짧은 삶을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살던 소녀의 모습.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후회를 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도 사랑했지만 손조차 내밀어보지 못한 소녀를 죽인 것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사랑하던 소녀를 위해 울어주고 싶었지만 소년의 창조주는 그런 쓸모없는 것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창조주를 원망하지 않았다.
창조주의 명령으로 소녀를 죽인 것 조차 소년은 원망하지 않았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들이 느끼는 [슬픔] 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소년은 지금[슬픔]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불쌍하게도 지금의 감정이 [슬픔] 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만물의 어머니, 로드 오브 나이트메어의 혼돈의 바다에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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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유랑(1)
"...제로스."
"네?"
앞서 가던 소년의 이름을 부른 소녀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에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도대체 뭐하자는 플레이야!!"
이마에도 모잘라 목까지 핏대를 세우며 카랑카랑하게 소리치는 소녀를 보며 제로스는 생긋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갔다.
"비밀이예요♥"
"..............."
이마에서 소녀의 이성을 지탱하던 끈이 툭 하고 끊기는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속으로 댐 브라스의 주문을 읊조리던 소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는지 곧 한숨을 쉬며 그만뒀다.
댐 브라스 정도의 공격으로는 저 여유 있는 얼굴에 상처 하나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야- 잘 생각하셨어요, 리나님."
그런 소녀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했다는 듯 제로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로스의 얼굴색이 밝아짐에 따라 리나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그 나름대로의 포커페이스라고 하지만 상황과 안 맞을때는 몹시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눈을 뜰때는 여유가 없거나 정말로 진지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낄때뿐이겠지.
4달전.
대지가 눈부신 초록으로 뒤덮여갈 때쯤.
제로스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날 밤, 리나는 촛불에 의지하여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기척을 느꼈고, 촛불로 인해 방안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단정한 단발.
그림자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
그녀의 기억에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던 존재는 딱 한 명.
제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바라며 재빠른 동작으로 뒤를 돌아본 리나는 자신의 바램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고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로스....”
제로스와 눈이 마주치자 리나는 아무생각 없이 두께가 족히 10cm은 될 것 같은 두꺼운 책을 그에게 던져 버렸다.
책은 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허무하게도 그의 손에 잡혀 버렸다.
이를 어느정도 예상한 리나는 그대로 제로스에게 헤드락이라도 걸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제로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분위기가 전하고 다름을 느낀 리나는 잡힌 손을 빼는 것도 잊고서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보았다.
분위기와는 다른 모습이었던 그의 웃는 눈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싸늘한 보라색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나는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제로스는 쉽게 잡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단지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리나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고개를 돌릴수도 없었다.
짙은 붉은빛보다 더 싸늘한 빛을 풍기는 그의 보라색 눈동자 속에는 조금은 겁에 질린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한심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수신관 제로스.
루비아이 샤브라니구두의 다섯 심복 중 한명인 수왕 제라스 메탈리움의 직속 부하인 그는 천년 전의 강마전쟁때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으로 골든 드래곤을 멸족으로까지 몰아 용족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런 존재였다.
자신 같은 존재는 파리 죽이는 것보다 쉬울 그였다.
하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금은 안심을 하는 그녀였다.
창문이 열려 있었는지 을씨년스러운 소리와 함께 바람이 들어와 촛불과 함께 사라졌다.
덕분에 방안은 어두워졌고 리나는 더 이상 제로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없었다.
바람과 촛불이 소리마저 가져가 버린 것일까.
제로스는 리나의 손목을 잡은채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리나 역시 숨을 죽인채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제로스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온거야...?”
무거운 침묵을 깨고 리나가 입을 열었다.
힘겹게 꺼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라도 하는 듯 제로스는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제로스 너...!!”
결국에는 폭발 직전까지 가버린 리나가 한 소리 늘어놓으려는 찰나 제로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을 잡아 당겼다.
앗차 하는 사이에 중심을 잃은 리나는 그대로 제로스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온기 없는 차가운 몸.
아무런 고동 없는 그의 가슴.
서늘한 기운이 전해져옴을 느끼며 리나는 ‘역시나 제로스는 마족이구나’ 라고 수긍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공허한 입을 벌리고 있는 천장 뿐, 제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그녀의 오른쪽 귓가를 간지럽혔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감촉.
제로스의 머릿결이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을 가지던 리나는 그제야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그의 팔을 보며 제로스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제로스의 행동에 한숨을 쉬던 리나는 그냥 머릿속을 비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그의 등뒤로 손을 가져갔다.
역시나 차가운 감촉.
시린 기운이 전달되자 리나는 몸을 살짝 떨며 좀더 그에게 안겨 들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차가운 그의 몸도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리나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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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유랑(2)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깜빡 잠이 들어버렸음을 알아챈 리나는 저런 상황에서도 잠을 잘 수 있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감탄을 했다.
그 커다란 눈을 반짝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떠보았지만 동공을 압박하는 눈부신 빛에 다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은 진정됐다고 생각된 뒤에 살짝 눈을 떠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며 환한 빛을 비추고 있는 촛불이었다.
촛불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촛대위에 꽂혀 있었으며, 촛대는 바닥에 놓여져 있었다.
가만... 바닥?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리나는 보랏빛 머리칼의 차가운 수신관에게 안겨 있었는데 어째서 바닥이 보이는지 의아해 했다.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살짝 몸을 움직이는 리나는 귓가에서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흠칫 놀라며 소리의 원인을 찾아보았다.
모포였다.
조금 두꺼워 보이는 모포가 그녀의 위에 올려져 있었다.
누가 덮어 준 걸까...?
리나는 문득 자신의 두 팔에 감싸여 있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려는 그녀의 머리에 시린 기운이 다가왔다.
잠깐 몸을 떨던 그녀가 고개를 들자 아까와는 달리 여유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수신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뭐가 어떻게 된 날일까.
평소 같았으면 단박에 화를 냈어도 모자를 것 같던 그녀는 웬일로 조용히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아무래도 리나가 품에서 잠들자 벽에 기대어 앉아서 줄곧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리라.
계속 차가운 기운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낀 리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힘없이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그런 리나를 내려다보던 제로스는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붉은 빛을 띄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불빛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제로스.”
“....네?”
뛰지 않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수신관이 대답했다.
이제야 어느정도 대화가 될 듯 싶었다.
“무슨 일이야?”
“제가 언제 리나님한테 일이 있어서 온적 있습니까? 이거 섭섭한데요~”
“시치미 떼지마!!! 이 능구렁이 신관!!”
분에 못 이겨 확 쳐든 리나의 머리는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제로스의 턱에 가서 박혔다.
퍼억!! 하는 꽤 큰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은 목까지 올라오는 신음 소리를 간신히 억누른채 턱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뭐 씹을 얼굴을 해야만 했다.
“아야야야...”
욱신거리는 통증에 머리를 매만지던 리나가 마찬가지로 턱을 쓰다듬고 있는 제로스를 향해 도끼눈을 치켜떴다.
“그정도는 피했어야지!!”
원인을 제공해 놓고 오히려 큰소리 치는 리나를 향해 제로스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야.. 리나님이 그렇게 고개를 들지 어떻게 알겠냐구요~ ”
“그래도!!!!”
“리나니임, 오히려 피해자인 제가 따져야 되는거 아니냐구요오~”
리나의 억지주장에 항변을 해보지만 전혀 통하지가 않았다.
결국 제로스는 한숨을 쉬며 한참동안 계속 되는 리나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한참동안 침을 튀겨가며 소리를 지르던 리나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에따라 리나의 말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며 울상을 짓던 제로스의 표정도 굳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리나는 뭔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봐, 제로스.”
“네. 리나님”
“내가 또 왜 온거야? 라고 하면 비밀이라고 대답할거야?”
“에에 글쎄요?”
여전히 사람을 놀리는 듯한 말투.
또다시 목청을 돋우려던 리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을때마다 석양빛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흩날렸다.
붉은 빛의 물결에 머릿속이 아찔해지려고 한 제로스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제로스?”
“예?”
“어서 말해보라니깐.”
“에...그게 말이죠.”
잠시 머뭇거리던 제로스는 똑바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나에게서 벽에 세워둔 석장의 보석장식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품안에 안긴 소녀처럼 붉디붉은 보석.
생글거리며 웃던 제로스는 붉은 빛을 눈에 새기려는 듯 싸늘한 보랏빛 눈동자로 잠시 석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곧 리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알 수 없는 빛을 담은 눈동자로부터 흘러 나오는 서늘함.
그의 눈동자는 저 높은 하늘의 차가운 허무로 이루어진 듯 싸늘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여행이나 한번 해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침묵 뒤에 조용히 흘러 나오는 낮은 목소리. ‘여행’ 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리나는 서늘함도 잊은채 차가운 미소를 띄고 있는 제로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행.... 이라고?”
“예. 여행이요. 물론 저와 같이 말이예요.”
“에? 너랑?”
무척이나 놀라나 듯한 리나의 목소리에 금세 차가운 미소를 지우고 갈매기 날개 눈을 하며 한숨을 포옥 쉬었다.
“아무리 제가 싫다고는 하시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놀라시면 상처 입는다구요~”
제로스는 너무하다는 듯 울상을 해보였지만 리나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행?
그것도 제로스와?
저 속을 알 수 없는 마족인 제로스와?
“하지만.....”
“가우리님이 걸리시나요?”
그 순간 리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 커다래진 눈동자에 거부감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제로스는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제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요?”
현재 리나가 있는 곳은 과거에 사령도시라고 불렸던 사이라그.
지금은 한창 재건에 힘을 쏟고 있는 실피르의 갑작스러운 도움 요청으로 가우리와 함께 와 있었다.
여기로 온 이후 가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재건을 시작한 마을 사람들과 지냈다.
그가 실피르와 마주보고 미소 지을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조용히 실피르의 집으로 들어와 책을 읽곤 했다.
물론 그게 성미에 안 맞아서 뛰쳐나간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 잡고 다시 돌아온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우리.”
조용히 불러보는 그의 이름....
언제나 바보 같이 웃으며 모든걸 받아주는 남자....
하지만 그는 그렇게 받아주기만 할뿐, 마음은 주지 않았다.
그게 실피르였건, 리나였건 말이다.
“결정은 내리셨나요?”
남은 가슴이 욱신거리는데 생글 웃고 있는 제로스가 미워죽겠는 리나였다.
“누가 너랑...!!!”
“호오, 가우리님과 실피르 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해도요?”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뜨며 검지손가락으로 공중을 휘휘 젓는 그의 모습.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을 하는 그의 모습에 과거, 가우리를 인질로 삼았던 명왕 피브리조가 생각나 버린 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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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유랑(3)
“뭐...뭐라고!!!!”
리나가 엄청난 기세로 일어섰다.
그러자 정성스레 덮여져 있던 모포도 허공을 날았다.
밤의 신사처럼 허공을 날던 모포는 조용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그 반동으로 계속 흔들리던 촛불도 그 생명을 꺼트렸다.
순식간에 주위는 허무가 토해낸 어둠으로 물들었고 그 어둠을 못 마땅하게 여긴 제로스가 손가락을 퉁겨서 촛불에 불을 붙였다.
불꽃은 화악- 하는 소리를 토해내며 주위를 밝혔다.
“....가우리...”
과거, 그녀 때문에 명왕 피브리조에게 끌려갔던 가우리.
단지 그녀를 끌어내기 위한 도구가 되어 버렸던 그.
자신 때문에 죽을 뻔한... 그.
고개를 숙인 리나의 어깨가 조용히 흔들렸다.
그런 그녀를 제로스는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정은 하셨...”
“에르메키아 란스!!!”
제로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나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조용히 빛나던 초의 불빛을 삼켜버린 백색의 광선이 무방비해 보이는 제로스에게 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제로스의 앞에서 작은 불꽃으로 화해 소리 없이 사그라졌다.
순간적으로 번쩍였던 방안은 또다시 어두워졌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리나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또다시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리나를 향해 제로스가 검지 손가락 흔들어 보였다.
“소용 없다니깐요. 그나저나 결정은 하셨습니까?”
“...그만.... 그마안-!!!”
절망적인 비명소리가 시작이라는 듯 그녀의 커다란 루비빛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곧 창백한 볼을 따라 흘러 내렸다.
“..그만.... 그만해...”
“......”
“...흑... 가우리....가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졌던 그때의 공포가 생각 나는 것일까.
리나에게서 느껴지는 격렬한 마이너스 에너지에 제로스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하는 순간 리나의 몸이 가을에 지는 낙엽잎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리나가 바닥과 키스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제로스는 재빨리 한쪽 팔을 내밀어 리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석양빛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흩어졌다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제로스의 팔에 매달린 꼴이 된 리나는 빛을 잃은 루비빛 눈동자에서 계속 눈물을 쏟아낼뿐, 그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졸지에 나쁜 놈이 되어 버린 제로스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차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의 눈은 계속 웃고 있었다.
“자아. 리나님. 이제 그만 진정하세요.”
제로스는 손수 리나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제로스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던 리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자아... 마음의 결정은 내리셨나요?”
능청스럽게도 들리는 제로스의 물음에 리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뭐어어? 사이라그를 떠나겠다고? 그것도 혼자?”
“아하하.. 그, 그렇다니깐.”
리나의 갑작스런 선전포고에 제일 놀란 것은 가우리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며 밖에 나가있던 자신과 실피르를 불러들여서 무슨 일인가 했던 가우리는 설마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가우리가 부담스러운 리나는 그저 베실베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리나님...”
“아- 괜찮아 괜찮아.”
실피르가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자 리나는 재빨리 두 손을 내저으며 또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가우리가 불끈 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소리에 흠칫 놀란 리나가 조금은 주늑이 든 눈동자로 가우리를 쳐다봤다.
“리나. 무슨 일 있는거야? 갑자기 왜...”
똑바로 물어오는 가우리의 물음에 리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가우리.”
“...어?”
갑작스런 사과에 할말을 잃어버린 가우리를 조용히 쳐다보던 리나가 앞에 놓여져 있던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차 잘 마셨어, 실피르.”
“리, 리나님!!”
의자 바로 옆에 놓아둔 작은 짐을 챙겨든 리나는 누가 볼세라 재빨리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곳에 더 있다가는 애써 한 결심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잘 있어, 가우리...”
“잠깐만, 리나!!”
가우리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어가려던 리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덜커덩 하는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온 걸로 봐서는 실피르도 당황해서 일어난듯했다.
“이유라도 말해줘야 하는거 아냐?”
“그래요. 리나님. 갑자기 이러는게 어딨어요?”
“그래, 자 리나. 어서 말해봐.”
리나는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어깨를 잡은 가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 마른침을 삼키며 얼른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냥.. 기분 전환이 필요했을 뿐이야. ....잘 있어!”
“리나아!!!”
꽤 잽싸게 뛰어가는 리나를 뒤따라 쫓아가던 가우리는 공간을 넘어 리나의 앞에 나타난 보랏빛 머리칼의 신관을 보고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멈춰섰다.
리나 역시 그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춰서서 가우리와 그를 번갈아 쳐다본 후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우리는 더 이상 그녀를 뛰어갈 수가 없었다.
“야아, 참 오랜만이네 가우리님.”
“...제로스!!”
가우리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한 손에는 석장을 들고 한 손으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생글생글 웃던 제로스는 그대로 멈춰서 가우리와 자신을 지나쳐 계속 뛰어가는 리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가우리님이라도 지금의 리나님을 막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상관 없어!!”
다시 리나를 잡으러 뛰려는 가우리를 허공으로 몸을 띄운 제로스가 멈춰세웠다.
“죄송하지만 가우리님은 사이라그에 남아주셔야만 해요.”
“너...!!”
가우리가 분노로 가득찬 눈으로 제로스를 쳐다보았으나 제로스는 가우리의 뒤쪽에서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오는 소녀를 보고는 슬며시 한쪽 눈을 떴다.
“....뭐, 혼자 계시라는 것만은 아니예요.”
장난스럽게 마지막 말을 중얼거린 제로스는 실피르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위로 날아올랐다.
역시나, 제로스의 모습을 발견한 실피르가 멈춰섰다.
“그래요...혼자는 아니죠...”
알 수 없는 말을 남기며 제로스는 아스트랄 사이드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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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유랑(4)
일단 가우리와 실피르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던 리나는 무턱대고 사이라그를 떠나오긴 했지만 4달째 아무 이야기도 안해주고 자신의 옆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앞서가는 제로스의 꿍꿍이를 알아내지 못해 골이 빠질 지경이었다.
오늘도 리나는 그저 제로스가 가는대로 터덜터덜 따라갈 뿐이었다.
“..아, 리나님.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에? 에에에?”
한숨을 포옥 쉬며 따라가던 리나는 갑작스럽게 꺼낸 제로스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제로스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제로스는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저 앞에 그의 검은색 망토가 펄럭이며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 제로스?”
이미 사라진 뒤에 그를 불러봤자 무엇하리요.
제로스가 사라진 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리며 걷던 리나는 막 뛰다가 엎어져 울고 있는 꼬마를 발견하고는 얼른 그 꼬마에게 다가가 안아 일으켰다.
“자아. 조심해야지?”
웬일로(?)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꼬마의 옷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주는 리나.
리나는 먹을때와, 도적 소탕할때, 돈에 관련된 때만 아니면 꽤 귀여운 미소녀로 보인다. 거기에 저런 화사한(?) 미소를 지어주면 영락없는 아름다운 미소녀....로 보인다.
“고마워요. 이쁜 누나.”
이쁜 누나라는 말에 순식간에 반짝이는 고양이 눈이 되어버린 리나는 헤죽헤죽 웃으며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손을 흔들며 또다시 뛰는 꼬마를 보며 당황해하던 리나는 문득 주변이 시끌시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일으킨 소동 때문에 시끄러운건 아니었다.
백색의 깨끗한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이 골목에는 원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끝이 안 보일정도로 늘어선 노점들과 그 안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거나 구경하기에 바쁜 사람들.
입가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 그 사람들은 무척이나 즐거워보였다.
덩달아 자기까지 즐거워지던 리나는 어디선가 불어온 조용한 바람에 흘러 내려온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렇게 침울해져 있는 건 리나 인버스님이 아니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주위를 둘러보던 리나는 식당 간판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곳으로 뛰려고 했다.
“리나님-”
기분 좋게 배부터 채울 생각을 하던 리나는 산통 깨는 목소리에 달리려고 하던 그 자세로 앞으로 넘어졌다.
북적거리는 골목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도 이리저리 퍼져 있어서 그런지 제로스는 아까와는 달리 공간을 넘어 바로 그녀의 옆에 나타났다.
그는 엎어져 있는 리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어라, 리나님. 왜 그런 곳에 누워 계세요?”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리나는 몸에 묻은 흙을 털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다음에 리나가 무슨 말을 할 건지 지난 일의 경험으로 눈치챈 제로스는 재빨리 그녀의 앞에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자 받으세요.”
“...에?”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리나는 제로스가 내미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보고는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자신의 몫을 할짝 대던 제로스는 먹던 아이스크림을 잠시 공중에 띄운 후 다른 손에 있던 것을 리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세이룬의 소프트 아이스크림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맛있어요.”
“.....”
한참동안 제로스와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쳐다보던 리나는 토라지는 것처럼 픽 고개를 돌리고는 일단 그가 준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로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제로스.”
어느새 다 먹은(빠르다..;;) 리나가 말을 꺼내자 제로스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예?”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음...”
리나의 질문에 제로스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 했고, 그런 제로스를 보고 있는 리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바로 그때. 생각이 났다는 듯 제로스가 살짝 쥔 오른손으로 왼쪽 손바닥을 쳤다.
저 산 위에 바위돌과도 견줄만한 굳어진 얼굴을 하던 리나의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그가 리나 쪽을 돌아보며 검지손가락을 펴보였다.
“어디로 갈까요?”
쿠당탕!!
불쌍한 리나.
아까 넘어져서 간신히 옷에 묻은 흙을 다 털었는데 또다시 넘어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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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유랑(5)
“아아- 배부르다아.”
방금 전 저녁으로 메뉴판에 씌어져 있는 것들을 모두 다 뱃속에 집어 넣어버린 리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관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옷걸이에 어깨보호대와 망토를 걸어 놓고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배가 불러서 행복한 표정을 짓던것도 잠시, 리나의 얼굴에는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 입 밖으로 토해내려다가 그만둔다.
그늘을 지우고서 일어난 리나는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똑같은 석양빛이 그녀의 온 몸에 쏟아져 내렸다.
제로스가 잡아 놓은 이 방에서는 노을이 지는 바다의 풍경이 아주 잘 보였다.
일부러 신경 써서 잡아 놓은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던 것이었을까.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혼자 식사할때가, 혼자 있는 시간이 쓸쓸하다고 생각되던건.
제로스는 식사를 하는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차를 마실때도 있었으나 옆에 없던 때가 더 많았다.
그럴때마다 리나는 혼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예전에 가우리와 만나기 전에는 언제나 혼자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스럽게 생각되어졌나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이 싫을 리가 없다.
리나는 왠지 자신이 전보다 더 침울해지는 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럴까나...”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노을이 무색할 정도로 한숨을 내쉰 리나는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림을 느끼고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살짝 돌린 리나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것은 노을빛을 받아 자주색으로 보이는 제로스의 머리칼이었다.
정신체로 이루어진 몸이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버티기를 포기한 리나는 그대로 창문가에 매달리듯 기대어 버렸다.
차가운 바람과 어우러진 붉은 머리카락이 리나의 등에 기대어 있는 제로스의 뺨을 간지럽혔다.
리나는 창밖을 향한채, 제로스는 그런 그녀를 등지고서 그렇게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제로스였다.
“역시나.. 궁금하신거겠죠?”
서서히 내려가던 리나의 고개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로스가 피식 웃었다.
“뭐야, 드디어 말할 생각이 든거야, 제로스?”
“그야 아무 말 안하고 리나님하고 다닌지 벌써 네 달이나 지났는걸요. 슬슬 리나님 한계에 다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목숨은 보존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봐, 제로스...”
창가를 쥔 리나의 손에 핏대가 서더니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용케도 제로스의 머리를 한대 후려치지 않고 참고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던 제로스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안봐도 훤한 리나의 반응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냥 보통의 인간처럼 리나님과 어울려서 여행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한 말 그대로예요. 전 앞으로 인간처럼 행동할거예요.”
제로스의 말에 점점 더 뭔가가 꼬여가는 리나의 머릿속.
한쪽 손으로 지그시 머리를 누르던 리나가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제로스는 그녀의 바램대로 뒤로 넘어가지 않고 잽싸게도 균형을 잡았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
왠지 그 얼굴이 거슬리자 몸을 돌려 침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 리나는 침대가 부서져라 힘을 주어 주저앉았다.
“인간처럼...이라고?”
“네에.”
“인간처럼 행동해서 너에게 득이 되는게 뭐가 있지?”
“야아- 꽤 날카로운 질문이시긴 한데요.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런거 안 따질거거든요. 단지...”
“단지?”
약간 불량해 보이는 포즈로 제로스를 올려다보는 리나.
그러나 제로스가 잠깐의 침묵을 지키려 하자 리나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삽시간에 제로스의 앞으로 뛰어가 섰다.
갑작스런 리나의 행동에 제로스가 화들짝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 또 그렇게 뜸 들이다가 그건 비밀이예요~♥ 라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 하려는 거 아냐!!!!”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르며 제로스의 마스코트인 “그건 비밀입니다♥”를 포즈까지 취해가며 설명하는 리나를 보며 제로스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에.. 그렇게까지 따라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뒤통수로 굵은 땀방울을 흘려보낸 제로스는 한 손으로 리나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서 살짝 떼어 놓았다.
“단지 리나님과 같이 다니고 싶었다고 하면 믿으실건가요?”
“아니.”
너무도 간단명료한 리나의 대답에 제로스는 울상을 했다.
“너무해요 리나님~!”
“너무하긴 뭘 너무해!! 나보고 지금 그 소리를 믿으라는 거야 뭐야!!”
“에이- 좀 믿어보시라니깐요♥”
생글생글 웃으며 애교를 떠는 제로스를 보던 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아아. 몰라몰라.”
“어쨌든 이제부터 전 인간처럼 살아볼겁니다. 잘 부탁해요, 리나님.”
“아악!! 몰라몰라!! 나가!!!”
두 손으로 애꿎은 머리를 헝클던 리나는 잠깐만을 외치는 제로스를 방 밖으로 내쫓은 뒤 재빨리 문을 닫아 버렸다.
엉겁결에 밖으로 쫓겨난 제로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들으라는 듯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저, 리나님?”
대답은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문에 기대어 있으리라.
제로스는 슬프게 미소 지었다.
“....제가 좀 더... 리나님 곁에 있고 싶었다는 것만은 알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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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유랑(6)
“가우리님!! 가우리님!!”
한 금발의 사내가 꽤 거친 손동작으로 짐을 챙긴다.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작은 가죽가방 안에 물건들을 넣는 그 사내 옆에는 긴 흑발의 연약해 보이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그 소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가우리님!! 잠깐만요!!! 가우리니임!!”
가방에 물건을 다 챙긴 사내의 시선이 하얀 시트로 감싸여져 있는 침대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그의 검으로 향했다.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가 버린 석양빛의 머리칼을 가진 작은 소녀가 그를 위해 구해준 검.
이 검을 구하기 위해서 그 작은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가보로 내려오던 빛의 검이 소녀의 실수로 사라진 것도 아닌데 소녀는 마치 자기 탓이라도 되는 양 무리를 해서 그에게 맞는 검을 찾아주었다.
가우리는 피식 웃으며 검을 손에 쥐었다.
이 검을 구할 때에 그녀는 흙투성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어.
그런 그녀에게 나는 무엇을 돌려주었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루비빛 눈동자에 서려 있던 조그마한 희망을 못 본체 외면하는 나 자신?
그녀가 진지하기 나올 때마다 일부러 바보짓을 해서 실망만을 안겨주던 나 자신?
제길-!!
홧김에 검을 든 손을 치켜든 가우리의 모습에 흑발의 소녀, 실피르가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가우리님...”
지금의 가우리의 모습은 꼭 고삐 풀린 망아지(에..비유가 좀;;) 같았다.
무언가 안정이 안된 모습.
그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사람이 떠나가서인가.
‘가우리님... 가우리님에게는 리나님이... 그렇게도 소중하신 거였나요...?’
가우리가 치켜 든 팔을 조금씩 떨며 내렸다.
검이 마치 자신의 애인인냥 쳐다보는 그의 눈빛을 실피르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소중했으면 잡으시지 그랬어요!!!”
“...실피르?”
갑작스런 실피르의 큰 소리에 깜짝 놀란 가우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는 양 무척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실피르는 두 눈 가득 눈물을 담고서 가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저는 다 알아요. 리나님이 어떤 심정으로 가우리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
“가우리님... 리나님을 좋아하던거 아니셨어요...?”
가우리의 몸이 실피르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크게 움찔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실피르는 더더욱 슬픈 눈을 했다.
“난... 리나를 붙잡을 자격이 없어...”
“그럼 지금의 가우리님은 뭐예요, 도대체!!”
“...!”
실피르의 절규가 담긴 처절한 목소리에 가우리가 흠칫 놀래며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실피르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럼 그때 잡지 그랬어요!!”
“실피르 난...”
가우리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힘없이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리던 실피르의 긴 머리칼이 앞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가우리는 그런 실피르를 위로해 줄 수 없었다.
“....미안해.”
어쩌면 이리도 저 사람의 말이 슬프게도 느껴지는 걸까.
이렇게 울기만 하는 자기 자신이 더 미안해지는 실피르였다.
가우리는 실피르의 어깨를 토닥여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검을 허리에 차고서는 가방을 들고는 문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가 문쪽으로 걸어가서 손잡이에 손을 가져갈때까지 울고 있던 실피르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가우리님.”
차분한 목소리.
방금 전까지 졸도할 정도로 울던 그녀라고는 상상도 못할 목소리였다.
손잡이를 향해 들어올리던 가우리의 손이 굳었다.
그의 뒤쪽에서 실피르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긴 흑발을 뒤로 넘긴 실피르가 그의 뒷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리나님을 찾으러 가시는 거겠죠?”
“...응.”
힘없이 가우리가 대답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시..실피르?”
실피르는 재빨리 눈가의 눈물을 닦고서 놀라 뒤를 돌아보는 가우리를 향해 생긋 미소지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가우리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실피르는 몰랐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어 보인 미소가 그에게는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는 것을.
자신을 추스르느라 온 정신을 다 쏟고 있던 실피르가 가우리를 제치고 먼저 문을 열었다.
“아, 저기 실피르...”
가우리가 뭐라고 하려 했으나 실피르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애써 밝은척을 했다.
“가우리님을 혼자 보내기에는 너무 걱정이 된다고요.”
그리고는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가우리님...이것마저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준비하고 올게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은 실피르는 세게 문을 닫은 후 복도를 달렸다.
그런 실피르의 뒷모습을 멍한 눈동자로 쳐다보던 가우리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우리에게는 오로지 그의 품을 떠나간 작은 소녀의 흔적을 쫓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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