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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5:1-6 석의
Ⅰ. 서론
야고보서는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여러 가지 소중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마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오해했던 이유는 야고보서가 율법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율법의 행위가 복음과의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마땅히 따라야 할 요소임을 인정하며, 야고보서의 사도성을 신뢰한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부유한 압제자들에 대한 책망의 메시지를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이 본문으로 석의 작업에 거쳐 오늘날의 청중에게 적용시켜 설교 대지를 작성하려고 한다.
Ⅱ. 본론
1. 본문 번역
(1) 부자들이여, 이제 들으십시오. 당신들에게 임하고 있는 고난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십시오. (2) 당신들의 재물은 부패하였고 당신들의 옷들은 좀먹었습니다. (3)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당신들에게 증거가 되며 불처럼 당신들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마지막 날들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4) 보십시오. 당신들의 토지에서 추수한 일꾼에게서 사취한 삯이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추수한 자들의 외침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당신들은 이 땅에서 사치하게 살았고 쾌락에 빠져있었습니다. 도살의 날에 당신들의 마음을 살찌게 했습니다. (6) 당신들이 의로운 자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또 죽였으나 그는 당신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2. 본문의 역사적 상황
전통적인 입장에 의하면 야고보서의 발신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다. 크리스토퍼 W. 모건은 야고보서에 언급되는 성도의 고난과 가난 등의 주제들(2:2-3, 5-6, 5:10, 13)이 성경 외의 교회 문헌들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모습과 일치하다고 보았다. 이 야고보는 전승에 의하면 A.D. 61년에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A.D. 62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W. 모건에 의하면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A.D. 50년경 이전, 그리고 기근이 있었던 A.D. 46년 이후에 기록되었다. 더글라스 J. 무에 의하면 “이 저작 시기는 A.D. 66-70년에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으로 말미암아 절정에 달한 당시 사회, 정치, 종교적 격동기의 서막이 열린 시기와도 일치한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그 당시의 팔레스타인 전역에 널리 흩어져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약 1:1 참고). 우리는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그 당시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의 추측을 할 수 있다. 우선 본문 말씀은 그 당시에 존재했던 빈부격차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빈부격차는 신자들 사이에서도 갈등관계를 조성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야고보의 책망의 대상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인 부자들로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를 이룬 형제일 수도 있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리에 있었다(2:6 참고). 본문 메시지의 책망의 대상에 대하여 R. 터크는 “오만불손한 태도로 유대 그리스도교회의 지체들을 박해하고 억압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지목하였다. R. 터크의 말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부자들은 유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 같다. 즉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러한 빈부격차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일단 유대에서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에 처하게 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1:28에 언급된 글라우디오 때의 큰 흉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새성경사전』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공동재산 소유를 시도했다(행 2:41-42, 4:32). 이것은 처음에는 가난을 제거하게 했으나(행 4:34-35),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적 파산을 가져오게 한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본문의 앞장인 4장에서는 수신자들 중 타지방에 가서 장사하려고 했던 자들이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13절 참고). 그리고 본문의 4절은 우리에게 부유하면서도 악한 토지 소유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랄프 마틴이 본문 말씀을 부유한 농부들에 대한 심판으로 보았던 것을 미루어볼 때, 그들 중에 어느 정도의 부유한 계층의 사치스러운 토지 소유주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도 요한 역시 예루살렘의 종말을 예언하면서 유대인들의 사치를 폭로한 적이 있었는데(계 18:3, 11-19 참고), 이는 바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의 그 당시의 상황이기도 했다.
3. 본문의 전후 문맥
야고보서는 성도의 믿음에 따른 언행, 즉 성도의 삶의 자세에 대해 여러 가지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본문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인 부유한 압제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인데, 이러한 교훈은 야고보서의 다른 곳에서 반복된다(1:10-11, 2:6-7). 그리고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고난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5:1)는 메시지 역시 앞장에서 유사하게 언급된다(4:9).
본문의 앞장 후반부에서 야고보는 타도시에 머물면서 장사하여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자랑이 허탄한 자랑일 뿐이라고 지적하였다(4:13-16). 따라서 17절에서 야고보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죄에 대해 언급하였을 때, 이 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구제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선행을 베풀지 않는 사람들은 그 당시의 부유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야고보는 본문에 들어서면서 구체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 부자들에 대해 책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야고보는 본문의 1절에서 “부한 자들아” 라고 부르면서 4절에서 “보라”고 하였다. 본문의 뒷문맥과 대조해볼 때, 이러한 수사학적 표현은 본문의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반복되고 있다. 7절과 10절에서 야고보는 “형제들아” 라고 부른 후 11절에서 “보라”고 하면서 본문의 수사학적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야고보가 부자들과 믿음의 형제들에게 동일한 수사학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을 통해 우리는 ‘부자들’과 ‘형제들’이 동일선상에 있는 독자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4. 내용 분석
야고보는 “부자들이여, 이제 들으십시오.”라는 말로 본문의 메시지를 시작하고 있는데, 그의 직설적인 책망은 다른 사도들의 서신과 비교할 경우 더욱 구약의 선지자적인 책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랄프 마틴은 언급하기를 야고보의 문체가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나 제1에녹서의 저자와 같은 묵시문학자들”과 매우 밀접하다고 보았다. 본문 말씀에서 드러난 야고보의 통렬한 책망은 야고보 당시의 사회적인 불의를 한층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야고보의 책망의 대상인 1절의 ‘plouvsio"’는 본문의 문맥을 고려할 때,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부자들의 신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R. 터크의 입장과 같이 이상원은 언급하기를 이 부자계층의 토지소유주들은 주로 교회에 적대적인 불신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알렉 모티어는 그의 주석에서 언급하기를 “그들은 원래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재물 덕택에 얻은 권력 때문에 몸에서 이탈되어 지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후자의 입장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어디까지나 교회공동체이며, 우리는 야고보가 불신자들을 향한 책망의 메시지를 교회공동체에 보내는 자신의 서신에 포함시켰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4절을 염두에 둘 때, “부자들에게 임하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심판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심판이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을 가리킨다고 주장할 수 있을 법도 하지만 여러 주석들에서 이 입장을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입장이 널리 수용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비록 본문에 언급되는 부자들에 대한 심판이 최후의 심판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일차적으로는 주후 70년의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3절에서 야고보는 “당신들의 재물은 부패하였고 당신들의 옷들은 좀먹었습니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세 동사가 완료시제로 사용된 것은 그들의 재물이 부패하고 은과 금이 녹이 슨 것이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예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타스커는 이에 대해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금과 은이 녹이 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쌓는 보물에 좀이나 동록이 해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마 6:20)과 동일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금과 은이 녹이 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녹이 쓴다고 표현한 것은 물질적으로 녹이 슨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는 부자들이 탐욕으로 인해 재물을 넘치게 쌓아놓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음에 대한 심판의 경고라고 볼 수 있다. 랄프 마틴은 이와 관련하여 “세상 재물의 일시적이고 무용한 특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재물이 많이 소유한 것이 마치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도 되듯이 착각하면서 물질적인 평안에 안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재물이 “불처럼” 그것을 소유한 자의 살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보면 녹슨 금속을 몸에 밀착하고 있을 경우 녹이 부식되어서 사람의 살을 파고들게 되는 이미지를 연상해볼 수 있다. 이는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부자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3:17에서 책망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다. 물질적인 풍요는 어쩌면 영적인 빈곤의 상태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 말씀은 그 어떤 알레고리적인 해석도 허용하지 않는다. 4절에서 토지 소유주가 품꾼의 삯을 착취한 것은 그야말로 일종의 사회악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악이 그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어떤 성격의 죄악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R. 터크는 품꾼을 억압하는 죄에 대해 “유대인들 특유의 죄”라고 지목하였고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해서는 “유대교의 말기를 특징짓는다.”고 보았다. 4절에서 언급되는 야고보의 책망은 신명기 24:14-15의 율법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품꾼을 억압하는 것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유대인 고유의 정신과 객을 선대하는 유대인 고유의 문화와 상충되는 것이다. 그 당시의 토지 소유주들이 어떤 방식으로 품꾼의 삯을 착취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이상원이 구체적으로 잘 지적하고 있다.
야고보는 품꾼에게 주지 않은 삯을 의인화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하박국 선지자는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11)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가능한가? 하박국 선지자는 언급하기를 그들이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였기”(합 2:12) 때문이라고 하였다. 메시지의 강조를 위한 의인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다윗 시대에 사울 왕에 대한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이 삼년의 기근을 가져왔다는 점은 그 원한이 얼마나 하늘에 사무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에서 ‘여자’는 약한 자를 가리킨다. 약한 자의 울부짖음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울부짖음을 듣고만 계시는가? 이에 대해 김명수는 “하나님이 단순히 그 소리를 들었다는 의미를 넘어서 그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4절의 “만군의 주”라는 표현은 구약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칭호 중 가장 위엄 있는 칭호이다. 본문과 관련하여 이 하나님의 칭호는 하나님께서 이방 강대국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주셨듯이 부유한 압제자들에 의해 박해받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천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만군의 주”는 철저히 택자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으로서 부유한 압제자들에 대한 심판의 위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심판은 5절에서 ‘도살의 날’에 비유되고 있다.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도 하나님의 심판을 ‘도살의 날’(사 34:6, 겔 21:15)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전쟁을 통해 임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한편 심판의 두려움을 각인시키고 있다. 특히 본문은 “도살의 날에 당신들의 마음을 살찌게 했습니다.”라는 문구를 추가하여 이 심판을 더욱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살찐 마음”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가난한 마음”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살찌도록 내버려두셨다. 마치 잔칫상에 오를 돼지를 잡기 전에 그 돼지를 먼저 살찌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살찔 때까지 내버려두신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 내버려두심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 짓고 있다(롬 1:28, 계 22:11).
계속하여 야고보는 그의 비판의 대상인 부자들이 ‘의로운 자’에 대하여 유죄를 선고하고 죽였다고 언급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해석상의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의로운 자’가 누구인가 라는 문제이다. ‘의로운 자’가 단수 형태로 언급되어 있을 뿐, 누구인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의로운 자’는 그 당시 원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특정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도 있다. 6절의 후반부는 이 ‘의로운 자’가 유죄를 선고받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가해자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토마스맨튼은 이 ‘의로운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할 때 야고보서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는 칭호와 함께 두 차례 언급된다(약 1:1, 2:1). 즉 야고보는 승귀하신 예수님을 가난한 자들의 위로자인 동시에 부자들의 심판자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6절의 피해자인 ‘의로운 자’가 예수님을 지목하고 있을 가능성은 줄어든다. 또한 야고보가 소개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상황은 전부 야고보 당시의 실례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6절의 상황만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특정 사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R. 터크는 언급하기를 “6절에서 ‘옳은 자’는 특별히 ‘옳으신 이’(예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죄하고 죽이는 행위에 대해 송영목은 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상징적으로 가난한 자의 임금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6절의 ‘의로운 자’를 예수님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로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타커스 역시 이렇게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의로운 자’가 왜 복수가 아닌 단수 형태로 제시되었는가? 랄프 마틴은 ‘의로운 자’라는 표현에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거나 구현하는 한 사람”에 대한 원리가 적용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Ⅲ. 결론
야고보서의 저자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본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는 부유한 토지소유주들에 대한 통렬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들의 재물이 썩었고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재물은 허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증거가 되어 그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치와 향락이라는 물질적인 풍요에 눈이 어두워 자신들의 영적인 빈곤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살찌게만 하였었다.
본문에서 야고보의 책망의 대상은 부유한 계층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본문에 언급된 부자들의 죄는 구약의 율법에 언급된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본적인 사회윤리를 망각한 죄이다. 이는 유대교의 말기의 상황을 직시하게 한다. 이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죄가 얼마나 가증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죄를 행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같이 야고보 공동체를 대변하고 있는 ‘의로운 자’를 정죄하고 죽인 자들이었다.
Ⅳ. 본문의 메시지
1. 본인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
본문 말씀이 필자에게 주는 교훈은 신자가 세속적인 형통에 대해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필자 역시 사람인지라 세상에서 단지 재물이 많다는 이유로 사치하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동경의 마음이 생길 때가 간혹 있다. 그러다가도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 삶이 잠깐이라는 말씀의 교훈으로 자신을 추스르곤 한다. 필자가 비록 목사후보생이라고 하지만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본문 말씀은 필자에게 재물에 대한 탐심을 경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진 것을 가난한 지체들과 나누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본문 말씀이 목사후보생인 필자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서의 야고보의 자세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책망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듣기 좋은 말만 한다. 그렇게 하여 청중들에게 환심을 사게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로서는 부적격이 될 때가 비일비재한 것 같다. 그러나 본문 말씀이 필자에게 제시하는 말씀 선포자의 자세는 그렇지 않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특권층에 대해서 굴할 줄 모르는 자세가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필자 역시 야고보와 같이 말씀의 진리를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2. 오늘의 청중에게 주는 메시지
본문 말씀이 오늘의 청중에게 주는 메시지는 주로 재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관련된 것이다. 첫째로 사회적으로 부유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자랑거리로 삼거나 사치함과 호화스러움을 즐기기보다는 구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부자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구제에 인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문이 오늘의 청중에게 주는 교훈은 구제할 줄 모르는 부자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본문은 재물을 축적하는 방법에 있어서 오늘의 청중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문은 토지 소유주가 품꾼의 삯을 사취하는 방식으로 재물을 부당하게 축적하는 것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그 누군가가 부자라고 할 때, 그가 재물이 많다는 것에만 주목할 뿐, 그가 정직하게 재물을 축적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부라는 목적에 이르기 위하여 수단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식의 이해가 오늘날의 통념인 것 같다. 본문 말씀은 모든 부자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한 부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을 축적함에 있어서 정직함을 미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청중들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간접적인 교훈을 도출해낼 수 있다. 세상 재물의 무상함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무턱대고 추구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일깨워준다. 오늘날의 신앙공동체 중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재물의 부요함이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무분별한 공식에 현혹되어 기복신앙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Ⅴ. 본문의 개요 및 석의주제
1. 본문 개요
1) 부자들의 재물에 따르게 될 화와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을 언급하였다(1-3절).
2) 부자들에게 착취당한 억울한 품꾼들의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4절).
3) 부자들은 온갖 사치와 향락 속에서 심판의 날이 오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5절).
4) 부자들은 저항하지 않는 의로운 자를 정죄하고 죽였다(6절).
2. 석의 주제 : 야고보는 부자들의 악한 처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을 선언하였다.
Ⅵ. 본문에 따른 설교주제와 설교대지
1. 설교 주제 :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2. 설교 대지
1) 가진 자들은 쌓아두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2) 가진 자들은 못 가진 자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3) 못 가진 자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